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6 - 팍스 로마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6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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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식할 만큼 꼼꼼하고 자질구레한 데까지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던 

로마 제국 초대 황제는

남의 윗자리에 서는 사람이 누구보다도 철저히 법을 지켜야만

아랫사람에게도 법을 지키라고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 요약 。。。。。。。

      카이사르를 암살한 공화파 세력과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렸던 안토니우스와의 대결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고 로마의 최고 실력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얻게 된 권력을 바탕으로 로마에 새로운 정체(政體)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일인자에 의한 의사결정이 합법화 된 국가, 즉 제정으로의 전환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저 나에게 힘이 있으니, 내 말을 따르라는 식이라면 위험하다는 것은 카이사르의 암살이 분명히 보여주었다. 여전히 공화정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세력들이 남아 있었고, 비록 그들에게 힘이 없다고는 하지만 암살이라는 도구는 약자라고 하더라도 성공의 가능성을 기대해 볼 수 있는 방식인 법이다.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모두가 보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 작업을 진행한다. 마치 거대한 직소퍼즐의 조각을 서로 연결되지 않게 띄엄띄엄 늘어놓기 시작하다가 어느 순간 마지막 조각을 끼워 넣는 식이었다. 일흔 일곱 해라는 시간은 그렇게 해도 로마의 제정으로의 전환을 안정적으로 이뤄놓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2. 감상평 。。。。。。。                               

     3권에서 드러난 것처럼 지중해 전역의 패권을 쥐게 된 로마는 더 이상 하나의 도시의 이익만을 극대화 하면 그만인 국가가 아니었다. 수백 명에 달하는 원로원 의원들에 의한 의사결정 구조는 이런 상황에서의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손에 쥔 기득권을 놓지 않고자 했기에 개혁은 요원할 수밖에 없었고,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그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그나마 마리우스나 술라 등의 비근본적인 개혁이 문제가 터져 나오는 상황을 잠시 미뤘을 뿐이었다.

     문제는 앞서의 서평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체제의 전환 자체가 문제를 자연적으로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일인에 의한 지배는 의사결정의 신속함이라는 장점이 있는 반면, 문제를 보지 못하는, 혹은 문제 해결의 의지가 없는 사람이 일인자에 오를 경우 이전보다 더 큰 문제를 일으키고 만다. 이전의 정체(政體)에서는 그저 실각을 시키면 되지만, 일인자는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그들을 강제로 끌어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특히나 혈연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이점은 장차 큰 불안요소로 다가오게 된다. 전제군주정의 최대의 약점인 능력 없는 이들의 통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익을 나누기를 거부하는 강한 기득권 세력에 의한 개혁의 좌절. 어디선가 본 듯한 그림이다. 로마의 경우 결국 기득권 고수에만 급급했던 이들을 완전히 권력에서 배제시켜버리는 방식으로 결론이 지어졌다면, 이 땅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나아가게 될까. 모든 관직을 평민들에게도 개방함으로써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던 로마의 귀족들은, 더 이상 권한을 나누기를 거부함으로써 독점적 권한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점을 이 나라의 ‘귀족’들은 제대로 알고 있을까.



     카이사르는 이런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권력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낸 사람이었다. 변화를 거부하는 완고한 체제로 인해 국가 전체의 이익이 저해 된다면 체제 자체를 바꾸어 버려야 한다는 명료한 태도.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그런 카이사르의 노선을 충실히 계승했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충분한 인내심과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카이사르로 인해 로마는 새로운 국가로 재건되었고, 옥타비아누스는 그렇게 세워진 국가가 든든히 서기 위해 필수적인, 보통은 2대나 3대 째에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로마로서는 제 때 제대로 사람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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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독설
김진호 지음 / 삼인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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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언제부터인지 ‘축복’, ‘천당’ 운운하는 이런 신앙이나 서로 얘기하면서

기나긴 세월을 복권추첨일 기다리듯 보내왔고,

그러는 동안 어느덧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면에서 절대권력의 추구자가 되어버렸다.


