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 Haeunda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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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100만 명이 찾은 부산 해운대. 무허가 횟집을 운명하며 억척스럽게 살고 있는 연희와 그녀를 좋아하지만 제대로 고백조차 못해본 상가번영회장 만식, 지질학자인 김휘와 그녀의 아내였던 유진, 해양구조대원인 형식과 서울에서 놀러온 삼수생 희미. 이 세 커플도 그 100만 인파 가운데 있었다. 


     일찍부터 대규모 해저지진과 그에 수반된 지진해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김휘 박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는 안일한 자세로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았던 정부 당국은 사태를 더욱 키웠고, 순식간에 시속 수백 km로 밀려오는 대형 해일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황할 뿐이었다. 모두가 살기 위해 달려야 했던 이런 혼란한 상황 중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는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

 




 

2. 감상평 。。。。。。。

 

     연기력은 어느 정도 보장된 중견 배우들과 신인급 배우의 적절한 2:1의 배합에, 전통적으로 뭐라 비난하기 어려운 가족의 회복이라는 소재, 그리고 꽤나 돈이 들어가도록 만드는(그런데 살짝 티가 나긴 했다) 재난 영화라는 장르. 더구나 그 재난이 여름철에 알맞은 대규모 물잔치라는 것까지.. 제작사인 CJ 그룹의 상영관 몰아주기가 아니라도 어느 정도 관객들이 몰려들만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는 영화다. 

 
   
하지만 감독의 두 가지 욕심 - 교육과 개그 -이 영화의 완성도를 조금 낮추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도 대규모 지진해일이 몰려 올 수 있다는 경고를 하기 위해서 김휘 박사가 재난예방 관리 앞에서 열변을 통하는 부분은 강사가 교단에 서서 강의를 하는 것처럼 보였고, 진지해지려는 상황마다 등장하는 잦은 개그 코드는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요컨대 등장인물의 연기가 아니라 대사를 통해, 그것도 서술적 대사를 통해 정보를 전달하는 식의 장면들과 극의 흐름을 끊는 불필요한 장면들의 남발이라는 말인데, 이건 감독의 고민 부족이나 연출력의 미숙함을 보여주는 예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영화 흥행 후 한 인터뷰에서 헐리웃에 도전하고 싶다고 했다던데, 아직은 조금 이르지 않을까.

 


  

 

     천만 피서객들을 덮치는 대규모 지진해일이라는 소재는, 이 영화를 둘러싼 영화 외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모습이다. 대규모 그룹이 투자와 제작, 배급까지 맡아서 상품을 내 놓는 전형적인 ‘규모의 경제’에 의존한 영화(지진해일?)는 천만 명의 피서객(관객?)들을 덮친다(다른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게 되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영화의 히트(스크린 과점유)는 씁쓸한 잔해(소규모 영화의 몰락, 영화적 다양성의 실종)도 함께 남긴다.

 
     전반적으로 썩 괜찮은 교육영화(?)라고 할 수 있다. 전 지구적 차원의 기상변화로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대규모 자연재해의 발생 빈도가 높아지고 있지만, 언제나처럼 눈앞에 일어나지 않는 일은 뒤로 미루는 공무원들과, 남은 어떻게 되든 자기 돈주머니만 불어나면 그것으로 오케이라는 개념 없는 시민들의 무사안일주의는 전국토를 온통 파헤쳐 인공구조물로 덮어버리겠다는 대규모 삽질 프로젝트의 강행과 그에 대한 무조건적 찬성으로 구현되고 있는 나라에 시의적절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영화라고나 할까. 물론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도 귀를 막고 도무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게 고질적인 그 사람들의 문제니까 어느 정도나 교육적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여름 한 철 볼만한 영화다. 하지원의 사투리 연기는 참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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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는,

 종종 애써 무시하려고 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어떤 '책임'이 생길까봐서이다.



