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경쟁에 이겨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을 가리켜
흔히 ‘영향력 있는 자리’가 주어졌다고 표현하면서
그곳에서 주님을 증거한다는 식의 사고가
여전히 우리 신앙 공동체 내부에 편만하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노라 하지만
실제로는 이 세대를 ‘본받고 있는 자’임을 확실히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 김근주,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 중에서
유튜브판은 야생과 같다.
언제 어디서 하이에나 같은 악플러들이 출현할 지 모른다.
이번 주에도 한 녀석을 만났다.
처음부터 시비조로 댓글을 달았고,
책을 한 권 추천하면서 생각을 교정할 기회를 가져보라고 했더니
자기가 나처럼 책 한두 권 겨우 읽고 주장하는 줄 아냐고 급발진을 한다.
그럼 뭐 책을 한 20권 추천을 하랴?
그러면서 웃기게 자기가 숭실대 대학원에서 기독교사를 전공했다고
갑자기 묻지도 않은 학벌 과시를 시작한다.
어쩌라고.....ㅋ
내가 잘 몰라서 그런데, 숭실대 대학원이 역사 관련으로 유명한 덴가?
조금 있다가는 내가 토론을 피한다고 또 빈정댄다.
토론을 피하는 게 아니라,
대화할 준비가 안 되어 있는 덜 떨어진 상대랑 굳이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거야.
처음부터 상대 조롱할 생각으로 가득 찬 애하고
무슨 정상적인 대화가 되겠니.
이어서는 어찌어찌 링크를 타고 내가 나온 학교까지 알아냈는지,
그 학교 출신인 걸 보니 독선적이네 어쩌네 하고 또 시작이다.
그래서 어이고 좋은 대학원 나오신 분에게는 눈에 차지 않는 학교죠 라고 대답했더니
갑자기 무슨 학벌 콤플렉스니 어쩌구 대답을 한다.
가만히 있는 사람을 건드리냐면서.
ㅋㅋㅋㅋ 이 네 글자만 쓰고 신고, 차단했다.
야, 지 학교, 내 학교 얘기 먼저 꺼내면서 조롱한 건 너고,
가만히 있는 사람 건드린 것도 너야.
영화나 드라마 속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듯,
무례함 바이러스가 유행인가 보다.
그래서 어제 결심했다.
쓰레기는 쓰레기 통에.
악플은 대꾸하지 말고 바로 신고, 삭제.
중세 서양사를 보는 여러 프레임 중 하나가 “기독교 vs 이슬람교”라는 대립구도다. 십자군이라는 종교에 기초한 대규모 군사원정이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고, 유럽은 교황권과 황제권 사이의 질긴 투쟁이,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는 이슬람 내부의 복잡한 세력다툼이 있던 시대이기도 했으니까.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두 세력이 지속적으로 대립(하기만)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긴 하다.
그런데 이런 관점에는 그런 역사적 사실만 영향을 주는 건 아닌 듯하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무슬림들에 대한 반감이 더 크게 영향을 끼쳤을 지도 모른다. 9.11테러와 그에 이어진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ISIS를 비롯한 다양한 이슬람 무장테러단체들의 만행들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슬람은 과격하고 호전적인 존재라는 인식이 굳어져버렸고, 이런 인식이 과거를 바라보는 데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이런 통념이 사실과는 좀 거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실은 그 시기 기독교인과 무슬림들은 같은 편에 서서 함께 싸우는 일도 잦았다는 것. 앞서 읽었던 비슷한 제목의 책(『십자가와 초승달, 천년의 공존』)에서도 크게 보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사실 추천을 받아 구입했는데, 비슷한 제목의 책이 나와 그냥 두 권 다 사버렸다), 그 책이 주로 문화적 차원에서의 교류를 다뤘다면, 이 책은 군사적 차원에서의 교류가 중심이다.
책은 크게 다섯 개의 장면을 중심으로 설명을 한다. 첫 번째는 한창 레콘키스타가 벌어지고 있던 11세기 이베리아 반도다. 첫 번째 이슬람 왕조였던 우마이아 왕조가 이베리아반도 중남부를 차지한 이후, 북부 산악지역으로 밀려난 기독교 세력이 끊임없이 남부의 무슬림들을 몰아내기 위해 싸워왔던 것 같지만, 실은 양측 사이에 길고 질긴 협력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 특히 이슬람 세력이 약화된 후에는 기독교국가들이 일종의 보호비를 받으면서 쪼개진 이슬람 자치국을 도와주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두 번째는 13세기 이탈리아 반도 중심에 무슬림들의 집단 거주구역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당시 이탈리아 남부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프리드리히 2세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북아프리카와 가까워서 일찍부터 그곳의 무슬림들이 많이 이주해 있던 시칠리아의 안정을 위해, 그곳에 살던 무슬림들을 집단으로 내륙의 루체라로 이주시켰고, 여기에서 황제의 군대를 위한 무기를 제조하거나, 군에서 직접 싸우기도 했다는 것.
