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도박.
이번 편은 인터넷 도박이다. 그 자체로는 무슨 폭력이나 그런 게 작동하지는 않지만, 사실 실상을 보면 조직폭력배들이 설계하고 운영하는, 그리고 이 과정에서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머리가 나빠 기술적인 문제를 직접 해결하지는 못하니 해외 취업사기를 동원해 납치된 이들을 감금하고 노에처럼 부리는, 말종들이다.
물론 조폭이 관여되어 있긴 하지만, 이건 지능범죄 쪽에 가깝지 않나 싶은데, 여기에 피지컬로 승부하는 마석도가 나선다. 뭔가 좀 어울리지 않는 그림인데, 영화는 뭐 그래도 어찌어찌 마석도의 팀이 사건을 해결해 가는 그림을 그리는데, 마동석 배우의 스케쥴이 안 맞았는지 필리핀에 차려진 불법 도박사이트의 본거지를 치는 일에는 참여하지 않은 채, 굳이 사이트를 접수하기 위해 국내로 돌아온 김무열(백창기 역)과 맞서 싸우는 그림을 그린다.
아쉬운 건 나쁜 놈들을 쳐 패서 잡아넣는 일이야 좋다지만, 정작 그런 인터넷 도박에 빠져들어가는 위험성에 대해서는 딱히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 내내 피해자는 취업사기로 납치되어 프로그램을 돌리는 사람들 몇몇 뿐이고, 나머지는 다 폭력배들끼리 치고받는 그림뿐이다.
그런데 이런 인터넷 도박은 생각보다 우리 삶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는 듯하다. 예전에 봤던 한 뉴스에서는 중고등학생, 심지어 초등학생도 스마트폰을 이용해 온라인 도박에 빠져 빚까지 진다고 하니...
여기에 코인까지?
작중에는 필리핀에서 인터넷 도박장을 운영하는 백창기가 한국에서 그 수익을 제대로 정산해주지 않는 사장 장동철(이동휘)에게 불만을 갖고 굳이 한국으로 기어들어오는 내용이 묘사됩니다. 이때 장동철은 불법 인터넷 도박으로 번 수익으로 한국에서 코인사기를 크게 한 탕 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백창기의 개입으로 무산되긴 했지만.
여전히 코인이라는 이름의 각종 사기들이 널리 퍼져있다. 애초에 대안화폐를 추구했던 비트코인도 이제 더 이상 화폐로서는 기능을 하지 않는다. 그저 투기의 대상이 될 뿐. 그리고 요새 나오고 있는 온갖 종류의 소위 ‘짭코인’들은 이름만 코인이지 그저 파생상품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건 근본적으로 투기에 가깝다. 정신 차리자.
다만 영화에서는 본격적으로 무슨 이야기가 진행되는 건 아니고, 살짝 맛만 보여주는 수준이고, 장동철 캐릭터가 워낙에 가볍게 나오는지라 그 위험성도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도박이든 코인투기든 결국 인간의 과도한 탐욕, 손쉽게 일확천금을 얻고자 하는 허황된 욕심 때문에 빨려 들어간다. 사기가 뻔히 보이는 일에 스스로 걸어 들어간 사람은 책임이 없을까?
악역 김무열 그리고 개그캐 박지환
이전 편에서도 언급했지만, 역시 이 시리즈는 악역이 얼마나 살리느냐가 중요하다. 전편의 경우 마석도가 상대해야 하는 세력도 두 개로 나뉘어 있고, 각각의 최종빌런도 생각만큼 인상적이지 못했는데, 그래도 연기파 배우인 김무열은 나름 존재감을 보이긴 한다.
다만 영화 속 김무열이 연기하는 백창기는 입체적이기는커녕 평면적이다 못해, 아예 흑백만화처럼 보일 정도로 단순하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살인까지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도박장 운영 수익을 얻으려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에 관한 주변의 다른 이야기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악인에게 멋진 서사를 굳이 그려줄 필요는 없지만, 조금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김무열 못지않게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건 역시 박지환이 연기한 장이수다. 액션 코미디를 추구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대놓고 코미디 부분을 담당하고 있으니 빠질 수 없는 부분. 전편의 초롱이 고규필의 포지션인데, 뭐 엄청나게 임팩트가 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영화의 성격을 뒷받침해 주는 중요한 조미료다.
