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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길 - 1990년대 이후 래디컬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
엘리자베트 바댕테르 지음, 나애리.조성애 옮김 / 필로소픽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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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가 유행을 잘 따라가는 인싸는 아니지만, 요새 유행하고 있는 페미니즘에서 나오는 말들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정신이 어질어질 때가 있다. 그 중 가장 당황스러웠던 용어는 “시선강간”이라는 표현이었다. 무려 강간이라는 무시무시한 범죄명이 붙어 있는 이 용어의 의미는, 그저 어떤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는 게 기분 나쁘다는 뜻에 불과하다.


가끔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중고등학생들이 자신을 기분 나쁘게 쳐다본다고 동급생들 폭행하거나 학대하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싶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걸 자랑스럽게 법적으로 제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공적 영역에서 만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 불쾌감을 표하는 것은 자유다. 그리고 그런 불쾌감에 대해 사과를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그걸 ‘강간’과 같은 행동과 동일시하는 건, 그래서 법적인 처벌까지 강제하는 건 우선은 용어의 혼란을 일으킨다. 강간의 정의를 시선에 둔다면, 욕설을 살인이라고, 담배꽁초를 버리는 행위를 테러행위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아, 오래 전에 대학교 캠퍼스에서 담배를 피며 여성을 바라보는 행위를 성범죄라고 우겨댔던 어떤 여성들이 있긴 했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결국 우리가 하는 말에는 아무런 의미가 담기지 않는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저명한 페미니스트이기도 한 이 책의 저자도 같은 부분을 지적한다. 저자는 “불쾌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몇 마디를 강간이라는 단어와 같이 취급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36)라고 묻는다. 이 질문의 배경에는 가정폭력을 당하는 아내에 대한 통계조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문맥이 존재한다. “정신적인 압박”을 “육체적 침해”와 동일시하는 조사에 대해 그는 “황당하다”고 말한다. 여성폭력에 관한 높은 긍정응답률은 애초에 잘못된 사고에 기초한 설문내용에 기인한 것이었다는 것.


다시 이야기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페미니스트, 그것도 저명한 운동가이다. 그가 이렇게 최근의 페미니즘 운동에 관해 강한 비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서양 기준으로) 6, 70년대 시작된 평등주의적 페미니즘 운동과 1990년대에 시작한 급진주의 페미니즘 운동 사이의 투쟁 노선의 차이가 그 배경에 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잘못된 길”은 급진주의적 페미니즘의 난동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 시각을 보여준다.


이 두 종류의 페미니즘의 차이는 간단히 말하면, 남녀평등이냐 여성의 특별함이냐의 문제인 듯하다. 이전의 페미니즘 운동이 남녀평등을 부르짖으며, 여성에 대한 부당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투쟁의 성격을 지녔다면, 최근의, 그리고 현재 주류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은 태생적으로 피해자이며 그런 피해자를 위한 특별대우가 필요하다는 말로 요약된다. 최근의 PC주의의 유행과 함께 이 래디컬 페미니즘의 주장은 별다른 비판을 받지 않은 채, 아니 비판을 하는 사람들을 도리어 공격하면서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저자가 래디컬 페미니즘을 비판적으로 보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제시된다. 먼저 이 운동은 진짜 희생자와 가짜 희생자를 혼동함으로써 좀 더 급한 투쟁을 간과하게 만든다. 몸에 쫙 달라붙는 짧은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면서, 자신을 쳐다보는 (마음에 들지 않는 외모의) 남성들을 시선강간범으로 고발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중요한 행동이 되는 동안, 정말로 심각한 차별을 받는 여성문제를 해결하는 데 들어가야 할 힘과 시간이 낭비된다는 말이다.


또, 래디컬 페미니즘은 결국 언론과 각종 문화 매체에 대한 검열과 삭제라는 형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건 성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를 감시하는 일종의 전제주의적 행태다. 누군가 불쾌하다고, 상처를 받았다고 말한다면 이제 곧 그것은 금지될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최근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익히 잘 아는 고전 문학 속 일부 표현이 PC주의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삭제되거나 원래의 단어가 “교정된 채” 새롭게 출판되는 경우도 실제 일어나고 있다는 뉴스를 본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극단적인 사람들끼리는 확실히 언동이 비슷해 지는 것 같다. 문제는 검열과 삭제를 초래하는 원인이 매우 모호한 어떤 사람들의 기분을 기준으로 하게 된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들 자신도 가끔은 헷깔리는 바로 그 기분 말이다.


