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건 부두로 가는 길 부클래식 Boo Classics 43
조지 오웰 지음, 김설자 옮김 / 부북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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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총 2부 13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13장의 초반에 실려 있는 저자의 요약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게 좋겠다.

 

     “이 책의 1부에서 나는 몇 가지 간단한 부수적인 자료를 써서 우리가 처해 있는 곤경을 설명하였다. 2부에서 나는 왜 그다지도 많은 품위 있고 정상적인 사람들이 유일한 구제책, 즉 사회주의라는 구제책에 불쾌감을 가지는지를 내 견해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2. 감상평    

 

     예비군 훈련이 내려준 축복으로 2박 3일 동안 가져간 두 권의 책을 읽을 수 있었다.(작년엔 가져간 한 권을 두 번 정독해서 읽어서 이번엔 두 권을 가져갔는데, 내년엔 세 권을 들고 가던지 해야겠다.;;)

 

 

     ‘동물농장’, ‘1984’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자였다. 사회주의라는 철학은 인간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경제적인 부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 특히 경제적인 약자들 -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사상이다. 충성된 사회주의자라면 개인의 영달보다는 약자들이 처한 상황의 개선, 나아가 근본적인 해결을 모색하는 게 당연하다. 그 사상과 원리의 타당성을 묻는 작업은 별도로 하더라도, 최소한 내가 돈 많이 버는 게 사회 전체에도 유익한 일이라며 사회 전체로 하여금 문제를 회피하게 만드는 체제보다 도덕적/윤리적으로 열등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게다.

 

     오웰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이 책의 1부는 당시 영국 북부의 광산마을들을 직접 방문해 그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고 기록한 일종의 취재인데, 이를 통해 오늘날 서구사회가 취하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체제가 과연 최선의 선택이었는가를 실감나게 지적한다.(특히 직접 수백 m 아래로 갱도를 타고 내려가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은 마치 직접 그 길을 기어가고 있는 듯한 생생함을 준다.) 저자는 이런 현실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건 바른 사회주의의 회복이라고 진단한다. 하지만 이미 그가 살고 있는 시대에도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외면하고 있었고, 오웰은 사회주의자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데 이 책의 두 번째 부분을 할애한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효과를 보지 못했는지, 이후에도 영국에서는 사회주의 정당이 정권을 차지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중도좌파 정도 되는 노동당에선 총리도 나오고 하던데) 다양한 원인이 있었겠지만,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그 사상이 현실로의 적용을 꾀할 때 필연적인가 싶을 정도로 자주 언급되는 폭력적 수단들이 주는 위화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 반대쪽에 서 있는 자본주의가 평화적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그게 폭력에는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이 옳다는 식으로 간다면 인류의 지적, 영적인 발전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1900년대 초반을 살아갔던 저자는, 당시 영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부조리들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가 선호했던 체제에 대한 호불호를 뒤로 하고라도 최소한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는 배울만한 점이 있다. 워낙에 자신이 가진 서푼짜리 지식을 가지고 곡학아세하는 비열한 ‘전문가’들이 넘쳐나는 우리나라의 상황에는 더욱. 자신과 세상에 대해 좀 더 진실한 지식인들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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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공할 힘 C. S. 루이스의 우주 3부작 3
C. S. 루이스 지음, 공경희 옮김 / 홍성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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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영국의 브랙톤 칼리지의 교원인 마크. 대학의 주류에 편입되어 성공하는 것이 목표인 그는 선배 교수의 권유로 ‘국가공동실험연구소’라는 단체에 (지나치게) 좋은 조건으로 영입된다. 하지만 그렇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서 좀처럼 연구소에서 자신이 하게 될 일이 무엇인지 모호하다는 점 때문에 마크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가운데, 연구소는 브랙톤 칼리지 소유의 한 숲을 매입해 일대를 완전히 헤집는 거대한 공사를 시작한다.

 

     한편 마크의 아내인 제인은 얼마 전부터 이상하고 무서운 꿈을 꾼다. 그녀의 꿈은 실은 실제로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혹은 일어날 일들을 보는 일종의 예지몽이었다. 그 꿈들은 연구소에서 벌이고 있는 거대한 음모에 관한 것이었고, 이를 눈치 챈 연구소 측은 그녀를 잡기 위해 마크에게 관심이 있는 척 했던 것.

 

     시간이 흐르면서, 과학주의에 기반해 소수의 엘리트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멸절시키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내려는 연구소 측의 음모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제인은 이 음모를 막으려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지구의 미래를 건 대결에 뛰어든다.

 

 

2. 감상평   

 

     C. S. 루이스의 ‘우주 3부작’을 마무리 하는 책답게, 우선 그 분량부터 엄청나다. 전작들의 두 배 이상이 되는 두툼한 두께. 담겨 있는 내용 역시 인류 역사 전체를 꿰뚫는 듯 거대한 사상들이 맞부딪힌다. 인간 이성을 숭배하며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연구소 세력과 영적인 존재를 인정하며 그와의 협력적인 삶을 모색해나가는 피셔-킹(전작의 랜섬이다)의 공동체는 정확히 유물론적 세계관과 유신론적 세계관 사이의 대결을 옮겨 놓고 있다.

