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은 응답하라 - 정치에 속고 자본에 털린 당신
톰 하트만 지음, 한상연 옮김 / 부키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1. 요약 。。。。。。。     

 

     저자는 건국 당시부터 모든 시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를 규정해 온 미국이라는 나라가 보수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기업귀족들의 사기로 인해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특히나 레이건 정부 이후의 공화당 정책의 초점은 한결같이 안정된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정치적인 의사집단으로 대두되어 온 중산층의 삶을 파괴하는 방향에 맞춰져 있으며, 그 이유는 소수의 거대재벌들이 정부의 의사결정에 좀 더 지배적인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라는 것. 책은 민주주의란 안정적인 중산층이 존재할 때만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경제와 정치의 상관관계를 강조한다.

 

 

 

2. 감상평 。。。。。。。   

 

     자주 가는 도서관 신착도서 코너에 있기에 눈에 띄어 집어 온 책.

 

 

     책 속에 등장하는 미국 공화당과 이를 뒤쫓는 일부 민주당 인사들의 행태는 한국의 그것과 딱히 다르지 않다. 대한민국은 삼성공화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소수의 재벌기업 오너(사실 이 말도 웃기는 게 정작 이런 이름으로 불리는 인사들의 주식 소유 지분은 한 줌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에게 편중된 온갖 특권과 변칙적 법 제정과 집행은 대놓고 부정하기 어려운 지경이니까.(대기업 회장들은 아무리 죄를 지어도 휠체어 타고 검찰 몇 번 다녀오고 교도소 특실에서 조금 쉬다보면 금방 나올뿐더러, 심지어 얼마 후에는 사면까지 받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되어 버린다.)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이런 행태들이 결국 민주주의의 실제적인 부정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를 위해 자칭 보수주의자들(이게 모든 정치적 보수주의자들을 비난하는 표현은 아니다)은 국민들의 눈을 속이며 차근차근 정부의 부와 권력(모두 국민들로부터 나온)을 민간 기업들에게 넘겨주고 있다는 것.

 

     책 속에 등장하는 한 연구 결과가 흥미롭다.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1972~2001년 사이 30년 동안 미국의 소득 수준 상위 10%의 실질소득은 34% 증가했다. 그런데 이 구간을 좀 더 세분화 해보면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같은 기간 상위 1%의 소득은 87%가 증가했고, 0.1%는 181% 증가했으며, 0.01%의 소득은 497%가 증가했다. 전체적인 부의 양이 증가했을지는 모르지만, 그 대부분은 아주 소수의 손에 들어가고 있다는 지적. 매년 경제지표를 발표하면서 대한민국이 발전하고 부유해져왔다고 홍보하는 정부 당국자들의 발표와는 달리 갈수록 먹고 살기 힘들어지고 있다는 대다수의 중산층들의 하소연이 이해가 되는 부분.

 

 

     책은 이런 상황들을 열거하면서 좀 더 옳은 방향으로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왜’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대답이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 상황이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가장 저자의 의도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명분으로 싸우기로 일어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진 않다. 좀 더 와 닿는 이야기로는 이대로는 점점 가난해져갈 뿐이니 일어나서 너희 것을 찾으라고 말하거나, 헌법에 어긋나는 일이니 바꿔야 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도 역시 임의성이 강하니 모든 것을 걸고 일어나 나서야 할 충분한 명분이 될지, 그리고 기층까지 미치는 실제적인 반향을 일으킬 수 있지는 모르겠다. 저자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 어떤 비전을 그려낼 수 있을까.

 

     아, 그리고 저자가 미국인이라는 걸 감안해도 미국 건국 ‘신화’를 너무 낭만적으로 (그것도 꽤나 많은 지면을 사용해서) 그리는 건 아닌지 싶은 생각도 들고.(이건 뭐 괜한 트집일 수도 있고)

 

 

     언제나 진실을 알아내는 것보다 감추는 게 더 쉬운 게 안타깝다. 뭐, 감추려는 사람은 분명한 이익이 눈에 보이니까 돈도 들이고 시간도 들이면서 즐겁게 해내겠지만, 이미 감춰진 걸 드러내기 위해선 당장 이익이 보이지 않아도 찾아서 읽고, 듣고, 배워야 하는 거니까. 얼마 안 남은 대선만이 아니라 몇 년마다 반복되는 각종 선거는 진실을 감추려는 사람들을 제지하고 심판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좀처럼 세상이 변하지 않는 건 누군가의 부지런함 때문일까,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의 게으름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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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재건축을 앞둔 한 허름한 연립주택에서 한 여중생(여선)이 살해를 당한다. 죽은 소녀의 엄마는 매일 저녁 죽은 딸이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며 공포에 질려 있고, 이웃 주민들과 주변 사람들도 대놓고 말은 못해도 다들 찜찜한 감을 어찌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빌라에 사는 한 사내가 수상하게 보였지만, 다들 자기와 직접 관련되지 않았기에 그냥 넘길 뿐. 사람들이 자꾸만 자신의 주변을 따라다는 듯한 느낌을 받은 사내는 여선과 꼭 닮은 수연이라는 아이를 죽이고 동네를 떠나기로 하고 차근차근 계획을 진행하지만, 이번엔 이웃사람들이 있었다.