 

1. 요약 。。。。。。。

     예수를 모든 종류의 일상적 권위에 대항해 적대적인 운동을 벌인 인물로 설정하고, 그 관점 아래 복음서의 여러 사건들을 재조명한 책이다. ‘역사적 예수 운동’의 한 지류이자 그 한국적 적응 모델 중 하나인 ‘민중신학’에 신학적 기원을 두고 있는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기존 교회 전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고 있으며, 자연히 성경 해석에 있어서도 자유주의적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

 

2. 감상평 。。。。。。。

     자유주의 신학이란 한 마디로 이성 중심의 신학, 모든 것이 이성적 사유 과정에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는 전제 위에 만들어진 신학이다. 이성이 모든 것의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 데, 계몽주의가 나타나면서 그 영향을 받아 발생된 것으로, 이런 면에서 이성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는 신학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소위 말하는 역사적 예수 운동이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성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라는 생각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실제로도 없는 것’이라는 일종의 착시현상을 불러일으켰고, 자연히 성경에 기록된 여러 기적적인 일들은 믿을 수 없는 것들, 나아가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꾸며 넣은 것들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역사적 예수 운동’은 그렇게 성경 편집자가 꾸며 넣은 것들을 배제하고 원래 역사 속에 살았던 예수의 모습을 추론해 보자는 나름 건실한 의도로 시작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사실상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2,000년 전 예수의 모습에 관한 정보는 사실상 현재 남아 있는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나아가 그것을 보존해 온 교회 공동체의 신앙을 통해서 밖에 알 수 없는데, ‘교회의 예수’ 말고 ‘역사적 예수’를 어떻게 찾아낼 수 있다는 말인가. 필경 어떤 부분은 삭제하고, 어떤 부분은 남겨둔다는 선별작업이 필요하지만, 이 선별작업 역시 그 때의 사람이 아닌 오늘의 사람이 기준에 근거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 연구를 진행하는 사람의 생각에 맞는 모습만 남게 되는 현상이 발생했던 것이다.(ex. ‘캘리포니아의 예수’)

     민중신학도 그런 역사적 예수 찾기 운동의 한 지류로, (마치 남미의 해방신학이 그랬던 것처럼) 6, 70년 대 한국의 독재 시대에 맞는 예수상(像)을 찾는 데서 만들어진 신학 조류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역사적 예수 운동’이 갖고 있었던 문제를 그대로 이어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진짜 역사 속에 살았던 예수를 찾기 보다는 오늘날 연구자의 상황에 맞는 예수의 모습을 이끌어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그런 민중신학의 약점을 오히려 강점으로 바꾸어 버린다. 현대인의 눈으로 읽어낸 성경(혹은 예수)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강변이다. 오히려 그런 해석만이 진정으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서 읽는 올바른 역사관에 기초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심하게 말하면 그저 말장난일 뿐이다. 저자는 결국 이 책을 통해 현대인의 눈에’만‘ 맞는 예수를 창조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물론 그러한 시도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분명히 민중신학도 한국 교회 발전에 나름의 역할을 했고, 그 안에는 권위와 권력에 의해 핍박받고 억압당하며 사는 많은 사람들의 상황을 적절하게 설명해 주며, 이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강조해 잊지 않도록 해 주니까.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또 하나의 ‘힘’에 대한 동경 아닌가.


     나아가 성경 텍스트에 관한 극단적 관점에서의 재단은 요셉을 혁명전사로 만들고, 마리아를 로마 군인에 의해 사생아를 갖게 된 여인으로 전락시키는 정도다. 말로는 역사적인 예수의 모습을 재구현 하겠다지만, 그 기본적인 사료가 되어야 할 복음서의 역사적 사료로서의 증거는 거의 인정하지 않으면서 무엇을 기초로 역사적 예수를 구현하겠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성경 텍스트의 역사성이 부정되고 나면 남는 것은 오직 오늘 책상 앞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상상된 예수의 모습밖에 남는 것이 없다.