세 번째는 좀 더 동쪽으로 위치를 옮겨 동로마제국 후반기를 다룬다. 제국 말기 동로마제국은 소아시아에서 치고 올라오는 이슬람 세력에 맞서 싸우고, 또 북쪽에서 내려오는 세르비아나 헝가리와도 싸워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수행 중이었는데, 여러 황제들이 왕실의 여성들을 이슬람 세력가들에게 시집을 보내곤 했다는 것.(당연히 군사적 교류도 많았다) 그 수가 하도 많아서, 왕조 자체가 자주 바뀌었던 동로마 제국의 상황에서 오히려 무슬림의 지도자 쪽이 혈통적으로 더 황제의 자리를 주장하기에 적합했다는 구절이 기억에 남는다.
네 번째는 16세기다 종교개혁과 그 후속 전쟁으로 복잡했던 유럽을 크게 위협했던 오스만 제국의 빈 포위전을 다룬다. 이것이야 말로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정면충돌로 보이지만,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 오스만군에도 기독교인들이 적잖게 있었고, 빈을 돕는 군사세력 중에서도 무슬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지막은 크림 전쟁이라고 불리는,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충돌을 다룬다. 19세기가 되면 오래된 나무가 서서히 죽어가든 오스만 제국도 거의 무너질 즈음이었는데, 러시아의 서진을 염려한 서방국가들이 그런 오스만을 도와 러시아와 맞서 싸우게 되었고, 당연히 이슬람 중심의 오스만군과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온 기독교인들이 함께 싸웠다는 말이다. 사실 이 부분으 앞서의 이야기들에 비해 기본적으로 임팩트가 살짝 적긴 했다.
두 종교 사이의 이 오랜 군사적 교류들의 이야기를 보노라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평소부터 자주 두 종교인들이 접촉할 수 있는 지역에서 이런 교류들이 잦았다는 것. 뭐 당연한 말처럼 보이지만, 그동안 우리는 그 접촉의 형태가 대립과 충돌, 그리고 정복의 형태로만 나타난다고 봐왔지만 실상은 좀 달랐던 것이다.
오히려 그런 일상적인 접촉이 없었던 사람들 사이에 더 격렬한 적대감이 나타나는 것 같다. 상대와 직접 만날 일이 없으니 얼마든지 과격한 말을 내뱉기도 하고, 그런 오류를 교정해 줄 경험을 전혀 하지 못하니 시간 지날수록 확증편향이 심해진다. 이건 유튜브에 악플이 범람하는 이유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저자도 여러 번 짚고 넘어가듯, 그렇다고 해서 이 시기 양측의 협력관계가 아름답고, 정의롭고, 완전히 서로 호혜적이기만 한 관계였던 것처럼 미화할 필요까지는 없다. 실제로도 그렇지 않았고. 다만 우리가 서로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만나려 하지 않는다면, 결국 한없이 고립된 채 모두를 적대시하는 일종의 자폐상태에 스스로 빠져버리고 말 것이라는 역사의 교훈을 주는 데 이 책은 충분히 도움이 될 것 같다.
90년대 영화 느낌.
1990년대 말엔 다양한 지구멸망 시나리오를 그린 영화가 나왔다. 뭐 이런 영화가 그 때만 나온 것도 아니고,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있었지만, 또 세기말적 분위기가 짙게 드리우면서 그런 영화들이 꽤나 유행했던 것 같다. 리뷰를 쓰면서 찾아보며 알게 되었지만, 지금 말하려는 두 개의 영화, “아마겟돈”과 “딥 임팩트”가 같은 해(1998년)에 개봉했다고 한다.
두 영화는 뭔가 설정이 비슷하다. 선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두 지구를 행해 거대한 소행성이 날아오고 이로 인해 지구가 멸망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상황을 영화의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아마겟돈”은 날아오는 소행성에 우주선을 타고 착륙해, 구멍을 뚫고 그 안에 폭탄을 장착해 터뜨린다는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 이 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건지는 확실치 않지만, 실제로 각국의 우주관련 연구기관에서는 비슷한 실험을 하고 있다고도 한다.
새 영화에 관해 리뷰를 하면서 왜 이 오래된 영화를 길게 물고 빼느냐, 역시 영화를 보는 내내 비슷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20년도 훨씬 더 지난 영화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는 2020년대 영화라니... 물론 모든 창작물이 완전한 새로운 창작일 수는 없다지만, 이건 뭐.. 분명 CG야 그동안 흘러온 세월만큼 발전한 느낌이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감성이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은 이제는 좀 촌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어느 날 갑자기 달이 지구를 향해 나선형 하강을 시작하고, 그로 인해 각종 문제들(주로 달의 인력 때문인 듯)이 발생하고, 웬만한 기업 회의실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나사 기지에서는 별다른 대책을 내지 못하는데, 미국 국방부에서는 수많은 핵미사일을 날려 달을 폭파시키겠다는 한심한 계획만 내고(달이 없어지면 급속한 환경의 변화로 인류는 아마 얼마 가지 못해 멸망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한 검증되지 않은 아마추어 천체관측자의 말을 따라 달로 향하는 로케트(그것도 박물관에나 있었던)를 타고 날아가는? 이게 최선인가요?