어떤 사람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내 삶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고,

그 사람의 슬픔이 내 슬픔이 되고,

그 사람의 괴로움이 내 괴로움이 될까봐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이상 다른 사람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알까.

그래서 모두가 외로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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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3 - 승자의 혼미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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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세기 후반에 로마를 덮친 사회 불안은  

과거처럼 평민층이 귀족계급에 대해 정치적 평등을 요구하며 일으킨 항쟁과는 달랐다.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항쟁은 

 사회 정의를 요구하는 빈민층과 부유층 사이에 일어났다.

 

1. 요약 。。。。。。。

     카르타고와의 두 차례에 걸친 대 전쟁을 마치고(3차 포에니 전쟁은 거의 일방적인 학살이었으니까) 단숨에 지중해 제일의 국가로 부상한 로마. 하지만 전쟁을 치루는 동안 로마의 주요 전략을 담당했던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귀족들은, 이제 전쟁의 열매들도 당연히 자신들만이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 동안 전쟁에 나갔던 것은 귀족이나 평민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당장 가장이 농사를 짓지 못하면 경제적으로 문제가 큰 문제가 생기는 평민들과는 달리 귀족들은 이 기회를 통해 헐값에 나온 농지들을 사들여 대농장을 만든다. 여기에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노예들을 통한 경작이 이루어지니, 로마 사회의 빈부격차는 점점 심화된다.

     이런 상황을 그대로 놔두면 안 된다고 생각한 이들이 바로 그라쿠스 형제였다. 호민관이 된 그들은 농지개혁을 통해 자작농을 육성하는 형태로 로마사회의 건전성을 확보하려고 했으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농지를 내놓으려 하지 않는 원로원 중심의 귀족들의 극렬한 저항으로 인해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결국 이런 완고한 귀족 중심의 정책은 로마군의 주력을 이루던 중산층의 몰락을 가져왔고, 자연스럽게 로마군의 질적 저하를 가져온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고 시민군 형태의 로마군을 지원병제로 바꾼 인물이 마리우스였지만, 상비군 제도가 없는 로마에서는 그 지원병들 역시 전쟁이 끝나면 사회(실업자)로 돌아가야 했기에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이런 수십 년 동안의 혼란을 공화정 체제를 강화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인물이 술라였다. 그는 군사력을 기반으로 권력을 차지해 원로원 주도의 국정운영체제를 강화하지만, 사실 그런 그의 시도 자체가 더 이상 원로원에게 큰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예였을 뿐이다. 특출한 인물에 의해 강화된 집단지도체제란 것처럼 모순된 제도가 또 어디에 있을까. 결국 술라 사후 또 한 명의 뛰어난 인재로 인해 원로원 주도의 국정운영은 불가능함이 드러나고 말았다. 20대의 폼페이우스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로마에 발생한 여러 위기들을 해소하고 단숨에 최고의 실력자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이것으로 술라 체제의 해체는 확정적이 된다.

 

2. 감상평 。。。。。。。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좌절된 것은 평민에게도 모든 관직을 개방한다는 획기적인 법률로 일찍이 귀족과 평민 사이의 갈등을 봉합해 그 힘을 외부로 쏟아 급속한 발전을 할 수 있었던 로마로서는 큰 타격이었다. 다시 그 둘 사이의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이는 로마 사회를 오랫동안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시오노 나나미가 원로원파와 평민파로 이름붙인 당파 사이의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의 법률은 두 계급 사이의 정치적 차원의 기회의 균등을 보장했지만, 이 시기 로마는 두 계급 사이의 경제적 차원의 기회 균등을 막아버리려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물론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이런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발생하게 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신속한 대책을 세우는 것은 한 사회의 지도층들이 가져야 할 당연한 의무이다. 가진 자를 위한 논리를 세우기 위해서 애만 쓰다가는 결국 국가 전체의 역량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나아가 가진 자들 자신들에게도 위기를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실제로 이 시기 로마는 동맹시들의 반발로 인해 큰 위기를 겪었고, 마리우스와 술라로 이어지는 로마에 대한 무력점거와 보복도 길게 보면 그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문제였다.

