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브, 막이 오른다
김주연 지음 / 파롤앤(PAROLE&)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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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전쟁으로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하고 있는 점 중 하나는 도대체 왜 푸틴이 이 지역을 러시아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느냐는 부분이다.


그저 푸틴의 망상이나 탐욕이라고 설명하는 건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기에 모자라다. 그리고 여기에는 단지 군사적/정치적 요충지를 차지하려는 생각을 넘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복잡하고 미묘한 역사도 있었다. 슬라브족의 역사 말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슬라브족의 역사와 분화 과정, 나아가 오늘날의 모습을 간략하게 스케치하고 있다(아주 학술적인 역사적 기술을 담고 있는 건 아니다).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특별히 자신의 주력 관심사인 공연, 음악, 문학 같은 예술 분야에 관한 설명을 덧붙여 독특한 분위기의 책을 만들었다.



슬라브족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포함하는 동슬라브족,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를 포함하는 서슬라브족, 그리고 발칸반도 북부의 구 유고연방에 속했던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코소보, (북)마케도니아와 슬로베니아, 불가리아 등의 뿌리인 남슬라브족이 그것. 동슬라브와 서슬라브족은 국경을 맞대고 있지만(그래서 폴란드가 최근 우리나라 무기를 잔뜩 사서 무장하는 중이다), 남슬라브족 국가들과는 루마니아와 헝가리, 오스트리아로 떨어져 있다.


단순히 ‘슬라브족’이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워낙 오랜 시간 흩어져 살아오면서 주변 민족과 교류를 해왔기에, 오늘날 그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하얀 피부에 금발을 가진 전형적인 슬라브족의 외형도 있는가 하면, 검은 머리에 좀 더 짙은 피부색을 가진 슬라브족도 있다. 특히 오스만제국의 직접적인 지배를 오랫동안 받았던 남슬라브족에서 이런 외형적 변화가 컸다.


단지 외형적인 변화만이 아니다. 동슬라브족의 경우 정교회가 우세지만, 서슬라브족은 가톨릭이, 남슬라브족에서는 이 두 종파에 앞서 말한 오스만제국 지배기 들어온 이슬람교 신자들도 많이 살고 있다. 종교가 다르면 문화도 달라지고, 사는 방식에도 차이가 생긴다. 하지만 인근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결국 그저 이웃일 뿐이고, 함께 살아가는 동료였다.



슬라브족의 역사에서 두드러지는 건 기쁨과 영광의 순간 보다는 고통과 슬픔의 시간들이었다. 비단 최근의 러시아의 침략 전쟁만이 아니라 우크라이나에는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의 역사가 있었고, 폴란드는 동서의 강국의 침략을 받아 영토의 상당 부분 잃기도 했었고, 과거 소련시절 공산당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체코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희생하기도 했다. 또, 남슬라브족의 영역은 유고 전쟁으로 엄청난 사람들의 죽음과 인종청소가 일어난 땅이었으니까.


물론 그 땅에 언제나 슬픔만 있었던 건 아니다. 체코의 프라하는 예술의 도시로 유명하고, 폴란드의 브로츠와프라는 도시는 실험적인 연극으로 유명한 연극의 도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곳 또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 아니던가.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과거 소련의 유산들로 칙칙하고, 황폐한 느낌이다.



저자가 직접 도시들과 거리를 다니면서 보고 들은 내용을 담았기에 생동감이 있다. 또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그리 익숙지 않은 지역들에 관한 이야기라 좀 더 호기심을 가지고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역사를 소개하면서 예술이라는 코드를 함께 넣은 것도 좋은 기획이었던 듯하고. 한 번쯤 기억해 둘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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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나리스 - 그리스도교를 밝게 비춘 스무 개의 등불, 바울부터 로메로까지
로완 윌리엄스 지음, 홍종락 옮김 / 복있는사람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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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전, 혹은 위대한 인물들에 생애를 요약한 책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1세기 살았던 고대 로마시대의 그리스 출신 저술가인 플루타르코스가 쓴 영웅전은 유명하고, 그보다 한 세대 후의 작가였던 수에토니우스는 로마 제정 초기 황제들의 일화를 담은 황제전을 써냈다.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이쪽은 성경 속 인물이라든지, 신앙적으로 모범이 되거나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그 주요 저술 대상이 되었다. 일부 초기 저작들는 외경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에서 자주 낭독되기도 했고, 성인열전과 비슷한 식으로 여러 명의 인물들을 묶어서 담기도 했다.


