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가 준비중인 '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년 기념 열린음악회'.

 이쯤 되면 개념이 없는 거지..

서해에서는 병사들이 수장된 채 시신도 못찾고 있는데

부산에서는 삼성 전 회장 '탄생'을 기념은 음악회?

그것도 국민에게 수신료를 받아서 운영하는 공영방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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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 법학자 김두식이 바라본 교회 속 세상 풍경
김두식 지음 / 홍성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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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개혁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습니다.

이미 한국의 많은 교회에서 

교인들이 목회자를 ‘참아 주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1. 요약 。。。。。。。


     저자는 ‘평생을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자신이 그동안 교회 때문에 느낀 슬픔, 절망 그리고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고백한다.(6) 1장부터 3장까지는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은 교회의 현실을 지적하며 이를 ‘교회 속의 세상’이라는 표현으로 정의한다. 이런 현상을 발생시킨 것은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라고 지적하는 저자는(4장) 국가에 의해 교회가 인정을 받게 되면서 너무 많은 것을 내어준 결과, 세상 속에서 교회의 독특성을 드러내야 함에도 반대로 교회 안에 세상이 들어와 버렸다는 것. 그 결과 중세 말 종교개혁의 시기에 이르러서는 교회 문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극도로 심해졌고 30년 전쟁이라는 극심한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고도 지적한다.(5장)
 

     6장부터는 그러면 ‘대안’은 어떤 것인지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놀랍게도 저자는 그 시작을 중세에 등장했던 ‘이단들’에서 찾기 시작하는데, 사실 그들이 주장했던 것들은 성경에 좀 더 가까운 주장들이었으며, 이는 위클리프나 후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약자를 품을 수 있는 교회(7장), 그로 인해 진정한 샬롬이 이루어지는 교회(8장)가 되어야 한다고 천명한 저자는, 더 이상 개혁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간곡한 부탁(9장)으로 글을 마친다.



2. 감상평 。。。。。。。

 

     이런 책의 서평을 쓰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저자의 뜻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나도 저자와 마찬가지로 그 비판받는 공동체의 한 일원이기 때문이리라. 나아가 책이 지적하는 내용들이 아예 사실과 거리가 먼 것도 아니기에, 단지 내가 한 잘못은 아니지 않느냐는 식의 간단한 반박도 통하지 않는다. 책을 쓴 저자도 많은 고민과 아픔을 안고 썼겠지만,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는 것도 그 못지않게 힘든 일이다.

  

     저자가 오랫동안 보고, 듣고, 느낀 것은 사실과 다르지 않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 교회는 여러 가지 내장질환을 앓고 있었고, 결국 그 질병이 겉으로 드러나기에 이르렀다는 데에는 교회에 대해 긍정, 혹은 부정적 감정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어느 정도 인정하는 바이다. 문제는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느냐이다. 어떤 사람은 이를 교회 자체에서 기인하는 문제로 보고, 또 다른 사람은 외부적 상황을 좀 더 중요한 요인으로 본다.

 

     이 책에서 저자는 후자를 좀 더 주도적인 원인으로 진단하면서, 그에 대해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교회의 잘못을 함께 지적하는 방향으로 내용을 진행한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은 박해받던 교회에게는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결국 국가에 의한 교회 개입이라는 좋지 않은 전례를 남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이 교회 속으로 들어오면서 교회의 본질이 흐려지기 시작한 것이 모든 것의 원인이라는 진단.

 