 
     오늘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떤가? 정권을 잡고 권력을 갖게 된 이들은 과연 이런 종류의 위기를 해결할 능력, 아니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정책의 주요 방향은 가진 자들을 향해 있고, ‘부자들이 돈을 써야 가난한 사람들도 혜택을 본다’와 같은 어림없는 말로 대중을 속이고 있다. 부자들이 호사스러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쓴 돈이 ‘평민들’에게까지 돌아오려면 족히 수십 번은 돌고 돌아야 한다는 말은 쏙 빼어 버린 채, 그라쿠스 형제를 죽였던 원로원 귀족들처럼 부의 재분배에 관해서는 입을 닫고 있을 뿐이다. 현재의 사회 및 권력 구조를 유지하는 데에만 목을 매고 있으니, 수십조에 달하는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 거대한 사업계획도 좀처럼 서민들의 피부에는 와 닿지 않는다.

     로마의 위기는 결국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제정으로 이행하는 원인(遠因)이 된다. 인간보다 체제에 더 집착하는 행위는, 결국 그 체제마저 유지시킬 수 없을 만한 위험요소를 품고 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는 이 시한폭탄의 해체를 위한 수순에 언제쯤 들어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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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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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사랑’이라는 주제, 그 중에서도 부제를 참고하면 ‘에로스’를 주제로 한 다섯 가지 단편들이 모인 옴니버스 구조의 영화다. 출장을 가던 중 처음으로 만난 여자에게 마음을 뺏긴 남자의 독백인 <his concern>, 숨바꼭질을 좋아하는 아내를 잃고 슬퍼하는 남편의 이야기인 <나, 여기 있어요>, 잘 나가는 감독과 두 명의 배우가 만드는 묘한 이야기 <33번째 남자>, 남편을 사고로 떠나보내고 그 사고의 원인이 된 남편의 여자와 함께 살게 된 이야기를 다룬 <끝과 시작>, 그리고 서로 다른 세 커플의 사랑 확인을 위한 하루 동안의 일탈을 다룬 <순간을 믿어요>가 두 시간 동안 스크린을 채운다. 

 



  

2. 감상평 。。。。。。。

 

     재미가 없다. 생각할 ‘꺼리’도 없다. 던져주는 메시지는 좀처럼 알기 어렵다.(도대체 난데없이 매우가 영화감독의 목을 물고 피를 빠는 장면이 등장하는 건 무엇 때문인가. 드라큘라 시리즈의 트레이드마크인 여자의 목에서 피를 빨아 먹는 흡혈귀라는 장면이 성애에 관한 일종의 상징적 코드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지만, 이 영화에서의 흡혈은 그런 예술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는 어떠한 코드도 읽어내기 어려웠다) 오히려 이 영화와 관련해 정말로 흥미로웠던 것은 영화를 보고 난 뒤 관객들의 반응이다.

     대다수가 혹평을 하는 가운데, 남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데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는 건지 좀처럼 공감이 되지 않는 이유를 들며 찬성을 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물론,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이다. 하지만 영화를 칭찬하는 과정에서 혹평을 가하는 사람들을 ‘야한 영화를 기대하다가 노출 장면이 등장하지 않아 심술을 부리는 작자들’ 정도로 몰아세우는 것은 분명히 논의의 여지가 있다. 단지 영화에 살색이 조금 밖에 등장하지 않았다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불평을 하는 걸까? 작품성이 있었대도 그렇게 실망을 했을까? 그리고 관객들이 어느 정도 그런 ‘기대’를 하고 들어간 것은 그들만의 잘못은 아니다. 애초부터 웬 처자를 벌거벗겨서 포스터를 만든 것은 영화 제작자들이니까.