여성의 태생적 피해자됨을 강조하는 건 자연스럽게 남성에 대한 공격으로 운동의 초점이 모아지도록 만든다. 이제는 남성의 폭력을 고발하는 것이 페미니스트의 의무이자 명예가 되어버리는 수준이다. 저자는 “지금의 페미니즘은 남성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본다. 남성적 힘의 남용에 대한 투쟁이 아닌 남성 자체에 대한 투쟁이 될 때, 결국 두 성은 격렬한 대립만 하게 될 뿐이다. 또, 모든 여성이 피해자라는 서사 역시 사실이 아니다.


또, 남성에 의한 폭력에 비해 그 수치가 낮긴 하지만, 여성에 의한 폭력 또한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일부러 눈을 감고 있으며, 자신들의 피해자 서사의 틀에 맞지 않는 일부 여성들(예를 들면 매춘부들)의 주장은 거짓이나 조작된 것으로 매도된다. 그러는 한편 여성의 특별함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모성본능에 대한 과도한 추앙을 초래하기도 하고, 남녀 사이의 강한 분리주의는 오히려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 뿐이라는 비판도 보인다.




저자가 보기에 래디컬 페미니즘의 가장 큰 문제는 제대로 끝까지 어떻게 될지 사고하지 않은 채, 눈앞의 불쾌함을 해소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는 점인 듯하다. 특히 남성을 그저 잠재적 성범죄자로 매도하고, 여성들만의 둥지모임으로써 페미니즘이 존재하는 한,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거라는 지적에는 공감이 간다.


끝까지 생각하지 못하니 논리적 모순이 난무한다. “여성은 태생적으로 피해자”라는 주장은 여성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그들의 또 다른 구호와 배치된다. 또 여성의 “태생적”인 특징을 강조하려다 보니 임신과 출산과 관련된 모성애적 측면과 여성적인 성격(부드럽고, 꼼꼼하고, 포용적이고 하는 식의)을 부각시키는데, 생각해 보면 이건 임신중절의 권리(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태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뺏는 일)를 주장하는 또 다른 흐름과도 배치되지 않는가.


저자는 오늘날의 젊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의 두 조류 사이에 끼어서 길을 잃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아마도 이 여성들이 좀 더 이른 시기에 나온, 좀 덜 급진적인 대신 남녀평등을 기초로 한 페미니즘 투쟁에 동참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자기비판적인 내용들이 그다지 담겨 있지는 않아서, 또 어떤 한계와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성별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측면에서, 남성에 대한 고발과 여성의 우월함, 혹은 고립된 여성들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듯한 주류 페미니즘보다는 좀 더 공감의 여지가 많아 보이긴 하다.


페미니즘 안에도 다양한 갈래가 있고, 각각의 주장과 강조점이 꽤나 다르다는 것, 이름에 여성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고 해서 모두 여성을 위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점 등 생각해 볼 만한 꺼리를 던져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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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교개혁을 오해했다 - 교회가 500년간 외면해온 종교개혁의 진실
로드니 스타크 지음, 손현선 옮김 / 헤르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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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인들에게 종교개혁이라는 사건은 어떤 면에서 절대로 침해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일일 지도 모르겠다. 물론 대부분의 보통의 신자들은 이 사건의 의미에 대해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할 지도 모르겠지만, 신학자들과 신학생들, 그리고 목회자들처럼 관련 내용을 학습해 온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문제는 어떤 사건의 의의를 중요하게 기리는 것과 그것이 갖는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개신교 진영에 속하는 학자들은 종교개혁이라는 사건이 유럽의 정치와 경제, 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고 주장해왔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막스 베버였고.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라는 유명한 책에서, 그는 개신교가 갖고 있는 특유의 사상이 자본주의 발전에 핵심적인 공헌을 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이 책의 저자 로드니 스타크가 비판하는 주요 논지 중 하나다.)





사회학자인 저자는 종교개혁과 관련된 몇 가지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종교개혁을 신화화하고 있었던 개신교인들에게는 자못 충격적인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가장 먼저 지적하는 건 종교개혁으로 신앙의 부흥이 일어난 적이 없다는 것. 여기에서는 종교개혁 당시 개신교로 넘어온 많은 지역들은, 실은 그 지역의 통치자들의 정치적인 결단이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일반 신자들의 경우 신앙심이 특별히 강해진 적이 없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당시 가톨릭교회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지역의 경우 개신교를 선택하면서 교회가 가지고 있던 힘과 재산을 차압할 수 있었던 유인책이 있었다는 말이다(반대로 이미 자국의 교회에 대한 영향력이 강했던 나라들―대표적으로 프랑스나 스페인 같은―은 굳이 개신교로 넘어갈 필요가 없었다는).


