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편안한 집처럼 여기게 해 준다.
그 교리를 통해 우리는 이 창조 세계가 모두 그렇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깨닫게 된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 일을 뜻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며,
만물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물고 있다.
- 알리스터 맥그래스,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사도신경』 중에서
90년대 말을 배경으로 한 청춘 로맨스 소설이다. 지난 번 인천의 한 목회자 공부모임에 특강을 하러 갔다가, 한 목사님께서 동생분이 쓴 책이라고 선물을 해 주셔서 손에 들게 됐다. 덕분에 오랜만에 이런 내용의 책을 보게 됐다.
단순한 청춘 로맨스라기에는 주인공의 스타트가 너무 기구하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외삼촌 집에서 자랐는데, 외숙모라는 인간은 다분히 사이코패스 기질이 있어 그런 주인공 재인을 학대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외삼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결국 재인도 집에서 사실상 쫓겨나게 되는데, 다행이 성적은 좋았던 지라 서울의 유수의 대학에 입학이 예정되어 있던 재인은 말 그대로 가방 하나만 들고 서울로 올라온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생활하던 재인에게 어느 날 복학한 선배 우진이 나타났고, 그와의 짜릿한 연애가 시작된다는 이야기.
어린 재인이 학대받고, 유기당하고,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보호와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모습은 슬펐고, 마침내 그녀 앞에 우진이 나타났을 때는 오히려 너무나 적절한 타이밍에 나타난 그에 대해 의심이 생길 정도였다. 혹 재인의 상처에 또 다른 상처를 더하지는 않을까 해서 말이다.
다행이 그의 마음은 진실했고, 둘은 그렇게 행복한 연애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 연애 기간은 너무나 짧고, 또 너무 찬란했다. 갑작스러운 이 상황을 이해하는 일은 소설 속 재인뿐 아니라 독자도 어렵기는 마찬가지. 하지만 다행이도 그 고생을 겪으면서 재인은 조금씩 단단해져가고 있었고, 마침 우연한 만남들(이 작품의 약점 중 하나는 이런 우연이 좀 많다는 부분이다. 이 걸 ‘운명’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을 통해 천애고아였던 재인의 곁에도 점차 ‘가족’이 생겨간다.
결국 재인을 치유한 것은 사람이지 않았나 싶다. 어린 시절 사람에게 받은 큰 트라우마는 그녀의 주변을 지켜준 또 다른 사람들 덕분에 점차 회복될 수 있었다. 무서운 것도 사람이지만, 곁에 있는 사람이 주는 힘은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
작가 후기에 이 책이 “제인 에어”에 대한 오마주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의 주인공 ‘재인’은 발음도 유사하다. 작가가 직접 꼽아주는 유사성을 보면 두 작품의 공통점이 제법 많다. 무엇보다 작가가 반했던 ‘완벽한 로맨스’가 중심이 되는 것도 그렇고.
작품의 결말 부분이 열려 있다. 그게 온갖 시련과 핍박을 받으며 자랐던 재인에게 어느 정도 선택권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 그리고 이 과정이 무슨 엄청난 후원자가 갑자기 생기거나 그런 게 아니라,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재인 스스로 만들어 낸 상황이라는 것이 마음에 든다. 한 명의 상처 입은 사람이 도리어 다른 사람들에게 회복과 치유를 일으키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부분은 헨리 나우웬의 “상처 입은 치유자”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 책은 한 온라인 글쓰기 플랫폼에서 인기를 얻어 결국 출판까지 이르게 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각 장의 비중이라든지 내용이 온라인 플랫폼에 맞게 딱딱 떨어진다. 적당히 끊어 읽기 좋다는 말이고, 드라마 같은 2차 창작물로 발전시키기에도 좋다는 말. 물론 앞서도 살짝 언급했던 아쉬움도 있지만, 뭐 요샌 웹드라마 같은 것도 많으니까. 따뜻한 이야기가 좋다.