     기본적으로 문제의 구조에 대한 저자의 진단에는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저자의 훑어 나가는 역사에 대한 약간의 보충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매우 단선적으로 교회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그 중심에는 ‘주류는 언제나 잘못이 많고, 비주류는 선하다’라는 일종의 선입관이 있는 것 같다. 콘스탄티누스는 문제의 원인이고, 카타리나 왈도는 선한가? 어쩌면 ‘주류’라는 것은 그것이 더 지속적인 시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더 많은 실수를 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아닐까? 카타리나 왈도파가 끝까지 남았다면 거기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었을까? 분파는 교단을 형성하고, 교단은 기득권을 만들며, 기득권은 다시 분파를 낳는다는 교회사가들의 말은 좀 더 깊이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교회가 왜 그래’라는 비난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비난의 대상과 원인을 적절히 잡아내서 하는 비난은 많지 않다. 기껏해야 기독교인 중 누가 하는 짓을 보니 기독교는 나쁘다는 식의 일차원적 비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물론 그런 비난과 지적일지라도 잘못된 것이라면 귀를 열고 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에 대한 지적의 깊이가 얕고 어설프면 그 해결책이 제대로 나올 리 없다. 우리나라 범죄자들의 99%가 쌀밥을 먹었다고 해서 쌀밥이 범죄를 일으키는 건 아니지 않은가.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드러내는 모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는 아니다. 우리가 교회 문제를 생각할 때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전자는 교회에 대한 대책 없는 비난을 자제케 해 주고, 후자는 교회에 대한 무조건적 옹호로부터 깨어나게 해 준다.

     이 책은 나름대로 문제에 대한 진지하면서 애정 어린 지적을 시도하고 있다. 저자가 제시한 대안적 교회 모델도 나름 흥미로운 ‘실험’이 될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저자 역시 느끼고 있듯 그러한 실험을 어느 정도까지 밀고 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헌법의 풍경』에서 받았던 저자에 대한 인상은 다루고 있는 분야는 다르지만 이 책에서도 꽤나 짙게 느껴진다. 역시나 꼭 한 번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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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1~6권 세트 - 전6권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외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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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른 스승 신들이 노여워한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어쨌거나 그게 진화의 방향이 아니냐?> 하고 말이다.

단단한 것이 무른 것을 이긴다. 파괴하는 자가 도피하는 자를 이긴다.

그러니까 경쟁자들을 없애 버리는 자는 싸움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1. 요약 。。。。。。。

 

     영계(靈溪)를 탐사하다가(『타나토노트』) 죽어 천사가 된 후(『천사들의 제국』), 마침내 신 후보생이 된 미카엘 팽송. 그는 다른 143명의 신 후보생과 함께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을 스승으로 삼아 새로운 지구를 탄생시키고 자신이 맡은 부족을 승리자로 만드는 거대한 게임에 참여한다. 하지만 타고난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는 그는 다른 후보생들과 함께 게임이 벌어지는 ‘아에덴’을 벗어나 그 ‘위’에 누가 있는 지를 찾아 나서고, 그러는 중에도 게임은 지속되면서 하나 둘 탈락자들이 늘어간다. 게임의 결말이 가까워지면서 신 후보생들 간의 긴장감은 높아지고, 팽송은 마침내 ‘9’에 이른다. 하지만 이어지는 반전..

  

 

2. 감상평 。。。。。。。

 

     사후세계에 관한 작가의 관심은 마침내 신들의 세계까지 올라갔고, 모든 것을 부정하는 데(無)까지 이른다. 모든 것이 상상의 산물일 뿐이라는 결론은 이제까지 그 ‘신들’을 우려먹으며 많은 책을 팔았던 저자의 이야기치고는 썩 특별하지도, 탁월하지도 않은 마무리였다. 최악이라고 까진 못하더라도 고심 끝에 차악(次惡)의 선택이라고나 할까. 책을 읽는 내내 독자들이 함께 고민했던 수많은 문제들과 질문들은 결론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개미』를 처음 손에 든 지 10년 만에 느끼는 저자의 상상력 고갈의 징조였다.   

   

     앞서 언급한 두 편의 작품들과 더불어 마침내 작가의 사후 세계에 대한 탐구가 드디어 끝이 났다는 점이 이 작품을 읽고 든 가장 긍정적인 느낌이었다. 사후 세계에서, 천사들의 세계, 나아가 신 후보생과 신 자체의 세계까지 나아갔으니 구조만 보면 단테의 「신곡」의 패러디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패러디의 수준이 원래의 그것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는 점이 아쉽다.

     기발한 상상력들이 담긴 단편집 『나무』라는 작품에서 이미 ‘어린 신 후보생들’의 이야기를 간단히 언급했던 적이 있었던 걸 생각해 본다면 이 작품에 관한 착상은 꽤나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문제는 판을 너무 크게 벌인 것 같다는 점이다. 대충 단편으로 끝났을 때는 여운이나마 남을 여지가 있었지만, 여섯 권이나 될 정도로 꽉 찬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지루해지는 느낌이 강해졌고, 결말은 허무했다.

