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역삼동 센터필드.

다들 뭘 하느라 불을 켜 놓은 걸까..


그나저나 오늘 날씨 정말 춥다.

귀가 떨어지는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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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버드
그레타 거윅 감독, 시얼샤 로넌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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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답답했던 시기.


십대. 사춘기를 지나고 자의식이 강해지고, 주변 사람들(특히 어른들)이 하는 말이 다 귀찮고, 하찮게 느껴지는 시기, 자신이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이 언제나 가장 현명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생각도 드는 그런 시기.


이 영화의 주인공 “레이디 버드”는 그런 고등학생이다.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은 그녀의 본명은 아니고, 부모님이 지어주신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이 있지만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을 “레이디 버드”라고 할 거라고 선언한다. 뭔가 잔뜩 불만이 있는 것 같은 그녀의 표정과 말투는 앞으로 진행될 영화가 어떤 분위기로 흘러갈지 살짝 보여준다.


영화 내내 주인공은 주변의 어른들(부모와 교사)에게 틱틱대고 불만을 터트린다. 하지만 또 그게 아주 엇나가겠다는 건 아니라서, 또 안심이 되긴 한다. 비록 금사빠라서 만나는 남자애마다 평생의 사랑을 만난 것처럼 다 줄 듯 연애를 하고, 그 나이 또래가 그렇듯 조금은 허영심도 가지고 있지만, “우리 애가 착하긴 해요.”


그리고 틱틱 댄다지만 은근 부모와의 관계도 그럭저럭 꾸려가고 있으니, 이 정도면 우당탕탕 그 답답했던 시기를 잘 넘어가고 있었다.





정말 막막한 시기.


사실 주인공 크리스틴이 처해 있는 상황은 정말로 조금 답답해 보이긴 하다. 아빠는 직장에서 구조조정으로 해고를 당했고, 엄마는 생계를 위해 매일처럼 직장에서 야간근무를 하고 있다. 하나 있는 오빠는 명문대를 졸업하고서도 무슨 이유 때문인지 여자친구와 함께 마트에서 일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고.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도 주인공이 아주 엇나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녀의 주변에 대화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엄격하기만 할 것 같은 가톨릭 계열의 고등학교에서는 줄리라는 친구가 있었고, 아빠는 늘 딸에게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힘이 되어주려고 한다. 그리고 늘 티격태격 대는 엄마와도 가끔 대화는 되고 있으니까.


역시 사람은 대화가 필요한 법이다. 사람을 지탱해주는 건 돈도 명예도 아니고, 결국 사람이다.





조금 덜 흔들렸으면.


그래도 아쉬운 건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주인공의 시행착오들이다. 또래들과의 사이에서 모든 정보를 얻고, 그렇게 얻은 부족한 정보를 바탕으로 선택하고 결정을 하니 시행착오가 나오는 건 당연할 수밖에. 뻔히 멍청한 선택을 하는 게 보이지만, 막상 그 상황 속에 들어가면 다른 길이 잘 보이지 않는 게 인생이다.


그렇다면 조금 더 경험을 해 본 사람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면 되는데, 그게 또 답답하게만 여겨지니...(결국 마지막엔 조언에서 크게 벗어나지도 않는데) 하지만 어쩌겠나, 이 또한 그 시절을 지나온 세대들이 갖는 우려인 거고, 그런 시행착오들을 온몸으로 맞부딪히는 것도 그 세대들의 특권일 것을.


수없이 흔들리면서도 결국 뿌리를 잘 박고 일어선 주인공에게 박수를 보내며, 그가 경험한 여러 새로운 모험들을 조금은 킥킥대면서 지켜볼 만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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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영화.


뮤지컬과 영화는 공통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보여주는 극이지만, 상영(혹은 공연)되는 장소라든지 이야기를 그려내는 방식이라든지 하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점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라면 아마도 ‘노래’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 노래는 매우 제한적으로 특정한 분위기를 내기 위해 배우들이 부르거나 한다면, 뮤지컬은 이야기 전개 자체의 중요한 축으로 노래를 사용한다.