 

 

 

2. 감상평 。。。。。。。     

 

     개봉하고 얼마 안 돼 보려고 했지만, 같이 보려 했던 친구가 범죄스릴러는 싫다고 해 단념했던 영화. 좀 늦게라도 보려고 했으나 이미 극장에서 내려버렸고, 이제야 다운받아 집에서 보게 됐다.

 

 

     한 편의 작품을 그리기 전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의 구성을 완전히 마치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하는 만화가 강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영화니 만큼, 기본적으로 인물들의 성격이나 이야기의 논리구조, 흐름만큼은 탄탄하게 보인다. 이래서 강풀의 만화를 좋아하는 거고, 영화로 제작되면 거의 빼지 않고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는 죽은 뒤에도 열흘이 넘게 저녁마다 집으로 돌아오는 딸이라는 약간은 으스스한 장면으로 시작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정작 가장 무서운 건 귀신이 아니라 남의 일에 신경 쓰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게 밝혀진다. 이웃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딱히 관심이 없는 사람들, 그저 자기 가족, 자기의 삶에 문제가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며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로 문제라는 것. 영화 후반부에서 그들이 아직은 살아 있는 수연이에게 관심을 갖기로 마음먹으면서 더 이상의 피해자는 생기지 않을 수 있었다. 결국 영화가 이야기 하는 건 무관심의 무서움과 관심의 힘.

 

 

     갈수록 흉포한 범죄들이 늘어나고 있는 건 우리 사회의 사회적 안전망이 망가져버렸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고, 그 원인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이웃에게 관심을 둘 시간 따위는 낭비처럼 여겨진 덕택이다. 사실 뭐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윗집에 사는 아가씨들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으니까.(아랫집 아주머니는 가끔 인사하지만 그게 전부다;;) 뭐 요샌 아예 그런 이웃들이 범죄의 주동자가 되기도 하는 마당이니 말 다했다.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만 경찰력의 확대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하지만, 건전한 이웃 공동체의 회복이 그리 쉽지만은 않으니..

 

     아쉬운 부분이 없진 않았지만(이를 테면 웹툰을 볼 때도 느꼈었지만, 영화로까지 만들 땐 지나치게 많은 등장인물들은 주인공이 분명치 않아 집중도를 좀 떨어뜨리기도 한다), 배우들의 연기는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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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10-23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운받아 놓고 보려고 생각 중입니다.

노란가방 2012-10-23 15:59   좋아요 0 | URL
네, 나름 생각할 것들이 보이는 영화에요. ^^
 
제국과 천국 - 세상을 뒤집은 골로새서 다시 읽기
브라이언 왈쉬 & 실비아 키이즈마트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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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골로새서의 현대적 탈굼을 시도한 책이다. 탈굼이란 일종의 번역인데, 단순히 문자 대 문자 식의 직역(直譯)이나 의미 대 의미의 의역(意譯)의 차원을 넘어서 원문을 번역 당시의 시대의 용어와 개념으로 설명하는 일종의 창의적인 해석과정을 의미한다. 최근에 유진 피터슨이 낸 ‘메시지 성경’이 그 좋은 예다.

 

     저자들(둘은 실제 부부다)은 로마 제국 산하에서 새롭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로 한 어린 공동체에 바울이 보낸 편지인 골로새서가, 오늘날 힘의 원리로 특징 지워지는 제국주의적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실제적 의미가 있는지를 추적해나가고 있다.

 

 

2. 감상평 。。。。。。。   

 

     성경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경우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 책이 자신의 삶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지(‘주었는지’가 아니라)를 물어보면 몇 가지 ‘영적인 생활’에 도움이 되는 지침들을 얻었다는 것 정도가 전부인 경우가 많다.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은 영적이고, 도덕적인 문서일 뿐이다. 과연 성경이 그 정도의 책일 뿐인 걸까?