 





     영화에는 제법 중량감이 있는 배우들이 꽤나 등장한다. 꽤나 영화를 찍었던 (하지만 번번이 흥행에는 실패하고 있는) 장혁, ‘경의선’ 때부터 눈여겨봤던 배우 김강우, 연기라면 따로 말할 필요가 없는 배종옥과 최근에서야 영화배우로서의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한 김민선, 그 외에도 엄정화, 황정민, 김효진 등등. 그런데 이 중량감 있는 배우들이 영화 속에서는 만나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 악전고투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빈약한 스토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선,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 영화의 옴니버스식 구조는 서로 전혀 연관성을 가지지 못한 채 그저 짧은 에피소드의 나열로만 끝나고 있다. 김수로나 이시영이 자신이 중심이 된 에피소드 이외의 장면에도 잠시 출현하기는 했으나, 말 그대로 특별출연이었을 뿐이었다. 또, 20분이라는 시간은 중량감 있는 배우들이 자신들이 가진 연기력을 충분히 발휘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부족해 보였다. 서둘러 이야기를 풀어 놓기에 급급했다고나 할까. 신인 배우들이 주로 등장한 마지막 스토리인 <순간을 믿어요>나, 김수로, 배종옥, 김민선이 등장한 <33번째 남자>나 완성도에 있어서 딱히 다르지 않은 것은 아마도 개연성 없는 스토리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쯤 되면 감독의 역량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결국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게 된 이유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상 시인이 쓴 동명의 시처럼 초현실주의를 표방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묘하게 ‘어려운(?)’ 영화였던 걸까? 그나마 장혁과 김강우가 출연한 두 개의 에피소드는 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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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변이들
로빈 브랜디 지음, 이수영 옮김 / 생각과느낌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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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게 왜 바람직하지 않아? 걔들은 착한 일을 했어.”

“맞아. 하지만 좋은 생존 전략은 아니라는 거야. 걔들은 이기적일 필요가 있어.”

  

 

1. 줄거리 。。。。。。。

     이제 고등학교에 들어간 미나는 자신이 쓴 편지로 인해 곤경에 처하게 된 교회 친구들(정확히 곤경에 처한 것은 그들의 부모들이지만)의 따돌림으로 하루하루가 힘겹기만 하다. 그 속 좁고, 이기주의적이며, 무례한 친구들은 미나가 큰 죄라도 지은 양 노골적으로 괴롭히지만, 미나는 무대응으로 일관한다.

     그런 미나의 삶에 작은 활력소를 주는 것은 셰퍼드 선생님이 가르치는 생물 시간과 그 시간 짝이 된 케이시라는 남자 아이. 교회 친구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미나는, 이제 창조론을 주장하는 교회 친구들을 마음껏 비웃는 완고한 진화론자 친구들을 새로 사귀면서 조금씩 고립감에서 벗어난다.

 

2. 감상평 。。。。。。。

     이 소설은 크게 두 가지 스토리 라인이 얽혀있다. 표면적으로는(이 책의 뒷‘표지’와 소개하는 글의 주요 내용이기도 하다) 진화론과 창조론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한 소녀의 이야기가 있고, 부차적으로는 주인공이 쓴 편지로 인해 곤경에 처하게 된 교회 사람들 및 그들의 자녀들과 주인공 사이의 갈등이 있다. 엄밀히 말해 이 두 가지 갈등은 직접적인 논리적 연결고리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작가는 이 두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서 교묘하게 한 가지 주장을 편다. ‘학교에서 친구를 괴롭히는 교회 친구들이 주장하는 창조론은 틀렸다’ 같은.

