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느낌이 오는가?
책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힘을 빼고 생각을 내려놓으면 된다.
책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어야지’가 아니라
책을 책 자체로 이야기를 이야기 자체로 즐기는 태도,
그것이 필요하다.
- 최성진, 엄지, 『책을 싫어하는 당신에게』 중에서
제목(부제가 ‘십자가 사건의 역사적 재구성’이다)에서 알 수 있듯,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전후로 한(특히 이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짧은 시간들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작은 책이다. 책 사이즈 자체도 작고, 부록을 빼면 150여 페이지 정도밖에 안 되니 정말 ‘작은’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역사적 재구성이라지만 정확히 말하면 본문의 재구성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남아 있는 자료들에 근거한 것이니까. 때문에 책의 첫머리에는 이 주제에 관해 참고할 수 있는 다양한 사료들(성경과 그 외 본문들)을 검토하고, 가장 확실한 사실들―예수라는 인물이 로마 총독인 빌라도의 명령으로 십자가형을 받아 죽게 되었다는―을 언급한 후, 좀 더 세부적인 사항들을 탐구해 나간다.
전반적으로 저자가 취하고 있는 관점은 본문비평에 의한 역사적 재구성인 듯하다. 물론 이 방식이 어떤 고대의 문헌이 언제쯤 작성되었는지, 어떤 선행 문헌들의 영향을 받았는지 하는 부분에 있어서 일정부분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이 비평방식은 어디까지나 잠재적인 것이지 결정적인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한 사람이 다양한 자리에서 다양한 필체와 용어로 다르게 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때문인지, 이들의 결론에서 연구의 대상이 되는 문서는 거의 항상 여러 개인, 혹은 그룹들의 편집물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마치 고대의 위키백과처럼. 저마다 자신이 얼마나 작은 증거로부터 대단한 차이를 발견했는지를 경쟁한 필연적인 결과다. 마태와 누가는 물론, 셰익스피어도 여러 명이다. 물론 최근에는 그들이 가정하고 있는 여러 명의 편집자들을 그냥 ‘마태’라고 부르자는 식으로 논의를 이어가고는 있지만, 거기에 깔려 있는 전제는 변한 게 없다.
예컨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이, 요한의 특별한 신학적 관점을 반영한 것이라는 서술은 그럼직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별다른 설명 없이(아마도 이 작은 책에 관련 논의를 모두 담기 어려웠겠지만, 담았다고 해도 별반 다를 것 같지 않다) 소위 가상칠언은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라고 단언하는 것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생각만큼 튼튼하지 않다.
본문들 사이의 조화 시도 일체를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는 태도도 아쉽다. 물론 일부 조화 시도는 무리한 주장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조화시도가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지 않은가. 기본적으로 ‘경전’이나 그와 비슷한 문서에 대한 고대인들의 존중심을 생각한다면 인터넷 문서 수정하듯 그들이 그 내용을 간단하게 수정했다고 보기는 오히려 어렵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본문비평 자체를 거부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본문 자체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작은 차이들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 이유에 관해 탐구하는 자세는 필요한 부분이니까. 결과적으로 ‘관점’의 차이를 감안하고 본다면, 썩 괜찮은 역사적 재구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보면 애초에 이 책만이 갖는 매력이 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몇 개의 역사적 정보들을 넣은 것을 제외하면, 익히 알려진 수난 이야기를 정리해 놓은 것뿐이니까. 물론 그걸 간단히 읽을 수 있도록 짧게 정리해놓았다는 점을 인정할 수는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