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난 50년간

미국 중산층 집의 크기는 두 배 가까이 커졌다고 한다.

50년간 사람의 몸이 커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족 구성원의 수는 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집은 이렇게 계속 커져 갔을까?

가만히 살펴보면 커져 버린 집의 공간은 물건으로 채워져 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눈만 뜨면

이 세상의 TV, 라디오, 신문 같은 모든 매체에서

더 많은 물건을 소유해져야 더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물건을 사기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

그리고 또 그 많은 물건을 넣기 위해서 더 큰 집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더 큰 집을 사기 위해서 더 많이 일해야 한다.

그야말로 인간의 삶과 자연을 수탈하는 악순환이다.


- 유현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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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비종교적인 것 같아도,

우리 마음은 사실 이 시대의 화려한 각종 우상이 지배하고 있다.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면서

오랜 세월 우리가 숭배해온 많은 우상이 사방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 팀 켈러,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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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조종자는 잘 삐친다. 그게 그 사람 취미다.

별안간 정색하고 입을 꾹 다문다. 그러면 분위기가 무거워진다.

심리 조종자는 말없는 비난의 화살들을 쏘아 댄다.

저 사람이 왜 갑자기 심기가 상했는지 짐작하고 알아내는 것은 당신 몫이다.

나중에 그는 발작이라도 하듯 분노를 쏟아 내고 한바탕 난리를 친다.

도대체 저런 폭력성을 어떻게 속에 담고 살았나 싶을 정도다.

다시 한 번 기억하자.

심리 조종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이 얼굴에서 저 얼굴로

바뀔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 크리스텔 프티콜랭, 『당신은 사람 보는 눈이 필요하군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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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 - 젤렌스키 대통령 항전 연설문집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지음, 박누리.박상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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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푸틴이 이웃나라인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략전쟁을 개시한 지도 벌써 1년이 훨씬 지났다. 많은 사람들은 설마 푸틴이 그런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킬 리 없다고 예측했었고, 또 우크라이나에는 세계 2위 군사대국인 러시아의 공격을 막을 힘이 없을 거라고도 예상했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그 모든 예측과 예상은 틀렸다.


러시아는 끝내 명분 없는 전쟁을 시작했고, 도살자 푸틴 패거리는 마치 6.25 때처럼 개전 후 48시간 이내에 우크라이나의 수도를 점령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으나 전쟁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다. 우크라이나의 시민들은 (물론 일부 부유층은 진작 해외로 도망을 갔다고 한다) 자발적으로 무기를 들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섰고, 서방 세계의 지원을 힘입어 최근에는 역공을 가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 상황 가운데서 주목 받고 있는 한 인물이 있다. 바로 우크라이나 대통령인 젤렌스키다. 아마 지난 1년 동안 가장 많은 사람들이 새로 알게 된 인물이 아닐까. 카키색 티셔츠를 입고 포격이 한창인 수도 키이우 어딘가에서 국민들을 향해 항전의 의지를 고취시키는 연설을 끊임없이 하는 그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6.25 당시 자기는 제주도로 도망을 가 놓고 국민들에게는 서울에서 뭉쳐 항전하라고 했던 어떤 분과는 사뭇 다르다)






젤렌스키의 연설은 단지 자국민들을 향한 것만이 아니었다. 이후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그는 세계 각지의 우호국 인사들 앞에서도 우크라이나를 지원해 줄 것을 계속해서 호소해 왔다. 물론 단지 그의 연설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서방세계가 군사적 지원을 해준 것은 아니겠지만, 또 그의 연설이 그 우호국의 수많은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낸 것도 사실일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젤렌스키의 연설문 열아홉 편을 모아 놓은 책이다.


연설문을 읽으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그 의미에 대한 통찰이다. 개전 초 일각에서는 코미디언 출신의 대통령이 무능해서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헛소리가 떠돌기도 했다. 모름지기 대통령쯤 되려면 명문대를 나와 일찌감치 정치에서 세력을 형성하거나, 법조계 경력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식의 후진적 정치관에서 나오는 꼰대의식이다.


물론 어떤 사람의 경력은 그 사람의 현재 능력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지표다. 하지만 화려한 경력이 그 사람의 진짜 능력을 가리는 가면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우리는 수많은 실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지 않던가. 그리고 그가 코미디언이었다는 건 사실이지만 그저 일차원적인 슬랩스틱이나 선정적인 내용으로 눈길을 끄는 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자신의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직접 제작과 각본에도 참여하고 꾸준히 사회참여적 메시지도 담아왔다는 걸 생각해 보면, 어쭙잖게 법전만 달달 외워 처세술로 높은 자리에 올라 정계에 입문하는 수많은 정치법조인들보다 백배는 나아 보인다.






여기 실린 연설은 다양한 자리에서, 다양한 청중들을 배경으로 한다. 젤렌스키는 자신의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의 기억 속 역사의 한 장면을 자연스럽게 꺼내고, 그걸 오늘의 현실에 오버랩 시킨다. 히틀러의 유대인 인종학살은 유대계인 젤렌스키 본인과 푸틴의 잔악한 민간인 학살과 겹쳐지고, 그런 히틀러를 자극할까 두려워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꺼렸던 영국과 프랑스의 실책은 정확히 푸틴을 자극할까 두려워하며 무기제공을 주저하는 서방세계의 모습에 덧씌워진다. 레이건 전 대통령이 고르바초프에게 했다는 “벽을 허물라”는 말은, 다시 그대로 적극적인 지원을 주저하는 독일 총리 숄츠에게 하는 말로 바뀐다.


