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이나 이 작가의 책 리뷰에 썼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다. 뭐 아주 훌륭한 작품을 써내기도 하지만, 대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하지만 독서 슬럼프나, 조금은 힘든 독서를 연이어 했을 때 가볍게 기분을 바꿔주는 유용한 상비약 같은 존재가 히가시노 게이고다.(소설이 아닌 에세이를 읽으며 그의 민낯을 살짝 본 후 좀 깨긴 했지만..ㅋ)
이번 작품은 한 밤 중에 일어난 한 살인사건을 중심에 두고 벌어진다. 견실한 제조업체의 생산 공장 본부장을 맡고 있던 한 남자가 죽었고, 인근에서 무직의 또 다른 남자가 죽은 남자의 가방과 지갑을 가지고 도망치다가 차에 치어 죽어버렸다. 당연히 경찰이나 언론에서는 후자가 전자를 살해하고 도주하다가 사망했다는 스토리를 그릴 텐데, 여기서 작가는 해소되지 않는 의문점을 심어둔다. 범인이 사용한 나이프는 어디서 왔으며, 범행의 동기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사건 수사에서 가장 중요한 범행도구와 동기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다니는 큰길에서 평범한 직장인이 죽었으니 서둘러 사건을 해결하라는 압박이 심해졌고, 경찰 고위층에서는 애초의 시나리오대로 사건을 몰아간다. 하지만 여기에 조용히 반대하며 의문점을 따라 진실에 접근하는 형사 가가.(이 책에는 ‘가가 시리즈’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처럼, 단순히 사건의 전개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사건을 둘러싼 사회의 반응에도 신경을 쓴다. 처음에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동정어린 시선이 쏟아지지만, 얼마 후 피의자가 피해자의 회사에서 비정규직으로 일을 했다가 계약연장이 되지 않았고, 그렇게 계약 해지가 이루어지기 얼마 전 일하던 중 사고가 발생했지만 회사의 요구로 산재처리를 하지 않았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변하기 시작한다. 요컨대 부당한 해고를 당한 피의자에게도 동정의 여지가 있지 않겠냐는...
이런 모습이 드물지 않은 것이, 하루에도 수없이 올라오는 자극적인 인터넷 기사들과 거기에 달린 댓글들, 며칠 후 밝혀진 반대쪽의 사정은 앞서 보도된 사건의 일방적인 방향을 드러내는 게 허다하다. 하지만 어떤 (자칭) 언론들도 애초의 보도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를 하는 걸 보지 못했다. 그저 클릭 수만 늘리면 그만이라는, 반쯤은 사기꾼 정신으로 채워진 이들은 별 신경을 쓰지 않으니까.
문제는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2차 가해가 수시로 일어난다는 점이다. 애초에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가족들을 향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거나, 아예 작정하고 억측을 바탕으로 한 가짜 뉴스가 만들어 지기도 한다.(이쪽은 앞서의 “기레기”보다 질이 좀 더 떨어지는 “양아치”들이다)
작품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다. 물론 작가는 여기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단서들을 독자에게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꽤 정통적인 추리소설의 방식을 지켜간다. 개연성 없는 반칙 플레이를 하지 않으니 또 그대로 읽어가는 맛이 있다.
다만 이야기 전체에 일본의 신사문화 같은 특유의 전통이 깊게 배어 있어서, 나처럼 다른 문화권에 있는 독자들이라면 작중 인물의 설명이 나오기 전까지 그 의미를 바로 캐치하기는 어려운 점도 있었다는 건 아쉬운 부분. 하지만 역시나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아... 이제 여유가 좀 생겼나 보다.
또 알라딘 굿즈병(?)이 돋아서....ㅋㅋ
글쎄 이 4만 원짜리 자개문양 머그컵을 사면 책을 몇 권 껴준다길래...
간만에 괜찮은 굿즈를 만나서 사지 않을 수가...
그래도 전세대출 이자에서 벗어나니,
책 살 때 주저하는 시간이 좀 줄어든 건 사실..;;
“검사들은 자신이 의미를 모르는 단어들을
사용하는 걸 좋아합니다.”
- 아흐메트 알탄, 『나는 다시는 세상을 보지 못할 것이다』 중에서
복음이란 무엇일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자주 듣게 되는 단어(요새도 이 단어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가 ‘복음’이다. 그런데 그 ‘복음’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 책의 저자인 톰 라이트는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가 매우 축소된 버전의 복음”만 알고 있으며, 이건 기독교에 대한 이해에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복음의 내용은 이렇다. 1) 온 세상은 죄를 지어 하나님의 분노와 처벌을 받아야할 운명에 처해 있다. 2)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 분노와 처벌을 대신 받으셨다. 3) 예수를 믿으면 우리도 그 처벌로부터 면해질 수 있고, 나아가 죽음 이후 약속된 천국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이렇게 묻는다. 그게 전부인가?
성경신학(신약) 전공자인 저자는 이 문제를 복음서를 좀 더 자세히 읽는 것으로 풀고자 한다. 복음서(와 다른 신약 저작들)의 저자들이 생각한 복음은 징벌과 그 면제라는 좁은 개념이 아니라, “이 세상에 큰 영향을 주는 좋은 일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선언”이었다는 것. 여기에서 선언이란 단순히 상징적이고 공식적인 언급에 불과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리는 일이라는 뜻이다.
복음서가 쓰일 당시 널리 통용되었던 ‘복음’에 관한 이해가 있다. 그것은 황제와 같은 인물들이 자신이 이룬 결정적인 승리, 혹은 어떤 업적을 널리 선전할 때 사용하던 용어였다. 이제 그 조치로 인해 장차 더 좋은 일이 확정적으로 일어날 것이고, 당연히 현재 그 사건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삶을 바꿀 것이다. 저자는 기독교의 복음 또한 이런 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오늘날 많은 교회가 초대 교회의 이 ‘선포’를 매우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변화’나 ‘천국에 가기 위한 방법’으로, 그리고 좋은 소식이 아니라 충고 정도로 바꾸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면 복음이 갖는 애초의 역동성과 기쁨이 사라지고 대신 지루하고 부담스러운 규칙들이 양산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
복음이 단순한 교훈이나 충고가 아니라 기쁜 소식의 선포라는 지적은 인상적이다. 또, 어떻게 이런 변질이 나타났는지 역사적인 과정을 추적해 본 것도 의미가 있었다. 확실히 초기 기독교 시대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과 오늘날의 사람들 사이에는 반응에 명백한 차이가 있다. 어쩌면 그것이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개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는 지적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바른 지식은 바른 믿음의 중요한 요건 중 하나다.
다만 그 “소식”이 우리의 오늘과 내일에 어떤 실제적인 효과와 변화를 일으키는지에 관한 설명이 좀 부족한 건 아쉬운 부분이다. 물론 이 책은 제목에도 나와 있듯 복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데 집중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가 행동을 권고하는 조언이 아니라 선포라고 강조한다면, 그것이 가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변화의 내용도 아울러 제시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복음의 의미에 관해서 좋은 설명을 담고 있는 책.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