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사랑
리처드 J. 루이스 감독, 더스틴 호프먼 외 출연 / 컨텐트존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1. 줄거리 。。。。。。。   

 

     그리 크지 않은 키에, 덥수룩한 수염, 그렇다고 성격이 자상하거나 상대방의 분위기를 맞춰줄 줄도 모르는 유대계 캐나다인 바니. 젊은 시절 로마에서 임신을 한 여자 친구에 대한 책임감으로 결혼을 하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의 아이를 배고 있었고, 결국 얼마 가지 않아 자살을 해 버린다. 캐나다로 돌아와 부잣집 딸과 두 번째 결혼을 하지만 처음부터 그다지 내키는 것도 아니었고,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었던 아내와의 관계는 금새 삐걱대다 이혼에 이른다.

 

     그리고 바니의 세 번째 사랑. 그는 그녀(미리엄)를 처음 본 순간 빠져들었고, 곧바로 들이대기 시작한다. 심지어 그녀는 바니의 두 번째 결혼식 피로연에 하객으로 참석했던 터. 그러니까 그는 결혼식에 다른 여자와의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오랜 일방적 구애에 마침내 그녀가 대답을 하고, 그렇게 첫 식사를 함께 하면서 둘은 가까워지더니 결국 결혼에 골인하게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 두 사람의 아이들이 독립을 할 나이에 이르렀을 즈음까지도 미리엄에 대한 바니의 사랑은 변치 않았지만, 한 순간의 오해는 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들었고, 결국 헤어지게 된다. 그러나 끝까지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은 바니. 노년이 되어 그의 기력이 떨어지고, 기억력마저 쇠퇴하게 된 그 때까지도 그가 사랑한 것은 오직 한 명 미리엄이었다.

 

 

 

 

2. 감상평 。。。。。。。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보기 시작한 영화였다. 일단 주인공이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영화 초반 비춰지는 그의 모습은 그냥 별 고민 없이 사는 어떤 남자의 이야기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과거의 서투르고 잘못되었던 판단들을 뒤로하고, 미리엄과의 사랑을 담아내는 부분부터는 좀 다른 분위기가 형성된다.

 

     영화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역시 오랜 시간 동안 변치 않고 한결같은, 아니 좀 더 잘 익은 모습으로, 상대를 사랑하는 노부부의 모습 때문이다. 그건 상대에 대한 집착과는 다른, 마치 오래될수록 그 독특한 풍미를 자랑하는 도자기나 좋은 가구 같은 것을 만날 때 느낄 수 있는 무엇과도 비슷하다. 아니, 그런 것들보다 더 아름다운 것.

 

 

 

     영화는 진짜 사랑을 찬양한다. 그건 그냥 자신의 온갖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금방 식어서 ‘진짜 사랑이 아니었다’고 칭얼대는 변덕스러움의 반대쪽 어딘가에 있는 거고, '내 실수로 벌어진 일이니 깔끔하게 포기하겠다‘는 식으로 젠체하는 것과도 다르다. 꾸준히 한쪽을 바라보면서, 상대를 위해 마음을 쓰고, 기다려주는 것, 그렇다고 그 사랑에 목을 매고 삶의 나머지 부분까지도 망가뜨리는 게 아니라, 그 사랑으로 인해 주변의 다른 사람들까지도 따뜻하게 배려하도록 만들어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 그런 게 이 영화에서 말하는 사랑과 가장 가깝지 않을까.

 

     간만에 본 멋진 영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에 빠지다>, 이는 이상한 표현이다.

사람들은 왜 <사랑에 오르다>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가?

아마도 사랑이 일종의 추락이자 상실이라는 것을

의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깊은> 사랑이란 한 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하는 사랑이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 『웃음』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사회의 발전과 기독교
손봉호 지음 / 예영커뮤니케이션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요약 。。。。。。。     

 

     한국 사회에 교회와 기독교가 들어온 지도 벌써 백 년을 훌쩍 넘겼다. 그리고 이 시기 우리나라는 전제적 왕조에서 식민지로, 그리고 다시 신생 독립국에서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부유한 나라로 숨 가쁘게 변해왔다. 이 책은 한국에 전래된 기독교가 사회의 발전에 어떤 공헌을 했는지에 관해, 역사관의 전환, 교육이나 의료, 빈곤퇴치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쓴 글들을 엮은 것이다.

