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와 쉐퍼의 대화
스콧 버슨, 제리 월즈 지음, 김선일 옮김 / IVP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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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변증’이란, 특별히 기독교 신학용어로서의 변증이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기독교 교리의 타당성과 합리성을 변호하고, 그 사실성을 증명해내는 일련의 노력들을 가리킨다. 기독교 공동체는 일찍부터 적극적으로 기독교 교리를 변증해내는 데 관심을 가졌고, 초기 기독교 교리의 정립에 소위 ‘변증가’들이 큰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

 

     이 책은 현대 기독교 안에서 가장 유명한 두 명의 변증가인 C. S. 루이스와 프랜시스 쉐퍼를 한 테이블에 놓고 비교, 대조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생전에 단 한 번도 두 사람이 만나 본 일이 없었다는 아쉬움을, 그들의 저작을 통해 간접적으로 가상의 대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다만, 물론 조금 후세대인 쉐퍼의 경우 루이스를 몇 번 인용하기도 했지만, 실제 대화만큼의 주고받음이 없다는 건 좀 아쉽다.

 

     공저자들은 몇 가지 항목을 설정하고 이 두 사람의 입장을 이에 맞추어 분석해 나간다. 책은 두 사람의 업적을 찬양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한계와 미흡한 부분까지도 아울러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2. 감상평    

 

     기독교 세계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책 좀 읽었다 하는 기독교인이라면 C. S. 루이스나 프랜시스 쉐퍼 같은 이름은 한두 번쯤 들어왔을 거다. 나 역시 C. S. 루이스의 팬이기도 해서, 홍성사를 통해 나온 그의 전집은 거의 모두 구입해서 책장 한 칸은 완전히 그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니까. 사실 이 책을 구입하게 된 이유도 바로 루이스 때문이었다. 이젠 그의 이름이 들어간 책이면 다 사 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책은 변증가로서의 두 사람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들이 쓴 많은 저작들을 두루 살핀 후, 그 안에 담긴 주장들을 하나의 논리로 다시 풀어내고는 두 사람의 주장이 얼마나 일관성이 있고, 체계적인가를 평가해 낸다. 쉽지 않은 작업을 한 저자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바로 그런 작업 방식 때문에 루이스와 쉐퍼의 의도에서 벗어난 결론들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평가했던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물론 루이스나 쉐퍼의 사상에 어떤 오류나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들도 각자가 서 있는 신학적 입장이 있고, 그 위에서 자신들의 논리와 상상력(특히 루이스의 경우)을 전개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쓴 각각의 책들은 그 원고가 가리키는 방향들이 미묘하지만 다른데, 이 책의 저자들은 그 모든 것들을 자신들이 만든 기준 안에 집어넣으려고 하고 있다.

 

     특히 예정과 자유의지라는 주제에 집착한 나머지, 두 사람의 모든 사상과 저술들을 이 카테고리 안으로 억지로 넣으려고 하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더구나 이 문제에 관해 저자의 신학적 배경(웨슬리안)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쉐퍼의 정통적인 장로교주의적 해답을 지속적으로 공격하고, 반대로 루이스의 성공회적 평신도의 입장(잠정적인 판단 유보)은 반복적으로 옹호한다. 아마도 그의 입장이 저자들의 신학적 입장과 비교적 부합하는 면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물론 책의 후반에 ‘축적 사례 논증’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와서 앞서의 (조금은 편향된) 비판적 시각을 약간 누그러뜨리기도 하지만.. 글쎄 이런 형식은 일관된 건지.

 

 

     책은 오늘날 이 시대에 맞는 변증의 모습을 고민한다. 변증이란 게 어차피 그 시대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담아내려고 했던 시도니까, 언제까지나 과거의 방식과 대답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는 게 맞다. 그런 의미에서 이전 세대의 탁월한 이들이 남긴 업적들을 창의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키려면 우선 이 책처럼 그 내용들을 잘 분석하는 작업이 앞서야 하는 거니까.

 

    여느 책도 그렇겠지만, 차분히 따져가며 읽어보면 유익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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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하나님을 너무 사랑함으로 보고 싶어

육체가 병들 수도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경이 보이면 얼마나 보이겠는가?’

 

- 존 오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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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 환경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아무리 비참한 처지에도 변화를 생각하지 않는다.

생활양식이 너무나 위태로워서

삶의 환경을 제어할 수 없다는 생각이 굳어지면

우리는 검증된 것, 익숙한 것을 고수하는 경향을 보인다.

우리는 정해진 삶을 따름으로써 내면 깊숙한 불안감을 중화시킨다.

 

- 에릭 호퍼, 『맹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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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가방 2013-04-25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의 이익과 정확히 반대되는 정당에 표를 주는 이유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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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사람들의 몸속으로 들어가 그 주인을 몰아내고 몸을 지배하는 외계인들의 침입으로, 인류는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동생을 지키기 위해 외계인들의 주의를 끌려고 나갔던 멜라니는 결국 그들에게 잡히고, 그녀의 몸에는 ‘원더러’라는 이름의 외계의 존재가 이식된다. 하지만 멜라니의 의식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원더러와의 한 몸 안에서의 동거를 시작한다. 원더러는 멜라니의 부탁에 따라 생존자들을 찾아 나서지만, 그런 그녀를 추격하는 외계인들이 있었다.

