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 3 - 5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5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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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다. 사실 강 자체야 그리 깊지 않은, 우리로 치면 “무슨무슨 천” 정도인 것 같지만, 이 강을 중심으로 로마 본국과 속주가 나뉘어졌으니 정치적인 의미가 큰 강이었다. 이제 카이사르가 쓴 또 하나의 명작인 “내전기”의 이야기가 풀려나온다.


루비콘 강 도하와 관련해서 아주 유명한 어구가 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인데, 카이사르가 강을 건너며 자신의 심경을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작가는 이 말이 지나치게 우울하고 숙명론적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 말은 수에토니우스가 전하는데, 작가는 그보다는 플루타르코스 쪽의 의견을 따라서, 카이사르가 고대 그리스 작가인 메난드로스를 인용해 “주사위를 높이 던져라!”고 말한 것으로 묘사한다. 확실히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주도하고자 했던 카이사르에게는 이쪽이 좀 더 어울리긴 하는 것 같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역시 보니파라고 불리는 보수파의 맹목적인 공격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공화국을 수호하는 당사자라고 여기던, 오로지 카이사르를 실각시키는 것만이 인생의 목적인 양 온갖 억지 죄목과 법 논리들, 그리고 자신들이 가진 법적 권력을 총동원해 몰아세웠으니, 수차례 타협을 제안했던 카이사르로서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유일한 다른 선택지는 그냥 모든 걸 포기하고 국외로 망명하는 건데, 이걸 선택지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중에서도 유독 강렬하게 등장하는 건 카토다. 마치 자신의 생각 자체를 공화국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 같은, 과대망상에 빠져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니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기존의 관례나 전통(자칭 ‘보수파’로서는 모순적인 일이다)이 허용했던 일을 넘어서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이른바 질서를 지키기 위해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라는, 전형적인 자가당착적 인물. 사실 이런 사람을 라이벌로 만나는 건 굉장히 고달픈 일이다.


만약 술라였다면 그는 진작 아무 거리낌 없이 카토를 죽여 버렸을 테지만, 카이사르는 달랐다. 그는 공화국의 전통에 따라 합법적인 방식으로 제일인자가 되고자 했고, 이런 고집은 결국 그 자신을 내전으로 몰아가고 말았다. 공리주의자라면 한 명(카토)의 희생과 다수의 (병사들) 희생 중 전자를 택하겠지만, 세상사가 또 그렇게 간단히 정리되지는 않는 법이니 어렵다.


오늘날에도 법의 적용을 다루는 온갖 정부 기관들이 오직 한 사람을 죽이려고 달려든다면, 이 과정에서 합법과 불법, 편법과 탈법을 종횡무진 오고가면서 물어뜯는다면, 그 상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소크라테스처럼 멋지게(?) 독주를 마시는 것만이 정답은 아닐 것 같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와 가장 크게 이미지가 달라진 인물로 라비에누스가 있다. 갈리아 전쟁 당시 카이사르 휘하의 군단장으로 활약을 했지만, 내전이 시작된 후에는 폼페이우스에게 달려가 카이사르를 가장 괴롭혔던 인물이다. 두 작가 모두 참고할 자료는 비슷했을텐데, 시오노 나나미는 그를 능력 있고 의리도 있지만, 피호제를 따라 폼페이우스 편에 서서 싸울 수밖에 없었던 고독한 늑대 비슷하게 묘사하지만, 콜린 매컬로는 그를 잔인하고 야만적인, 길게 보지 못해 카이사르로부터 내쳐진 인물로 그린다. 어느 쪽이 실제 인물의 성격과 맞을 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차이는 재미있는 부분이다.


이 외에도 무능한 브루투스, 능력은 있지만 약간 관심병을 가지고 있는 듯한 안토니우스, 일찌감치 등장해 왕국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클레오파트라 등 다양한 인물들이 “로마인 이야기”와는 조금 다르게 묘사된다.


사실 결정적으로 두 작품의 차이는 전쟁의 묘사에 있다. 시오노 나나미 쪽이 전쟁의 배경과 전투의 경과, 전략적인 부분에 과한 해설 등이 월등히 낫다. 왜 디라키온에서 양측이 그런 전투를 해야 했는지, 또 왜 다음 전장이 파르살로스가 되어야 했는지는 “로마인 이야기”를 읽는 쪽이 훨씬 재미있다. 콜린 매컬로는 전투 묘사라든지 전술과 전략에 관한 이해에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또 인물의 생생한 묘사라든지, 한 인물의 내력을 충분히 보여준다던지 하는 부분에서는 이쪽이 더 나으니까.