     당연히 이 소설은 ‘다윈과 기독교의 끝나지 않는 논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진화론은 과학이며(이 소설에서는 ‘과학’이라는 말과 ‘사실’이라는 말이 동의어로 사용되는데, 이런 용법은 매우 독단적이다), 창조론(혹은 지적설계론)은 ‘철학’(마찬가지로 이 책에서 ‘철학’이라는 용어는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는 논설쯤으로 여겨진다)일 뿐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p. 154-155) 그나마 소설 속에서는 이런 주장을 블라인드 뒤에서 말하고 있는데, 책 뒤에 붙은 해설에서는 노골적으로 사족을 붙여 놓아서 오히려 본문을 쓴 작가의 수고를 무위로 돌리고 있다.

 

     말이 나온 김에 나도 이 책의 ‘위대한 예’를 따라서 사족을 좀 붙이자면, 저자는 진화와 변이 사이의 구별을 정확히 하고 있지 않은데, 진화론을 믿지 않고서는 독감 바이러스의 변종이 나타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단정 짓는 부분이 그 예이다.(p. 95) 바이러스의 변종이 등장하는 것은 같은 종류의 생물이 가진 형질의 변이이지, 바이러스가 말이 되거나 소가 되는 진화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대대로 칼을 잘 만드는 장인 가문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칼을 만드는 데 최적화 된 어떤 동물로 변할 거라는 생각은 좀처럼 믿기 어렵다. 진화의 가장 좋은 예로 등장하는 화석(cf. p. 331) 역시, 한 지층에서 발견되는 화석과 다른 지층에서 발견되는 화석이 다르다는 것은 앞선 지층에서 발생된 생물이 뒤에 발견된 생물로 변화되었다고 믿을 수도 있지만, 그저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동물들이 살았던 증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요컨대 이 문제는 사실(이건 있었던 일 자체를 말하는 표현이다)에 관한 해석의 문제 혹은 세계관의 문제지, ‘사실’과 말도 안 되는 거짓말’(p. 154) 사이의 힘겨루기가 아니다. 사실 과학만이 진실이라는 명제는 계몽주의 시대 이래로 유구하게 흘러온, 족히 3, 400년은 이어져 온 개념이다. 하지만 이 주장의 후계자들은 후설이 지적한 것처럼 자연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세계는 진정한 세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오류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비교적 근래에 등장한 과학철학에서는 과학 자체가 지니고 있는 패러다임의 문제를 비교적 솔직하게 받아들인다. 증거에 의해 믿는, 증거로만 지탱되는 과학적 사실이란 하나의 허구적 개념이며, 현대의 복잡하고 좁은 과학계에서는 상호 교차 점검이라는 학문적 개념이 실제로 수행되기가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철학이란 게 늘 그렇게 쓸 데 없는 거짓말을 정당화시키는 일만하는 건 아니다) 쉽게 말해 어떤 과학자가 말한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는 동료 과학자들에 의해 엄밀하게 증명될만한 시간이나 기술적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이와 관련해서는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이라는 책을 읽어보라. 쿤의 유명한 책 『과학혁명의 구조』도 좋고.)

 

     작가는 셰퍼드 선생을 진화론을 믿으면서도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는 ‘쿨 한 사람’으로 묘사하지만, 반대로 진화론자들 혹은 과학적 의견을 때려잡을 사탄 일당으로 여기지 않는 기독교인들도 있다. 소설 속 미나의 친구들이나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의 행태는 물론 비난 받아야 마땅한 일이겠지만, 그런 식으로 한다면 난 마땅히 중형을 받아야 할 악질적인 무신론자나 유물론자의 예를 수없이 들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신론자나 유물론자라는 이유만으로 비난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건전한 상식이겠지만(그리고 이건 기독교라는 조건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미나라는 주인공의 성장 이야기라는 측면에서는 그래도 볼만한 소설이다. 작가는 고등학교 1학년 소녀의 미묘한 심리변화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으며(언젠가 고등학교 때 썼던 일기장을 다시 봤을 때 느꼈던 낯 뜨거움과 유사한 느낌으로 책장을 넘겼다), 주인공은 조금씩 회의하면서(물론 내가 보기엔 충분히 회의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자라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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