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줄거리 。。。。。。。  

 

    1978년 부산의 한 국민학교에서 은주라는 이름의 여학생 한 명이 납치되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유괴범에게서는 전화 한 통 오지 않았고, 덕분에 경찰의 수사는 지지부진. 아이의 엄마는 점집까지 전전하지만 모두들 아이가 죽었을 것이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단 한 명 김중산(유해진)을 제외하고.

 

     사주에 ()’이 있는 사람이 수사에 나서야 아이가 살 것이라는 중산의 말에 따라 은주의 부모는 공길용(김윤석)에게 사건을 맡기기를 원했고, 제법 사는 집 부모의 요청이기 때문인지 윗선에서도 그렇게 조치가 된다.

 

     그렇게 유괴된 아이를 찾기 위한 형사와 도사의 협력이 시작되는가 싶지만, 어디 일면식도 없는 두 사람에게 그게 영화처럼 쉬운 일이던가.

 

 

 

2. 감상평 。。。。。。。   

 

     실화를 바탕으로 한 수사물. 하지만 배경이 70년대 말인 관계로, 현대식 수사기법이 등장할 거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그런 걸 원하면 CSI 시리즈를 보는 게 낫고..) 영화의 포인트는 형사와 도사라는, 쉽게 조합이 되지 않는 팀이 꾸려지고 (, 이쪽도 비슷한 콘셉트의 미드가 있었던가), 그들이 만들어가는 익숙하지 않음의 상태에서 뭔가를 이끌어 내려고 하는 데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의도가 작품 안에 잘 드러난 것 같지가 않다. 우선 두 사람이 맡고 있는 캐릭터의 성격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김윤석이 맡은 공형사 역은 욱하면 위아래 가리지 않고 할 말을 내뱉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규정준수의 화신이거나 의협심으로 똘똘 뭉친 것은 아니다. 잔머리를 굴리는 타입도 아니라서, 그의 수사를 보며 치밀하다는 느낌은 도무지 들지 않는다. 오랜만에 웃음기 싹 뺀 모습으로 등장한 유해진 역시 부적 몇 장 그리고 꿈 꾼 것 말고는 도사로서의 면모나 활약하는 장면이 그다지 보이지도 않고..

 

     캐릭터를 살리려면 인물들을 좀 더 과장되게 그렸어야 했지만, 아무래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다보니 내부적으로 좀 다른 생각을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아이가 유괴되었는데 개그 치는 도사나 지나치게 방방 뛰는 형사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수사물을 보는데, 범인의 정체가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상황까지 이르면 확실히 좀 아쉽다는 느낌이 든다.

 

 

 

​     오히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영화 종반이었다. 사건 해결 후 논공행상을 하는 과정에서의 조작과 거짓 부분인데, 시간으로 보면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사건 해결보다 더 흥미로울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경찰 조직 안의 알력과 배타성, 그리고 고생한 주인공이 물 먹는 장면은 모처럼 감정적 동요를 일으켰으니까.

 

    본편에서 잘 느껴지지 않던 두 캐릭터의 케미스트리가 살짝 느껴지기까지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아이는 돌아왔고, 사건은 종결됐고, 실화를 표방한 이상 없는 일을 과하게 만들어 내기도 힘든 것을..

 

    이래저래 흥행은 쉽지 않을 듯. 뭐 그래도 지루한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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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먼문명 - 별과 우주를 사랑한 지동설의 시대
박용숙 지음 / 소동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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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동서양의 방대한 유물 자료들을 수집한 저자는 샤먼문화가 고대 동서양에 걸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뭐 여기까지는 일반적으로도 충분히 인정되는 설명이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한두 발 더 나간다.

 

     우선 이 책의 제목처럼 샤먼문화가 단지 문화적 양상을 넘어서 (상당한 정도의 교리적 체계 가지고 있는) 하나의 문명을 형성했으며, 여기에는 상당히 과학적인교리들(지동설이라든지 별자리의 움직임을 반영한 무구라든지..)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몇 발 뜀뛰기를 시작하더니 동서양의 고대문명을 아예 사면문명의 발명품 정도로 이해하려는 시각까지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엔 저자의 전작 샤먼 제국에서 주장했던 시각 - 동서양 역사의 뒤섞어 하나의 문명(사실 이 책에선 그냥 하나의 나라로까지 만들어버리긴 했다.)으로 묶어버리려는 까지 살짝 엿보인다. 결국 태초에 샤먼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

 

 

2. 감상평 。。。。。。。

 

     사실과 진실을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후자가 실제로 있었던 일 그 자체를 가리킨다면, 전자는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틀 안에서의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사실을 통해서 진실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는 필연적으로 나의 해석(그리고 선입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게 역사탐구에는 종종 심각한 방해가 되기도 한다는 걸 이 책의 저자인 박용숙 전 교수는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오늘날 랑케식의 실증주의적, 나아가 있는 그대로를 기술하는 것이라는 관점은 철지난 역사관이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무한정 창의적인 해석을 내놓는 게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

 

     흥미롭게도 이 책은 과학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고대 샤먼들이 과학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저자 자신은 물론 출판사의 책소개에도 이 책이 과학적탐구를 담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이르는 말이다. 역사가 과학적으로 탐구되는 완전히 객관적인 무엇이라고 생각했던 랑케의 의식을 반영하는 걸까? 그런데 책의 내용은 그와는 반대이니 아이러니할 수밖에..