     가장 좋아하던 작가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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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존 - Dear Joh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1. 줄거리 。。。。。。。

 

     현역 군인인 존은 휴가를 나와 있는 동안 우연히 만난 사바나에게 호감을 느낀다.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매일같이 만나며 서로에 대한 마음을 키워가던 그들은 방학과 휴가가 끝나면서 헤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수시로 편지를 교환하며 인연의 끈을 이어가던 기다림의 시간은 존의 전역이 예정된 1년 후면 끝날 것 같았지만, 갑작스럽게 발생한 테러와 그로 인한 복무연장 결정은 적어도 둘 사이에 있어서만큼은 큰 시련이었다.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도 계속되던 편지교환은 어느 날 도착한 사바나의 편지 한 통으로 중단되고 만다. 

 


 

2. 감상평 。。。。。。。

 

     이 생각하지 말고 오직 느껴야만 영화표 값에 대한 아쉬움을 누를 수 있는 영화가 던져주는 메시지는 딱히 없다. ‘2주간의 찬란한 사랑, 7년간의 가슴 벅찬 기다림’이라는 카피문구는 두 문장 사이에 무엇인가 빠진 것이 있었고, 그 빠진 한 줄은 이야기의 내용을 전혀 다르게 바꾸어 놓았다. 감독이나 홍보담당자는 적어도 이야기의 ‘분위기’는 그대로라고 강변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글쎄다..

     배우들의 연기력, 특히 사바나 역의 아만다 사이프리드는 맘마이야 때보다 확실히 나아지긴 했다. 채닝 테이텀은 여전히 약간은 무뚝뚝한 맛이 있었고. 하지만 영화관에 가는 시간과 비용을 들이는 이유가 단지 배우를 보기 위해서는 아닌 나 같은 관객에게는 그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었으면 하는데, 이게 너무 무리한 요구일까.

 

 

     영화의 중요한 소재 가운데 하나인 ‘편지’는 기다림은 기쁨을 배가시킨다는 교훈을 스스로 체득하게 만드는 매체다. 그것은 즉각적인 전송으로 인해 조급증이라는 병에 걸려 있는 현대인들은 쉽게 느끼지 못하는 긴장과 떨림을 주었었다. 기다릴 줄 모르는 현대인들, 무엇이든 느끼는 대로 행동하도록 부추김을 받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세계관은 기술의 빠른 진보라는 선물을 가져다주었을지는 모르지만, 그와 함께 ‘일단 해 보고 나서 생각하자’는 식의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행동을 조장하는 면이 크다. 사실 오늘날 많은 문제는 그렇게 생각 없이 눈앞의 것만 보며 저지른 사람들이 일으킨 것이 아닌가. 당장에 모든 단문전송메시지(SMS)와 휴대폰과 인터넷을 이용한 각종 메신저를 내던져버리고 편지로 돌아가자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겠지만, 가끔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편지를 통해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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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지 않을까?
김진 지음 / 위즈덤로드(위즈덤하우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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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물이 고이면 썩게 마련이에요.

앞에서 지적한 섬김과 치유와 쉼이 없는 교회의 모습도

모든 것이 교회 안으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교회 안에서 서로 부딪치고 있으니 문제가 아닌 것도 큰 문제로 부각되고,

그러다 보면 갈등과 싸움이 많아지는 것이에요.

지금 말씀처럼 세상에 나가서 복음과 진리로 싸우면

교회 안에서 섬김과 치유와 쉼은 자연스럽게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밖에서 그렇게 힘들게 고생하다 보면

안에서는 서로 위하는 마음이 더 간절하게 생길 테니까요.

 

1. 요약 。。。。。。。

 

     ‘왜 기독교인이 예수를 믿지 않느냐’는 도발적인 질문을 100분 토론 형식으로 꾸며낸 책이다. 교회와 예수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다소 소모적인 논쟁(1장)으로 이야기의 불을 붙이는 전략을 사용한 저자는, 본격적으로 2장으로 들어가면서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로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는, 알맹이 빠진 모습(저자는 이를 ‘붕어빵 기독교’라는 용어로 표현한다)이라고 지적한다. 3장에서는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를 짚어보고, 4장부터 6장까지는 그 결과 나타나고 있는 파열음들을 들려준다. 7장부터는 결론부로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가 올바로 회복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짚어보고 있다.

