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는 쉽지 않은 삶의 방식이다.

무엇인가를 포기한다는 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거액의 재산을 포기한다던지,

높은 사회적 지위나 편하고 좋은 대우를 뒤로 하고

빈손으로, 또 낮은 자리로 가는 것은

쉽게 볼 수 없는 용기 있는 행동이다.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사람을 향해

박수를 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러 종교에서도 이 포기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얼마 전 입적한 법정 스님이 쓴 ‘무소유’라는 책은

제목 그 자체가 그가 믿는 종교의 이상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고,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프란체스코라는 수도사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그가 한 여러 훌륭한 일들과는 별개로)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오늘날에도 성직자, 혹은 독실한 종교인이라면,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사람으로 기대되고 있고,

때문에 그들이 비싼 집과 차를 소유하거나

무엇인가 강해지거나 하면 그 자체로도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있다.

심지어 어떤 이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느냐가

그의 종교적 신앙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인 양 여기기도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모든 포기가 가치 있는 것일까?

포기라는 행위가 가치가 있는 것은

그 행위 자체가 옳은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용기’라는 미덕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자신의 전 재산을 포기했더라도

그 이유가 누군가의 협박에 굴복했기 때문이라면

그는 딱히 칭송받을만한 이유가 없다.

누구의 강요나 압박에 못 이겨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할 때에야

그것은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한 포기라 할 수 있다.

 

또, 그가 포기한 것이 정당하게 그의 소유여야 한다는 조건도 붙는다.

범죄의 행위로 얻게 된 재물을 포기한다거나 하는 것은

단지 인과응보일 뿐이다.

이 말은 좀 다르게 표현하면,

그가 온전히 소유한 것만을 포기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오직 그가 가지고 있는 것만을 포기할 수 있다.

아니면 가질 수 있으리라고 상당히 기대될 때만 그렇다.

생각해 보라. 내가 김태희와 결혼하기를 포기한다고 말하면

이걸 진지하게 칭송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건 실제로 내가 가지고 있는 자격이나 능력, 혹은 재화도 아니고

그것에 이를 수 있으리라는 상당한 기대조차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그냥 ‘체념’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문제는 그런 용기에서 비롯된 포기와 체념을 혼동하는 데 있다.

특히나 포기를 칭송하고 높게 보는 문화에서 자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 이런 판단을 내릴 소지가 크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포기란 매우 쉬운 도피처로 전락한다.

자신이 없거나, 실패를 경험한 뒤에는

누구나 두려움을 품게 된다.

그리고 이럴 때 사람들은 짐짓 뒤로 물러서며 스스로에게 암시한다.

이건 용기 있는 포기라고.

사실 이건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나는 더 중요한 것을 위해 이걸 포기하는 거라고.

 

물론 덜 중요한 것을 포기하고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일은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선택은 앞서의 조건에 부합할 때라야 그런 것이지,

포기하는 것 자체가 더 나은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나 압박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용기에서 비롯된 결정이어야 하고,

자신이 온전히, 그리고 정당하게 소유하고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높은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그냥 도망가고 있는 것일 뿐이다.

(도망이 항상 비난이나 조롱을 받을만한 일이란 뜻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약한 인간이고, 나 역시 그 인간 중 하나다.)

 

길게 보면 포기는 인생을, 그리고 세상을 윤택하고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체념이나 도망은 그저 기회만을 앗아가고 후회만을 남길 뿐이다.

끊임없는 자기 암시로 잠시 자기를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나,

감추어진 것은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다.

감정의 현혹에 빠져 들어가지 말고,

그럴 땐 잠시 머리를 식혀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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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었다.

 너무 못생긴 남자가 너무 아름다운 여자한테 사랑을 고백하면

농담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건.

- 아멜리 노통브, 『공격』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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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사랑이라는 병은 괴질(怪疾)이기는 하되

사랑 자체가 곧 치료의 수단이 된다는 이븐 하즘의 정의는 인상적이었다. 

이븐 하즘에 따르면 사랑이 괴질인 까닭은,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치료를 원하지 않기때문이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통찰인가!'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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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oly life will
produce the deepest impression.
 
Lighthouses blow no horns;
they only shine.
 
- D. L. Moody

 
거룩한 삶은
가장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등대들은 경적을 울리지 않고
다만 빛을 비출 뿐 입니다.


- 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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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한다는 것 - 제대로 믿기 위해 다시 붙잡는 믿음 이야기
박광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1. 요약 。。。。。。。

 

     교회와 믿음의 본질에 관해 고민하는 한 목회자가, 교회 공동체에 처음으로 들어온 신자들을 위해 믿음이란 무엇인지 목회적 관점으로 풀어낸다. 원래는 새로 들어온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라고는 하지만, 수 년 간 신앙생활을 했더라도 아직 참 맛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책의 내용 대부분은 그대로 도움이 될 것이다.



2. 감상평 。。。。。。。

 

     책에 담긴 전체 내용이 새롭거나 특별하지는 않다. 하지만 책에 담긴 내용은 충분히 진중하고 담백한 맛을 준다.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애초의 집필 목적인 독자들에게 신앙이란 무엇인지를 차분히 가르치고자 하는 부분에는 거의 제대로 도착했다. 아마도 책의 이런 성격은 저자의 ‘목회적 의도’ 때문일 것이다.

     전국에 수만 개의 교회가 있고, 그 몇 배에 달하는 목회자들이 있지만 여전히 이 나라가 충분히 기독교적(여기서 이 단어는 ‘국교화’나 ‘지배적 위치’와는 다른 의미다)이지 못한 것은, 우선은 신자들이 그들이 믿는 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어쩌면 그들이 무엇을 믿는 지 제대로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교회에 나오면 복 받는 것이고, 그 복의 내용은 경제적이며 세속적인 성공과 동일시되는 것이라면, 그건 교회에 나오나 서낭당에 나가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상황이 벌어진 데에는 당장의 수적 증가를 위해 정말로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이 무엇인가보다는 쉽고 대중적이며,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을 수 있는 내용들을 가르친 목회자의 책임도 무겁다고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책의 출판은 나름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물론 이 책에 담긴 것과 같은 생각을 하는 목회자들이 적지는 않겠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글로 표현하고, 다시 책으로 엮어내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일이니까.

     그렇다고 책의 내용이 단순한 것은 아니다. 과연 처음으로 교회에 나온 사람이 이 부분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싶은 부분도 보인다. 하지만 관심을 갖고 읽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한 권쯤 사서 권해줘도 괜찮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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