그의 연설은 품위가 있고, 절제되어 있다. 무의미한 어구의 반복이나, 자기도 모르는 용어의 남발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모름지기 국가 지도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 정도의 품격은 있어야 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든다. 빙빙 돌려 말하지 않으면서도, 너무 노골적이지 않다. 그의 연설문에 도움을 주는 비서들이 분명 존재하겠지만, 단지 누가 써준 걸 대신 읽는 식으로는 이 정도의 호소력을 갖추기 힘들다.



비록 우크라이나가 선전하고 있지만, 전쟁의 결말이 어떤 식으로 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용기와 인내, 그리고 절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훌륭한 덕성을 이미 충분히 보여주었다. 또, 이 큰 위기의 상황에서 젤렌스키 같은 좋은 지도자가 있었다는 것 또한 분명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부디 학살자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그리고 우크라이나에게는 영광이 있기를(Slava Ukra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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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 교리 분별하기 - 교리 차이의 경중 어떻게 볼 것인가
게빈 오틀런드 지음, 이제롬 옮김 / 개혁된실천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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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교리란 어떤 의미일까? 좀처럼 어려운 사고를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교리란 그저 어렵고 무슨 내용인지 잘 와 닿지 않는(그래서 별 실용성이 없는) 현학적인 진술 정도로 여겨질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교리를 예수가 전한 사랑의 메시지가 변질된 무엇이라고 생각하거나, 기독교인들을 분열시키는 원흉이라고 보기도 한다.


물론 이런 관점들은 진실의 일부를 담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일부가 언제나 전체를 그대로 그려내는 건 아니다. 코끼리의 코와 발과 꼬리를 만졌다고 해서 코끼리 전체의 모습을 알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교리는 기독교의 등뼈를 이루는 부위다. 단지 교리만 있다고 해서 기독교가 완성되는 건 아니지만, 교리가 없다면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라고 부를 수 없는 무엇이 되어 버릴 것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일찌감치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때문에 자신들이 믿고 있는 바를 정확하게 진술하기 위한 노력을 수백 년 동안 경주해 왔다.





하지만 분명 교리가 일으킨 문제도 적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교리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였다. 이와 관련해 다양한 부분을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중에서 이 책의 저자는 사람들이 모든 교리(적 진술)를 똑같은 중요도를 갖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 문제였다고 보고 있다. 어떤 교리는 기독교를 세우는 핵심적인 위치에 있지만, 또 다른 교리들 중에는 그 정도로 중요한 것은 아닌 것도 있다는 말이다.


저자는 크게 네 단계로 교리의 중요성을 구분하고, 복음의 본질에 관한 1순위 교리부터, 교회의 건강과 실천을 위해 매우 중요한 2순위 교리, 기독교 신학에는 중요하지만 그것 때문에 신자들이 나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3순위 교리, 그리고 복음을 증거하고 함께 사역을 하는데 있어 중요하지 않은 4순위 교리로 나눈다.


그럼 각각의 위치에 있는 교리는 어떤 걸까? 저자의 구분에 따르면, 1순위 교리에는 동정녀 탄생과 믿음으로 얻는 의가, 2순위 교리에는 세례의 의미와 방식, 영적 은사의 지속에 관한 견해, 남녀 간의 관계에 관한 내용 등이 포함된다. 3순위 교리의 예로는 천년왕국설(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과 창조에 관한 견해 등이 들어간다.(4순위는 굳이 언급되지 않는다.)





물론 이런 구분은 어느 정도 임의적인 부분이 있다. 애초에 이런 구분 자체를 저자가 만든 것이니까. 어떤 사람들은 세례나 성찬의 의미에 대해서 2순위가 아니라 1순위라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창조적 진화론을 주장하는 것이 기독교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것이 3순위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사실 꽤 쎄 보이는 느낌의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려는 건 오히려 애초의 인상과는 반대되는 느낌이다. 저자는 교리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교리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분열되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니겠느냐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교리들의 경중을 나누어서, 어떤 부분에서 서로 견해가 다르더라도 그것이 핵심적인 교리가 아니라면 하나 됨을 추구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주장한다.


모든 문제(분열)가 낮은 순위의 중요도를 가진 교리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일어난 건 아니 것이다. 그보다는 서로에 대한 존중의 부족, 자신의 아는 것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교만함, 그리고 감정의 대립 같은 인간적 관계 차원에서의 문제가 일으킨 분열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내세운 명분이 대개 교리라는 건 참 슬픈 일이다.



이런 차원에서 교리들 사이의 중요도를 구분해 보자는 저자의 제안은 꽤 울림이 있다. 단, 이 구분을 놓고 다시 싸우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기독교는 신비 위에 세워진 종교이고, 신비란 그 특성상 처음부터 우리가 완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면이 있을 수밖에 없다. 어떤 하나의 해석이 유일한 것이라는 착각에서만 벗어난다고 해도, 우리(그리스도인들)는 좀 더 힘껏 서로의 손을 잡고 더 큰 일을 위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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