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경제개발을 수행할 수 없는 경제,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수백만 빈민들의 굶주림을 수수방관하는 경제,

나는 교육자로서 이러한 경제를 존중해야 할 이유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 파울로 프레이리, 『망고나무 그늘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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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기억하라 - 하워드 진 연설문집 1963~2009 불온한 책 3
하워드 진 지음, 앤서니 아노브 엮음, 윤태준 옮김 / 오월의봄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1. 요약     

 

 

     미국의 대표적인 시민운동가 하워드 진의 대표적인 연설문 스무 개를 모아 엮은 책. 1963년부터 2009년까지의 약 40년 동안 그가 일관되게 주장해 온 것은, 반전(反戰)과 시민들의 직접적인 참여(시민운동, 시민불복종 등)를 통한 실제적 민주주의의 구현, 그리고 미국의 패권주의, 예외주의의 철회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2. 감상평     

 

 

     미국은 왜 미국(美國)이라고 불릴까? 그 나라의 어디가 그렇게 아름다워서, 원어인 America에는 전혀 내포되어 있지 않은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걸까? 어쩌면 우리는 그 나라의 진짜 모습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그 나라에 대한 ‘미담’들만을 주입받아왔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 책에 실린 연설들을 통해 하워드 진은 그런 세뇌를 미국 국민들 역시 받아오고 있었음을 밝혀낸다.

 

     책에 자주 언급되는 ‘셰이스 반란’은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부유층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헌법을 제정하고 각종 제도들을 발전시켜 왔음을 보여주고, ‘사코와 반제티 사건’은 그런 정부에 반대하는 이들을 향한 사법적 살인의 예다.(마치 우리나라의 조봉암 사형처럼) 여기에 미국이 침략하거나 약탈했던 수많은 예들 - 멕시코, 필리핀, 쿠바,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 -은 그들의 도덕적 우월 주장이 허구임을 드러내주고, ‘정당한 전쟁’이라고 불리는 독립전쟁, 남북전쟁, 2차세계대전에서도 대량살상이라는 참혹한 사실을 정당화시켜주지는 못한다.

 

     하워드는 문제 해결의 시작은 평범한 시민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는 것부터라고 주장한다. 옳지 않은 명령은 거부하고, 부와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이 국가운영마저 멋대로 하지 못하도록 반대해야 한다. 그들이 미화해 놓은 역사의 실제 모습을 공부하고, 그로부터 교훈 - 지배층은 자발적으로 일반 대중을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 -을 배워야 한다는 것.

 

 

     전반적인 논지에 대해선 깊은 공감을 하며 읽었다. 그의 여러 사상들, 그리고 미국 사회에 대한 강한 비판은 상당부분 우리나라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교학사 역사 교과서 문제는, 미국은 선량한 건국의 아버지들에 이해 성립되었고 그 이후 착착 발전과 부흥의 길을 걸어왔다는 편향된 역사 조작과도 일맥상통하고, 미국 내 존재하는 인종과 경제적 능력에 따른 차별 역시 그렇다.

 

     다만 대안적 측면에서는 조금 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 문제와 관련해서는 시민불복종과 적극적인 시민운동 등으로 권력자들의 의지를 돌리거나 꺾을 수 있다는 건 어느 정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전쟁과 관련해서는 거의 무조건적인 반대 입장을 표하는 부분에선 일부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보인다.

 

     저자는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강조함으로써 그 전쟁의 비윤리성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그러면 대안은 어떤 게 있는가? 히틀러의 만행을 내버려둬야 했다는 건가? 저자는 최소한의, 그리고 최단기간의 무력개입을 통한 해결을 한 가지 방법으로 제시하지만, 국지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상당히 모호하고 그 실제 가능성도 의심되고 있는 개념이다. 노예제 폐지를 위해 전쟁을 벌여야 했을까라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짐승과 같은 처우를 받으며 하루하루 버텨가던 노예들이 과연 ‘시간이 좀 더 들더라도 (한 몇 십 년?) 전쟁이 아닌 방식으로 해결해 나가자는 제안을 받아들일까 하는 부분을 생각해 본다면 썩 타당해 보이진 않다.

 

     여기에 한국전쟁과 관련되어 정확하지 않은 정보 - 미국이 한국을 침략해 일어난 전쟁이며, 당시 남한은 독재정권이었다는(407쪽) -는 저자의 분명한 실수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나중에는 분명 변질되었지만) 독재정권까지는 아니었고, 전쟁은 미국의 침략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북한의 남침에서 비롯된, 방어적 전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쟁의 참상을 부정하거나, 오늘날 미국이 전 세계에서 일으키고 있는 전쟁 이면에 감춰진 탐욕스러운 동기를 드러내고, 실제적으로 반전운동에 뛰어들었던 저자의 노력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상황이 급할 땐, 대안이 완전히 마련되지 않았더라도 우선 잘못된 방향을 막아내는 것이 중요한 법이니까.

 

     여러 장소에서, 다양한 시기에 했던 연설들이지만 한 사람이 평생 동안 중요하게 여겨왔던 가치들을 말해왔던 점이라서 유사한 정보나 논지들이 자주 발견되기 때문에 모든 부분을 정독할 필요까지야 없겠지만, 진짜 민주주의, 사회적 정의, 조금은 나은 미래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읽어볼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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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불안과 염려는

 

진정시켜 달라고 간청해야 하는 고통일 뿐 아니라

 

용서 빌어야 할 약함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이지요.

