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C. 스프로울, 고난과 죽음을 말하다 - 고통 속에서 발견하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소명
R. C. 스프로울 지음, 김진우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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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권에서 스프로울이라는 이름은 널리 알려진 신학자다. 개인적으로 그분의 책을 많이 읽어본 건 아니지만,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된 책만 해도 수십 권이나 되니까. 내가 앞서 읽어본 책은 어린이에게 기도에 관해 쉽게 설명하기 위해 쓰인 책이었다. 자칫 지루하거나 어렵게만 느껴질 수 있는 신학적 주제를 쉽게 설명하는 재능이 있는 저자다.


이번 책에서는 제목에 나와 있는 것처럼 ‘고난’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신학적으로 설명한다. 사실 이 두 가지 주제는 일찍부터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종의 난제로 여겨졌던 것들이다. 왜 선하신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보존하면서 대답하고자 하는 노력이 신정론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어 왔고.


이 책도 어떤 면에서는 신정론의 한 부류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방향이 약간 다르다. 신정론은 하나님에 관해 설명하려는 시도라면, 이 책은 고통과 죽음을 겪는 인간의 입장에서, 특별히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저자는 죽음을 ‘마지막 소명’으로 진단한다. 죽음이 소명이라는 의미는, 그 부름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즉,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 기독교계 일각, 특히 번영신앙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조금 놀라운 주장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치유와 회복의 하나님으로만 보려고 애쓰니까. 그러나 죽음은 사탄의 승리가 아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임하는 사건이다(히 9:27).


죽음을 이렇게 정의하면, 이제 그것을 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제대로 수용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하나님은 때로 죽음과 고통을 명령하고 우리에게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하신다. 중요한 것은 그 고난의 골짜기를 그분과 함께 걷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을 통해 더욱 성장했다.


또 저자는 성경은 죽음의 원인이나 방법이 아니라 죽는 사람의 영적 상태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중요한 지적이다. 반면 오늘 우리는(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죽음 그 자체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영적 상태에 충분히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책의 2부는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견해와 성경의 견해,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마주하게 될 사후의 상태, 천국에 관한 성경의 증언을 정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리뷰를 쓰고 있는 지금, 시리아와 튀르키예 국경 지대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 벌써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뉴스를 보고 있다. 몇 달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압사해 죽는 사고가 있었고, 러시아의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쪽 모두에서 또 엄청난 죽음과 고통을 발생시키고 있다.


확실히 고통과 죽음은 어렵다. 그건 너무나 거대해서 몇 마디 말로, 아니 아무리 두꺼운 책을 써도 모두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외침과 비명은 너무나 커서 그저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무시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 당장 우리 주면서도 그리 드물지 않게 이런 일들은 일어나고 있으니까.


물론 이 책이 죽음과 고통에 관한 모든 내용을 다 풀어냈다고 보지는 않는다. 성경에 나온 내용을 모두 정리한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정도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알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내용은 충분히 담아내고 있는 것 같다. 아주 깊은 신학적 사유는 아니라도 이 정도면 건전한 복음적 이해라는 소기의 목표는 얻을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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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만하면 한 번씩 주는 알라딘 용돈.

근데 재미있는 건....

그리 힘을 주며 쓴 리뷰가 아닌 것들이 이렇게 선정되어서 용돈으로 돌아온다.

막상 읽어보면 그닥 잘 썼나 싶은 것들인데....

뭐 아무튼 감사.. ^^


이번에 선정된 리뷰는 아래 링크로

https://blog.aladin.co.kr/749578114/14305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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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경제학은 정부의 역할을 시장 실패를 고치는 기능으로만 축소했고

정부가 시장을 적극적으로 창출하고 구성해 나갈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았다.

공공 영역의 가치 창조 기능이 과소평가된 것이다.


마리아나 마추카토, 『가치의 모든 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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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곳
김종관 감독, 연우진 외 출연 / 미디어룩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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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가 다였나?


포스터에 매력적인 사진이 있어서 본 영화다. 모두 다섯 명의 인물 사진이 다섯 개의 층으로 쌓여있는 모양인데, 그 중 가장 눈에 잘 보이는 위에서 두 번째 단에 아이유의 사진이 있다. 베이지색 니트를 입고 오른 손으로 턱을 괸 채 어딘가를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머지 네 사람이 들어있는 단의 색상이 대체로 어두운데 반해 아이유의 단은 밝아서 유독 더 그렇다.


