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정보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멋지다.

하지만 그 정보를 선택하고,

거기에 휩쓸리지 않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먼저 정보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운 다음,

그걸 절제 있게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것은 분명 미래를 위한 교육 문제들 중 하나이다.

삭제의 기술은 도덕 및 이론 철학의 지류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 움베르토 에코, 『미네르바 성냥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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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지 않아도 자석이 철을 끌어당기듯
나쁜 습관에 빠진 사람은
나쁜 습관에 이리저리 끌려다닌다.


-존 클라이머커스 
 

 


Just as iron,
even without willing it,
is drawn by a magnet,
so is a slave to bad habits
dragged about by them. 


-John Clima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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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3 - 최후의 노력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3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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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갑작스러운 이민족의 침입으로 잇따라 군인 출신의 황제들이 나타나 상황을 수습하기 바빴던 3세기가 지나고, 로마는 제국 전체의 상황을 돌아보고 새로운 정책을 세울 줄 아는 두 명의 황제를 맞이하게 된다. 제국을 네 명의 황제가 나누어 방위한다는 전략을 세웠던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이를 다시 하나로 통합해 전제군주국가로 전환시켰던 콘스탄티누스가 그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시민들의 지지나 동의가 없이 오로지 권력을 가진 황제 자신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 이미 로마의 성격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2. 감상평 。。。。。。。                    

 

     로마라는 나라는 참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기원전 8세기 중반에 건국되었다고 알려진 이 나라가 4세기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니 족히 1,200년 째 나라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야 고려와 조선만 해도 각각 오백 여년은 되고, 신라는 천 년 가까이 나라를 유지했으니 어떤 나라가 몇 백 년을 지속했다고 하더라도 딱히 놀라지 않겠지만, 사실 세계사를 봐도 이런 경우는 매우 독특한 사례다. 이 정도로 버틸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장점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기간 동안 한결같은 국가 형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넘어간 것도 실로 놀라운 발전이었고, 다시 제정으로 변했고, 후에는 절대군주국가로 생명을 이어나간다. 다행이 이러한 변화는 각 시대마다 로마가 처한 현실에 가장 잘 반응할 수 있는 흐름을 탄 것이었고, 덕분에 로마가 망하지 않고 이어져나갈 수 있었다.

 

     사실 이렇게 본다면, 이 책의 군데군데 등장하는 것처럼 콘스탄티누스에 의한(사실 이미 이민족의 침입에 시달리면서 로마는 강력한 군주를 원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전제군주국가로서의 전환을 딱히 퇴보니, ‘이렇게까지 해서’(355)라니 하며 안타까워하거나 평가절하 할 이유는 없다. 로마가 언제 일관된 정체를 가지고 있었던가? 그런 식으로라면 시오노 나나미가 그렇게도 찬양해 마지않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야말로 공화정에서 한 사람에게 권력이 독점된 체제로의 변화를 시작한 인물이 아닌가.

 

     물론 이 시기 과거 로마를 강하게 만들었던 여러 미덕들이 점차 줄어가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건 로마라는 국가가 쇠락해가는 시기이기 때문이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했기 때문도 아니고, 콘스탄티노플로 사실상의 수도를 옮겼기 때문도 아니다. 전제군주국가로의 전환도 따지고 보면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황제를 암살해버린 로마인들 자신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도 자신들이 고대 로마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사람들이나 되는 양 안타까운 척을 하는 학자나 저술가들을 보면 그 순진함에 어이가 없어지기도 한다.

 

 

     저자는 3장에서 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사실상 장려 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 설명을 시도한다. 저자에 따르면 시민들과 원로원의 지지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기존의 원수정을 전제군주정으로 바꾸기 위해 신이 수여한 왕권이라는 개념이 필요했고, 이는 기존의 로마의 다신교 신관으로는 불가능했기에 새로이 기독교를 지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설명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 면이 있는데, 사실 로마는 이미 오래전부터 실력주의(이 단어가 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로 나아가서 원로원과 시민들의 지지란 사실 명목상에 불과한 것이 된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절대군주가 된 것처럼 행동했던 황제들은 이미 앞에도 있지 않았던가. 더구나 왕권신수설이라는 천년 후의 개념은 천년 뒤에나 나오게 된 것이다. 중세가 되기 이전엔 교회가 황제에게 관을 씌워준 적도 없었고, 저자에 따르면 여전히 소수파에 불과한 기독교가 어떻게 제국의 황제의 위치를 공고히 해줄 수 있었겠는가.

 

     저자는 자신이 비종교적 관점(354)으로 꽤나 중립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신도’라는 일종의 다신교 문화에 익숙한 일본인이어서인지 일신교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신교를 서술할 때면 꼭 한 번쯤 비꼬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14권부터는 본격적으로 로마가 멸망한 원흉으로 기독교를 지목하는 듯한 뉘앙스를 보이니 말이다. 역시 인간은 자신이 자라온 공기가 아닌 다른 공기를 들이마시면 불편함을 느끼게 되나보다.