이 책은 잘 알려진 성공회 신학자인 로완 윌리엄스가 쓴 일종의 성인열전, 또는 신앙인 열전이다. 가장 먼저 소개되는 건 바울이고,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나 켄테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 안셀무스, 에크하르트, 틴들처럼 교회사에서 주목받는 인물들이 다수 등장하기도 한다. 또, 19~20세기 활동했던 기독교인들도 적잖이 등장하는데, 윌버포스나 찰스 디킨스 같은 인물은 좀 유명하지만, 세르게이 불가코프나 에디트 슈타인, 에티 힐레숨 같은 인물들은 조금 낯설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이런 인물들의 일생을 요약하고, 그들의 사상과 글과 말 등을 정리하는 식의 내용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전제한 채로, 그들의 삶에서 저자인 윌리엄스가 생각하기에 특별했던 요소들을 골라서 그 부분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각각의 인물들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 정리되어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들을 모았다고도 볼 수 있다. 다분히 윌리엄스의 신학적 사고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더듬어 갈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책에 실린 내용 중 일부는 저자가 각각 다른 자리에서 했던 강연이나 글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예를 들면 켄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글은 BBC 라디오에서 했던 강연에서 가져온 것이고, 에크하르트나 크랜머에 관한 내용은 서로 다른 교회에서 했던 강연, 틴들에 관한 글은 저자가 앞서 출판했던 책 속 한 부분이다.


물론 잘 편집되어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잡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면, 또 그 인물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다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로도 현대 인물들에 대해서는 아는 게 부족하다보니 살짝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고.


흥미로운 건 이 책의 바로 앞에 읽었던 수학에 관한 책에서 중요하게 언급되었던 시몬 베유라는 이름의 여성 철학자가 이 책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부분이다. 이렇게 연속으로, 그것도 전혀 다른 장르의 책에서 동일한 인물을 만나게 되는 경험은 매우 드문데, 내친 김에 좀 더 파봐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깊은 신학적 사고와 유려한 문체, 그리고 훌륭한 번역자의 작업이 더해져서 미적으로 아름다운 문장들이 잔뜩 담겨있다. 이런 게 전 세계 성공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캔터베리 대주교를 역임한 저자의 품격이다 싶다.


다만 조금은 현학적이라는 느낌도 동시에 들기도 하는데, 이건 책에서 그려지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 우리가 매일 뉴스에서 접하고 있는 그것들과는 좀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뉴스라는 게 언제나 자극적인 것들만 모아서 가공하는 나쁜 버릇이 있긴 하지만, 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지금’을 보여주는 중요한 매체이니 무시할 수만은 없는 부분이다.


물론 이 책은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지시하는 책은 아니다. 교회의 과거와 가까운 어제를 살피면서 우리가 오랫동안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안내서에 가깝다. 언제나 이런 목표를 확인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곳에 이르는 과정에 많은 돌발현상들이 일어나겠지만, 목표를 잃지 않으면 결국 도착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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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개소리쟁이에게는 이 모든 것이 무효다.

그는 진리의 편도 아니고 거짓의 편도 아니다.

정직한 사람의 눈과 거짓말쟁이의 눈은 사실을 향해 있지만,

개소리쟁이는 사실에 전혀 눈길을 주지 않는다.

자신이 하는 개소리를 들키지 않고 잘 헤쳐 나가는 데 있어

사실들이 그의 이익과 관계되지 않는 한,

그는 자신이 말하는 내용들이 현실을 올바르게 묘사하든

그렇지 않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기 목적에 맞도록 그 소재들을 선택하거나 가공해낼 뿐이다.


