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유일한 연결 지점은 미디어다.

미디어는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데 힘써야 하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떨어뜨려 놓고 있을 뿐이다.

미디어는 폭력을 조건 형성하고 가르치며,

우리의 가장 어두운 본능을 키우고,

우리의 가장 깊은 두려움을 조장하는 폭력적인 전형들을 공급하고 있다.

 

- 데이브 그로스먼, 살인의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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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윅
데이빗 레이치 외 감독, 키아누 리브스 외 출연 / 노바미디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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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병으로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진 한 남자, 존 윅(키아누 리브스)이 있었다. 장례식 이후 실의에 빠져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던 존에게, 며칠 후 아내가 죽기 전에 편지와 함께 보낸 강아지 한 마리가 배달된다. 이제 그 녀석과 함께 다시 살아볼 힘을 내려고 하는 찰라, 존이 가진 차를 뺏으려던 한 양아치에 의해 아내가 남긴 강아지가 죽고 존마저 린치를 당한다. 더구나 그 양아치는 러시아 출신 마피아의 아들놈이었다.

 

     평범한 상황이었으면 여기서 그냥 끝나고 말았을 테지만, 곧 그 양아치 주변의 모든 사람이 (심지어 양아치의 아버지인 조직의 보스까지도) 그가 존의 차를 훔쳐냈다는 사실을 알고 얼굴 표정을 굳힌다. 존은 왕년의 전설적인 킬러였던 것. 아내가 남긴 추억을 망가뜨린 녀석을 향한 존의 복수극이 그렇게 시작된다.

 

 

 

 

2. 감상평 。。。。。。。  

 

     생각해 보자. 아마도 감독은 화끈한 액션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했을 것 같다. 그리고 여기엔 복수극이 제 맛이라고 여겼을 것이고, 관객이 그 복수극에 기꺼이 공감을 하려면 복수의 대상이 가능한 멍청하고 나쁜 놈인 게 편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이 조건에 딱 맞는, 그래서 주인공이 휘두르는 폭력에 마음껏 공감하면서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액션 영화다.

 

     오랜만에 돌아온 키아누 리브스는 왕년의 활동성을 보여주려고 하지만, 64년생인 그의 나이도 곧 50이다. 그 옛날 매트릭스 시절의 네오같은 파릇파릇함과 유연한 허리(?)를 보여줄 수는 없었고 그의 액션은 시원하기 보다는 묵직해 보인다. 요새도 빨판으로 빌딩 유리 위를 기어 다니시는 톰 행크스 옹을 볼 때 느껴지는 감정과 유사한.. 그래도 영화 속 존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매력이 있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겠다. 의리와 실력 하나만큼은 모두에게 인정받는 그런 인물이니까.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폭력이 주가 되는 영화들에 높은 평점을 주기 어려운 이유는, 폭력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관점 자체가 안고 있는 위험성 때문이다. 굳이 구구절절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나의 소중한 개를 죽였으니 상대는 물론 그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모두 쏴 죽여 버려도 된다는 논리는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영화 속 존 윅이 아니라 옆집 아저씨라면, 죽은 것이 강아지가 아니라 금붕어나 뭐 그런 거라면, 그래도 동일한 논리가 통해야 할까.

 

     물론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폭력을 행하는 것보다, 이렇게 영화 속에서 꾸며낸 이야기를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새 애들 하는 꼴을 보면 갈수록 현실감각이 부족한 철부지들이 늘어나는 것도 또 사실이니까. 그리고 현실에서는 존 윅보다 상대의 양아치가 될 확률이 좀 더 높기도 하고.

 

 

     그래도 확실히 몰입감은 있었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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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30대의 음악감독 정우(이상윤)와 광고기획사에서 일하는 수경(윤진서)이 만나 서로 호감을 갖고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 찰라, 수경의 회사로부터 일을 받아 작업하던 정우는 도둑맞은 기타를 찾겠다고 마감을 앞두고 강원도까지 나갔다가 폭우와 사고 등으로 차가 밀려 결국 일을 마치지 못하고 만다. 정우의 책임감 없음에 수경은 실망하고 그렇게 소원해진 두 사람.

 

     얼마 후 다시 한 번 일 때문에 함께 미국 출장을 가게 된 정우와 수경은, 정우의 천방지축 여동생 소영(이솜)과 함께 다니며, 일인지 데이트인지 알 수 없는 시간들을 보내며 관계를 회복한다.