 

     작가는 이야기를 통해 유물론적 세계관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여러 군데서 지적한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방법론적인 한계(오직 그것의 도구로 측정할 수 있는 것만 말할 수 있다)와 존재론적인 한계(결국 그것은 그 세계관을 주장하고 있는 인간의 가치마저 먼지로 전락시켜버리는, 그래서 언제라도 쓸어버리면 그만인)를 드러내면서, 그것이 가진 (애써 부정하고 있는) 종교적 특성까지도 꼬집어 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사상을 전파하기 위한 이야기로만 읽을 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 책에 대한 찬사들은 다 거짓말이었으리라.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과 함께 판타지 문학의 선구자이기도 한 루이스는 작가로서도 뛰어난 명성을 얻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그런 작가의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각각의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들은 특별한 캐릭터를 지니고 있고, 이야기의 전개 역시 단선적이지 않고 풍성하다. 소설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책.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책 속의 ‘국가공동실험연구소’를 ‘국공연’이라는 약칭으로 부르는 부분. 처음부터 입에 잘 달라붙지도 않는 어색한 발음이 나는 이름인데다, 왠지 모르게 붕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냥 ‘연구소’라고 부르거나 영어식 약자인 N.I.C.E.라고 표기했더라면 어땠을까.

 

 

     저자의 다른 책들에서 읽을 수 있었던 인생과 세상에 관한 탁월한 통찰들이 어떻게 이 소설 안에 녹아져 있는지를 발견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다.(물론 이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분명 루이스가 쓴 모든 책이 탁월한 통찰을 보여준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 책은 읽어 볼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저자가 작품 속에서 비유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거대한 세계관들의 전쟁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정신 차리지 않으면 책 속의 마크처럼 주저주저하다가 정말로 중요한 걸 놓쳐버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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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위해 오로지 잘못된 것만 끊겠다고 한다면

주님에 대한 사랑을 말할 자격이 없다.

잘못된 것은 누구든 마땅히 끊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마저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 오스왈드 챔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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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어린 시절부터 단짝이었던 릴(나오미 왓츠)과 로즈(로빈 라이트). 둘은 나란히 아들을 낳았고, 당연히 그 둘도 자라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릴의 아들인 이안이 로즈와 관계를 맺었고, 이를 보게 된 로즈의 아들 톰은 홧김에 릴에게 달려갔고 곧 둘 역시 같이 밤을 지새우게 되었다. 사실을 알게 된 네 사람은 약간의 충격을 받더니 곧 현실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한다. 그렇게 꼬이게 된 관계.


     시간은 흘러 톰과 이안도 성인이 되었고, 톰이 일을 하다가 만난 아가씨와 결혼하면서 네 사람의 복잡한 관계는 정리되는 듯했다. 얼마 후 이안 역시 톰의 피로연장에서 만난 금발의 아가씨와 결혼, 톰과 이안은 똑같이 예쁜 딸까지 낳게 된다. 그렇게 모든 건 한 때의 비밀에 붙여지고 모두들 새로운 삶을 시작하나 싶었지만, 이안은 톰이 자신의 릴과 여전히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실을 목격하고 폭발하고 만다.


     다시 한 번 모든 게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 놀랍게도 네 사람은 예전과 같은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선택했고, 그렇게 영화는 평온한 척 마무리 된다.



2. 감상평    


     두 커플의 나이차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어머니의 친구, 친구의 어머니와 사랑에 빠진다는 게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나이가 절대적인 건 아니니까. 다만 톰과 이안의 나이가 열아홉에 불과했다는 건 잘 해야 남편과 사별하고 떨어진 두 여자가 미성숙한 서로의 아들들을 자신들의 성적 위안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비난도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그걸 아무리 좋은 그림으로 포장을 한 듯, 결국 영화 속 인물들 역시 자신들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않음을 인식하고 있지 않던가.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낳았는데도 여전히 혼외정사를 즐기며 그에 대해 별다른 후회도 하지 않는 네 인물들의 모습은, 남들(여기에는 며느리 혹은 아내, 손녀 혹은 딸도 포함된다)은 어떻게 되든, 내 감정에만 충실하면 그만이라는 지독한 자기중심적 사고의 절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물론 사랑이란 건 지극히 내밀하고 개인적인 면이 있는 게 분명하지만, 이 영화에서도 보이듯 최근의 그것에 대한 개념은, 과연 우리들이 정신이 점점 발전하고 있는 건지 쉽게 확신할 수 없게 만든다. 입고 다니는 옷은 소재의 차이만 있을 뿐, 원시 시대의 그것과 그다지 형태적으로 다를 바가 없고, 그렇게 맨살을 드러내고 다니다가 아무나 마음에 들면 당장에 섹스부터 생각하는 수준이니.. 프로이트적 인간이해를 좋아하지도, 대부분에 걸쳐 동의하지도 않지만, 이쯤 되면 집단적으로 남근기나 생식기 어딘가에서 더 이상 발달이 지체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시내로부터 벗어난 한적한 해변에 집을 짓고, 따뜻한 날씨 덕인지 아니면 바다가 가까이 있어서인지, 옷을 시도 때도 없이 훌렁 벗고 다닌다. 한정된 공간에 그렇게 네 사람이 함께 어울리며 뒹구니, 안 그래도 감정의 지배에 모든 걸 내어 맡겨버린 현대인들에겐 얕게나마 남아 있는 윤리적, 혹은 도덕적 문턱은 이제 아무런 장애도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영화 속 그림은 아름답다. 하지만 영화가 그리고 있는 건 그다지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다. 극한 기근으로 서로의 아들을 바꿔서 잡아먹었다는 어떤 엄마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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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10-22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예술이라지만 가끔은 도가 지나치다 싶은 것들이 있네요.

