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 독살 의혹.
병자호란은 남한산성에서 당시 조선 왕인 인조가 청 황제에게 절을 했던 삼전도의 굴욕으로 끝났다. 이후 청은 조선의 차기 왕이 될 소현세자 내외를 볼모로 끌고 갔는데, 세자는 청 황실의 고위 인사들과 교류를 하면서 그들의 우호적인 인상을 준다.
문제는 그런 세자가 조선으로 돌아오면서부터였다. 애초에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면서 정통성도 부족했던 데다가,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은 무능한 왕이라는 이미지까지 더해지면서 인조는 정치적으로 꽤 몰려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청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안고 돌아온 세자에게 위협을 느껴 아들을 독살했다는 것이 이 사건과 관련해 오래 전부터 제기되던 의혹이다.
영화는 이 의혹을 사실이라고 가정하고 진행된다. 여기에 시각장애를 갖고 있는 침술사 천경수(류준열)라는 캐릭터를 넣어 한 명의 증인으로 기능하게 만들면서, 사건을 보는 관객들의 긴장감도 높여준다. 구중궁궐 임금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일을 보여주는 방식으로서 이런 증인을 놓아두는 건 영리한 설정이었다.
올빼미.
영화의 제목 올빼미는 그렇게 감독이 만들어 넣은 가공의 캐릭터인 천경수를 가리킨다. 그는 보통 때는 앞이 보이지 않지만, 주변이 어두워지면 희미하게 볼 수 있는 상태다. 마치 올빼미가 야행성이라 낮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자다가 밤이 되면 비로소 사냥을 하러 날아다니는 것처럼.
한편으로 이 제목은 아무리 다른 사람들 몰래 음모를 꾸미더라도, 누군가는 그걸 보고있을 수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과 비슷한. 다만, 영화의 전체적인 밝기가 너무 어둡다. 아무리 밤이 주된 무대지만 이렇게 어두워서야...
온통 CCTV와 블랙박스 같은 카메라들이 비추고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짜 나쁜 놈들은 자기들만의 어둠 속에서 일을 처리하곤 한다. 결국 증거가 없으니 처벌도 없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 이어진다. 심지어 누군가 사건을 드러내더라도 그저 덮어버리고 끝내는 일도 비일비재하니... 올빼미처럼 한 밤의 쥐새끼들을 낚아채 잡아먹는 어둠의 영웅들을 그린 드라마나 영화가 인기를 끄는 이유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유해진.
영화의 주인공은 류준열과 유해진인데, 개인적으로는 인조 역의 유해진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어딘가 조금 나사가 헐거운 개그 캐릭터로 나오는 영화나 편한 옆집 아저씨 같은 예능의 모습만 보다가, 간만에 이렇게 진지한 역할로 나오는 게 조금 새롭게 보였달까.
앞서 잠시 설명했듯, 당시 인조의 상황은 매우 불안정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왕들이 대개 그렇듯 공신들의 등쌀에 눌려 지냈고, 전쟁에서 패하면서 엄청난 피해까지 입었으니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기도 어려웠다. 영화 속 인조는 심한 불안과 일종의 편집증을 갖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유해진은 약간은 미쳐있는 이 캐릭터를 썩 괜찮게 묘사했다.
다만 대사처리는 좀 아쉬웠는데, 너무 뭉개져서 무슨 말인지 잘 안 들리는 부분도 보인다. 시종 그가 어딘가 아픈 모습으로 등장했기에 너무 또렷한 발음을 사용하기 어렵기도 했겠다 이해는 가지만.
영화 말미에 묘사된 것처럼, 실제로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은 지 4년 만에 세상을 떠난다. 흥미롭게도 그 역사 공식적으로는 병사로 기록되었다는 점인데, 영화는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 그의 마지막을 천경수가 마무리한다는 설정을 넣는다. 영화적으로는 꽤 시원한 장면이지만, 또 인조가 그렇게 실제로 악랄했나 하는 질문을 해 보면....흠..
굉장히 오랜만에 전자책으로 읽어봤다.(직전에 봤던 전자책이 1년은 훨씬 전이었던 것 같다.) 요샌 편하게 전자도서관을 이용할 수도 있고 해서, 전자책을 구입할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하지만, 여전히 나는 책장을 넘기면서 볼 수 있는 물성을 지닌 책이 좀 더 익숙하다.(물론 언제 전자책 충동구매를 할지 모른다. 아, 선물은 환영이다.)
사실 전자책으로 읽을 만한 책과 종이책이 더 나은 책은 어느 정도 구분이 되는 것 같다. 편하게 훅훅 넘겨도 상관 없는 책은 전자책이라도 크게 문제가 없지만, 한 자 한 자 새겨야 하거나, 작가나 저자의 고민이 깊게 담겨 있거나 한 책은 종이책 쪽이 좀 더 읽기에 적합하다. 아쉽게도 전자책으로만 나온 이 책은 후자 쪽에 속한다.