 

 

2. 감상평 。。。。。。。   

 

     어떻게 보면 좀 낯간지러운 말만 가득한 책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어기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되었건 우리나라에서 자화자찬이라는 건 그리 점수를 따기 어려운 모습이니까.

 

     하지만 기독교가 무슨 사회악이나 되는 것처럼 평가절하하고, 아니 노골적인 조롱과 욕설의 대상이 되는 것 또한 정상적인 모습은 아닌 게 분명하다. 공과(功過)라는 게 산술적으로 더하고 빼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분명 기독교가 이 땅에 이렇게 짧은 시간에 깊게 뿌리내릴 수 있었던 건 단순히 ‘극성스러움’ 때문만은 아닌 게 분명한 거니까. 과오도 있지만, 그건 적극적인 악의 행사보다는 침묵과 관조(물론 이것도 결코 가벼운 잘못은 아니다)가 대부분이었고, 반대로 선의의 행위들도 많았다.(여기에서 최근 몇몇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벌인 개인적 돌출행동은 제외하자.)

 

 

     개화기, 모든 것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던 시절, 한국의 기독교 전래는 다른 아시아권이나 남미, 혹은 아프리카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면을 지니고 있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는 서구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첨병역할을 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기독교는 외국의 침탈이 벌어지기 수십 년 전에 책과 사람들을 통해 이 땅 곳곳에 심겨지기 시작했고, 오히려 일본의 제국주의적 양태에 대항하는 구심점 중 하나의 역할을 했다. 또 당시 기독교는 서양의 문화와 기술을 수입하는 통로로서 작동하기도 했고, 이 땅의 초기 근대 교육기관과 의료기관은 거의 도맡아 설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경제적 성장이 꼭 어떤 사회가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경제적 분야에 대한 공헌만으로 기독교가 유익하다고 주장하려는 건 적절치 않지만, 몇몇 저자들과 그들의 글들에서는 이런 느낌이 강하게 들어 좀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기독교가 도대체 뭘 해왔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한 번쯤 믿고 읽도록 해도 괜찮을 것 같은 책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aint236 2013-02-14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독교가 사회 구원의 역할을 포기하고 개인의 구령에 전념하면서 사회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게 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노란가방 2013-02-14 15:30   좋아요 0 | URL
적극 동의합니다.
창조세계 전반을 구속하는 큰 비전을 상실해 버렸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겠죠.
 

1. 줄거리 。。。。。。。   

 

     어린 시절 물에 빠진 자신을 구하려다 먼저 죽은 남동생에 대한 기억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윤희. 자신을 원망하며 시도 때도 없이 구타를 하는 아버지와 단 둘이 살면서도, 묵묵히 그 매를 다 맞고 있다. 자신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비만 오면 옛날 그 기억이 떠올라 아무 데도 나가지 못하고 집에 숨어 있다 보니 어렵게 얻은 일자리는 금방 잃어버리기를 수차례.

 

     어느 날 동네 양아치인 고등학생 진호에게 동생과 찍은 하나 뿐인 사진이 들어 있는 지갑을 빼앗긴 윤희는 얼마 후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게 되면서 다시 진호와 조우하게 된다. 조금씩 진호의 아픔을 알게 되면서 동병상련의 마음을 갖게 된 윤희는, 이제 ‘누나’로서 진호를 구하기 위해 큰 걸음을 내딛으면서 스스로를,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치유하기 시작한다.

 

 

 

 

2. 감상평 。。。。。。。   

 

     실수와 잘못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단지 소심한 성격 탓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픔이 무거운 책임감이라는 통로를 통해 자신의 고통으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그런 책임감으로 인해 영화 속 윤희는 자신을 구하려다 죽은 남동생을, 자신이 죽인 것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윤희가 아버지로부터 끊임없이 구타를 당하는 것은 일종의 고행으로 여겨진다.

