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인이 ‘데모크라티아’라고 불렀던 정치체제는

무엇보다 그것이 기능하도록 만드는 역량 있는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아테네인은 지도자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무의식적으로 거부해왔다.

페리클레스는 교묘하게도 실제로는 ‘홀로’ 지배했지만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은 너희 모두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아테네 민중은 ‘홀로’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페리클레스 뒤에 나타난 지도자들이

모두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밀려난 사실이 그 증거이다.

아테네의 민중은 지도자를 키울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 두각을 드러내면 그 순간 망가뜨리고 말았다.


- 시오노 나나미, 『그리스인 이야기 3』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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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의 칼빈주의 강연 - 문화 변혁의 기독교 세계관 선언서 Abraham Kuyper Series 2
아브라함 카이퍼 지음, 박태현 옮김 / 다함(도서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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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네덜란드의 개혁파 신학자이자 목사, 정치가(수상까지 역임했다)였던 아브라함 카이퍼가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의 초대를 받아 칼빈주의(칼뱅주의)를 주제로 여섯 번의 강의를 했다. 칼뱅주의가 무엇인지부터, 그것이 종교와 정치, 학문, 예술에 끼친 영향, 그리고 미래 전망까지 종합적으로 다룬다.


카이퍼의 강연을 옮긴 이 책은 그 동안 여러 차례 번역되어 왔었다. 개인적으로는 학창시절 레포트 도서로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한데, 카이퍼 자신이 네덜란드인이다보니 네덜란드어로 했을 강연임에도 초반에 나왔던 책들은 그 강연을 영어로 옮긴 책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중역본이었다. 원문의 뉘앙스를 충분히 살리기 어려운 것은 당연했고, 네덜란드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도 아쉬운 부분이 좀 있었다고 한다. 이 책은 네덜란드어에서 바로 우리말로 번역했다.





한 명의 번역자가 번역을 하면서, 강연들 사이의 통일성을 살릴 수 있었다는 서문 내용이지만, 사실 내용이 쉽지는 않다. 신학뿐 아니라 철학, 그리고 역사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별다른 설명 없이 바로 논지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없다면 내용을 따라가기가 어려울 듯하다. 확실히 “신학책”이라는 느낌.


이런 어려움을 한 발 넘어설 수 있다면, 비로소 카이퍼가 말하고자 하는 점이 무엇인지 눈에 들어온다. 저자가 이 일련의 강연에서 강조하는 바는, 칼뱅주의가 가지고 있는 포괄성 성격이다. 물론 당시에도 칼뱅주의가 하나의 교단이나 교파를 부르는 명칭으로 사용되긴 했지만, 저자가 말하는 칼뱅주의는 그보다 큰 하나의 세계관이다. 그것을 통해서 세상을 다시 이해할 수 있는 무엇이라는 의미.


카이퍼는 칼뱅주의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져왔고, 종교의 참된 의미와 기능을 되살렸으며, 정치적으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자유를 회복시켰다고 말한다. 그건 단순히 종교적 신조를 모아놓은 일련의 교리들이 아니었다.


물론 살짝 무리한 해석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예술과 관련된 부분인데, 저자는 칼뱅주의가 교회권력과 지원에 종속되어 있던 예술을 해방시켜, 본래의 권위를 회복할 수 있도록 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저자가 이 결론에 이르기까지 사용한 신학적 해석에는 어느 정도 타당성을 인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칼뱅주의의 전제들에서 이끌어낸 해석이지, 칼뱅주의 자체가 예술을 어떤 식으로 부흥시키거나 장려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되지 못한다. 틀렸다는 말은 아니지만, 조금은 무리해 보이는 것도 사실.





마지막 강연에서 카이퍼는 칼뱅주의의 미래를 예측하고 있는데, 확실히 칼뱅주의자들을 둘러싼 상황이 당시에도 녹록치 않았다는 점이 여실히 느껴진다. 굉장히 강력한 도전들에 직면해 있고, 심지어 칼뱅주의자들 안에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행동하고 있기도 하니까.


카이퍼는 더 철저하게 칼뱅주의를 연구하고, 그 원리에 따라 소망으로 살아가자고 권한다. 그의 연설이 행해진지 거의 130년 가까이 지난 오늘, 과연 그 연설이 행해졌던 미국 땅에서 칼뱅주의는 성공했을까? 그리고 칼뱅주의를 금과옥조로 여기며 자주 입에 올리는 우리나라의 보수교회들의 상황은 또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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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정치인이 단 하나의 사례로 더 큰 추세를 반박하려 들거든

이것이야말로 나쁜 과학의 전형적인 특징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자문해보자.

그 반대 사례 하나가 정말로 전체적인 개념을 깨뜨릴 수 있을까?

우리 지도자들의 발언 뒤에 과학적인 뭔가가 더 있는 것은 아닐까?


- 데이브 레비턴, 『과학 같은 소리 하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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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을 얻기 위해 책을 읽어요!”

그가 힘주어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책을 읽지 않도록 하라.