노란가방 2013-10-24 18:54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이젠 누가 얼마나 더 자극적으로 이야기를 꾸며내느냐가 예술성을 높여주는 양 생각하는 것 같아요.
 

1. 줄거리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라온 린다(아만다 사이프리드). 어느 날 친구와 우연히 함께 간 롤러장(?)에서 척(피터 사스가드)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결국 스물한 살의 나이에 집을 나와 척과의 결혼생활을 시작하지만, 빚에 쫓기고 있던 척은 그녀를 포르노 영화에 출연시키기로 한다. 우연찮게도 그녀가 찍은 영화는 사상 초유의 대박 포르노영화가 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며 린다는 일약 스타에 오른다.

 

     하지만 계속되는 척의 폭행과 위협으로 린다는 점점 더 불행한 삶으로 몰리고 있었고, 결국 남편으로부터 도망을 나와 자신의 지난 이야기들을 담은 자서전을 낸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

 

 

 

2. 감상평       

 

     가장 기본적인 질문부터 해보자. 포르노 영화에 출연해서 유명해진 여자를 ‘스타’라고 부르는 게 타당할까? 스타에 대한 정의야 개개인이 느끼는 기준이 다르겠지만, 또 이미 무슨 행사 때마다 여자 연예인들이 마치 정육점에 걸려 있는 고깃덩어리처럼 자기의 맨살을 드러내놓고 과시하며 뿌듯한 미소를 짓는 게 미덕(?)이나 되는 것처럼 되어버린 세상이지만, 솔직히 이 질문은 해 볼만 하지 않은가? ‘포르노 스타’가 과연 사회로부터 존중받아야 하는 지위나 현상인가?

 

     영화의 초중반부는 이런 세태를 그대로 그려내며 위에서 제기한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는 길을 착착 걸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중반 이후부터 분위기는 서서히 바뀌어간다. ‘그 과정을 여주인공이 정말로 원했던 것이 아니라면’이라는 식으로. 물론 이렇게 되면 주제는 가볍게 선과 악의 구도로 정리된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신체와 관련해 대신 결정해서는 안 되는 거니까. 우리는 린다의 척으로부터의 탈출 및 독립을 응원하면 그만이다. 다만 그러면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은 사라져버렸다. 만약 그녀가 원했던 거라면 이 현상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하는.

 

 

 

 

     영화 속 등장하는 영화(‘목구멍 깊숙이’)가 실제 개봉했을 당시 미국은 ‘성 해방’과 ‘평등’ 같은 가치들을 부르짖고 있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이 뜨거운 감자가 떨어졌으니 어지간히 시끄러웠을 테고, 당연히 영화를 직접 보려는 관객들도 많았으리라. 그런데 여기서 다시 질문 하나. 포르노랑 성해방이 무슨 상관인가? 포르노를 막으려는 사람들에게 맞서 싸우는 게 성해방인가? 오히려 성노예화, 인간의 가치를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는 건 반대쪽 사람들 아닌가? 자칭 여성해방론자들이 판을 엉뚱하게 읽으며 뻘짓을 하는 동안 개나 소나 자기가 하고 싶으면 아무하고나 섹스하는 게 성적인 해방이고, 자유라고 하는 우스꽝스러운 주장이 이미 널리 퍼져버린 지 오래다.

 

     문제는 억압적인 가부장적 체계, 남성우월주의적인 왜곡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멍청한 마초들에게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자기의 눈앞에 보이는 신체의 일부에 ‘자유(?)’를 부과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역사적 사명인 양 깃발에 써 휘두르고 다니는 지독한 사회적 근시안의 소유자들도 완전히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기는 어렵지 않을까.

 

 

     여주인공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변신은 놀라울 정도다. 확실히 맘마미야 이후로 다양한 폭의 연기에 도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게 ‘자신의 결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만 좀 더 힘이 있는 주제를 이렇게 한 개인의 과거사 정도로 그려내는 감독들의 작업엔 그다지 매력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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