 


2. 감상평 。。。。。。。

 

     이 독특한 방식의 책의 구조는 여러모로 저자에게 잘 맞았던 것 같다. 우선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에 대해 일종의 변증과 발전적 제안을 한다는 책의 기본 방향에 잘 어울린다. 일반적인 서술로 진행했다면 자주 반복되는 구조로 인해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었겠지만, 토론형식을 사용함으로써 중간중간 저자와 독자 모두의 생각과 어긋나는 발언 삽입함으로써 이런 위험에서 벗어났다. 또 이런 형식에는 일반적인 유리점도 있는데, 먼저 각각의 인물이 짧은 시간동안 발언을 해야 하기에 일부러 길게 저자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만 툭툭 던져도 된다는 것(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서술상의 편리함인지 모두 알 것이다)과, 등장인물이 많기 때문에 혹여나 어떤 독자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주장이 나와 항의를 받더라도 ‘그건 내 생각이 아니었소’라고 쉽게 빠져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서술 방식에는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약점도 있는데, 한 명의 저자가 성격이 다른 여러 등장인물들의 입자에서 발언을 꾸미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야기의 후반으로 가면서 점차 등장인물들의 발언만 놓고 보면 서로 잘 구분이 되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저자가 하고 싶은 부분에 가까워질수록 여유가 사라진다고 할까. 그래도 전반적으로 꽤 재미있는 시도이긴 했다.

 

     저자가 지적하는 한국 교회의 문제점들은 대부분의 신자와 비신자들이 공유하는 문제일 것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문제의 원인은 3장에 잘 나와 있는데, 성경해독력의 저하와 구원의 의미에 대한 축소, 제자도에 대한 외면, 맘몬주의 등이 그것이다.(76-77)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비교적 정확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한국 교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신학을 추구하는 총신대와 가장 진보적 신앙을 천명하는 한신대 양쪽에서 모두 공부했던 저자의 독특한 이력의 영향도 있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은 양쪽의 신학이 적어도 실천적 영역에 있어서만큼은 서로 통하는 면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내용상에서도 저자는 여섯 명의 인물들의 입장을 자유로이 오가고 있다.

     문제는 그 해결방향. 책 속에도 언뜻 언급되었듯이 쉼과 적극적인 섬김은 서로 어디쯤에서 조화를 시킬 수 있을지 그 경계를 설정하기가 쉽지 않다. 큰애 젖을 물리면 둘째가 칭얼대고, 둘째를 안으면 셋째가 울기 시작하는 것처럼. 어떤 문제에 대해 애정 없이 파상공세를 취하는 것은 늘 쉬운 법이다. 그리고 각각의 공세를 각각의 방식으로 막는 것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을 모았을 때 과연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 모델이 나올 수 있는가 인데, 책은 이 점에 대해서는 놓쳐버리고 있다.

     또 저자가 강조하는 것 가운데 하나인 예수에 대한 믿음과 예수의 믿음을 구별하는 것도 그리 단순하지는 않은 문제다. 이는 초반부의 소모적 논쟁 중 하나인 예수와 교회를 분리할 수 있는가 와도 연결되는 문제인데, 우리가 예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제자들이 남긴, 나아가 교회가 보존해 온 문서들을 통해서이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믿음과 예수에 대한 믿음은 딱히 구별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굳이 두 가지를 나누어 구분하려는 것은 ‘원시적인’ 신앙을 가졌던 고대 신자들에 비해 자신들이 좀 더 사실적으로 과거를 재구성해낼 수 있다는 현대 신학자들의 오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분명 오늘날 현실 기독교의 모든 면이 만족스럽지는 않다. 이를 굳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도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권위에 대한 공격에서 즐거움을 찾으려는 천박한 문화에 휩쓸려서는 곤란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볍게 문제를 다루지 않고 진지하고 조심스러운 접근을 하고 있는 이 책은, 교회에 애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민을 하는 기독교인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목회자는 목회자대로, 신자들은 신자들대로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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