책 읽기를 의무로 생각하지 말라.

남보다 앞서 나가거나 뒤처지지 않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지 말라.

정말 좋아하는 것을 읽으라.


캐스린 린즈쿡, 『C. S. 루이스와 기독교 세계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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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5-30 1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넘 좋은 말인것 같네요.근데 학창시절 책을 읽으라는 말은 학습서를 보란 말과 동이어이기에 많은 이들이 책을 읽으라는 말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것 같습니다ㅜ.ㅜ

노란가방 2025-05-30 17:53   좋아요 0 | URL
ㅠㅠ
 
리딩 더 타임스 - 뉴스를 읽는 그리스도인의 지성, 시간, 상상력, 공동체
제프리 빌브로 지음, 홍종락 옮김 / IVP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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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뉴스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간밤의 뉴스를 확인하고, 화장실에 앉아서도, 밥을 먹을 때도, 양치를 할 때도 끊임없이 새로운 뉴스를 게걸스럽게 찾아다닌다. 물론 그 뉴스라는 것이 무슨 정치나 사회 문제 같은 묵직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고, 소품과 패션, 그냥 연예인 신변잡기인 경우도 많고, 유명인을 물고 뜯는 것은 특히나 인기가 많다.


10여년 전부터 우리가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단어가 뉴스와 관련해서 등장했다. 페이크 뉴스(fake news), 이른바 “가짜 뉴스”가 그것이다. 도널드 트럼프라는 유력 정치인이 자신이 운영하는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로로 쉴 새 없이 이 가짜뉴스를 쏟아내며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분노를 조장하고, 격렬하게 상대를 증오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런 일을 트럼프만 저지른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그가 처음이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가 속한 정파의 특성상 수많은 기독교인들조차도 이런 증오의 행진에 기꺼이 동참하게 만들었다는 점은 분명 교회에도 위협이 되는 상황이었다. 이 책은 이렇게 심각하게 파편화되고 분열되어버린 미디어 환경과 그 안에서 상주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어떻게 이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지 도움을 주기 위해 쓰였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게 집중한다. 세속적인 삶의 태도를 멀리하고 숲에서 홀로 오두막을 짓고 살기도 했던 소로는 “머캐덤 도로”처럼 되어버린 정신을 경계한다. 이전의 도로는 얇고 크게 잘라낸 박석 같은 걸 까는 식으로 만들어졌지만, 그의 시대는 돌을 잘게 부숴 도포하는 형태의 도로건설이 도입되었다. 소로는 세상의 바쁜 소식에 매몰된 사람들의 정신이 마치 그런 머캐덤 도로에 깔린 작은 돌조각처럼 조각조각 분열되어 있음을 비판했던 것.


주로 1부는 현대의 복잡한 뉴스매체들에 몰입되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종의 우상숭배적 태도일 수 있음을 지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내용은 시간에 관한 고전적인 구분을 다루는 2부로 이어지는데, 순환적이고 반복적인 시간을 가리키는 “카이로스”와, 직선적으로 흐르며 우리의 관심을 지금 일어나는 새로운 일들에 집중하게 하는 “크로노스”가 그것.


2부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시간을 바라보는 방식에 관한 독특한 해석이다. 저자는 선지자들이 우리 삶의 일상적인 사건들을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펼쳐지는 거대한 드라마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자리잡는지를 설명한다고 말한다. 그 결과 카이로스적으로 펼쳐져 있던 시간은, 크로노스적 시간을 중심으로 접히고 응축된다(멋진 표현이다).


3부에서는 그러면 실제로 우리가 어떻게 이런 미디어, 뉴스 과몰입 상태, 편향된 정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관한 조언이 담겨 있다. 저자는 흔히 제안되는 팩트 체크와 뉴스 피드의 다양화가 근본적인 해답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뉴스 밖 진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진짜 공동체를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집 밖으로 나가 좀 걸으라는 말이다. 와우.





맨 처음 언급한 미국의 상황에서만 문제가 심각한 것은 아니다. 최근 우리는 엄청난 사건을 겪었는데,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대통령이 부정선거라는 가짜뉴스에 매몰된 탓이었다. 지독히도 무능하고, 화려한 자리만 쫓아다니길 좋아하던 부인에게 끌려 다니며, 반대파들에게 (심지어 단순히 졸업식에서 구호를 외쳤던 학생의 입을 틀어막고 끌어내는 식으로) 저열한 탄압을 하기를 마지않았던 그는, 그 가짜뉴스가 사실이라는 증거를 찾겠다며 군대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문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그런 가짜뉴스를 좇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안에 기독교인들이 수두룩한 것 또한 마찬가지로 사실이고. 적어도 이 점에서 만큼 교회는 거의 실패한 것 같다. 그러나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법. 교회는 그들을 의미도 목적도 없는 데이터로 구축한 가상의 현실에서, 다시 실제의 살과 몸이 머무는 곳으로 데리고 나와 함께 갈 수 있을까. 솔직히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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