이 책의 저자는 유대 백성들이 바벨론에 머무는 동안, 성경 속 죄의 개념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이전의 기록에서 죄는 주로 짐이나 오점 등으로 설명된다. 대표적인 것이 속죄일에 백성들의 죄를 지고 광야로 내보지는 염소다. 하지만 페르시아 통치기를 거치면서 죄가 ‘빚’이라는 개념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제 죄는 어떤 사람의 천상 장부에 마이너스로 기록되는 무엇(일종의 영적 채권)이 되었고, 그 수치를 제로로 만들어야만 구원이나 회복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내용으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
이런 변화의 중요한 이유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페르시아는 아람어를 공용어로 사용했고, 아람어에서는 죄를 빚으로 표현하는 습관이 있었고 이런 특성이 자연히 유대인들의 사상에서 영향을 주었다는 말이다. 이는 자연히 신약의 유대인들의 표현에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주기도 가운데 죄 용서에 관한 부분이다. 우리말 번역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구절은 원문으로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 준 것 같이~’이다.
책의 대부분은 구약 성경 속 죄의 개념을 연대순으로 훑어보면서, 저자의 주장을 입증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저자의 설명만 보면 정말로 구약 내에도 이미 이런 종류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처럼 보인다. 다만 저자는 이 작업에 본문비평을 끌어다 오는데, 본문비평이 가지고 있는 기준의 모호함이라는 부분은 짚어둘 만하다(솔직히 말하면 본문비평의 주장들 상당부분은 이렇게도 가능하고 저렇게도 설명이 가능한 것들이다).
예컨대 저자는 창세기에 있는 내용도 죄를 빚으로 묘사하는 구절은 상당히 후대에 편집된 부분으로 여긴다. 그 결과는 어떻게 보면 그냥 죄를 빚으로 묘사하는 건 후대의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이전 시기의 것이라는, 임의적인 구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즉 같은 책이라도 일부는 앞선 시대, 또 일부는 후대의 것 하는 식으로 구약 성경 전체를 파편화해버린다.
한편 죄의 개념에 대한 이런 변화는 자연히 그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지에도 영향을 끼친다. 죄가 빚이 된 이상, 그 빚은 채무자가 갚아야 할 무엇이 된다. 여기서 유대인들의 포로생활은 이 빚을 갚는 기간이라는 개념이 나오고(예레미야나 역대기, 다니엘), 또 한편으로는 선행을 통해 하나님의 장부에 기록된 자신의 죄의 값을 줄여나간다는 개념 또한 나오게 된다(이 개념은 중세에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 시대에도, 예컨대 단4:27에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건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선행(혹은 자선)이 왜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졌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유대인들은 재산 중 얼마만큼을 여기에서 사용하는 게 좋을 지에 관한 나름의 기준에 관한 전승도 존재했고(처음에는 재산의 1/5, 이후에는 나머지 재산의 이자수익의 1/5), 이건 하나님의 장부에서 빚을 지우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당연히 이런 개념은 기독교 안으로도 들어왔다. 중요한 건 이 때 선행으로 빚을 줄여가는 작업은, 자력구원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인간이 지은 죄는 너무나 커서 사람 차원에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무엇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문제를 줄여갈 수 있는 방법으로 자선을 허락하셨다. 인간이 이를 통해 문제를 조금씩 해결해 갈 수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 흥미로운 부분이다. 루터는 면벌부 판매 관행을(그리고 그 돈으로 호화로운 교회 건물을 짓는 것을) 비난했지, 선행을 비난하지 않았다.
저자는 죄를 빚으로 보는 이런 관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설명하는 데도 한 가지 중요한 지침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한 방식이 무엇인가 하는 점인데, 하나님을 자신의 아들을 죽여야만 분이 풀리는 잔인한 존재로 묘사하지 않으면서, 죄가 가진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는 매커니즘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안셀무스의 논의가 주된 자료로 사용되는데, 이 부분도 한 번쯤 생각해 볼 부분이다.
책의 논지를 끝까지 밀어붙이다보면 하나님 백성의 삶에 있어서 선행, 혹은 자선의 중요성을 대단히 강조하게 된다. 혹자는 여기에서 자력구원의 자취를 느낄 지도 모르겠으나, 우선은 앞서 랍비들이 제안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보는 방법도 있고, 무엇보다 성경 자체에서 죄라는 빚을 갚는 방법에 관한 언급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한 부채증서의 폐기와 함께 동시에 등장하고 있다면, 우린 이 또한 무시할 수많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