 

 

     전작에서도 반복적으로 사용되던 증거였던 발음상의 유사성은, 이번 책에서도 주요한 증거로 제시된다. 예컨대 저자는 동양에서 머리에 쓰는 은 무속의 굿과 연관이 되고, 이는 다시 영어의 ‘god’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241). 물론 이건 부여의 대소왕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과 동일인물이라는 전작의 설명 정도는 아니나, 과연 이걸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

 

     ​또 형태상의 유사성 역시 중요한 증거라고 본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 형태상의 유사성은 , , 같은 매우 단순한 형태의 기호들이다. 하나의 선 위에 다른 선을 더하기만 하면 만들어지는 이런 기호들은 그저 곳곳에서 서로 관계없이 그려졌을 가능성도 충분하지 않을까.

 

     책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금성 이데올로기도대체 무엇인지도 불분명하다. 어떤 것에 이데올로기라는 명칭을 붙이려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큰 문명사적 영향력에 대한 설명이 반드시 따라와야 한다. 이건 단순히 어떤 상징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수준을 넘어서, 그것이 사람들의 정신적, 물질적 세계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이 책의 금성 이데올로기는 여러 지역에서 삼각형의 도상이 사용되었다는 것 이상을 보여주지 못한다.

 

 

     물론 이 책은 한민족이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모두를 합한 개념으로서의) 아시아의 중심이었다고 주장하던 전작의 과도한 민족주의적 시각을 정면으로 내세우지는 않는다. 이번에는 그 중심에 샤머니즘이 있었고, 샤머니즘이 하나의 사원국가형태로(275) 아시아와 (이번에는) 유럽까지 영향을 미치는 일종의 제국을 형성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제국은 단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듯하다. 중세 유럽에서나 볼 법한 기마무사가 훨씬 이전의 고구려 고분에 그려져 있는 게 그 증거라는(305) 설명은, 제국이 무력까지 행사할 수 있는 실제의 국가라고 보는 듯하다.

 

     중국정부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정부의 임나일본부설도 이런 식으로 주장되지 않았을까. 적은 문헌자료와 사연이 정확히 적혀 있지 않은 유물들에 대한 창의적인 해석, 그리고 여기에 역사에 특정한 관점을 부여하려는 강력한 동기.

 

 

     동서양의 다양한 유물들의 사진을 한 권의 책 안에 (그것도 상당히 많은 컬러 도판으로) 모아놨다는 점은 분명 이 책의 공헌이다. 저자의 중후반 결론부의 과도한 감정이입(이 부분은 사실보단 감정의 문제인 듯)을 뺀다면 모음집으로서의 이 책의 장점은 그대로 남는다. 그런데 이 부분 역시 생각해 보면 전작에 대한 내 서평의 마지막 부분 - ‘아시아와 유럽 지역에 살았던 고대인들에게 때때로(‘항상이 아니다) 나타나는 매우 놀라울 정도의 공통적 기억에 관한 발견과 그 자료들에 대한 매우 견실한 수집이 이루어졌다‘ - 이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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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제가 저 자신을 견딜 힘을 주소서

모든 짐 중에 가장 무거운 짐

내버릴 수 없는 근심 덩어리

 

- 크리스티나 로제티, ‘누가 나를 건저내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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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들은 물가 오르고 임금은 제자리니

 

아껴 사고

나눠 사고 (값이 떨어질 때까지 조금씩 나눠서)

바꿔 사고 (기존에 사던 것보다 싼 걸로)

다시 생각해 보고 사는데,

 

 

청와대도 어지간히 갖다 쓸 사람이 없는지

 

아껴 쓰고 (자기 사람은 끔찍히 챙긴다)

나눠 쓰고 (장관으로도 쓰고, 비서로도 쓰고, 급하면 다시 의원으로 쓰기도 하고)

바꿔 쓰고 (장관 시켰다, 총리 시켰다..)

다시 쓰고 있다.

 

정말 알뜰한 정부인가보다.

