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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으로 중요하다는 잘못된 가정 하에

경제적 평등에 매달릴수록

사람들은 자기 고유의 이해관계와 목적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소유한 화폐량에 의거해

특정 수준의 소득이나 부에 만족하게 된다.


- 해리 G. 프랭크퍼트, 『평등은 없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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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버씨의 죽음 - 갈아넣고 쥐어짜고 태우는 일터는 어떻게 사회적 살인의 장소가 되는가
김영선 지음 / 오월의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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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흥미롭다. ‘존버’라는 비속어가 정면에 나오는 게 조금 불편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보다 더 불편한 건 이 책에 실린 수많은 과로사 사례들과 열악한 노동조건들, 그리고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보다는 악화시키는 데 여념이 없는 2022년 우리나라의 집권세력이다.


조금은 말랑할 것 같은 이 책은 사실 사회학 연구서다. 과로라는 주제를 가지고 저자는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다양한 영역에서의 사례들을 들며 스케치 한다. 특히 최근 코로나라는 비상상황이 일어나면서 안 그래도 열악했던 노동조건은 더욱 악화되었지만, 비단 문제는 근래에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물질중심적 사고는 비용을 줄이고,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을 선으로 여기는 체제다. 이 때 줄일 수 있는 비용 중 시설과 관련된 것은 한계가 있고, 결국 인건비를 줄이는 식으로(필요한 인력보다 적은 수의 직원으로 일을 하는 것도 포함된다) 과로의 구조화가 일어나게 된다.


또, 기술의 발전으로 플랫폼 노동이 늘어나는 것도 이런 상황을 악화시키는 게 한 몫을 한다. 플랫폼 노동자들은 법적으로 합당한 노동기준을 요구할 수 없는 개인사업자로 취급되고, 노동자들 사이의 연대감이나 조직적인 행동도 어렵다. 꼭 같지는 않지만, 최근 화물노조 파업을 두고 정부가 보인 조치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나는데, 분명 특정한 회사에 소속되어서 운송을 하는 대가로 대금을 지급받는 그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사업자이기에 애초에 노조를 구성할수도, 파업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어디까지나 법적으로는 그랬다).






이런 구조화된 악조건들로 인해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지만, 이를 막기 위한 제도 마련은 더디기만 하다. 친 재벌 정당의 집요한 반대와 발목잡기로 인해 상당부분 누그러진 형태로 입법된 주당 52시간 노동제와 중대재해처벌법 같은 법률이 지난 정부에서 만들어졌지만 온갖 빠져나갈 구멍투성이이고, 그나마 정권이 바뀐 후에는 간신히 만들어둔 제도들도 쓰레기통에 처박히거나 개정될 위기에 처해있다.


사실 이런 규정들은 무슨 한국에만 있는 특별히 반 기업적 법도 아니다. 입만 열면 국격 운운하며 그 일원이 되고 싶어 안달인 선진국들에서는 거의 대부분 갖춰진 최소한의 장치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쪽에서는 위보다는 아래를 바라보는 이중적 태도를 지닌 이들은 노동조건을 개선하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위기감을 조성하기 바쁘다.


책 후반에는 흥미로운 통계가 하나 실려 있는데, 세계적으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 주된 원인은 앞서 언급된 것과 같은 복잡한 이유들 때문이고(우리나라는 지난 몇 년 동안 이루어진 법 개정 때문에 소폭 줄었다고 하는데, 이런 추세가 계속 이어질지는 알 수가 없다).