반면 당시 일반 대중들은 가톨릭에도 개신교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건 당시 교회를 방문한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서 입증되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당시 민중들의 불경건함, 비어 있는 예배당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소동들에 관해 남긴다. 물론 이것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는가, 과장의 여지는 없었는지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2장에선 종교개혁의 결과로 탄생한 다양한 국교회들이 오히려 개신교의 부흥과 발전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루터교와 성공회는 처음부터 국교회의 성격이 확고했는데, 이는 비국교도에 대한 핍박뿐만 아니라, 독점적 위치에 있으면서 변화와 발전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 또, 오늘날의 세속화된 세상에서 여전히 국가 공무원이나 국가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국교회는 오히려 교회다움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무신론자가 교회 관련 부처의 수장이 되거나, 심지어 세속철학에 근거해 수정된 교리를 국가차원에서 결정하는 식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3장에서는 민족주의의 탄생에, 4장에서는 자본주의의 발명에, 5장과 6장에서는 과학혁명과 개인주의의 출현에 종교개혁이 끼쳤다고 주장되는 과장된 내용에 대한 반박이 실려 있다. 자본주의나 과학혁명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면, 수세기에 걸쳐 조금씩 발전해 온 결과물이다. 당연히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오래 전부터 이미 그 변화는 시작되어 왔다는 것.


마지막 7장과 8장은 교회의 성장과 관련된 주제다. 흔히 세속화는 교회와 신앙의 적인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유럽의 많은 교회들이 비어가고, 기독교가 곧 소멸할 거라는 예상이 많이 떠돌고 있지만, 실제 사회학적 통계에 따르면 오히려 종교인구, 그 중에서도 기독교인구는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는 것.


또, 개신교와 가톨릭의 분열이 오히려 서로를 경쟁시켜 더 열정적으로 신자를 확보하도록 만들었다는 주장도 흥미롭다. 반면 국교회가 지배적 종교인 나라들에서는 종교적 열정이 떨어지고 있는데, 우리가 흔히 듣는 유럽의 비어있는 교회, 술집과 클럽으로 변하는 교회가 다 그런 것들이라는 설명.





전반적으로 책에서 담고 있는 다양한 주장들이 눈에 많이 들어온다. 특히 종교개혁이라는 사건 자체가 지나치게 신성시 되어서 제대로 된(비판적인) 고찰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기도 하고, 또 교회의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사회학적 연구 없는 일방적인 주장을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덧씌워 찬양하는 방식은 분명 주의해야 할 부분이니까.


다만 여기에 실린 주장을 대부분 인정한다고 해도 종교개혁의 의의가 손상되는 건 아니다. 저자는 종교개혁 자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에 덧씌워진 부가적인 효과 주장에 대한 비판이니까. 예컨대 종교개혁이 자본주의 형성에 핵심적인 영향을 끼친 게 아니라는 사실이 종교개혁 자체의 타당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이런 오해들을 바탕으로 개신교회 우월성을 주장하는 논리를 폈다면 조금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꽤 재미있게 읽었다. 애초에 도서관에서 빌려 본 책이지만, 방금 전에 주문을 해버렸다. 차근차근 살펴보면서 소개해 주는 영상을 만들어 볼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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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특별한 영상입니다. ㅎ
제가 사랑하는 C. S. 루이스의 책을 두고 하는 이상형(?) 월드컵!
2부는 금요일에 업로드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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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원제.


영화가 시작될 즈음 원제로 보이는 어구가 크게 지나간다. "A Common Man", 직역하면 보통 사람 정도가 되겠다. 이 제목이 어째서 “라이브 테러”같은 직설적인 제목으로 바뀌었을까.


영화는 원제처럼 아주 평범해 보이는(하지만 머리털은 없어 조금은 수상해 보이는) 한 사내를 따라 진행된다.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의 길을 거니며 큰 가방을 메고 버스와 기차를 타고, 쇼핑몰을 들르고, 시장에 들려 아내가 말한 토마토와 채소를 구입한다. 그리고 경찰서까지 방문해 지갑 도난신고까지 하는 남자.