내전이 조금 빨리 끝나버린 감이 없지 않다. 이제 남은 시리즈는 두 개밖에 안 되고, 그 중 카이사르 이야기는 한 개에 불과하다. 아까우니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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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근원 못지않게 선의 근원도 신비다.

끊임없이 선을 추구하고 낙심하지 않고 선의로 남을 대하는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넘어 경이감을 안겨 준다.

거기서 초자연적이고 신적 근원을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홍종락, 『악마의 눈이 보여 주는 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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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과 함께 - 고대 근동의 눈으로 구약의 하나님 보기
이상환 지음 / 도서출판 학영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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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의 배경은 고대 근동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어떤 진공 환경 속에서 살았던 것이 아니라 다양한 힘과, 문화와 종교가 어우러져 있던 실제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수 천 년의 시간적, 공간적, 역사적, 문화적 간격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오늘 우리가 구약을 읽으면서 그 본문 속에 묻어있는 당시의 이런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이런 오해 가운데 지극히 현대적인 관점으로 구약을 읽어내는 오류가 쉽게 발생하곤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윤리적 기준으로 고대 본문들 속 행위를 재판하려 한다든지, 오늘의 학설과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본문들을 죄다 허구로 몰아가든지 하는 나이브한 이해들은 그리 드물지 않다.


이 책은 그런 오해를 조금은 줄여주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다. 물론 책 한 권으로 구약의 모든 배경을 설명할 수는 없고, 이 책의 주요 목표는 구약 시대의 다신교적 배경이다. 고대에는 다신교가 일반적이었고, 그 가운데서 여호와(책에서는 “야훼”라는 명칭을 사용)라는 유일신으로 돌이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 과정에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던 이유는 무엇인지 등을 차분하게 설명해 나간다.





우리(그리스도인들)는 흔히 구약에서 반복적인 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고 한심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어쩌면 저렇게 똑같은 잘못을 했다가 큰 곤경을 치르고서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듯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걸까 하는 식이다. 그 대표적인 본문이 사사기다. 가나안 정착 직후의 혼란스러운 몇 백 년간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책에서, 고대 히브리인들은 너무나도 쉽게 하나님을 버리고 주변 민족들의 우상으로 넘어가버린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오히려 그들이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로 돌아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그들의 삶 전체를 감싸고 있는 주변 환경과 문화는 각 지역마다 그 지역을, 또는 어떤 영역마다(강이나, 산이나 하는) 그 영역을 다스리는 신적 존재가 있고, 각 존재들은 특별한 고유의 능력이 있어서 자신에게 치성을 드리는 추종자들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생각이 진리로 여겨지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신들은 오직 신상들을 통해서만 어떤 공간에 임재할 수 있고, 대규모 신전을 운영하는 대제국들의 힘을 목격한 이상 이 모든 것을 그저 부정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구약을 보면 백성들이 그토록 자주 우상으로 돌아서는 모습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 구약 전체에 걸쳐서 어떻게 그런 백성들의 관점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돌이키려고 애쓰고 있는지도 보인다. 고대 경건한 히브리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점진적으로) 가르치고, 이방의 신들로부터 신성을 벗겨내는 작업을 끊임없이 반복해 왔다. 물론 이 작업도 고대의 방식으로 해 왔다는 점은 기억해 두어야 할 부분.





분명 신학을 다룬 책이지만 읽는 과정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아마도 저자가 동료 신학자보다는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일반 신자들을 예상 독자로 생각하고 쓰지 않았나 싶다. 특히 이런 부분은 마지막 장인 5장에서 두드러지는데, 이 장은 어떤 학문적 논의라기보다는 맘몬이라는 우상으로 형상화된 돈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열망에 대한 경고(그리고 적용)이다.


