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클의 소년들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직 인종차별이 법적으로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던 1900년대 중반이야기의 주인공인 엘우드는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고등학생이었다밖에서는 마틴 루터 킹이 이끄는 흑인인권운동이 한창 시끄러웠던 당시작은 시골 마을에 살고 있던 엘우드는 자신이 겪고 있는 (노골적이거나 은폐되어 있는차별적 일들을 점점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졸업이 다가올 즈음학생들의 입장에서 바라볼 줄 아는 선생 힐의 추천으로 대학과정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엘우드그러나 학교로 가기 위해 얻어 탄 자동차가 하필 도난당한 차였고제대로 된 재판 없이 소년 구금 시설에 수용되고 만다학교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감화원에서는 온갖 비인권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고그 안에서 이런저런 충돌을 겪으면서 엘우드의 생각은 점점 더 무르익어간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고가는 방식으로 쓰였다현재의 엘우드가 과거의 엘우드를 회상하는 식감화원이 있던 저리에서 발견된 수십 구의 시신들로 인해그곳에서 벌어졌던 만행이 사회에 드러나게 된 건 그가 그곳에 있었던 때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후다른 말로 하면 너무 늦은 때였다.



인종차별아니 흑인혐오가 보편적이었던 그 음침한 시절최소한의 타인의 시선조차 의식하지 않을 수 있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을 읽어나가는 것 자체가 괴로운 일이었다그건 후기에서 이 책에 실려 있는 이야기가 (다행이도실화가 아니라는 걸 작가가 밝힌 후에도 마찬가지였다비록 니클의 감화원이 실재하지는 않았더라도우리 곁에는 그와 비슷한 기관들경험들이 너무나 많으니까.


가깝게는 우리나라에도 형제복지원 사건이라든지도가니 사건 등 장애인이나 힘없는 아동청소년들을 향한 착취와 폭력이 배어있는 과거사들이 하나둘 드러나고 있다뿐만 아니라 직장 내 갑질이라든지간호사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는 태움 같은 악습들집단 따돌림 같은 이야기들이 익숙한 상황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기도 하고.


이 작품이 단순히 그런 현실 속 문제를 투영해 고발하는 르포 형식으로만 진행되었다면 감동은 반감되었을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작가는 이 주제를 훌륭한 솜씨로 그려낸다니클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하나씩 이어지면서 점점 그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고마지막 부분에는 반전까지 삽입되어서 조금은 어벙벙한 상태로 결말을 맞는다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전체적으로 무슨 미국 고전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든다.



이런 끔찍한 일이 무슨 수백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내가 태어나기 고작 수십 년 전(태어난 후 살아온 시간보다 더 적은일들이라는 걸 자각하게 될 때마다 소름이 끼친다그리고 여전히 그 문제는 다 해결되지 않은 것 같다는 게 괴롭고.


소설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웠던 부분은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흑인 소년들)이 이런 구조적인 억압과 차별에 익숙해져 가는 모습이었다혼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대한 문제 앞에서 포기하고 위축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지도 모르겠다그렇게 수많은 가능성들이 꺾이고 묻혀버리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을까꽉 막힌 조직과 분위기는 그 사회를 질식시켜버리고 만다.


미국 사회의 어제와 오늘을 관통하는 가장 큰 문제를 잘 드러내주는 작품퓰리쳐상은 이런 작품이 받는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린이 동지 - 인도 마오쩌뚱주의 운동과 아동병사 교차하는 아시아 5
조지 커너스 지음, 권루시안 옮김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세계 2위의 인구대국인 인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마오주의 무장투쟁에 관한 내요을 담고 있다마오주의란 중국공산당의 지도자였던 마오쩌둥(모택동)의 혁명사상을 가리키는 것으로농민들을 혁명의 주체로 삼는다는 특징이 있다.


흔히 공산주의 하면 마르크스만 떠올리지만은근 이 마오주의에 기초한 공산주의를 채택한 나라가 많다특히 농업 중심의 저개발 국가의 경우 농민을 혁명주체로 꼽는 마오주의가 좀 더 잘 맞았기 때문.