얼마 후 한 건물의 옥상에서 경찰서로 전화를 건다. 자신이 지금 네 개의 시한폭탄을 장치했으며, 그 중 하나가 경찰서에 있다는 것. 실제로 경찰서에서 시한폭탄을 발견한 경찰들은 그와 진지하게 협상을 시작하는데, 남자가 요구하는 건 감옥에 갇혀 있는 네 명의 범죄자들을 자신이 지시하는 곳까지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영화의 원제는 이 모든 일을 하는 사람의 평범함을 부각시킨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한 사내가 잔인한 테러범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폭탄테러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그런데 영화의 말미에 가면 여기에 반전이 더해진다. 남자가 범죄자들을 끌고 온 건, 그들을 풀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처형하기 위해서였다는 것.


남자는 평범한 사람들을 수없이 희생시키는 테러범들에게 제대로 된 처벌을 하지 못하는 무능해 빠진(그리고 무능하기까지 한) 정부와 사법기관들에 대한 평범한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여준 것이었다.




무능한 심판.


영화는 테러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세상 속에서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테러에 젖어 들어가는가를 보여주는 것 같다. 테러가 횡횡하는데도 그것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고, 심지어 테러범을 잡은 후에도 그에 대한 응분의 처벌을 하지 못하는 사회 속에서, 평범한 시민들은 무엇을 믿고 살 수 있을까.


다행이 우리나라에서는 무슨 폭탄 테러 같은 것들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한 번에 죽는 사고들은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온다. 하지만 사건이 발생할 당시에만 시끄러울 뿐, 시간이 지나면 누구도 제대로 된 책임을 지지 않고 흐지부지 잊히곤 한다. 얼마 전 헌법재판소에서는 이태원 참사의 주무 장관의 탄핵안을 기각했고, 기각 판결이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짓이 지들이 잘났다고 떠들어대는 여당과 정부의 꼴사나운 행태가 나타나기도 했다.


사실 이전에는 이 정도의 사건이 벌어지면 소위 정치적인 책임이라는 걸 지겠다면서 스스로 물러나는 게 상례였다. 하지만 이젠 그런 최소한의 책임지기도 사라져버렸다. 백주대낮에 칼부림이 일어나고, 아파트에 설계대로 철근이 들어가지도 않은 채 시공이 되고, 침수 위험을 경고했는데도 교통통제를 하지 않아 지하차로에서 사람이 죽어가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기껏해야 말단의 담당자에게 뒤집어씌우고 만다.


자, 이런 각자도생의 세상에서, 평범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남자의 행동에 분명 불법적인 요소가 개입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그가 경찰서 이외의 공간에 숨겨두었다는 폭탄은 처음부터 폭발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영화 말미 경찰들이 그를 체포하려 하지 않았던 건 이런 상황을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법이 심판하지 못한 범죄자를 누군가는 해결해야 하지 않느냐는 지극히 상식적인 정의에 대한 감각.




자력구제.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자력구제 금지의 원칙을 국민들에게 강제하고 있다. 쉽게 말해, 무슨 억울한 피해를 당하더라도 직접 갚아주지 말고, 법적 기관에 보복을 맡기라는 말이다. 여기에는 사적 보복에서 나타날 수 있는 과잉을 막으려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려면 국가기관이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하고 가해자에게 응분의 처벌을 가해야 한다.


문제는 이 기본적인 과정이 어그러질 때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정의에 대한 감각과 달리 한줌밖에 안 되는 일부 인사들이 법의 제정과 그 철학에 지나치게 큰 영향을 끼친 결과, 우리는 가해자를 처벌하는 게 문제인 양, 또는 처벌의 본질이 그가 저지를 악행에 대한 보응이 아니라 그를 개선시키는 것인 양 착각하는 사회에 살게 되었다. 범죄자들은 사법제도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보통의 시민들은 언제 범죄의 피해자가 될까 두려워하게 되었다.


최근 이런 사적 보복을 주제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자주 제작되고 큰 인기를 끄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그로기 상태에 빠져 있는 국가 사법제도에 대한 불신은 단지 이런 대중문화로의 반영으로만 끝나지 않고, 결국 불안한 사회를 만들 것이다.


영화 속 남자는 결국 의도했던 대로 네 명의 악질 테러범들을 하늘로 올려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 그 네 명 이외도 또 다른 테러범들은 출현할 것이고, 사법부는 여전히 무능할 것이고, 보통 사람들은 계속해서 피해를 입을 것이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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