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칼로 손에 상처를 내거나

끓는 물에 발을 데는 일은 흔히 일어난다.

그렇게 해서 생긴 상처는 40년이 흐른 뒤까지 그대로 남는다.

 

한데 어찌된 일인지 부모들은 마음의 상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왜곡된 정신과 망가진 인격의 소유자들은

대체로 자녀를 칼이나 불의 위험으로부터는 잘 보호했으되

영혼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조심성 없는 부모들이 길러낸 것이다.

 

 

- 길버트 하이트, 『가르침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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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는 가난한 나라를 돕는가 - 국제원조를 둘러싼 정치와 외교적 진실을 낱낱이 파헤치다
캐럴 랭커스터 지음, 유지훈 옮김 / 시공사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1. 요약 。。。。。。。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Part 1과 2에서는 국제원조에 대한 일반적인 개관으로 국제원조가 무엇인지, 그리고 역사적으로 어떻게 원조에 대한 의식과 자세가 달라졌는지를 훑어본다. 이어지는 부분(Part 3~7)에서는 미국, 일본, 프랑스, 독일, 덴마크라는 다섯 나라에서 실제로 원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목적과 현황, 시대적 변화 추이에 대해 살핀다. 마지막인 Part 8에서는 국제원조에 대한 간략한 전망으로 마친다. 

 

2. 감상평 。。。。。。。

 

     이 학술적인 책은 20세기 들어서 국제원조라는 개념이 어떻게 나타났고, 사람들에게 익숙지 않았던 이 사업을 누가, 어떤 목적으로 오늘날과 같이 자연스러운 일로 만들었는지에 관해 각종 통계와 저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객관적인 서술을 시도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각국의 정치구조가 국제원조와 같은 국가적 의제에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강한 권력을 가진 대통령제보다는 의원내각제가, 양당제보다는 다당제가 국제원조 같은 틈새 이슈를 부각시키는데 더 유리하다. 왜냐하면 후자 쪽의 정치구조에서는 항상 다른 정당 및 정치 세력들과의 연정이 필요하고,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정당에서는 다른 정당에서 선점하지 않은 이슈들을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점은 비단 국제원조만이 아니라, 다른 정책적 의제에도 적용되는 부분일 것 같다.

 

     책의 앞뒤 표지에는 ‘국제원조를 둘러싼 정치와 외교적 진실을 낱낱이 파헤치다’나, ‘국제원조는 인도적 차원이 아닌 자국의 이익을 위한 정략이다!’와 같은 자극적인 문구를 사용해 이 책이 뭔가 음모를 파헤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홍보하고 있으나, 막상 책의 본문에는 딱히 그런 도발적인 내용이 담겨 있지는 않다. 사실 국제원조가 자국의 외교적 이익달성을 위한 한 수단이라는 내용 정도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니 굳이 ‘파헤친다’는 식의 표현을 사용할 것도 없지 않은가. 차라리 원조의 대가로 수혜국의 각종 이권에 개입하는 행위나, 미국 등의 나라에서 볼 수 있듯 원조에 사용되는 일체의 제품들을 자국산으로 제한해 일종의 보조금 지급효과를 달성하는 일과 같은, 좀 더 문제가 되는 사안들을 다뤄주는 것이 좀 더 효과적이었을 텐데 이런 내용들은 등장하지도 않는다.

  

     사실 국제원조는 그 목적이 어떠하든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할 것이다. 당장 하루에 천원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이 수두룩하지 않은가. 물론 공여국 위주의 원조보다는 원조를 받는 수혜국의 입장과 눈높이를 맞추어 이루어지는 것이 최선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사 늘 최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애초부터 자발적인 선을 기대할 수 없는 인간들을 향해서 아무런 대가 없이 선을 베풀라고 요구하기 보다는, 그들이 이익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인정하더라도 더 많은 원조를 유도해 내는 것이 국제사회가 할 수 있는 차선책이 아닐까 싶다. 굳이 원조를 하는 공여국의 속셈을 검은 것으로 비난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말이다.

 

     내용의 학술적인 정밀성과 비례해 재미는 떨어진다. 하지만 이런 책도 있어야 기초적인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전반적으로 대학교의 국제관계학 개론 교재 정도의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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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은 ‘텔레비전을 그냥 보라’고 부르심 받지 않았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예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탁월한 프로그램들을 만들고

또 꼼꼼히 챙겨 시청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책을 읽듯 텔레비전을 꼼꼼히 시청하기 위해서는,

리모콘을 사용하는 데서 오는 순간적인 즐거움보다

더 고상하고 사려 깊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것이 마음과 생각을 다해 이 매체를 거듭나게 하라는 부르심이다.