 

 

 

 

2. 감상평 。。。。。。。  

 

     전체적으로 워낙에 잔잔하게 진행되는 영화다. 일어나는 사건에서도 특별한 부분을 찾기 어렵고, 그렇다고 캐릭터에 독특함이 묻어나오는 것도 아니다. 남는 건 배우들의 각개약진뿐인데, 그래도 이 부분에서는 윤진서라는 배우가 참 예쁘게 나왔다. 똑부러지지만 배려심 또한 함께 가진 사랑스러운 수경이라는 캐릭터를 잘 연기해 냈다.

 

     여기에 마담 뺑덕에서 정우성과 함께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이솜이 정우의 여동생 역할로 출연했던 것도 흥미로웠던 부분. 사실 이 영화 속에서 이솜이 맡은 캐릭터는 딱히 호감이 가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뭔가 좀 더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들 만한 걸 가지고 오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을 살짝 가지고 있었지만..;;) 배우 자체가 가진 싱싱함으로 대략 선방했던 정도랄까.

 

 

 

 

     이야기의 구성도 치밀하다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뜬금없는 미국 출장은 뭐고, 또 영화 중후반부를 뒤덮는 미국 관광은 뭔지.. 그렇다고 관광지의 멋진 모습을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라도 있었을 텐데, 그런 것도 아니고.. 전반적으로 분위기와 느낌만 강조하다보니 정작 논리적 구성이 약해진 느낌. 하지만 느낌만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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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자본 (양장)
토마 피케티 지음, 장경덕 외 옮김, 이강국 감수 / 글항아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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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제목을 보면 이 책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자본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본의 정의나 분류를 다양하게 할 수도 있지만, 일단 저자는 간단하게 벌어놓은 돈(혹은 부)’ 정도로 정의하고 논의를 시작한다. 이 책은 21세기에 이 자본은 어떤 모습으로 변할 것인가 하는 전망과 함께 여기에 문제는 없는가 하는 질문(과 함께 나름의 대책)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 우선 저자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자본이 어떤 식으로 변해왔는지를 구할 수 있는 통계자료 안에서 분석한다. 우선 자본소유 구조에 있어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역이 농경지에서 주택(부동산)과 각종 비물질적 자본으로 전환되었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 시기에는 잠시 감소했으나 전반적으로 축적된 자본의 양이 소득 대비 6, 700%에 이르게 되었으며, 공공자본에 비해 민간자본의 양이 적게는 4배에서 7배 이상까지 더 많았다.

 

     특히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나타나는 주요 문제점 중 하나로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게 유지되어왔다는 점을 지목한다. 이 말은 이미 많은 돈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더 부자가 되는 사회구조가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이는 갈수록 불평등의 문제를 야기할 것이고, 민주주의적 가치를 훼손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때문에 저자는 자본에 세금을 부과하자는 제안을 꺼낸다. 기존의 소득에 부과하는 누진적 세금은 종종 역진적 상황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에 나름의 효용을 인정하더라도 부족하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어느 개별국가의 제도만을 통해서 효과를 내기 어렵기 때문에 국제적인 공조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2. 감상평 。。。。。。。  

 

     책을 구입해서 한참 읽고 있는데 피케티 오류 인정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그런데 몇 개의 신문 기사들의 내용을 확인해 본 결과 오류의 내용이란 게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항상 앞선다는 명제가 실제 불평등 확대를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한국경제), 역시 그 명제가 21세기 소득불균형의 미래를 예측하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라는 것(조선일보) 같은 내용이었다. 프레시안은 여기에 소득불평등도 부의 불평등의 주요 요인이라는 것을 인정했다는 내용을 덧붙인다.

 

     정리하자면 피케티가, 자신이 이 책에서 21세기 부의 불평등 문제의 핵심적인 원인으로 꼽았던 지나치게 높은 자본수익률이라는 요인에, 그것이 유일한 요인은 아니며 여기에 최근 불거지고 있는 소득불평등이라는 요소도 더해야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럼 이게 과연 오류 인정이라고 불릴만한 것일까? 흥미로운 부분은 피케티 역시 책 속에서 자본수익률과 함께 임금의 불평등(소득불평등)이 미래 경제구조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498).

 

앞으로의 세계는 과거의 가장 나쁜 두 세계가 결합된 모습일 것이다. 즉 상속자산의 불평등도 극심하고, 매우 심한 임금의 불평등은 능력과 생산선 측면에서 정당화되는(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실에 거의 근거하지 않은 주장이다) 세계다.

 

     일부 언론도 이 포인트를 오류라고 부를 수 있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던지, 그렇게 되면 다른 학자들이 주장하던 것과 큰 차이가 없어지므로 피케티의 독특성이 사라진다는 식으로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부분은 피케티 개인이 노벨상을 받느냐 못 받느냐에는 큰 영향을 줄지는 모르지만, 그가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부의 불평등 문제 그리고 그 원인으로서의 과잉 자본수익 라는 논점 자체가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다.