그러면 이 영화는 아이유가 주연을 맡은 것일까?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유는 주연급도 아니었고, 심지어 영화 내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 초반 주인공 창석(연우진)이 카페에서 만난 여성으로 등장하는데, 처음에는 무슨 소개팅이라도 하는 줄 알았던 상대가 알고 보니 치매에 걸린 어머니였다는.... 이 장면을 끝으로 아이유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나중에 영화 설명을 보면 아이유는 ‘우정출연’이었다고 한다.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


영화는 전체가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으로 구성되어 있다. 몇 년 만에 귀국한 소설가 창석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치매에 걸린 자신의 어머니와 안면이 있는 사진작가와 출판사 담당자와 바텐더, 그리고 전화 속 전처까지. 그리고 감독은 이 과정을 꽤 분위기 있는 색깔로 묘사한다.


다만 그 만남과 헤어짐에 어떤 영화적, 그리고 서사적 의미가 있는지는 잘 와닿지 않는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있지만, 그 모든 이야기가 다 어떤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 않던가. 적어도 영화로 만들기 위해 이런 만남들을 모았다면, 그 안에 어떤 이야기를 담았어야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단지 파편적인 것만이 아니라, 어떤 일관된 흐름 안에 있어야 했고.


하지만 그게 보이지 않는다. 각각의 이야기가 그걸 보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놓고서도 뭘 말하려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뭔가 즐거워하는 관음증이 있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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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소멸 - 우리는 오늘 어떤 세계에 살고 있나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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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철학자 한병철의 책이다. 그다지 철학에 조예가 없는 나지만, 그래도 벌써 이 저자의 책을 몇 권쯤 읽어본 것 같다. 고전 철학자들처럼 뭔가 거대한 체계를 쌓거나 하지는 않지만, 현대인들이 익숙하게 마주하는 현상들을 철학적 언어로 설명하고 풀어내는 데 꽤 능력이 있는 저자다.


이번 책에서는 “디지털화”라는 주제를 다룬다. 기술발전이 계속되면서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디지털화되고 있다. 여기에 최근 몇 년 동안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팬데믹는 이런 경향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이제는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사람과 사람이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거의 모든 일상적인 일들을 다 할 수 있는 시대다.





이런 기술과 시대상의 변화는 우리 삶에 어떤 변화를 초래했을까? 저자는 디지털화가 세계를 탈사물화하고 탈신체화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0과 1의 숫자로 변환 가능한 시대에 더 이상 사물은 애초에 그것이 가지고 있었던 본래적 ‘가치’보다는 디지털 세계에서의 ‘쓰임’이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보면 이렇다. 사진이라는 게 있다. 그것이 처음 나왔을 때는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는 기계로 여겨질 정도로 신기한 물건이었다. 오래되어 빛바랜 사진은 그것이 처음 인화되었을 때와는 다른 또 다른 감상과 정취를 느끼게 만들어주는 사물이기도 하다. 사진작가들은 단순히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복사해 옮기는 것을 넘어서 그 안에 있는 무엇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진들, 주로 휴대폰으로 찍은 셀피들은 어떤가? 한 자리에서 수십, 수백 장씩 찍은 사진들은 단지 그 순간만을 위해 소비된다. 휴대폰 사진첩에 수천 장의 사진이 저장되어 있다고 해서, 어디 그걸 다시 되돌아보는 사람이 있던가? 그건 더 이상 사진이라는 하나의 독립된 사물이 아니라 그저 정보의 덩어리에 불과하게 되어버린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현대인들은 사물을 오직 스마트폰을 통해서 경험한다. 스마트폰을 건드리고 쓰다듬는 동작은 거의 예배와 맞먹는 몸짓(35)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스마트폰을 통해 경험된 세계는 실제 세계와는 다르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경험하는 건 실제의 사물이나 대상이 아니라, 오직 내가 원하는 것으로서의 사물(즉 나의 기호, 나 자신)일 뿐이다. 저자는 그래서 스마트폰이 “자폐적 대상들”과 비슷하다고도 말한다(46).


오늘날 사람들은 관계 역시 디지털로 이어가지만, 이런 방식은 결국 관계를 저해한다고 저자는 경고한다(84). 우리는 서로 접속해 있을 뿐, 실제로 만남을 갖지는 못한다. 한 때 온라인 소개팅이 유행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그런 관계는 관계라고 부를 수 없는 마주침에 불과하다. 디지털을 이용한 접속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강한 결속, 특히 서로를 향한 충성의 마음에 기반한 단단한 관계와는 전혀 다르다.


어쩌면 요새 일종의 밈처럼 떠도는 MZ세대의 극도의 이기주의적 성향은 이런 디지털 문화의 최종적 결말의 한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언제든 상대방을 차단할 수 있는 디지털 세계에 익숙한 이들에게, 이어폰을 끼고 사무실에서 일하거나, 내 스케쥴에 따라 관계를 오프할 수 있다는 생각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대답이지 않겠는가.


군데군데 눈에 와서 박히는 문장들이 제법 있다. 디지털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현실을 보며 불안을 느끼는 학자의 시선은 공감이 간다. 다만 이게 디지털화를 보는 유일한 시선은 아닐 수 있다는 건 기억해야 할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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