 

- C. S. 루이스, 『루이스가 메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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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19세기 미국. 노예를 허용하는 주(州)와 금지하는 주가 공존하고 있던 시대. 흑인이지만 자유인으로 태어나 제법 잘 나가는 바이올린 주자로 살아가던 솔로몬 노섭은 어느 날 좋은 보수를 약속하는 두 명의 젊은이를 만나 함께 워싱턴으로 가기로 하지만, 실은 납치를 당해 남부의 노예주로 팔려가게 된다.

 

     너그러운 주인 포드와 악랄한 주인 엡스에게로 넘겨지며 12년간의 노예생활을 하게 된 노섭. 구타와 폭언, 강간과 학대로 점철된 끔찍한 노예생활 끝에, 캐나다에서 온 한 백인의 도움으로 마침내 자유인임을 밝힐 증명서를 가져와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2. 감상평  

 

     처음부터 어느 땅에서는 노예가 허용되고, 또 다른 땅에서는 금지되는 것이 문제였다. 같은 흑인이라도 누구는 자유인이고 누구는 노예라는 식의 임의적인 구분 자체가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전에 피부색에 따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물건으로 취급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정상은 아니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어느 공간에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으니, 나는 괜찮은 쪽에 있다는 생각은 더 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늦추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안전’마저도 언제라도 사라져버릴 수 있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었지 않은가.

 

     이런 차원에서 노섭의 ‘해방’은 한 개인사(個人史)지, 노예제 자체에 대한 승리라고 보기엔 어렵다. 그 자신은 자유인 증서를 얻어 집으로 돌아가던 날, 함께 매를 맞고 학대당하던 팻시는 뒤에 남아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던 모습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의 경험은 그저 한 개인의 불행이었을 뿐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노섭이라는 인물이 비난받아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런 개인적 경험을 책으로 쓰고 그것이 당시로서는 놀라울 정도인 십만 부 이상이 팔려나가고, 그 본인도 노예해방운동에 뛰어들면서 사건의 의미는 보다 크게 확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에선 그 부분을 그리고 있지는 않고 있으니까.. 영화 자체만으로 보면 여전히 한계가 있다고 밖에..

 

 

 

 

     영화 속에서 흥미로웠던 부분 중 하나는 노예를 부리는 쪽과 학대받는 쪽 모두가 같은 종교인 기독교를 믿고 있다는 점이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노예를 조롱하는 관리자의 노래를 배경으로 성경을 낭독하는 주인의 모습을, 또 성경구절을 읽어주고는 노예를 학대해도 좋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주인을 그리고 있지만, 동시에 힘든 일을 당하면서도 흑인영가를 부르며 언젠가 심판의 날이 올 것을 믿으며 신앙으로 버텨가는 노예들의 모습도 담겨져 있다.

 

     어떻게 한 종교가 두 계급에 동시에 유익을 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만 한 부분이다. 종교란 잘못하면 숙명론으로 변질되거나 언제나 현실 그 자체를 정당화하거나 강화시키는 식으로 나갈 수 있다는 점을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달까. 물론 정확히 말하면 노예들은 신앙으로 인해 자신들의 처지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았고, 오히려 극단적인 위기의 순간에 삶의 의미와 목표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해 주는 키(key)였다고 하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노예제는 전쟁과 더불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악이다. 둘 다 자신이 상대보다 우월하다는 극도의 교만함에서 비롯되는 범죄다. 소위 ‘문명화’라는 건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어떻게 대하느냐의 하는 부분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 거다. 이런 의미에서 다시금 고대의 ‘채무노예’와 비슷한 계급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은 분명 우려스러운 모습이다.

 

     다시는 인간이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끔찍한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라며, 한 번쯤 볼만한 작품. 결코 편한 마음으로는 보기 어려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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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정권의 숙청작업을 피해 남한으로 귀순한 특수부대원 지동철(공유). 자신의 아내와 딸을 죽인 리광조(김성균)를 찾아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살아가던 그를 품어주던 유일한 사람인 박회장이 어느 날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고, 우연찮게 그 자리에 있었던 동철이 범인으로 몰리게 된다.

 

     최정예 방첩대원인 민대령(박희순)이 동철을 쫓기 위해 전담반에 소환되었고, 여기에 모든 음모를 꾸민 국정원 김실장(조성하)도 동철을 죽이고 그가 현장에서 가져간 비밀문서를 되찾으려 한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펼쳐지는 추격전.

 

 

 

 

2. 감상평  

 

 

     잘 만들어진 액션 영화다. 감독은 한국영화 특유의 출생의 비밀이나 연인에 대한 과몰입 같은 것을 넣지 않고, 순수하게 액션과 추격전만으로 맛을 낸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캐릭터 소개는 빠르고 강렬하게 이루어지고, 이후에는 군더더기 없이 바로 추격전으로 전환된다. 추격전의 스케일은 굉장하고 속도도 빠르다.

 

    배우들도 제대로 연기에 녹아드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주인공인 공유는 환상적인 액션을 보여주고, 추격자 역의 박희순도 모처럼 긴장감을 느끼게 만드는 연기를 보여준다. 여기에 메인 악역 조성하나, 최근 드라마로 인기 절정에 오른 김성균 같은 배우들도 조연이지만 확실한 몫을 해 주고 있으니, 간만에 제대로 몰입이 되는 영화를 봤다.

 

 

 

 

     공유를 좋아하는 여성팬이나, 화끈한 액션을 좋아하는 남성팬 양쪽 모두 만족스럽게 볼 수 있을 것 같은 영화. 겉 멋 가득 든 허세 캐릭터들이 보이지 않는 게 무엇보다 큰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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