책은 그 중에서도 어린이 동지라고 불리는 아동병사에 집중한다책의 부제인 인도 마오쩌뚱주의 운동과 아동병사는 이런 성격을 잘 보여준다모든 지역과 종류의 아동병사가 아니라 인토의 마오주의 반군 속 아동병사만이 이 책의 연구 대상이다저자는 실제 연구를 통해 이들에 관한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요새도 가끔 해외 뉴스를 보다보면반군세력 가운데 여전히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채 총을 들고 있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그럴 때면 일반적으로 그런 아이들이 납치되어 그런 일을 하고 있다거나아니면 애초에 폭력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식으로 해석할 때가 많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가 직접 인도의 반군들 사이에 들어가 실제 아동병사를 인터뷰하며 연구한 결과 실제는 달랐다는 것무엇보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했고언제든 원한다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심지어 어떤 반군지도자는 열사병에 걸릴 수 있다는 이유로 나이 어린 어린이 동지를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적어도 인도의 이 지역에서만큼은 납치나 강제노동성착취 같은 일들이 벌어지지는 않는다는 말이다저자가 이 책에서 아동병사라는 용어보다 어린이 동지(comrades)’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이런 아동들의 주체적 행동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저자는 이 아동들이 반정부 운동에 참여하게 된 배경을 추적한다인도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주의의 형태인 카스트제도의 최하단부에 위치한 달리트’ 문제가 있었다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온갖 경제적정치적 착취와 억압을 받고 있던 이들이심지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공권력에 의해 삶의 터전으로부터 쫓겨나면서 이런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그들의 투쟁은 어쩌면 살기 위한 하나의 선택이었다.


물론 이 투쟁에 합류를 결정한 아동들(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도 있다)이 다들 이런 정치적 현실을 인식하거나투쟁의 이념에 정통해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일부는 폭력적인 부모를 피해서혹은 원치 않는 결혼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또 구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기 위해(실제로 이 반정부운동 공동체 안에서는 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도 이뤄지고 있다합류했다저자는 이 또한 자기표현과 평등이라는 가치를 위한 발걸음이라고 해석한다.


요컨대 저자는 인도의 이 아동 병사들은 결코 강제로 동원되지 않았으며나름의 주체적 판단에 의해 마오주의 운동에 참여했고그 안에서도 합리적인 대우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고 말한다그리고 여기에서 그들을 피해자나 영웅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교정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사실 책에서 좀 더 눈에 들어오는 건 여전히 남아있는 카스트 제도와 이 불치병을 해결할 의지조차 없는 인도 사회의 정치 엘리트들의 한심함이다물론 그게 인도의 정치 엘리트집단만의 문제는 아니지만어른들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결국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게 된 셈인데여기에 그 아이들이 강제로 동원되었는지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는지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온갖 악습을 피할 수 있는 곳이 그곳뿐이라면 그건 사실상 강요된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책은 마오주의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사실 본토인 중국에서조차 폐기된 사상일 정도로 그 한계가 분명한 생각이기 때문그래도 농민 중심의 혁명 사상이라는 특징 때문에 여전히 힘을 발휘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개인적으론 그 사상은 뭔가를 무너뜨리는 데는 효과가 있으나 세우는 데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다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형적인 엑소시즘 장르물.

영화는 구마의식을 행하고 있는 한 신부(배성우)의 모습으로 시작한다하지만 방 안에서 들리는 괴성에 문밖에 있던 어머니가 달려 들어오면서 의식은 실패하고결국 악마에 사로잡힌 소녀는 끔찍하게 죽음을 맞는다.


그 뒤 실의에 빠져 있는 신부의 형 강구(성동일가족이 한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진다이사 온 직후부터 이상하고 끔찍한 일들이 발생하고가족 중 한 명과 꼭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나머지 식구들을 위협하며 나선다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사건의 배경에 초자연적인 일이 있음을 짐작한 가족은 강구의 동생인 신부 중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그렇게 벌어지는 엑소시즘 한 판이 영화 중후반부의 스토리.


사실 영화 자체는 그리 새로운 게 없다전형적인 엑소시즘 장르 공식에 충실한데다가의식의 절차나 방식에 특별히 신경을 쓰는 것 같지도 않았고초반의 희생자와 그로 인해 실의에 빠진 주인공다시 한 번 기회를 얻어 성공한다는 이야기까지.


그렇게 치면 연애물이니 법정물이니 하는 장르물은 다 같다고도 할 수 있지만중요한 건 역시 디테일이 아니겠는가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라든지이런 영화 같은 경우 엑소시즘에 동원되는 색다른 절차라든지그것도 아니라면 악마의 기발한 등장이라든지 하는이 중에서는 세 번째에 좀 힘을 기울인 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딱히 인상적인지는 않았다.






라틴어는 언제부터 주문이 되었을까

이런 영화를 보면 늘 나오는 게 신부들이 외우는 무슨 주문 같은 말들이다대개 라틴어인데내 짧은 라틴어 지식으로 봐도 금세 무슨 뜻인지 추측할 만한 간단한 성경어구혹은 신학 용어들일 뿐이다그런데 또 좀 강한 느낌의 발음에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을 연속해서 내뱉으면 그게 뭔가 있어 보이나 보다좀처럼 이런 류의 영화에서 라틴어 주문이 빠지지 않는 걸 보면.(악마가 라틴어만 알아듣는다던가..)


문득 언제부터 라틴어가 이런 식의 주문처럼 들리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물론 로망스어와 상당히 거리가 먼 동양 쪽 언어사용자들에겐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기도 하지만서양 쪽에서도 비슷한 느낌이다지금은 그런 라틴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사라졌지만어쨌든 상당수의 언어의 고대형태가 거기서 나왔으니좀 옛스러운 느낌을 주나보다.





