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이 북한에 세운 체제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직 모스크바와 베이징이

 

평양에 꾸준한 원조를 제공할 의향이 있을 때에만 유지될 수 있었다.

 

- 안드레이 란코프, 『리얼 노스코리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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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유혹은 먼 옛날부터 존재했다.

우리 옛 조상도 고무줄 새총을 발명하자마자 분연히 일어서서,

기술의 발전 덕분에 종교 없이 너끈히 살 수 있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의 길도 그때와 다를 바 없다.

세속주의에 매몰되어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며 살 것인가,

사랑이 없는 자아를 위해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을 염원하며 살 것인가 선택해야 한다.

 

- 조이 데이비드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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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임신한 아내의 안정을 위해 호주의 한 시골 마을의 경찰서로 자원한 셰인. 하지만 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평온한 레드 힐 마을에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다. 인근의 교도소를 탈출한 ‘지미’가 레드 힐로 오고 있었던 것. 마을의 보안관인 올드 빌은 수하들을 무장시키고 기다리지만, 신출귀몰한 지미에게 속수무책으로 한 명씩 당하고 만다.

 

     하지만 지미는 두 번씩이나 셰인과 마주쳤는데도 그를 죽이지 않는다. 지원을 요청하러 간 집에서 과거 올드 빌의 패거리가 지미에게 저지른 비열한 짓을 알게 된 셰인은 빌과 지미의 마지막 대결 현장으로 간다.

 

 

 

 

2. 감상평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벌어지는 복수극이라는 기본 얼개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탈옥까지 하며 벌이는 지미의 복수극이 딱히 긴장감을 자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나름 매복하고 있는 올드 빌의 수하들을 한 사람씩 처리하는 과정이 이 영화에서 가장 스릴을 느끼게 해야 하는 부분이었는데 완전히 실패하고 만다.

 

     우선적으로 올드 빌을 비롯한 패거리가 전반적으로 전성기는 한참 지난 노인들이라는 점이 에러였고, 오래전 일에 대한 복수라는 컨셉을 유지하고 싶었더라도 적어도 캐릭터들이 독기를 품고 있다든지, 반전의 냉혹함 따위를 보여준다든지 했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아니다. 이 ‘노인단 자경단’이 구사하는 전술이라는 것도 그저 여러 곳에 나뉘어 상대를 기다리다 발견하면 처리한다는 단순한 작전일 뿐이다. 일대일로 상대할 역량이 안 된다는 게 처음부터 분명했는데도 각개격파 당하기 딱 좋은 모양새로 나서면서도 온갖 허세는 다 부리는 모습이 어이가 없을 정도..

 

 

     감독의 연출력도 딱히 인상적이지 못하다. 영상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뜬금없이 등장해서 분위기를 잡고 빠지는 흑표범 역시, 뭔가를 따라하려고 했다는 느낌만 준다. 무엇보다 장르설정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게 가장 큰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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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창조주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그곳을 다스릴 인간을 창조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를 거역하고 세상에 살육을 불러왔고, 세상은 피로 가득한 황폐한 곳이 된다. 창조주를 경외할 줄 아는 셋의 후손인 노아는 신의 선택을 받고 다가올 거대한 홍수로부터 생명을 살릴 방주를 만들기 시작하고, 가인의 후손인 두발가인의 군대는 그런 방주를 빼앗으려 한다.

 

     마침내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노아는 가까스로 가족들과 함께 방주에 오른다. 하지만 자신과 가족들 역시 세상을 망가뜨린 인간임을 깨달은 노아는, 결국 인간이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에 새롭게 태어날 아기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편집증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노아 이야기와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스토리.

 

 

 

 

2. 감상평 。  

 

     영화가 ‘성경적’인지 아닌지를 다투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게다. 하지만 처음부터 기독교 교리를 전달하거나 성경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구현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면, 그 스스로 자신이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 주장 - 이를테면 댄 브라운의 어이없는 팩션 소설들처럼 -하는 게 아닌 이상 영화 자체가 말하려고 했던 게 무엇이었나를 생각해 보는 게 좀 더 생산적일 것 같다.

 

 

     물론 영화 자체는 성경에서 가져온 모티브이지만, 감독은 이 이야기를 완전히 새롭게 읽어내려고 한다. ‘(마치 최근 10년 동안 자주 제작되고 있는 그리스 신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그 신화의 내용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확연하게 구분되는데 두 이야기의 중심엔 물론 주인공 노아가 있다. 전반부는 방주를 제작함으로써 생명을 보존하는 구원자로서의 노아가 있고, 후반부엔 자신을 포함한 인류의 죄악을 그치기 위해 자기 자손마저 세상에 남겨두지 않으려는 심판자로서의 노아가 등장한다.