심지어 이렇게 늘어난 노동시간의 질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도 문제다.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삶이 좀 더 편해질 거라는 낭만적 예상과 달리, 우리는 여전히 유토피아를 향해 한 발도 제대로 내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대책은 역시 좀 더 많은 인력을 확충하는 것이다. 인력이 부족하니 쉴 새 없이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계속 발생하는 거니까. 문제는 여기에 투입되어야 하는 인건비인데, 기업 운영에 있어서 대표적으로 줄어들지 않는 부분인 바로 임금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강요할 수만은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무슨 소련 시절 계획경제나 중국의 대약진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정부에서 개별 기업에 인력을 더 뽑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정도만 가능한데, 이 정도로 해결될 문제는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일의 양을 줄이거나 속도를 늦추는 방식이 남은 대안일 것 같은데, 기업 운영자들의 사고엔 이런 선택지가 아예 배제되어 있는 것 같다. 어쩌자는 건지.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주제와 관련된 여러 내용들이 잔뜩 담겨 있는 책인데, 그 구성이 썩 체계적으로 잘 되어있다는 느낌은 주지 못한다. 다양한 사례 모음집 사이에 저자의 분석이 살짝살짝 비추는 정도. 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이나 독창적 해석 같은 것도 부족하다. 다만 우리가 뉴스 등을 통해 산발적으로 접하던 문제를 이렇게 한 권에 모아서 읽어보는 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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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
김근주 지음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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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대부분의 종교인들에게 그들의 경전이 중요하겠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은 그 중에서도 더 특별하다. 기독교와, 그 앞선 시기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의 삶에 있어서도 성경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흔히 볼 수 있었던 신상과 거대한 신전 같은, 시각적인 것들을 배제한 채 철저하게 말씀 중심의 신앙을 강조해 온 전통이기 때문이다(물론 실제 역사에서는 이 길에서 벗어난 적이 수없이 많지만).


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성경을 제대로 읽어내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쓰인 원어에 대한 장벽이나 좋은 번역들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지만, 문제는 읽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 우리는 성경은 우리 자신이 처한 상황과 배경의 영향이 지나치게 강한 경향이 있다. 쉽게 말해 성경의 내용을 내 멋대로 읽어낸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성경을 운세뽑기집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다. 본문에도 나오지만, 내가 읽는 부분에 ‘가라’는 말이 있으면 당장 지금 하고 있는(혹은 하려고 하는) 일을 계속 진행하라는 뜻으로 읽어내는 식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어도 괜찮은 걸까?



이 책의 제목에서 사실 책에서 하려고 하는 주제를 읽어낼 수 있다.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 나 중심, 내가 원하는 걸 찾아내기 위한 성경 읽기가 아니라, 성경이 원래 하고 있는 말이 무엇인지에 집중하면서 읽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책에는 이를 위한 다양한 조언들이 담겨 있다.


우선은 잘못된 성경 읽기에 관한 다양한 예들이 눈에 들어온다. 앞서 언급한 운세뽑기식 읽기만이 아니라, 공동체를 잊어버린 채 개인적 차원(나아가 개인윤리 차원)에서만 성경의 내용을 읽어가거나, 잘못된 ‘영적 해석’들이 난무하는 현상들, 그리고 무엇보다 근시안적인 문자적 해석 같은 것들이 그 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런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들이 제안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성경을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경이 원래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것이 쓰일 당시의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배경 위에서 본문의 내적 논리를 충실하게 밝히는 읽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저자의 주장에 전반적으로 동의한다. 오늘날 교회가 영향력을 잃어버린 것은, 그 영향력의 원천인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런 불완전한 삶은 역시 불완전한 읽기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게 맞다.


다만 본문에 대한 비판적인 읽기 또한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고려한 읽기를 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지 지금 내가 서 있는 상황의 영향도 들어갈 수밖에 없을 테니까.


책에서 저자는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입각한 노예제 옹호를 대표적인 오류의 예로 지목하고 있지만, 노예제가 문제가 있다는 사고 자체가 현대적인 관점이지 않느냐는 비판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 본문의 원래 의미가 무엇인지를 확정해 나가는 과정에서도 어차피 우리는 지금의 시대와 문화 속에서 정상, 혹은 옳은 것이라는 전제로 본문을 바라보게 될 것도 같고.