전체적으로 비슷한 구도로 벌써 네 편째다. 별다른 주제의 발전도 없고, 매번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기만 하는 포켓몬 시리즈를 보는 느낌?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드디어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다. 사실 강 자체야 그리 깊지 않은, 우리로 치면 “무슨무슨 천” 정도인 것 같지만, 이 강을 중심으로 로마 본국과 속주가 나뉘어졌으니 정치적인 의미가 큰 강이었다. 이제 카이사르가 쓴 또 하나의 명작인 “내전기”의 이야기가 풀려나온다.
루비콘 강 도하와 관련해서 아주 유명한 어구가 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인데, 카이사르가 강을 건너며 자신의 심경을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작가는 이 말이 지나치게 우울하고 숙명론적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 말은 수에토니우스가 전하는데, 작가는 그보다는 플루타르코스 쪽의 의견을 따라서, 카이사르가 고대 그리스 작가인 메난드로스를 인용해 “주사위를 높이 던져라!”고 말한 것으로 묘사한다. 확실히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주도하고자 했던 카이사르에게는 이쪽이 좀 더 어울리긴 하는 것 같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역시 보니파라고 불리는 보수파의 맹목적인 공격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공화국을 수호하는 당사자라고 여기던, 오로지 카이사르를 실각시키는 것만이 인생의 목적인 양 온갖 억지 죄목과 법 논리들, 그리고 자신들이 가진 법적 권력을 총동원해 몰아세웠으니, 수차례 타협을 제안했던 카이사르로서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유일한 다른 선택지는 그냥 모든 걸 포기하고 국외로 망명하는 건데, 이걸 선택지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중에서도 유독 강렬하게 등장하는 건 카토다. 마치 자신의 생각 자체를 공화국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 같은, 과대망상에 빠져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니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기존의 관례나 전통(자칭 ‘보수파’로서는 모순적인 일이다)이 허용했던 일을 넘어서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이른바 질서를 지키기 위해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라는, 전형적인 자가당착적 인물. 사실 이런 사람을 라이벌로 만나는 건 굉장히 고달픈 일이다.
만약 술라였다면 그는 진작 아무 거리낌 없이 카토를 죽여 버렸을 테지만, 카이사르는 달랐다. 그는 공화국의 전통에 따라 합법적인 방식으로 제일인자가 되고자 했고, 이런 고집은 결국 그 자신을 내전으로 몰아가고 말았다. 공리주의자라면 한 명(카토)의 희생과 다수의 (병사들) 희생 중 전자를 택하겠지만, 세상사가 또 그렇게 간단히 정리되지는 않는 법이니 어렵다.
오늘날에도 법의 적용을 다루는 온갖 정부 기관들이 오직 한 사람을 죽이려고 달려든다면, 이 과정에서 합법과 불법, 편법과 탈법을 종횡무진 오고가면서 물어뜯는다면, 그 상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소크라테스처럼 멋지게(?) 독주를 마시는 것만이 정답은 아닐 것 같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와 가장 크게 이미지가 달라진 인물로 라비에누스가 있다. 갈리아 전쟁 당시 카이사르 휘하의 군단장으로 활약을 했지만, 내전이 시작된 후에는 폼페이우스에게 달려가 카이사르를 가장 괴롭혔던 인물이다. 두 작가 모두 참고할 자료는 비슷했을텐데, 시오노 나나미는 그를 능력 있고 의리도 있지만, 피호제를 따라 폼페이우스 편에 서서 싸울 수밖에 없었던 고독한 늑대 비슷하게 묘사하지만, 콜린 매컬로는 그를 잔인하고 야만적인, 길게 보지 못해 카이사르로부터 내쳐진 인물로 그린다. 어느 쪽이 실제 인물의 성격과 맞을 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차이는 재미있는 부분이다.
이 외에도 무능한 브루투스, 능력은 있지만 약간 관심병을 가지고 있는 듯한 안토니우스, 일찌감치 등장해 왕국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클레오파트라 등 다양한 인물들이 “로마인 이야기”와는 조금 다르게 묘사된다.
사실 결정적으로 두 작품의 차이는 전쟁의 묘사에 있다. 시오노 나나미 쪽이 전쟁의 배경과 전투의 경과, 전략적인 부분에 과한 해설 등이 월등히 낫다. 왜 디라키온에서 양측이 그런 전투를 해야 했는지, 또 왜 다음 전장이 파르살로스가 되어야 했는지는 “로마인 이야기”를 읽는 쪽이 훨씬 재미있다. 콜린 매컬로는 전투 묘사라든지 전술과 전략에 관한 이해에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또 인물의 생생한 묘사라든지, 한 인물의 내력을 충분히 보여준다던지 하는 부분에서는 이쪽이 더 나으니까.