또 하나 중요한 차이점은 무대다. 카메라를 자유자재로 움직여서 관객이 배우들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줄 수도 있는 영화와 달리, 뮤지컬은 아무리 잘 설계한다고 해도 관객과 무대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특징 때문에 관객들은 더욱 배우들의 노래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조금은 과장된 움직임과 노래들은 무대 위에 있을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때문에 이 둘이 합쳐졌을 때, 정확히는 영화 스크린 위에서 뮤지컬이 공연될 때 느끼는 이질감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이질감은 단지 어색한 ‘느낌’을 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도 어색함을 준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스크린 위에서 공연되는 뮤지컬을 즐기자는 마음으로 영화관에 앉았지만, 총을 맞고 죽어가면서도 이게 사랑일까를 노래하는 장면에서 피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모든 부분이 어색하기만 한 건 아니었고, 특히 여러 배우들이 등장해서 노래하는 몇몇 장면에서는 웅장함이 느껴지기도 했고, 설희 역의 김고은이 부르는 노래들은 유독 가슴을 움직인다. 그리고 아마 한 곡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인 조마리아 역을 맡은 나문희의 노래는 울렸다.





개그와 신파.


개인적으로 뮤지컬 원작을 보지 못해서, 얼마만큼을 영화로 옮겼는지, 어떤 부분이 삭제되거나 추가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뮤지컬에서 했던 것을 대부분 영화로 옮겨놨다는 가정 아래, 꼭 들어갔어야 했나 싶은 부분이 좀 보인다.


대표적으로 안중근과 함께 거사에 참여한 3인방을 사용하는 방식이 거슬린다. 억지 개그와 신파라는, 한국영화 특유의 문제로 지적되는 게 다 등장한다. 제일 어린 유동하는 마진주라는 인물을 만들어 연애를 하도록 만들고, 나머지 인물들은 뭔가 나사가 하나 빠진 것처럼 모자란 캐릭터로 묘사되어 긴장감을 깬다.


만약 이런 장면이 무대 위 뮤지컬에 있었다면 조금은 달랐을까 하는 생각도 살짝 들긴 했다. 사실 공연장에서는 아무리 집중을 한다고 해서 조금은 느슨해지는 지점이 있기 마련인데, 이런 부분에서는 그냥 별 생각 없이 넘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카메라를 통해 관객을 그 자리에 당겨놓을 수 있는 영화에서는 이게 좀 덜컹거리는 부분이다.





불타는 욱일기.


이야기는 중반까지 두 개의 장소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안중근과 그의 동료들이 거사를 계획하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설희가 이토 히로부미의 여자가 되어 그의 동선을 파악해 독립군에게 알려주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아마도 총독부에서 열렸던 연회에서 복수를 다짐하는 설희의 상상 속 노래 부분이었는데, 홀 중앙에 걸린 거대한 욱일기가 불에 타서 재가 되는 장며을 CG로 넣었더랬다. 명성황후를 모시던 궁녀였던 설희가 억울하게 죽은 황후의 복수를 위해 모든 걸 바쳐가며 공작을 하고 있다는 상황과 목 놓아 부르는 노래가 절묘하게 어울린다.


동양평화니, 대동아공영이니 하는 같잖은 구호를 외치며 수많은 사람들을 착취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깃발이 바로 욱일기였다. 진작 개소리꾼들과 함께 사라졌어야 할 그 깃발이 여전히 반성 없는 일본인들에 의해 휘날리고 있는 상황에서(그리고 그 깃발에 우리나라 군인들더러 경례를 하라고 명령하는 얼빠진 지휘관들이 있는 나라에서), 영화 속에서라도 정의가 실현되는 모습을 보는 게 통쾌했다.


아, 김고은이 은근 노래를 잘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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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 성차별, 사회적 불의, 경제적 불평등 따위에 대한 비난은

정전기가 튀듯 따끔하게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기, 행복 추구, 자긍심 갖기,

일과 가족의 적절한 균형 도모 등을 위한 여타의 방법론들 또한 넘쳐난다.

그러나 너무 많이 먹고 마시는, 영화나 TV를 너무 많이 보는, 문제와 관련하여

사람들의 양심을 찌르려는 예언자가 있다면,

그는 아마 조만간 강단을 내려와야 할지도 모른다.


- 제라드 리드, 『C. S. 루이스를 통해 본 일곱가지 치명적인 죄악과 도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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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초승달, 천년의 공존 -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극적인 초기 교류사
리처드 플레처 지음, 박흥식 외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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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그 중에서도 중세 서양사를 이해하려면 자연히 만나게 되는 것이 기독교와 이슬람교다. 두 종교 모두 아브라함에게서 그 정신적 뿌리를 찾고 있는(여기에 유대교까지 포함해 세 종교를 아브라함 계통 종교라고 분류하기도 한다)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실제 관계를 맺는 방식은 매우 미숙했다. 우리에게 익숙하게 남아있는 십자군이나 지하드가 그 대표적인 이미지고.