 

     문제는 그런 상처들이 스스로를 괴롭게 하거나 자책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구타는 그 순간 육체적인 고통에 집중하게 만들 수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윤희를 괴롭게 만드는 근본적인 과거의 상처를 계속 떠올리게 만들 뿐이었다. 이런 부분은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어머니를 보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괴로워하던 진호나, 늘 술에 취해 살며 목적도 없이 윤희를 구타하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누구의 책임인지도, 누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건지도 알 수 없는 막막한 상황에서 감독은 ‘종교’라는 대안을 꺼낸다. 오래 전부터 종교란 그 시대의 사람들이 그 시대의 지혜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을 맡기고 위로와 해답을 얻었던 대상이었으니까. 물론 영화 속에서 종교(혹은 기도)는 모든 것을 단번에 해결해 주는 만능키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윤희는 기도를 통해 자신을 오랫동안 사로잡고 있었던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단초를 얻게 되었고, 이후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건 그녀 자신의 용기와 결단의 힘이다.

 

     또, 영화는 그렇게 자신의 아픔을 치유해 낸 윤희를, 또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치유자로 그려낸다. 먼저 자신 안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직업적으로, 혹은 관성적으로 무미건조하게 다른 사람의 아픔을 건드리는 영화 속 의사나 교사와 대조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저 영화 속에서 종교가 일정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를 불편하게 여기며 낮게 평가하려는 사람들은, 한 줌도 되지 않는 자신의 지식으로 모든 걸 이해하고 평가하는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오만한 근대인들(그리고 이 영화 속의 차가운 의사와 교사)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주제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려고 했던데다 저예산 영화다보니, 화려하고 웅장한 영상보다는 그냥 우리 주변의 모습들을 편안하고 담백하게 담아내고 있다. 연기자로 전업한 지 꽤 시간이 흐른 성유리는 이젠 꽤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있고, 그녀와 콤비를 이룬 고등학생 역의 이주승도 나쁘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루퍼 - 렌티큘러 없음
라이언 존슨 감독, 브루스 윌리스 외 출연 / UEK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1. 줄거리 。。。。。。。   

 

     그리 멀지 않은 미래. 주인공 조는 청부살인업자다. 그가 살던 시대보다 30년 후에는 타임머신이 개발되는데, 이를 독점한 범죄조직은 자신들이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을 캡슐에 넣어 과거로 보내고, 조 같은 업자들이 그렇게 보내져 온 사람들을 죽이고 처리하는 것. 말 그대로 완전범죄다. 하지만 어느 날 그의 친구가 전해온 놀라운 소식. 친구의 미래 존재가 살인대상이 되어 나타났단 것. 그리고 얼마 후, 조에게도 그런 일이 발생한다.

 

     미래의 조는 자신의 아내를 죽인 조직의 두목 레인메이커를 처리하고 아내를 살려내기 위해 직접 과거로 왔던 것이다. 시간으로 연결된 미래의 조와 현재의 조. 하지만 두 사람은 좀처럼 마음이 맞지 않는다. 마침내 어린 레인메이커를 발견한 두 사람. 미래의 조는 소년을 죽여 틀어진 미래를 바꾸려 하지만, 현재의 조는 그런 그를 보며 갈등을 하기 시작한다.

 

 

 

2. 감상평 。。。。。。。   

 

     영화는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중심에 두고 현재와 미래의 ‘나’가 조우하는 설정으로 정면돌파를 시도한다.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를 사용한 이상 현재의 변화가 미래의 상황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을 십분 이용해야 하는데, 감독이 처음부터 이 점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고 들어갔기 때문인지, 시간 여행 중 두 명의 ‘자신’이 직접 만나는 경우는 피하는 일반적인 경우와는 좀 다른 시도를 했던 것 같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영화의 마지막까지 주의 깊게 지켜보고 생각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전체적인 스토리를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아쉬운 건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흥미를 자아낼 만한 부분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선 굉장히 자주 등장하는 시골의 농장 근처는 딱히 긴박감을 주기엔 적절하지 않고(우선 보이는 게 별로 없으니까), 두 명의 조가 생각의 차이를 보이고 싸우는 부분이나, 레인메이커가 될 소년을 죽이려는 미래의 조의 집착도 딱히 공감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 무엇보다 그 자신이 수십 명의 사람들을 돈을 받고 죽여 왔던 청부업자였으면서 말이다.

 

 

 

     처음부터 주인공을 살인청부업자로, 그것도 딱히 고민 없는 인물로 설정해 둔 것 자체가 패착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소재의 독특성, 그리고 결말의 반전에만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역시 영화의 기본은 탄탄한 인물설정과 그들 사이의 관계에서 나오는 재미라는 걸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