 

 

 

2. 감상평 。。。。。。。   

 

     외계인의 지구 침략이라는 오래된 소재를 이런 식으로 새롭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싶었던 작품이다. 보통은 지구인과 외계인 사이의 대결은 선과 악으로 간단하게 치환되어 버리고 그 후에는 그냥 아무 이유를 물을 필요 없이 닥치고 적들을 죽이는 게 영화의 유일한 목적이 되는 식이다. 이 때 외계인에 대한 적의를 다지게 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기괴하게 생긴 그들의 모습. 유명한 텔레비전 드라마 시리즈였던 'V'의 경우 외계인은 파충류 같은 피부를 가진 징그러운 존재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외계의 존재는 빛이 나는 해파리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보통 인간의 목 뒤 상처를 통해 들어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니, 다른 점은 눈동자가 빛난다는 것 정도? 그러니 외계인과 사랑에 빠지는 인간이라는 설정까지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었다. 여기에 그들은 단지 영혼과 비슷한 무엇으로 그려내는 모습(실제로 영화 속에서 그들의 이름은 ‘소울Soul'이다)은 단순히 외계인에게 몸을 뺏긴다는 식이 아니라 영혼이 바뀌는 것처럼 그려지기까지 하니까 확실히 다른 분위기다. 약간의 액션을 가미한 SF 멜로물이라고 할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외계인들의 모습은 퍽이나 당황스럽다. 그들은 지나가는 동료 외계인이 차를 달라고 하면 아무 조건 없이 그대로 열쇠를 내어주고, 다친 이가 있으면 조건 없이 치료해 준다. 슈퍼마켓에서는 돈을 받지 않고 물건을 가져갈 수 있으며, 자연과 지구를 파괴해 온 인간들을 경멸한다. 그런 식의 생활방식이 영속적일 수 있느냐 하는 논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정도라면 ‘평화를 위해서’ 지구인들 속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는 외계인들의 논리를 부정하는 게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그저 인간이기 때문에 영원히 존재해야 하는 건가?

 

     복제인간의 장기적출을 통한 생명연장이라는 주제를 복제인간의 입장에서, 그리고 그들의 사랑 이야기로 풀어가려고 했던 ‘네버 렛 미 고’라는 영화가 문득 떠오른다. 겉으로 드러난 것 이상의 생각할 거리들을 제공해 주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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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에서 만난 예수 - 그리스도교의 한반도 전래 역사
최상한 지음 / 돌베개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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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경주 불국사에 있는 석가탑 안에서 돌로 만든 십자가가 발견되었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저자는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천주교와 개신교가 들어왔다는 18세기, 19세기 후반 이전에 비공식적인 루트로 우리나라에 이미 기독교(특히 동방기독교라고 부르는 네스토리우스교)가 들어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조선 중후기 실학자들의 기록에는 ‘야소교(예수교)’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며,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들어왔던 길리시단(크리스챤)을 조선에서도 알고 있었으며(그리고 몇 명의 조선인들은 천주교 성직자가 되기도 했다), 고려나 발해 시대의 유적과 유물에 십자가가 자주 발견된다는 점 등이 저자가 이런 추측을 하게 만드는 증거다.

 

 

2. 서평      

 

     책 제목을 보고 기대가 좀 됐다. 불국사에서 만난 예수라.. 뉴스를 통해 접했던 불국사 석가탑 속의 돌십자가에 관한 연구나, 그 유래를 추적하면서 한국 고대사에 기독교가 남긴 자취를 책으로 엮은 건가 하는 생각으로 집어 들었다. 서문에서도 기존의 공식적인 기독교 전래 시기가 대단히 늦었다는 식으로 내용이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본문의 내용은 전체의 절반 이상이 조선 중후기 기독교에 관한 언급에 할애되어 있고, 3장(고려시대)과 4장(신라와 발해)의 경우는 연대가 좀 더 위로 올라가지만, 직접적인 사료 같은 근거보다는 (고려시대의 경우) 몽고(원)의 지도층에 네스토리우스교가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혹은 매우 제한된 유물 몇 개를 통해 지나치게 과감한 추측을 하는 듯하다.

 

     이 외에도 저자가 이 분야의 전문연구자가 아닌 탓인지 여러 부분에서 논리전개나 서술 상의 문제가 눈에 띄기도 한다. 우선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도마 사도가 중국에 들어갔다는 서술은 그 근거가 희박한데도 마치 사실처럼 묘사되고 있으며, 심지어 그가 중국에 입국하기 250년 전에 ‘천주’라는 말을 사용하는 하느님을 믿는 종교가 있었다는 기록(30)은 이 책에서 말하는 ‘기독교의 동방 전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또 저자의 교회관에 관한 제한된 이해 - 이를테면 예배당 건물이나 성직자, 선교사들에 대한 부정적 뉘앙스 -도 자주 보이고, 성경기록에 관한 잘못된 이해 -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베푼 것이 빌립 사도라는 -마저 보인다(250).

 

 

     기독교의 동방 전래, 혹은 네스토리우스교(경교)에 관한 내용으로는 이 책의 저자도 자주 인용하고 있는 김호동 교수의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이라는 책을 보는 게 훨씬 더 학술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책 곳곳에 실려 있는 도판들과 사진들은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해주기도 하지만, 나쁜 건 아닌데 전반적으로 아쉬운 느낌이 드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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