     저자는 민중을 압제하고 폭압적 수단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이들을 향한 예수의 독설을 쓰고자 했으나, 결국 나온 것은 (그나마 무엇을 했는지도 정확하지 않다고 여기는) 예수의 입을 빌린 저자의 독설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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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8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회 밖에서 예수를 못 찾는다고? 그건 네 생각이고. 어디서 예수탐구에 대해 몇 마디 좀 주워듣고선 이런 글이나 쓰는지.

2017-10-28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장의 다양성이 합의점이 없음을 말하는게 아님. 당연히 있을 수 밖에 없는 차이들을 과장하지 마시길.

2017-10-28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학자들중 일부나 복음서를 역사문서로 취급함. 중립적인 종교학의 경우에는 그런 주장은 처음부터 먹히지도 않고. 그런걸 감안하지도 않으면서 뭐가 어쩌니 저쩌니.

2017-10-28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라리 민중신학 자체를 비판하면 모르겠는데, 역사연구 자체를 통째로 부정해버리니 이건 뭐 봐주기도 힘듬.

2017-10-28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맛에 맞는대로? 자연과학 정도를 빼면, 입맞에 안 맞는 연구가 어디있는데? 보수기독교인들도 지들 입맛에 맞는 소리만 하잖아. 결국 차이는 입맛이 아니라 얼마나 합리적이냐 차이임. 보수 신학자들은 그걸 못함.

2017-10-28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소한 하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데. 진짜 예수상이 뭔지는 몰라도, 전통적으로 교회가 제시하는 예수 모델은 현존하는 다른 어떤 모델들보다 설명력이 떨어짐. 즉, 어떤 입장을 취하더라도 최소한
교회 모델을 받아들이는 입장보다 합리적임.

2017-10-28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에서 양비론이 왜 역겨운 입장이냐면, 현실적인 대안 제시도 못하는 주제에 어느 편도 선택을 못하기 때문임. 교회의 예수론은 끝났고 다른 대안들만 남았음. 그 대안들을 비판한다고 죽은 옛날 예수론이 돌아오진 않음. (역사연구를 포기하고 지금 가진 자료로는 예수에 대해서 알 수 없다고 말하면 모를까.)
 
10억 - A Mil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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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최후의 1인에게 10억을 주겠다는 내용의 한 인터넷 방송국의 서바이벌 이벤트에 참여한 참가자들. 직업도, 성격도, 나이도 다른 그들이 도착한 곳은 호주의 광활한 사막으로 둘러싸인 어떤 숲 속. 무엇인가 흥미로운 게임이 진행되나 싶었지만, 곧 그들은 이 게임에서의 탈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고 경악한다.

     영문도 모른 채 자신들을 진짜 서바이벌 게임으로 몰아넣는 장 PD에게서 벗어나려고 애를 써보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서서히 게임의 룰 안으로 들어가고 만다. 그리고 마지막에 밝혀지는 장 PD의 사연은 이 모든 게임의 이유로 제시되지만...

 



 

2. 감상평 。。。。。。。

 

     살인 게임의 설계자가 연속된 미션을 부여하고, 참가자들은 그 미션에 참가하다가 하나 둘 죽어간다는 기본 개념은 이미 잘 알려진 ‘쏘우’ 시리즈에서 본 구조이고,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추리소설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중 하나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내용을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이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한 영화 ‘10억’에서는 그 ‘어디선 가 들어 본 듯한 것 이상의 무엇’을 제대로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굳이 말하자면 신민아가 정면에 등장했다는 것 정도?

     한 사람씩 죽어가는 과정도 전혀 긴박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미션이 공개될 때마다 그 결과가 예상될 정도로 평이한 스토리였다. 마지막 부분의 반전에 뭔가를 담아내려고 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단순히 반전을 등장시키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극 중간 중간에 힌트를 제공하는 식의 전개는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그 반전의 내용조차 설득력이 없다!!

