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단지 정치적 계산의 낮은 차원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단지 무엇이 이익이 되는가 뿐만 아니라
무엇이 고상한 것이며 무엇이 명예로운 것인가에 대해
서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서방세계에 대한 경고』
영화 '공기인형' 중에서
‘기쁨’은 성의 대체물이 아니지만,
성은 기쁨의 대체물이 될 때가 아주 많다.
- C. S. 루이스, 『예기치 못한 기쁨』 中
1. 줄거리 。。。。。。。
신들을 섬기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키워낸 전사들로 그리스 전체를 정복하려는 군주 하이페리온. 그러나 올림푸스의 신들은 인간의 일에 직접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 때문에 나설 수가 없었다. 결국 하이페리온을 막아 나서게 된 것은 농부출신의 테세우스였다. 그가 폭군을 막을 운명을 갖고 있음을 깨달은 신녀 페트라 등과 함께 테세우스는 절대 무기 에피로스의 활을 들고 전쟁터의 한복판으로 들어간다.
2. 감상평 。。。。。。。
A급 영화는 아니다. 그러기에는 내세울 수 있는 부분이 딱히 보이지 않는다. 휘페리온(그리스 식 발음이다)과 테세우스라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과 스토리를 가져온 것은 기본적인 서사구조를 갖추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외의 부분들이 다 묻혀버린 듯한 느낌이다. 왜 영화가 ‘신들의 전쟁’이라는 제목을 갖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게 되었을 정도로 포스터 전면에 등장했던 그리스 신들의 비중은 축소되어버렸고, 테세우스와 페트라의 러브라인이나, 테세우스의 싸움에 담긴 의미 같은 것들은 미노타우르스의 미궁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건 돈 좀 써서 연출해 낸 대규모 전투신인데, 그 정도 눈요깃감은 이미 충분히 보지 않았나. 물론 고대 그리스 문명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라면 어느 정도 어필을 할 수 있겠지만.
영화를 보면 곳곳에 고대 그리스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주는 대사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감독은 교훈과 상업성 중에 후자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결과는 신통치 않아 보인다. 소년장사 테세우스는 너무 늙었고, 신들은 구경꾼이었으며, 차라리 자신을 돕지 않은 신들에게 복수하겠다는 휘페리온이 좀 더 설득력이 있을 정도다.
가장 부러운 건 이렇게 매년 쏟아낼 수 있는 풍부한 이야깃거리들이다. 그리스 로마 고대 신화라는 든든한 자산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원천이고, 이런 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산업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그에 반해 매년 무슨 날이 되면 반만 년 역사를 끊임없이 되뇌면서도, 모든 정치적, 경제적 역량을 그저 서양을 따라하는데 쏟아 붓기에 정신없는 이 민족의 현실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가까운 중국만 해도 삼국지 하나를 가지고서 잘 알려진 영화로만 만들어진 것이 벌써 몇 편이던가. 처음부터 배급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우리의 이순신이 테세우스나 알렉산드로스의 이야기에 미치지 못하는 건 아닐텐데 말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지금 이 순간 내가 먼저 자존심을 접고
사랑을 표현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누구 방식이 더 옳은지를 놓고 싸울 때마다
나는 사랑을 택하는가, 아니면 자존심을 택하는가?
- 게리 채프먼, 『함께 사는 동안에』
베이징의 한 발 마사지 업소에서 일하고 있는 핑궈(판빙빙). 좁은 단칸방에서의 가난한 삶이지만 남편인 안쿤(동대위)과 함께 즐겁게 살려고 애를 쓰는 그녀였다. 그러나 어느 날 술에 취한 그녀를 작장 사장(양가휘)이 강간을 하게 되면서 모든 일이 엉클어지기 시작했다. 마침 빌딩의 창문청소를 하던 안쿤이 그 장면을 목격한 것. 그리고 얼마 후 핑궈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문제는 점점 더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정작 남편인 안쿤은 자신의 애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반면, 아내에게서 아이를 얻지 못한 사장은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 안쿤은 이 일을 빌미로 사장을 협박해 돈을 요구하고, 사장은 아이를 얻기 위해 이를 수락한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는 태어나는데...
급격한 중국식 자본주의 성장의 이면에 존재하는 추잡하고 어두운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나가는 감독의 시선이 마음에 든다. 애써 과장되게 꾸며댈 필요도 없이 정확하게 그냥 그 모습 그대로를 담아내도 이런 영화가 나오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위대함에 경의를 표한다.
정부 주도의 급격한 경제성장은 필연적으로 전체 경제주체의 수용능력에 부담을 줄 수밖에 없고, 그 결과는 지배와 피지배 계층 간의 완전하면서도 돌이킬 수 없는 분리와 그 가운데서 상실되어가는 인간성뿐이었다. 영화 속 사장은 마사지 업소를 운영하며 벌어들인 돈으로 벤츠를 몰며 하룻밤을 즐기기 위해 여자를 사고 도박으로 돈을 탕진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핑궈와 안쿤 부부는 하루하루 입에 풀칠을 하면서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한 번 그렇게 신세가 나뉘자 이젠 무엇으로도 처지를 바꾸는 것이 불가능해져버렸다. 결국 자본주의적 발전이란 누군가에겐 기쁨을, 누군가에겐 절망을 안겨주는 지극히 인간적인 경제정책이었을 뿐, 애초부터 모두에게 이익을 돌려주는 체제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 등장하는 네 명의 인물(사장과 그의 아내, 안쿤과 핑궈)들의 행동은 모두가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사장은 강간을 한 종업원이 자신의 아이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거액의 돈을 주고는 아이를 가져가기로 한다. 게다가 뻔뻔스럽게도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 이래라저래라 조언을 하려 한다. 그의 부인은 애정 없는 남편과의 관계에 불만족을 느끼고는 자신을 찾아온 안쿤과 관계를 맺으며 냉소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고, 안쿤은 아내의 임신을 빌미로 돈을 얻어내려는 모습으로 심지어 아내를 제대로 보호하지도 못한다.
그나마 핑궈는 가장 정상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그나마 시종일관 수동적인 모습으로만 그려진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을 가장 인간적으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이유’는 아이였다는 점. 핑궈는 엄마로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꿋꿋이 버텨나가고 있는 것이었고, 사장은 자신의 핏줄을 타고난 아이를 지키기 위해 아내를 설득하려 하고 안쿤에게는 돈을 안겨준다. 그의 아내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연민과 남편에 대한 분노로 안쿤과 육체적 관계를 맺고, 안쿤은 아이에 대한 불신으로 아내를 의심하고 얼빠진 행동들을 계속한다. 정작 중요한 건 역시 돈보다는 사람이라는 게 아닐까.
양가휘와 판빙빙의 연기력은 영화 전체를 통해 빛이 난다. 특히나 판빙빙은 얼굴만 믿고 적당히 자리를 차지하는 모델이 아니라 진짜 배우라는 사실을 이 영화를 통해 확실하게 입증해내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 일이 그들의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슬프기도 하고. 자유무역이니 시장경제니 하는 것에 목숨 걸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믿기 싫은 이야기겠지만, 자본주의란 건 물질적인 측면에는 발전을 가져오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영혼의 차원에는 퇴보를 가져다주는 제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