달이 초거대구조물이었다고?
영화의 가장 큰 상상력이라면 역시 달이 초거대구조물이라는 발상이다. 아마추어 천체관측가인 KC 하우스먼은 어느 날 달의 궤도가 정상범위를 벗어나고 있음을 깨닫고, 그것이 달이 엄청나게 큰 인공구조물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거라고 해석한다. 당연히 그의 말은 나사 관계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고 잊힐 뻔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나사에서도 달 궤도의 변경을 깨닫고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내용.
여기에 나노로봇 군체들로 그려지는 비인류 지성체가 등장하면서 달이 외계인이 만든 거대한 기지일 가능성을 보여주는데, 직접 로켓을 타고 달의 내부에 형성된 금속제 구조물들까지 보여주면서 이런 예측이 맞나 싶을 즈음, 이야기는 훨씬 더 복잡하게 꼬여간다. 알고 보니 달은 인류의 오래 전 조상들이 만든 인공구조물이었고,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AI가 자의식을 갖게 되면서 도리어 멸종되고 말았다는 것. 그 AI가 다시 지구의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 달을 움직이고 있다는 건데.... 하...
달이 알고 보니 지구 침략을 위한 비밀기지라는 설정은 우리나라엔 지난 2012년 개봉한 핀란드 영화 “아이언 스카이”에서도 볼 수 있었다. 이쪽은 히틀러가 전쟁에서 패하기 전에 달로 로켓을 쏘았고, 그 후손들이 나치적 삶을 달 기지에서 이어오고 있다는 설정의 블랙 코미디 영화였는데, 상황은 훨신 말이 안 되어 보이긴 해도 또 블랙 코미디만의 위트가 느껴져서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종류의 웃음마저 주지 않는다. 달 전체가 위장된 인공구조물이라는 설정은 애초부터 말이 안 되어 보였고, 그건 차라리 지구 전체에 추진기를 달아 통째로 멀리 옮기겠다는 내용의 중국영화 “유랑지구”류의 허풍과도 비슷해 보인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걸 어떻게 봐야 하는 건지 보는 사람을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빈틈투성이.
억지로 억지로 이야기를 끌고 오긴 했는데, 그 사이사이의 설정이 빈틈투성이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주인공 세 명이 우주선에 타야 하는지도, 그 중 두 명이 하필 이혼한 전처와 전남편일 이유는 무엇이며, 그래도 그 두 사람은 우주인으로 활동해 본 경력이라도 있는데, 관련 훈련이 전혀 없었던 아마추어 천체관측가가 나머지 한 자리에 앉아 있는 이유는? 그가 새로운 가설을 제기해서? 어쩌면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될 수 있는 로켓 발사에 그런 모험을 하는 이유는 영화이기 때문일까?
그런데 그렇게 달에서 문제를 해결한 것도 정작 주인공들이라기 보다는 그들의 오래 전 조상들, 그러니까 AI의 반란을 초래해서 멸망했던 조상들이 남긴 프로그램이었다. 주인공 일행이 타고오다 완전히 망가진 우주선을 순식간에 수리할 수 있는 기술력까지 가지고 있었던(근데 왜 망했어..).
더구나 그렇게 달에서 벌어지는 일도 뭐 하나 제대로 되어가는 게 없는데, 위기감을 조성하려고 했던 건지 중간 중간 나오는 지구의 가족들 이야기는 또 얼마나 어설픈지. 주인공 커플이 이혼을 했다고 잔뜩 삐뚤어지기로 작정한 아들내미나, 그 아들내미와 지구가 멸망해 가는 와중에서도 썸을 실현하는 중국계 보모 여자애는 또 왜 나오는 건지(영화의 제작에 중국 자본이 합작 형태로 참여했다고 한다. 이게 원인은 아니었겠지?)
많은 재난영화가 그렇지만, 그냥 정신없이 인물들의 관계가 뻗어나가고 우연의 일치가 일어나고, 극단적으로 단순한 사람들이 잔뜩 등장하는 영화. 호감가는 인물이 별로 없다는 게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링컨 고등학교 학생들은
그 무례한 욕설과 저주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모욕을 당할 때마다 도랑에 빠진 기분이 든다면
어떻게 하루를 살아낼 수 있겠는가?
살다 보면 필요한 곳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법을 터득하기 마련이었다.
- 콜슨 화이트헤드, 『니클의 소년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