 


 
 

     신민아라는 배우는 참 여러 가지로 운이 없다고 해야 할까.. 뭐 그런 느낌이 드는 배우다. 하드웨어적인 면은 참 타고 났는데, 그렇다고 연기력이 요즘 나오는 어설픈 배우처럼 아예 C급도 아닌데(물론 아직 A급 연기를 펼친 작품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유독 그녀가 나오는 영화는 좀 가볍다는(혹은 깊이가 좀 덜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시나리오나 감독의 연출력의 문제라고 돌릴 수도 있겠지만, 반복해서 그런 영화들만 찍는 상황은 그녀 자신도 완전히 책임을 면할 수는 없지 않을까.

     서바이벌 게임과 연쇄적 살인(혹은 죽음)이라는 긴장감을 주는 소재에 호주의 광활한 사막과 숲이라는 좋은 무대는 이 영화를 단순히 즐기기 위해 보는 데에는 쓸 만한 영화라는 데 손을 들어 주고 싶게 만든다. 하지만 이 영화를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 주저된다. 여름 한 철을 겨냥해 만든 한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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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내 곁에 - Closer to Heave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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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온몸의 근육이 마비되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루게릭병에 걸려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종우와, 장례지도사라는 꺼려지는 직업으로 인해 두 번이나 이혼을 당한 지수가 만난 곳은 종우 어머니의 장례식장이었다. 그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프러포즈를 받은 지수는 점차 종우에게 마음을 열게 되고, 그렇게 슬픈 결말이 예정되는 사랑은 시작되었다. 사랑이란 모든 것을 불태우는 거라고, 현실에 충실하면 된다고 그렇게 시작한 사랑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악화되어 가는 종우의 병세는 둘 사이를 서서히 갈라놓는다.

 




2. 감상평 。。。。。。。

 

     영화 개봉 전부터 김명민의 엄청난 체중 감량으로 기대감을 갖게 했던 영화다. 스틸 컷을 통해 보인 배우 김명민의 모습은 배우라는 직업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장인(匠人)을 떠올리도록 만들었고, 직접 스크린 속에서 확인한 그의 모습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여기에 자극을 받았는지 하지원도 모처럼 열연을 펼쳤다. 여기에 예상치 못했던 브아걸 가인의 썩 괜찮은 연기력을 비롯한 조연들의 적절한 뒷받침은 이야기를 진행하는 데 적어도 연기력의 부족으로 인한 어색함을 느끼지는 못하도록 만든다.

     문제는 영화의 주젠데.. 감독은 ‘불치의 병’과 ‘마지막을 함께 하는 사랑’이라는 소재를 함께 엮어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어느 한 가지 주제가 다른 주제를 덮어버리면 안 된다는 점인데, 여기에서 감독은 첫 번째 주제(김명민의 연기력)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정작 영화 속에서는 두 번째 주제(김명민과 하지원의 관계)를 조금 더 강조하는 언밸런스함을 보여준다. 때문에 일부 관객들에게는 김명민의 연기에 좀 더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감독의 연출에 불만족을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내 새끼가 장기자랑에 좀 더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과 비슷한, 김명민이라는 배우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영화는 진한 감동을 주려고 애를 쓴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요즘 보기에 딱 알맞은 영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온 가족이 함께 손잡고 들어가기에는, 감독이 수시로 벗겨대는 하지원의 몸매나 김명민과의 베드신은 좀 민망하다.

     올 가을 얼마나 많은 관객이 찾을 지 기대되는 영화. 영화는 나중에 보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제대로 만들어졌다. 또, 배우들이 직접 부른 OST 곡들은 영화를 지켜보는 또 다른 재미를 준다. 검은 수트를 입고 나오는 하지원의 모습이 참 예쁘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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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5 -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5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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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평화)는 우열이 없는 나라끼리의 대화를 통해 성립되기보다는

절대적으로 우세한 나라의 조정이나 판정을 통해,

또는 부득이한 경우에는 물리적인 힘을 통해 성립될 확률이 더 높은 것이 

인간 세계의 현실이기도 하다.