 

     저자는 이러한 흐름에 정면으로 반대하며 매우 도발적인 이 책을 써내려 간다. 이 책에 따르면 골로새서는 무력에 의한 평화, 약자(노예와 여성, 아이들과 가난한 이들)의 희생 위에 선 번영, 황제에 대한 절대적인 우상화가 널리 퍼져 있던 당시 사회의 정치, 문화 전반에 대한 혁명적인 요구를 담고 있는 소책자라는 것. 당연히 이런 폭발력 있는 문서를 오늘날 제대로 읽어나간다면, 그 때와 매우 유사한 오늘날의 상황(소비지향적인 문화와 약자들에 대한 폭력 위에 서 있는 번영의 신화, 극단적인 상대주의로 인한 포스트모더니즘적 혼란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급진성을 담은 문서로 읽혀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성경을 살아 있는 말씀으로 제대로 읽어내는 방식을 제시하고 있는 좋은 책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거대 다국적 기업들이나 미국의 패권주의, 나아가 더 많은 물질을 누리는 것을 좋은 것(심지어 옳은 것)으로 가르치는 자본주의적 교리와 신보수주의적 정책들에 대한 저자의 직접적인 비판과 공격이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내용을 좀 더 영적인 문제에 관한 지침으로만 읽어내고 싶은 마음도 들겠지만, 저자의 논리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결코 쉽게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복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습이 고작 교회 건물 사이즈를 늘리는 것에 머물 수는 없는 게 아닌가.

 

     다만 책이 읽기에 쉽지는 않은 게, 생각보다 좀 어려운 이론적 설명이 자주 보인다. 그리고 물론 골로새서 본문이 주가 되고 있긴 하지만, 그보단 좀 더 넓은 문맥에서 성경을 고찰하는 부분이 자주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종종 골로새서의 문맥을 놓치는 경우도 있고, 골로새서 자체를 연구하는 데 좀 더 집중하고 싶은 독자에겐 약간의 목마름도 느껴질 수 있겠다.

 

     성경의 역동성을 잘 보여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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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오직 수학의 완전함에서만 아름다움을 느끼며 살아온 석고. 어느 날 옆집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소리를 듣게 되고, 평소 몰래 마음에 두고 있었던 화선이 그 범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사건을 은폐하기로 한 석고. 경찰은 그가 만들어 놓은 트릭에 걸려 좀처럼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지만, 석고의 친구이자 끈질긴 형사인 민범은 조금씩 진실에 접근해나가기 시작한다. 곧 사랑하는 여자를 위한 석고의 마지막 계획이 시작된다.

 

 

 

 

2. 감상평 。。。。。。。   

 

     일본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다 보니 수학에 빠져 외톨이처럼 살아가는 주인공이니, 점심마다 먹을 도시락을 사는 가게니 하는 왜색이 좀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나름 감독의 연출력이 동원돼 크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한국식으로 연착륙하지 않았나 싶다. 감독은 일본 특유의 자극적인 연출이나 감정과잉을 적절하게 조절해낸다.

 

 

     영화는 두 개의 축 - 화선과 석고의 미묘한 감정, 그리고 석고와 민범 사이의 트릭 풀이 -을 가지고 진행되는데, 당연하게도 이 둘 모두에 관여하는 석고 역의 류승범의 역할이 핵심적이었다. 이 영화에선 기존의 깐족거리는 면이 전혀 없이, 약간은 음울하면서도 혼자 모든 것을 계산하고 묵묵히 자신의 계획을 실천해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잘 표현해 낸다. 일부 사람들은 그의 답답한 모습에 불만을 터뜨리기도 하지만, 뭐 그렇게 연출된 거니까 그만큼 연기를 잘 했다는 뜻도 되겠다. 다만 극의 후반으로 가면서 트릭풀이보다는 종속적인 사랑이야기로 급 마무리되는 듯한 느낌도 준다.

 

 

 

 

     상대의 범죄까지도 덮어주는 게 사랑이라는 메시지가 전해져오지만, ‘사랑은 모든 허물을 용서해 줄 수 있고 모든 허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할 수 있지만, 그 허물을 없애 주겠다는 결심을 접지는 않는다’는 C. S. 루이스의 말이 내겐 좀 더 타당하게 느껴진다. 어찌됐건 사랑하기 때문에 한 일이니 괜찮다는 식은 곤란하니까.

 

     배우들의 군더더기 없는 연기력만큼은 볼만했던 영화. 근데 개인적으론 일본식 영화는 아주 예쁜 장면들이 아니라면 잘 공감이 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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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2 1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22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라.

그리고 필요하다면 말을 사용하라.”

 

-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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