그러면 두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늘 그렇게 싸우기만 했을까? 이 책은 이슬람교가 시작된 7세기부터 양측이 세력이 동쪽으로는 오스만제국의 진출로 유럽이 위기감에 휩싸이고, 반면 서쪽으로는 레콩키스타의 완성으로 이슬람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물러나게 된 15세기까지의 약 9백 년 간의 이야기를 크게 훑어가며 다룬다.



사실 이 정도의 내용을 담자면 전체적으로 책의 볼륨이 상당히 두꺼워져야 할 텐데, 이 책은 생각만큼 두껍지 않다. 에필로그에 번역자 후기까지 합쳐도 280쪽이 안 되는 정도다. 하지만 책의 전체적인 구성은 꽤 짜임새가 있다. 이슬람의 발흥부터 시대의 흐름을 따라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양편의 상황을 오고가며 잘 서술하고 있다.


특히 서술의 방식에 있어서 마음에 들었던 점은, 한두 개의 사료에 근거해서 당시 시대상을 단정 짓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기록이 있다면 그 기록의 진위를 먼저 판별해야 하고, 그 기록이 담고 있는 사실이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사실인지도 가려야 한다. 또, 일회성을 갖는 사건인지, 아니면 저변에 두루 퍼져있던 관행인지도 알아야 하고.


저자는 자주, 자신이 인용하고 있는 기록이 그것을 남긴 당사자들만의 기록인지 좀 더 널리 퍼져있는 관행인지 분명치 않다고 덧붙인다. 이런 태도는 조금은 민감할 수 있는 이 책의 주제를 다루는 데도 좋은 쪽으로 작용한다. 서술은 최대한 중립적인 차원에서 조심스럽게 이루어지면서도, 중요한 포인트에서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앞서 언급했던 십자군과 지하드의 이미지가 워낙 강렬했던 탓인지, 많은 사람들은 이 두 종교가 언제나 서로를 적대적으로 대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그런 면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역사라는 건 대부분 중요한 정치적인 사건들, 군주들과 영주들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중심으로 기록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는 두 문화권 사이의 직간접적인 교류와 (때로는) 우호관계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는 황제 취임 축하선물로,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하룬 알 라쉬드로부터 코끼리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슬람 세력이 급속도로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로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당시 기독교 세계가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슬람 문화의 찬란한 발전은 기독교 국가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는데, 서로 대립하면서 싸워 온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상대보다 우위에 서기 위해 과학기술을 발전시켰고, 심지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도 배우기를 마다하지 않았지만, 반면 이슬람 세계에서는 그런 미개하고 이단적인 유럽으로부터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교류의 문을 닫아버렸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인쇄술로, 구텐베르크의 발명이후 50년 만에 유럽은 인쇄소를 갖춘 도시가 100개가 넘고 나온 출판물이 600만 부를 넘었지만, 오스만제국의 술탄은 인쇄술을 배우려는 시도 자체를 처벌하겠다는 포고령을 내림으로써 스스로 학문과 사상이 발전할 길을 막아버렸다.





책의 말미에, 왜 그렇게 두 문화권은 서로를 경계하고 적대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저자가 답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만날 때 갖게 되는 태도에는 이전에 겪었던 경험이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유럽은 이슬람 세계를 정복자로서 처음 대면했었고, 자연히 그들을 깎아내리고 적대적으로 대하는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반면 무슬림들은 자신들이 신의 최종적인 선택을 받았다는 자부심에 충만해서, 기독교인들을 낮춰보는 오만한 태도를 갖고 있었다. 사실 당시 그들이 만났던 유럽은 조각조각 분열되어 있었기에, 뭔가 배울 만한 게 없었다고 여길 만도 했고.


결국 서로에 대한 총체적인 지식과 이해의 부족이 오랜 적대관계를 낳았다는 말인데, 그게 전부는 아니었을 지라도 분명 일리가 있는 지적인 것 같다. 교통과 통신이 이전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이해가 부족하다는 건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언제쯤 이런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게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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