 

- 퀀틴 슐츠, 『거듭난 텔레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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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상의 관심사들에 대한 부질없는 집착에서 벗어나

온 인류에 대하여 광대한 사랑을 품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자신이 진정으로

살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 마틴 루터 킹(목사, 흑인인권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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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영화
평점 :
개봉예정


1. 줄거리 。。。。。。。                      

 

     백제를 무너뜨리고 이어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 공격을 앞둔 나당연합군. 연합군이라고는 하지만 서로 다른 속내를 가지고 있었던 두 나라는 쉽사리 평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한다. 먼저 대세는 기울었지만 평양성 안에는 당과의 협상을 주장하는 남생(연개소문의 장남)이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남건(연개소문의 차남)과의 다툼에서 밀려남으로써 고구려는 협상의 여지를 스스로 없애버렸다. 사람은 고민이 사라지면 의외로 강해지는 법이다. 온 성이 결사적인 자세로 적을 막으니 쉽게 공략될 리 없었다.

 

     여기에 당이 한반도의 지배권을 넘겨줄 지 확신할 수 없었던 신라와, 백제와 고구려에 이어 신라까지 무너뜨리고 한반도를 손에 넣으려는 당은 모두 평양성 이후 상대와의 일전을 대비해 병력을 보존할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서로 눈치만 볼 수밖에. 고민이 많은 군대가 고민이 없는 군대를 치는 꼴이니 대군이라 해도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결국 당에 투항한 남생이 평양성에 고민을 심어두는 데 성공하고, 마침내 성문이 안에서부터 열리면서 전쟁은 급격히 절정으로 치닫는다.

 

 

  

2. 감상평 。。。。。。。                      

 

     영화는 일반적으로 전쟁이란 것이 단순히 선과 악으로 쉽게 가를 수도 없고, 그 안에 다양한 정략(政略)적 목적들이 담겨 있으며, 국제관계에 있어서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나아가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아니겠느냐는 주제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아내고 있다. 어느 것 하나에 좀 더 집중했다면 보다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길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자체가 가족끼리 가볍게 즐기면서도, 아는 사람들은 또 영화를 읽어내는 맛을 느끼도록 제작된 것 같으니 뭐 그대로도 괜찮아 보이긴 한다.

 

     전편인 ‘황산벌’에서도 나타났던 주제지만, 이번 영화에서도 감독은 ‘전쟁은 윗대가리들끼리 하는 것이지 평범한 백성들과는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거시기(이문식 분)의 대사를 통해 전쟁이 가지고 있는 비인간성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 끌려나와 딱히 그 전쟁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거시기에게, 이 전쟁은 그저 살아나기만 하면 누가 이기든 상관없는 이벤트일 뿐이다. 시작은 백제군으로 했으나, 나라가 망한 뒤에는 다시 신라군의 일원으로 평양성 앞까지 와서 결국 갑순과 결혼해 고구려군으로 전쟁을 마친 거시기의 삶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를 보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소시민들의 삶과 ‘거시기’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권이 바뀌고 선거를 통해 아무리 국회의원들을 뽑아놓아도, 일단 당선되고 나면 언제 서민들을 위한 정책을 쏟아냈던 사람들인가 싶을 정도로 안면을 몰수하는 정치인들을 보며 이제는 아예 기대를 접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상황에서 비록 영화지만, 거시기의 국가에 대한 ‘파업’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더 이상 국가의 부속품으로 살기를 거절하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겠다는 거시기의 선언은 일견 이기적인 태도로 보일수도 있으나, 진짜 이기적인 것은 온갖 명분을 끌어대며 시민들에게 한없는 희생과 양보만을 요구하는 지배층들은 아닐까. 엄밀히 말하면 국민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지배층의 국민’이기를 포기하는 것이고, 지배층들에 대한 파업의 선언이다. 국민들의 파업을 불순한 눈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그들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민주국가의 기본 방향이 아니던가. 물론 현실세계에서 아직까지 그런 나라는 없었고, 영화에서도 이 파업은 거시기 혼자만의 파업으로 끝났을 뿐 다시 역사는 역사대로 흘러가버리고 만다.

 

     재미있게 만든 영화다. 이 시리즈 영화 특유의 사투리들은 명절에 모여서 함께 볼 때 쏠쏠한 재미를 더해주고, 전편보다 더 강해진(혹은 과장된) 유머코드는 부담 없이 즐기기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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