- 해리 G. 프랭크퍼트, 『개소리에 대하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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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의 수학 - 32년형을 선고받은 크리스토퍼에게 수학은 무엇이었을까?
프랜시스 수 지음, 고유경 옮김 / 경문사(경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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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신학이 무슨 소용이냐고 묻는 이들에게”라는 제목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신학이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일각의 오해에 대한 대답이었는데, 이 책도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단 이번에는 신학이 아닌 수학이다.


수학 역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받아왔다. 특히 ‘수포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학생들을 괴롭히는 학문분야로 악명을 떨치고 있기도 하고. 심지어 일부는 수학이라는 게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무관한 학문분야로 여기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런 오해에 대한 수학자의 반론이다.





저자인 프랜시스 수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동양계, 정확히는 중국계 미국인이다. 이민자인 부모님은 자신들은 힘든 일을 하면서도 아들은 대학원을 졸업하기를 원했던 전형적인 동양적 사고의 소유자였다. 결국 그는 최초로 미국수학협회 회장에 오른 동양계 인물이 되었으니, 부모로서는 꽤 뿌듯한 일이었을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즐겨했던 저자에게 수학은 꽤나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분야였을 것이다. 하지만 소수자로서 이런 성공을 거두기까지 난관이 없을 리가... 이 책은 자신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겪은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과, 수학 그 차제가 가지고 있는 매력과 유익에 대한 저자의 찬사들로 채워져 있다.


또 하나, 이 책의 제목이 “참회의 수학”인 이유는 저자와 편지 교환을 하고 있는(그리고 그 일부가 책에도 실려 있는) 한 죄수 때문이다. 그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마약에 빠져 열아홉 살 때 무장강도 사건으로 32년형을 받은 젊은 중범죄자였다. 그런 범죄자가 교도소 안에서 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소용이냐는 핀잔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이를 통해 세상 속에 담겨 있는 진리에 대해 하나씩 깨달아가고 있었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수학이 인류의 번영을 위한 학문이라고 말한다(이건 수학이 무슨 소용이냐는 질문에 대한 반론이다). 기본적으로 정확한 계산을 바탕으로 하는 수학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손해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수학을 싫어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걸 가르치는 방식에 기인하는 문제다. 수학은 단순히 많은 문제를 푸는 게 아니가, 세상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일종의 탐험과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으로 수학을 접하고 배운다면, 우리의 수학에 대한 공포증은 조금 줄어들었을가?


나아가 저자는 수학은 의미를 찾아내고, 일종의 놀이이기도 하며, 아름다움과 영원, 진실 같은 좀 더 철학적 주제들을 더듬어 따라가는 방식이라고도 본다. 하긴 흔히 최초의 수학자로 생각하는 피타고라스도 철학자이자 일종의 종교인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모든 사람이 수학을 통해 그런 것들을 얻을 수는 없다. 그리고 여기에는 수학은 물론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다양한 편견(여성은 남성보다 수학을 잘 못할 것이다, 동양계 학생은 수학 성적이 좋을 것이다 같은)과 힘의 논리 같은 것들이 사람들의 수학 탐험을 방해한다. 책의 후반은 수학의 진정한 가치를 더 널리 확장시키기 위해 갖춰야 할 부분에 관해 제안한다.





학창시절 나도 수학을 제법 어려워했던 것 같다. 온갖 수식들이 난무하던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에서 길을 살짝 잃었던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졸업할 때까지 배우는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본 적이 한 번 도 없었는데, 유독 수학에선 어려움을 느꼈다(그래도 수능시험에선 만점을 받긴 했다). 처음에 그렇게 두려움을 느끼니 이후에도 좀처럼 친해지지 않았다. 만약 수학을 단순한 계산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탐험으로 배우기 시작했다면, 조금은 달랐을까?


비단 모든 학문이 제대로 공부를 한다면, 결국 세상에 대한 이해로 넘어가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학문이라면 어느 것 하나 필요 없는 게 없을 것이다. 이게 배움이 주는 즐거움의 원인일 테고. 이 책에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숫자나 수식보단 수학철학, 공교육과정에 대한 문제제기 같은 게 좀 더 많이 나온다. 조금은 다른 식으로 수학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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