 

 

     또 한 가지 지적되는 부분은 피케티가 그의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자료가 조작되었다는 점인데, 이게 사실이라면 앞서의 공격보다 훨씬 더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신문기사들을 보면 그가 자료를 종합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논지에 맞는 부분들을 취사선택했으며, 일부에는 수치적인 오류 혹은 조작(어떤 이들은 엑셀 연산상 오류라고 말하기도)이 있었다는 것. 결과적으로 실제로 자본수익률이 늘 경제성장률보다 높지는 않으며, 최상위층이 보유한 부의 비율 역시 과장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케티 역시 책 속에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늘 높은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을 인용하는 기사는 전혀 없었다는 게 함정(428).

 

요약하자면 부등식 r>g는 특정한 시기와 정치 환경에서는 성립되지만, 다른 시기와 정치 환경에서는 성립되지 않는 불확정적인 역사적 명제다.

 

 

     그리고 일부 언론에서 피케티의 통계에 문제가 있다는 기사를 내며 인용했던 파이낸셜타임즈의 자체조사 역시 피케티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해냈다는 느낌을 주지는 못한다. 그래프를 보면, 소득상위 10%에 해당하는 이들의 소득 비중은 거의 차이가 없으며, 상위 1%의 경우 약 10%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10%라는 차이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상위 1%의 소득을 얻는 사람들이 전체 부의 30%가 아니라 20%를 가져간다는 말이 무슨 큰 차이가 있을까? 30%는 문제가 있는데 20%는 괜찮다는 뜻인가?

 

     물론 그래프는 지난 100년 동안 부의 격차가 점점 낮아지는 듯한 추이를 보여주고 있고, 이는 부의 불평등이 증가하고 있다는 피케티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그래프를 정확하게 살피면 1900년대 초반 두 차례의 큰 전쟁 덕분에 소득상위 1%의 소득이 급격하게 떨어졌고, 그 이후에는 큰 변동 없이 이어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좀 더 큰 기간을 두고 보면 이 5, 60년 사이의 변동이 어떤 큰 흐름의 일부인지는 아직 알 수 없으며, 피케티의 말처럼 오늘날 부가 과거만큼 불평등하게 분배되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1945년 이후 충분한 시간이 흐르지 않았기 때문임이 증명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오히려 책을 보면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사람들이 이 책에 관해 가장 많이 떠들어 대던 글로벌 자본세라는 주제가 생각보다 훨씬 적은 분량만 등장하고 있고, 또 그 자체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점이었다. 피케티는 자본세를 국가 재원 조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경제 분야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라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 때문에 그가 제시하는 세율도 100만 유로(12억원) 이하의 부에 대해서는 0%, 100~500만 유로(12~60)에 대해서는 1%, 500만 유로 이상에는 2%에 불과하다.

 

     평균자본 수익률이 약 4~5%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지도 않을 것이고, 부자들의 경우 그걸 다 내고도 수익을 낼 수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누가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가 분명히 드러날 것이고, 이것은 향후 자본주의의 중요한 폐단 중 하나인 부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핵심적인 자료가 될 수 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다만 이 주장이 실제로 가능한가 하는 부분에는 좀 회의적이다. 우선은 이를 위한 국제적인 공조가 제대로 이루어질지 알 수 없고(아니 안 될 것 같다), 나아가 각국의 정부가 늘 옳은 판단만을 하는 정의로운 정부가 아니라는 점 또한 집고 넘어가야 할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광범위한 세무조사가 필요할 텐데 여기에 들어가는 자원과 노력도 만만치 않을 테니..

 

 

     피케티는 이 책이 진리를 담고 있는 거룩한 문서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사회과학적 연구 자체가 정밀과학이 아니며, 끈기 있는 연구를 통해 패턴을 찾아내고 분석함으로써 민주적인 토론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10). 그렇다면 최근 이 책의 출판을 계기로 부의 불평등문제, 그리고 자본소득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나오고, 또 한 편으로는 이 책을 반박하는 논리들이 개발되고 하는 현상 자체를 피케티는 반가워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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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캐나다 셔브룩 대학 병원의 조사를 따르면

임산부의 93퍼센트, 태아의 80퍼센트에서

킹콘의 유독 성분이 검출되었다.

임신하지 않은 여성의 69퍼센트에서도

유독 성분이 검출되었다.

몬산토사의 설명은 거짓이다.

현대 미국인은 유전자 조작 옥수수의

살충 독소에 오염되어 있다.

 

- 후나세 슌스케, 몬스터 식품의 숨겨진 비밀

※ 킹콘 : 유전자조작 옥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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