책은 보통의 생활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강박증을 앓고 있는 작가의 에세이다. 학창시절부터 그 증상이 시작되었던 작가는, 졸업 후 영어교사 일을 시작하면서 증상이 크게 악화되는 경험을 한다. 이제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젊은이에게 그 충격은 몇 배로 크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강박증의 증상과 원인은 너무나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작가는 자기 내부의 목소리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비난하고 공격하는(책 속에서 작가는 이를 ‘참소’라고 부른다) 부분이 가장 크게 괴로웠던 것 같다. 다행이 그런 작가를 이해해주는 든든한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고, 약물과 상담 치료도 꾸준히 받았던 것 같지만, 작가가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증상 호전의 원인은 하나님을 만난 것이었다.
비로소 작가는 자신을 고발하는 목소리의 근원에 죄가 얽혀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이렇게 단순하게 서술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 떠올랐을 수천 겹의 자기를 고발하는 목소리의 무게를 이겨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사실 책이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우선은 작가가 적고 있는 일들의 무게감이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좀 더 큰 이유는 책에 담긴 글의 얼개가 생각만큼 탄탄하지 않아서다. 시간적 순서에 따라 자신의 증상의 악화와 호전 경과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처음과 마지막 일부 그런 부분이 있긴 하다), 중간에는 그냥 의식의 흐름을 따라 주제들을 배열하고 있는데다가 그 내용 또한 반복적이고 비슷비슷(대부분 신앙적 고백이다)하다.(어쩌면 이 또한 강박증의 특징일 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싸움이 아직 다 끝난 것 같지는 않다. 사실 이런 종류의 질병에 끝이라는 게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의 주변에는 지지가 될 만한 가족들이 있고, 무엇보다 조금은 느리지만 더듬더듬 신앙의 빛을 향해 가고 있으니 조금은 좋은 쪽으로 기대를 해 봐도 좋지 않을까.
생애 말기에 병원에서 기계호흡장치를 달고
인공영양을 받으며 최대한 버티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마치 현대 사회 죽음의 통과의례로 자리 잡은 듯하다.
이는 엄밀히 삶의 연장이 아닌 죽음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처럼 병원임종의 가장 큰 문제는
죽음이 인간적인 마무리가 아니라
하나의 의학적 사건으로 처리된다는 것이다.
- 박중철,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중에서
저자 소개를 읽는 데 흥미로운 내용이 보인다. 대학원에서 보수적인 교수의 지도를 받았지만, 교수의 성향과는 정반대로 진보적인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는 부분. 학계라는 게 학맥과 인맥 등으로 촘촘히 얽혀 있곤 해서, 다른 소리를, 그것도 자신의 은사의 주장에 반대해 그렇게 활동하는 게 쉽지 않다. 그리고 아마 이건 일본도 마찬가지일 텐데, 용기 있는 결단이다.
책은 고등학생에서 대학생 정도 되는 역사 동아리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중간 중간 질문과 답변도 섞어 가면서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전개해 나간다. 여기에서 다뤄지고 있는 건 근대 일본이 참여한 다섯 번의 전쟁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그 사이에 있었던 중일전쟁이 그것.
저자는 각각의 전쟁들의 단순한 경과가 아니라, 그 사건들이 일어나기 전후의 배경을 중심으로 인과적 서술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일본이라는 나라가 장기적인 계획에 따라 조금씩 주변국들을 침략, 공격해 가며 자국의 안전을 도모하려고 했다는 점과, 이 과정 내내 철저하게 자국중심의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강경파가 득세했다는 점이다.
사실 근대 일본은 서양세력에 의해 강제 개항과 개화가 이루어지면서, 종래의 쇼군에 의해 이루어지던 정치체제가 무너지면서 일종의 아노미 현상을 맞게 된다. 일부는 텐노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어 서양식 개혁을 추진하려고 했고, 미약하게나마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을 추진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성공한 것은 전자였고, 이들이 태생적으로 힘에 호소하기를 좋아했다는 게 모든 사건의 근원이었다.
시민들의 의사가 제대로 대표되지 않은 채, 소수의 정치가들과 군인에 의해 좌우된 일본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주변국은 물론 자기 자신의 엄청난 손해로 끝나고 말았다. 사실 전쟁을 거듭할수록 피해가 누적되었고, 다시 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또 다른 전쟁에 나서는 느낌이 진작부터 들었지만, 일단 그 안에 들어가 버리고 나면 이 뻔한 그림이 보이지 않았던 걸까.
보통 사람들은 저 위에 있는 사람들이 다들 똑똑하고 자신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어 현명한 판단과 결정을 내릴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반대 의견에 귀를 막고, 좀 더 큰 시야에서 상황을 볼 줄 모르는 소견이 좁은 인간들이 너무 많은 권한을 가질 때 얼마나 파괴적인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
저자는 담담하게, 일본이 주변국에 입힌 피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면서 사안을 다룬다. 이렇게 깔끔하게 인정할 때 비로소 앞으로도 나아갈 수 있는 거다. 그저 무조건 과거를 덮고 잊자고 우긴다고 해서 동반자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사실 이건 유치원 다니는 애들도 알 수 있는 너무 단순한 진리다)
부디 이런 양심적인 학자들과 시민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자국이 일으킨 전쟁을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꾸며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내가 보기에 한일 양국이 제대로 된 우호관계를 만들어 가기 위한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