내전이 조금 빨리 끝나버린 감이 없지 않다. 이제 남은 시리즈는 두 개밖에 안 되고, 그 중 카이사르 이야기는 한 개에 불과하다. 아까우니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가 보자.
악의 근원 못지않게 선의 근원도 신비다.
끊임없이 선을 추구하고 낙심하지 않고 선의로 남을 대하는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넘어 경이감을 안겨 준다.
거기서 초자연적이고 신적 근원을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 홍종락, 『악마의 눈이 보여 주는 것』 중에서
구약 성경의 배경은 고대 근동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어떤 진공 환경 속에서 살았던 것이 아니라 다양한 힘과, 문화와 종교가 어우러져 있던 실제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수 천 년의 시간적, 공간적, 역사적, 문화적 간격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오늘 우리가 구약을 읽으면서 그 본문 속에 묻어있는 당시의 이런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이런 오해 가운데 지극히 현대적인 관점으로 구약을 읽어내는 오류가 쉽게 발생하곤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윤리적 기준으로 고대 본문들 속 행위를 재판하려 한다든지, 오늘의 학설과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본문들을 죄다 허구로 몰아가든지 하는 나이브한 이해들은 그리 드물지 않다.
이 책은 그런 오해를 조금은 줄여주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다. 물론 책 한 권으로 구약의 모든 배경을 설명할 수는 없고, 이 책의 주요 목표는 구약 시대의 다신교적 배경이다. 고대에는 다신교가 일반적이었고, 그 가운데서 여호와(책에서는 “야훼”라는 명칭을 사용)라는 유일신으로 돌이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 과정에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던 이유는 무엇인지 등을 차분하게 설명해 나간다.
우리(그리스도인들)는 흔히 구약에서 반복적인 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고 한심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어쩌면 저렇게 똑같은 잘못을 했다가 큰 곤경을 치르고서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듯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걸까 하는 식이다. 그 대표적인 본문이 사사기다. 가나안 정착 직후의 혼란스러운 몇 백 년간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책에서, 고대 히브리인들은 너무나도 쉽게 하나님을 버리고 주변 민족들의 우상으로 넘어가버린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오히려 그들이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로 돌아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그들의 삶 전체를 감싸고 있는 주변 환경과 문화는 각 지역마다 그 지역을, 또는 어떤 영역마다(강이나, 산이나 하는) 그 영역을 다스리는 신적 존재가 있고, 각 존재들은 특별한 고유의 능력이 있어서 자신에게 치성을 드리는 추종자들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생각이 진리로 여겨지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신들은 오직 신상들을 통해서만 어떤 공간에 임재할 수 있고, 대규모 신전을 운영하는 대제국들의 힘을 목격한 이상 이 모든 것을 그저 부정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구약을 보면 백성들이 그토록 자주 우상으로 돌아서는 모습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 구약 전체에 걸쳐서 어떻게 그런 백성들의 관점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돌이키려고 애쓰고 있는지도 보인다. 고대 경건한 히브리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점진적으로) 가르치고, 이방의 신들로부터 신성을 벗겨내는 작업을 끊임없이 반복해 왔다. 물론 이 작업도 고대의 방식으로 해 왔다는 점은 기억해 두어야 할 부분.
분명 신학을 다룬 책이지만 읽는 과정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아마도 저자가 동료 신학자보다는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일반 신자들을 예상 독자로 생각하고 쓰지 않았나 싶다. 특히 이런 부분은 마지막 장인 5장에서 두드러지는데, 이 장은 어떤 학문적 논의라기보다는 맘몬이라는 우상으로 형상화된 돈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열망에 대한 경고(그리고 적용)이다.
또, 이런 종류의 책을 쓰는 저자들의 경우 자신들이 소위 중립적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신앙적 표현들을 배제하거나 구약 본문에 대한 설명에서도 그와 비슷한 시도를 하곤 하는데, 이 책은 저자 자신의 신앙을 애써 감추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서문의 첫 문장이 바로 이 점을 분명히 하는 내용이었다(“나는… 독자들에게 내 신앙을 나누려는 목적으로 본서를 썼다”) 그렇다고 학문적 검토의 수준이 낮다는 의미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구약의 히브리인들이 살았던 세계를 좀 더 실감나게 맛보고 싶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