살림살이 금방 나아지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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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 세월호와 기독교 신앙의 과제
박영식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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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책은 고통과 악의 이유에 관한 신학적 질문으로 시작한다. 저자는 이에 대한 고전적인 대답들 교훈을 위한 것, 죄에 대한 징벌, 선을 낳기 위한 연단의 과정 을 검토하면서, 그것들이 실제로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지 못한 설명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문제의 원인을 하나님에 대한 고전적 이해가 가진 한계에서 찾는다. 전통적 신학에서 하나님은 제일원인’, 혹은 전능자로서의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이렇게 될 때는 앞서 제기된 악의 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낼 수가 없다. 제일원인자로서의 속성을 지키려면 하나님을 고통과 악의 원인으로 몰거나, 잘해야 인간이 겪는 고통에 무감각한(악을 도구로 선을 이루거나, 치명적인 고통으로 교훈을 주려는) 존재로 상정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선함과 전능함, 그리고 실제적 고통이라는 조화시킬 수 없는 트릴레마(trilemma)라는 것.

 

     저자는 고전적 이해에서 과감하게 탈피해 새로운 신관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물론 그 설명들은 타당한 면도 있고, 성경의 기록들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은 그저 전능자로서 계시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그분은 저 멀리 계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인간들 사이에 들어오시는 분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을 기꺼이 스스로 제한하시기도 한다.(케노시스 신학)

 

     하나님은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겪으며, 슬픔을 느끼신다. 나아가 그들이 문제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의지가 되어 주신다. 하나님은 관찰자가 아니라 인간들과 함께 고난을 겪는 분이라고, 성경의 기록자들도 말하고 있지 않던가. 저자는 하나님을 이렇게 이해할 때 그분을 믿는 사람들의 고통을 대하는 태도와 행동 또한 극적으로 달라진다고 말한다이제 그들은 고통을 해석하고 설명하려고(혹은 판단하려고) 애쓰기보다는, (하나님처럼)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나아가 구조적인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5. 감상평 。。。。。。。

 

     신학의 여러 분과 가운데 조직신학(또는 교의신학)이라는 게 있다. 주로 교리적인 부분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데, 따지고 보면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던 일련의 탐구 중 가장 먼저의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조직신학 안에는 변증학이라는 분야가 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련의 공격으로부터 하나님을 지켜내는 논리와 체계를 연구하는 분야다. 그리고 다시 역사적으로 보면, 변증학은 조직신학의 여타 분야들보다 앞서서 시작된 활동이다.

 

     그런데 이 전통 있는 분과가 요새는 그다지 인기가 없다. 하나님을 대신해 그분을 변호한다는 포지션에 서는 일이 결코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악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선함을 변호해 내려는 신정론은 어렵기 그지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 쉽지 않은 작업에 뛰어든 저자에게 우선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책은 저자의 깊은 고민과 적당히 얼버무리지 않으려는 탐구의 과정이 잘 담겨 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근본적인 질문인 그 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에 대해서 저자는 그 날, 하나님은 죽어가는 아이들과 함께, 슬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 가족들과 함께 계셨다라고 대답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차라리 먼저 그런 일들을 막는 게 낫지 않으셨는가라고 하는 질문에는 그분은 전능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제한하고 비우실 수밖에 없었다고 대답하는 듯하다.

 

     확실히 전통적인 설명과는 조금 결이 다른 대답이다. 그리고 사실 아주 만족스러운 대답도 아니다. 하지만 이 대답의 공헌은, 적어도 그분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입에서 도리어 고통 받는 사람들을 괴롭히는(물론 이게 고의가 아닐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말이 툭툭 터져나오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지나치게 말이 많아서, 자신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해석하고 설명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게좀 더 진실한 반응이 아닐까.

 

     한편 저자의 주장은 전능성을 희생시켜서 그분을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는 것인가 하는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마 이 두 번째 공격은 첫 번째 질문들을 던진 사람들과는 그 배경이 좀 다른 사람들 (아마도 같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 있는 어떤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분이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시면서 스스로 자신을 제한하셨다면, 이제 그분은 전능하지 않으신 것인가? 저자 역시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능이라는 엄청난 개념이 어디 처음부터 다 이해가 되기는 하는 것이었던가. 차라리 성경이 말하고 있는 데까지만 바라고, 겸손하게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 또한 적당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것보다 얇았지만, 그리고 문체가 가능하면 편안하게 읽도록 하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담겨 있는 내용은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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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5-06-18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볼만한 책이죠 쿠쉬너의 책을 요약해 놓은 느낌이랄까요?

노란가방 2015-06-18 18:05   좋아요 0 | URL
사실 알라딘 강화유리 보틀 준다고 해서 구입했던 책이었는데..ㅋ
예상치 못하게 훌륭한 책을 발견한 느낌이네요.
읽어볼 만한 책 맞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