 

1. 요약 。。。。。。。

     로마의 최고권력자가 되기 위한 카이사르의 여정이 계속 이어진다. 갈리아 정복을 어렵사리 마치고 명성과 함께 힘까지도 손에 넣은 카이사르를 로마의 지배층들이 경계하기 시작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한 사람이 지나치게 빛나는 별이 되어 버리면 집단지도체제인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이 유지될 수 없었기 때문. 오랜 시간 카이사르파에 의해 눌렸던 그들은 마침내 삼두정치의 또 다른 한 머리인 폼페이우스를 그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 카이사르에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카이사르는 마침내 본색을 드러낸다. 그는 국법을 어기고 군대를 이끌고 본국으로 들이닥쳤고, 이 전격적인 쿠데타에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공화정파에 속한 의원들은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에게 우호적인 동부 그리스지역으로 건너가 병력을 모으고 카이사르와의 일전을 벌이지만, 파르살로스 평원에서의 회전에서 대패를 하고 만다. 이후 이집트로 가서 다시 한 번 대결을 펼치려고 했던 폼페이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암살을 당하고, 카이사르는 로마 세계의 제일인자로 등극한다.

     승리자가 되어 본국으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로마의 정체(政體)를 바꾸기 위한 여러 개혁들에 착수하지만,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정적들에 의해 암살을 당하게 되고 다시 한 번 로마는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된다. 카이사르의 부하 중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가졌던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가 후계자로 지명했던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또 다른 내전이 이어지고, 마침내 안토니우스를 제압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세계의 새로운 일인자가 된다.

 

2. 감상평 。。。。。。。

     카이사르는 과연 개인의 이익을 공공의 이익과 관련시켰는가?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는 이 점에 대해 전혀 의문을 던지지 않지만, 카이사르에 대한 숭배적인 묘사는 오히려 서술의 신뢰도에 대한 저항감만을 북돋을 뿐이었다. 물론 카이사르가 결국 승리자가 되었기에 결과를 근거로 그에 대한 후한 평가를 하는 것 자체는 어느 정도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아직 내전이 다 마무리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두세 달을 ‘휴가’로 보낸 것까지 ‘천재의 탁월한 자기 제어’라고 칭송하는 건(213) 좀 낯 뜨겁지 않은가.

     카이사르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어쩌면 그가 암살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그는 자신이 정확히 어떤 것을 가리켰는지에 관해 그저 후세의 추측만을 남길 수 있었다. 종신 독재관에 취임해 사실상의 황제가 되고 난 뒤 그의 판단이나 결정에 어떤 변화가 생겼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보다 근본적인 질문은, 과연 카이사르가 생각했던 제정으로의 정체 변경이 당시 로마 사회가 앓고 있었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해결책인가 하는 점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이전의 서술을 통해 볼 때, 당시 로마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한 사회 불안이었고, 다른 하나는 보수적인 로마인들의 성향으로 인한 순혈주의가 사회통합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토지를 중심으로 한 경제구조와 사회 구성원의 비중의 변화로 인한 사회 구조의 문제다. 정체를 바꾸는 것은 권력구조를 바꾸는 것뿐이지, 직접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물론 권력의 정점에 문제의 해결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와 해법을 가지고 있는 이가 오른다면 문제의 해결에 힘을 쏟을 수 있겠지만, 결국 군주제의 가장 큰 약점은 늘 바른 의지와 능력을 가진 군주가 연속적으로 왕위에 오를 수 없고, 반대의 경우인 군주가 오르더라도 그를 실각시킬만한 방법이 힘의 행사 이외에는 전무하다는 것이다. 권력의 집중은 인(人)의 장막 안에 고립된 군주로 인해 다수의 의견을 모으는 데 어려움을 끼칠 수 있다.

    백번 저자의 의견을 받아들여, 카이사르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그런 루비콘 강을 건넜다고 하더라도, 그의 해결책은 자신에 대해 대단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나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최고 권력자가 된 후에도, 모든 것을 손에 쥐게 된 그 때에도 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만이 그토록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겠지만, 너무나 일찍 죽어버렸으니 누구도 결과는 알 수 없을 터.

     ‘로마인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로마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저자의 야심찬 계획은, 카이사르를 다룬 두 권의 책에서는 쉽게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되었다. 물론 격동의 시기이긴 했지만, ‘시민들’은 ‘병사들’로 전락해 버렸고, 그들의 삶은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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