고대 라틴어는 로마 제국의 확장과 함께 지중해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갔지만중세로 들어오면서 그 영역은 게르만족이라든지(중서부 유럽), 아랍인들(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 슬라브족을 비롯한 동방에서 온 유목민족의 후예들(동유럽등이 나타나면서 사용지역이 위축되었다그나마 교회의 예배 언어로 유지되어왔기에 오늘날까지 남았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


문제는 그렇게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과 교회 예배에서 쓰는 말이 달라지면서당장 글도 모르는 일반인들은 그저 예배 시간에 알 수 없는 말로 주문을 외우는 성직자들을 구경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아마 이 때문에 라틴어가 뭔가 신비한 느낌을 주는 주문 언어처럼 여겨지게 된 건 아니었을까 싶다어쩌면 우리가 이런 영화 속 라틴어 주문과 명령들을 들으며 느끼는 감정이 중세 일반인들이 교회에 갔을 때 느꼈던 것과 유사할지도.



주연을 맡은 배성우 배우의 고생이 썩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지는 못했던 영화. 우선은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있어야 했는데, 악마가 왜 돌아다니는지, 하필 다른 사람들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뭔지, 그래서 오래된 스토브 안으로 끌려들어간 둘째는 어떻게 됐는지, 이 가족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처방 - 불안과 고통에 대처하는 철학의 지혜
존 셀라스 지음, 신소희 옮김 / 복복서가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피쿠로스주의라고 하면흔히 쾌락주의로 번역된다왠지 어감에서 뭔가 흥청망청 즐기고낭비하고과시하는 모습이 떠오른다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존 셀라는 이게 큰 오해라고 말한다에피쿠로스는 무절제한 쾌락을 즐기라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분류한다. (1) 먹는 행위와 같은 동적인 육체적 쾌락, (2) 배고프지 않은 상태와 같은 정적인 육체적 쾌락, (3) 친구들과의 즐거운 대화와 같은 동적인 정신적 쾌락, (4)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상태와 같은 정적인 정신적 쾌락이 중 에피쿠로스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네 번째 유형의 쾌락이었다참으로 만족스러워서 어떤 걱정이나 불안도 느껴지지 않는 정적인 정신적 쾌락이걸 아타락시아라고 불렀다.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얻을 수 있는 동적인 쾌락보다 어떤 상태에 이르렀을 때 얻을 수 있는 정적인 쾌락이 좀 더 근본적인 쾌락이라고 보았다예를 들면 뭔가를 먹어야 느끼는 만족감 같은 쾌락보다배가 고프지 않아 편안함을 느끼는 쾌락이 좀 더 근본적이라는 것결국 우리가 뭔가를 먹는 이유는 배고프지 않기 위해서라는 논리다꼭 뭔가를 먹거나 소유하거나 하는 식의 물질적인 쾌락 말고도정신적인 차원에서도 이 논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또 하나그는 인간이 육체적 고통을 썩 잘 견뎌낼 수 있다고 말한다문제는 일어날 지도 확실치 않은 미래의 육체적 고통을 염려하느라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다는 부분이다이런 차원에서 그는 대부분의 고통이 자신이 자초한 일이라고도 말한다그렇다면 역으로 해결책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문제가 우리 마음에서 시작된다면그 마음을 바꾸면 평안을 얻을 수 있다.



언뜻 불교의 가르침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준다물론 모든 종류의 정념을 버리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불교 쪽이 (그 가능성을 제쳐두고서라도좀 더 극단적으로 보이긴 하다에피쿠로스는 뭔가에 대한 욕구 자체를 악한 것으로 보지는 않으니까비싸고 부드럽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먹는 것도 문제는 아니다다만 매번 그런 것을 먹고자 버둥거리다보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는 정도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만사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대답이 정말 해결책인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이런 점은 죽음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여실히 드러나는데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은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죽고 나면 어차피 고통을 느끼지 못할 텐데 뭐가 걱정이냐는 투다이쯤 되면그가 정말 고통을 이해하고 있는지 되묻고 싶을 정도.


그러나 인간이 겪는 많은 고통이 결국 욕심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그의 지적을 부정할 수는 없을 듯하다이 욕망의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오지 못한다면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정신적 쾌락을 강조하는 에피쿠로스가 친구의 중요성을 말하는 부분도 인상적이다최상의 정신적 즐거움과 안정감편안함은 역시 소중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경험할 수 있는 즐거움이다끝없는 경쟁 아래서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거나 밟고 더 높은 데로만 올라가려고 하는 이들은 절대로 누릴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에피쿠로스 철학을 알기 쉽게 잘 설명하는 책이다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미움받을 용기’ 같은 종류의 심리학과도 잘 맞을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