 

 

     확실히 뒤로 가면 갈수록 재미가 떨어지는 시리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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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남의 불행을 보고 참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

 

- 라 로슈푸코, 『인간 본성에 대한 풍자 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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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옥성호의 부족한 기독교 3부작 시리즈 2
옥성호 지음 / 부흥과개혁사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1. 요약 。。。。。。。                      

 

     심리학의 무분별한 도입으로 인해 교회에 나타난 문제점을 지적했던 전작에 이어, 이번에는 마케팅 기법이 교회에 도입되면서 나타난 문제점을 지적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교회에 출석하도록(구원받을 수 있도록이 아닌!) 고안된 교회 마케팅 기법은 결국 기독교 복음의 상품화를 초래하고 말았고, 마케팅 자체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구매자 중심의(이 경우에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편한) 변형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변형은 결국 교회에 독으로 작용할 것이다.

 

    저자는 마케팅 기법이 교회에 도입되게 된 배경을 살피고, 빌 하이벨스 목사의 윌로우크릭 교회와 릭 워렌 목사의 새들백 교회에 나타난 변화와 문제점을 실례로 든다. 나아가 이 모든 것의 배경에는 숫자에 관한 숭배가 자리 잡고 있음을, 즉 ‘마케팅 교회’는 사실 물량을 숭배하고 있을 뿐이라는 결론을 낸다.  

 

 

 

 

 

 


2. 감상평 。。。。。。。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내 경우 이 책을 보면서 딱히 반대할 만한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물론 이런 책을 읽고 반발할 사람들은 애초에 이런 책을 보지도 않겠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야 이런 책이 출판되었다’며 마냥 반길 수만도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 안타까운 내용이니까. 사실 이 책에 지적되어 있는 내용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잔뜩 쌓이기 시작해, 이젠 감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전엔 목사들 사이의 고민이었지만, 이제는 목사 이외의 그리스도인들까지도 더 이상 참기 어렵게 되었다고나 할까. 이 문제를 문제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인이 아닌 교인들밖에 없는 것 같다.

 

     책의 지적을 요약하면 한 가지다. 교회가 세상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덧 교회도 규모의 경제를 추종하고 있고,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의 실용주의를 받아들여 교회다움을 잃어가고 있다. 문제는 이런 식의 세상 따라잡기의 결과가 세상을 능가하는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결론지어지기보다는, 세상에서 내놓은 것들의 아류작들밖에 보여줄 수 없다는 태생적 한계다. 그러다보니 퀀틴 슐츠가 지적하는 것처럼, 불신자들을 그리스도께 돌리겠다고 만들어진 기독교 텔레비전이 도리어 불신자들로부터는 외면 받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진품이 옆에 있는데, 그리고 비용의 차이도 별로 없는데, 굳이 복제품을 선택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말이다. 교회가 교회만이 가지는 독특함을 버리고 세상과 비슷해지려고 애를 쓸수록, 세상이 더욱 교회를 멀리하게 될 것은 자명하다.

 

     해답은 교회 자체의 성장만을 바라보지 말고, 교회가 가리키는 그분께 집중하는 것이어야 한다. 교회는 그분의 통치를 확장시키는 도구인데, 도구가 자기를 개량하는 데에만 집중할 뿐 정작 그 도구로 해야 할 일은 잊어버린다면 얼마 가지 않아 버려지지 않겠는가. 이 책에서 저자는 이를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는 말로 표현한다. 결국 바른 교회론의 정립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목사들만이 아니라 온 교회구성원들이 교회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깨달아야만 문제는 고쳐지기 시작할 것이다. 이 책이 이런 필요를 촉구하는 좋은 촉매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출판된 지 3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띄는 큰 움직임이 없는 걸 보면 쉽지만은 않은 일인지도 모르겠다.(물론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을 수도 있다. 조용함 자체가 그들이 마케팅에 목을 매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좋겠다.)

 

 

    책은 비교적 평이하게 쓰였다. 전작보다는 페이지가 더 늘어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읽기가 힘들 정도의 내용은 아니다. 아마도 책 전체에 담겨 있는 교회에 대한 저자의 안타까움에 자연스럽게 공감을 하며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작을 읽으며 아쉬웠던 투박한 문체는 조금 교정되었고, 자신의 주장을 절제하며 제시하려는 노력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다만 책의 프레임과 분석 자체는 다른 여러 외국 저자들 - 이를 테면 마이클 호튼 같은 -에 의해 분석된 것들에서 크게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다. 사례분석이 대부분 미국교회에 국한되어 있는 것도 좀 아쉽다.(물론 왜 그럴지 짐작은 간다.) 우리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미국교회의 역사를 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좀 씁쓸한 일이다.

 

     읽어보라. 확실히 추천도서 목록에 넣어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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