또, 이런 종류의 책을 쓰는 저자들의 경우 자신들이 소위 중립적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신앙적 표현들을 배제하거나 구약 본문에 대한 설명에서도 그와 비슷한 시도를 하곤 하는데, 이 책은 저자 자신의 신앙을 애써 감추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서문의 첫 문장이 바로 이 점을 분명히 하는 내용이었다(“나는… 독자들에게 내 신앙을 나누려는 목적으로 본서를 썼다”) 그렇다고 학문적 검토의 수준이 낮다는 의미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구약의 히브리인들이 살았던 세계를 좀 더 실감나게 맛보고 싶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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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게임
나윤아 지음 / 한낮의단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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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루이스는 동화 작가이기도 했다. 그는 동화(fairy tale) 같은 판타지가 섞인 이야기가 가진 힘을 믿었고, 좋은 이야기는 어린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이 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이 점에서 그는 친구였던 톨킨과도 생각이 일치했는데, 이 덕분에 “반지의 제왕”과 “나니아 연대기”란 명작이 탄생할 수 있었다. 루이스는 이 작품에서 기독교적 교훈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 자체로도 충분히 멋진 판타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종류의 작품들을 만나는 게 쉽지가 않다. 우선은 동화 같은 건 아이들이나 보는 거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인 것 같고, 또 애초에 좋은 이야기를 만드는 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기도 하다. 그나마 그림책 쪽은 꽤 괜찮은 이야기들이 종종 보이는데, 아주 어린 아이들과 성인들 사이에 있는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는 더 찾아보기가 힘들다.


지난 번 서울 국제 도서전에 갔을 때, 이 책을 소개받았다. 매우 확신 있는 눈빛으로 책을 소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표지부터가 교복을 입은 귀여운 청소년들이 그려져 있고, “조각게임”이라는 알 듯 모를 듯한 제목도, 라운딩 처리를 한 책 모서리도 다 조금은 특별해 보였다. 그리고 오늘 아침 책장을 열었는데, 생각보다 흡입력이 있다.





이야기는 여중생 서예나의 관점으로 서술된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특별히 예쁘거나 잘난 데가 없다고 여기는 예나는,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형편으로 몰렸다. 특별히 악의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어느 날 친구들과 대화 중 작은 거짓말을 했고, 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연예인 연습생 정원과 친해지려다 또 다른 거짓말을 하게 된다.


한 순간 자신의 거짓말이 밝혀지면서 궁지에 몰리게 된 예나에게 갑자기 이상한 문자 메시지가 온다. “조각게임”에 참여하면 자신이 했던 거짓말을 모두 지워줄 수 있다는 제안. 처음 몇 번은 무시하고 지웠지만, 막다른 골목에 몰린 지라 결국 제안을 승낙하게 되고, 이제 본격적인 게임을 시작한다. 게임은 이제 예나의 눈에만 보이는 친구들의 가슴에 생긴 흉측한 구멍을 메우라는 것.


구멍은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공허함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보인다. 예나의 친구들은 구멍을 보거나 인식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중학생다운 방식으로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한 노력을 한다. 사람들의 인정이나 자신이 원하는 성공 같은 것들로. 게임에 참여하기로 동의하자 정말로 친구들의 기억 속에서 예나의 거짓말은 사라진 것 같았고, 이제 예나는 연습생인 정원의 성공을 돕기 위한 작전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그렇게 친구들의 가슴에 난 구멍을 어느 정도 메우는 데 성공한 예나. 하지만 구멍을 메우는 돌은 정확한 모양이 아니었고, 심지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작아지더니 결국 없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예나는 뭔가 중요한 걸 깨달은 듯하다.





사람의 마음에 빈자리가 있고, 그 자리는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다는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이어지던 내용이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청소년들의 눈높이에 맞게, 그리고 살짝 판타지적 내용을 섞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무엇보다 앞서도 언급했듯, 이야기에 흡입력이 있다. 중학생들이라면 이런 대화를 나누겠지 싶은, 귀여운 이야기들을 읽는 맛도 있다. 친구들에게 했던 거짓말이 들키는 장면에서는 나도 식겁했고, 의도치 않았던 거짓말들이 모여 주인공을 곤경에 처하는 모습은 참 잘 구성했다 싶다.

다만 인물들의 이야기 외의 배경에 관한 묘사가 약하다는 점은 문학적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루이스도 문학 비평 가운데서 이런 부분을 지적하기도 했는데, 뒤마의 “삼총사”에는 배경이 없어서, 이야기가 겨울인지, 여름인지, 궁전인지 어딘지를 구분할 수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 책의 작가 역시 인물 묘사에 치중하느라(그리고 아마 주제 전달에 집중하느라) 이런 부분까지 신경 쓰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부분이야 문학적 완성도에 관한 내용이고, 좋은 주제와 신선한 소재, 그리고 단순히 청소년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청소년들이 읽을 만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간만에 교회 청소년들에게 권해 줄 만한 책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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