 

     그러나 심판자로서의 노아는 결정적인 순간에 살인 대신 사랑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의 선택으로 인해 인류는 보존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이 영화의 재미있는 지점이다. 처음부터 창조주가 세상에 홍수를 내리려고 했던 것은 타락한 인간이 흘린 피 때문이었다. 만약 노아가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태어난 손녀들을 죽였더라면 그 역시 홍수로 죽어간 인류와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의 후손도 세상에서 사라짐으로써 타락한 인류를 심판하려는 창조주의 계획은 완전히 성취된다.

 

     하지만 노아는 좀 다른 선택을 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다시 시작되는 인류는 살육이 아닌 사랑으로 시작되는 신인류다. 어떻게 보면 이 역시 타락한 인류를 물로 정화하고 세상을 새롭게 만들려는 신의 계획의 성취이기도 하다. 노아는 구원자와 심판자 사이에서 갈등을 겪지만, 결국 어느 쪽을 선택했더라도 그분의 계획은 성취되었을 것이라는 말.

 

 

 

 

     영화는 살육이 아닌 사랑이라는 방식으로만 인류는 다시 삶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아낸다. 그리고 정말로 우리에겐 이전과 같은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 승자독식, 약육강식, 부익부빈익빈이라는 악한 원리에서 벗어나 좀 더 정의로운 원리가 회복되어야 한다. 사실 지금의 모습이라면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세상이 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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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 아르뱅주의
신광은 지음 / 포이에마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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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저자는 한국 교회가 겪고 있는 윤리적 실패를 잘못된 신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단한다. 바로 ‘아르뱅주의’가 그것.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뱅주의를 적당히 편의에 따라 조합시킨 이 ‘실용적 신학’은, 자신의 결단에 따라 구원을 얻을 수 있고, 그렇게 얻은 구원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절대로 무효화되지 않는다는 문장으로 요약된다.

 

     이 새로운 신학의 탄생은 매우 큰 결과를 가져온다. 구원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가능하다는 설명은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일단 그런 확신이 들고 난 뒤에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 구원이 영원히 폐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제 어떤 식으로 살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판을 치게 된다. 도덕적, 윤리적 실패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저자는 이를 한국교회가 발행하는 ‘면죄부’와 같다고 칭하기도 한다.

 

     책은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에 관한 역사적, 신학적 고찰을 통해 두 신학 사조의 장단점을 살핀 후, 아르뱅주의와 같은 기형적 신학이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모색해 본다.

 

 

2. 감상평 。  

 

     한국 교회의 윤리적 실패와 타락의 원인을 잘못된 신학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보는 저자의 진단에 동의한다. 저자는 ‘아르뱅주의’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사실상 신학의 부재라고도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입만 열면 ‘칼빈주의’를 외치면서 협잡과 뒷거래, 줄 서기에 여념 없는 보수교단의 신학교 교수들, 성경연구를 충실히 하지 않으면서도 부끄럼 없이 강단에 오르는 목회자들과 역시 일주일 가야 성경 한 번 제대로 펼쳐보지 않는 신자들에게서 무슨 바른 신학적 지식과 적용과 실천이 나타날 수 있겠는가.

 

     물론 이미 오래 전부터 지적해 왔던 것들이지만, 이 책은 그에 대한 본격적인 신학적, 학술적 정의와 정리를 시도했다는 데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특히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장단점을 비교하는 부분은 명쾌하고, 오랫동안 잘 준비해왔다는 인상을 주고,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는 부분도 바른 방향이다.

 

 

     하지만 책이 지나치게 길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처음부터 책의 주제가 일찌감치 나와 있는데 계속해서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여 반복되는 내용도 상당하고, 뒤로 갈수록 책장이 넘어가는 속도가 줄어들더니 정작 저자가 힘을 주고 있는 제3의 대안을 설명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집중하기 어려웠다.

 

     내용면에 있어서도 ‘튤립(TULIP) 교리’를 축으로 삼아 책에서 다루는 모든 사조들을 설명하려다보니, 그 신학이 담고 있는 ‘내용’과 과정이 제대로 고려되지 않는 기계적이고 도식적인 분류를 하는 느낌을 준다. 저자는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 주의를 비판하면서 ‘논리적 모순’, ‘신비’라는 측면을 강조한다. 하지만 ‘모순을 그대로 두고,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실존(140)’이라는 저자의 설명은 자신이 제기한 문제를 그대로 답습하는 건 아닌가? (저자의 설명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하도 논리를 따지기에 해 보는 말이다)

 

     이 외에도 저자가 193-194쪽에서 설명하고 있는 ‘일반은총’은 사실 ‘일반계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아르미니우스의 ‘선행은총’과 대비되는 칼뱅주의의 개념은 이름이 비슷한 ‘일반은총’이 아니라 ‘일반계시’다.

 

 

     결국 교회는 바른 신학을 가지고 있을 때에야 건강할 수 있다.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의 실용주의적 접근은 교회의 순수성을 훼손시키고, 나아가 교회의 교회다움을 지워버리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면에서 현재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신학적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나름의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는 괜찮은 책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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