물론 그렇다고 이런 작업이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완전하지는 않아도,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포함된 해석학적 공동체를 꼽을 수 있다. 이건 특정한 사회나 조직의 관점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인데, 문제는 신학의 경우 “자기들만의 해석학적 공동체”가 강해서 그 안에서만 대화가 이루어진다는 점..(아.. 너무 비관적인가)



성경을 읽기 전, 어떤 마음으로 읽어야 할지를 정리해 볼 수 있는 책. 그리 두껍지도 않고, 내용도 편안하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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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변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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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세우스의 배”라는 이름의 형이상학적 질문이 있다. 그리스 신화 속 영웅인 테세우스가 크레타섬에 있었다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수 미노타우르스를 처치하고 아테네로 돌아올 때 타고 온 배가 그 주인공인데, 아테네 사람들은 그 배를 오랫동안 보존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무로 만든 배였던 지라, 시간이 지나면서 썩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이 부분을 새로운 판자로 갈아 끼우면서 보존을 했다.


물론 처음 한두 개 판자를 갈아 끼운 것으로는 큰 차이가 없을 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계속 썩은 부분을 새것으로 교체하다보면, 어느 순간 처음 배의 조각은 하나도 남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면 과언 이 배는 ‘테세우스의 배’일까?


이 질문의 핵심은 부분이 변했을 때 전체가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가에 있다. 그리고 금세 느꼈겠지만, 이 질문의 답은 결코 쉽지 않다. 어느 정도의 ‘부분’을 교체하는 것까지 전체가 남아 있는 거라고 용납할 수 있을까?



이 재미있는 생각에는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존재하는데, 그 중 하나가 이 소설에 나오는 것 같은 인체의 예시다. 어떤 사람이 사고나 질병으로 신체의 일부분, 예를 들어 장기가 손상되었다고 하자. 그래서 그 부위를 이식받았다면 그 사람은 원래의 그 사람과 동일한 사람일까? 물론 여기에 다양한 감상적인 대답이 나올 수도 있지만, 만약 그 이식받은 부위가 뇌라면 어떨까?


뇌를 단순히 유기적 기계 정도로 여기는 현대 뇌과학계에서 이 질문은 그리 어렵지 않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소설 속 수술을 집도한 도겐 박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주인공을 설득하려 한다. 그는 우연히 찾아간 부동산 사무소에서 일어난 총기사고로 뇌의 일부분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지만, 기증자의 뇌 부위를 이식함으로써 간신히 살아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주인공 준이치는 조금씩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자신에게서 수술 전과 다른 모습들이 하나둘 발견되기 시작했고, 그런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체의 일부를 이식받은 후에도 원래의 나와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도 의식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의식이 달라진다면, 그래도 나는 나일까?


사실 이 부분은 소설적 재미를 부여하기 위한 요소로, 뇌의 일부를 이식받았더니, 그 뇌를 제공한 사람의 성격과 감정이 그대로 옮겨진다는 조금은 통속적인 스토리로 이어진다. 개인적으로는 이 때문에 애초의 형이상학적 질문이 조금은 단순하게 변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런 노골적 장치가 없었다면, 평소에 그런 철학적 질문을 그토록 오래 붙잡고 있지는 않았을 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결국 작품은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의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인가 하는 다분히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사실 ‘영혼’이라는 고전적인 대답이 있다면 간단하겠지만, 오히려 그걸 부정하는 유물론적 과학에서는 대답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기도 하다.



소설의 결말은 매우 파괴적이다.(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주인공이 받았던 뇌 이식 수술의 배경에 관한 설명도 좀 뻔했고, 뭔가 반전이 있지 않을까 싶은 기대가 깨진 것도 아쉽다. 다만 급속도로 발전해 가고 있는 의학기술은 어쩌면 곧 이런 뇌 이식을 실제로 가능하게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든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우리는 여기서 묻는 질문을 좀 더 진지하게 해야 할 것이다.(물론 그 전에 기후위기가 심해져서 모두 끝날 지도...)


확실히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금방, 재미있게 읽힌다. 이 책도 단숨에 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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