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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 사회평론 / 2005년 10월
평점 :
증거에 입각해 확신하는 습관,
증거가 확실하게 보장하는 정도까지만 확신하는 습관이 일반화된다면
현재 세계가 앓고 있는 질환의 대부분이 치유될 것이다.
1. 요약 。。。。。。。
스스로를 대단히 철두철미한 합리주의자라고 생각했던 러셀이 쓴 여러 글들과 연설문들을 모아 놓은 문집이다. 다분히 도발적인 이 책의 제목은 그가 쓴 한 글의 제목(Why I am not a christian)을 옮긴 것이다. 그는 이 글에서 그에게 가장 익숙한 종교였던 기독교를 믿을 수 없는 이유를 열거하며 나아가 종교는 공포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지극히 익숙한 주장으로 나아간다. 이후의 글들에서는 이 주장을 기반으로 종교는 인류의 지적인 면이나 도덕적인 면, 사회적인 면에 있어서 해악만을 끼쳤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2. 감상평 。。。。。。。
이 과할 정도의 자신만만함이 느껴지는 글들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아마도 러셀은 자신이 확고한 진리 위에 서 있다고 생각했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눈부신 과학 발전은 그로 하여금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으며, 반드시 그래야만 정확하고 바른 것이라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으리라.
종교에 관한 저자의 생각은 앞서 간단하게 언급했던 것처럼, 종교란 공포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더 이상 이전 시대의 공포의 대상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 이 시대에는 종교의 존재를 지지할 만한 어떤 근거도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종교를 계속 유지하면 할수록 인류 사회에 피해만 주므로 마땅히 제거되어야 한다는 식이다. 최근 유사한 책들을 쓰고 있는 크리스토퍼 히친스나,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들의 주장의 오리지널이라고나 할까. 이들 아류작들은 사실 주제면에 있어서 거의 발전을 하지 못한 것 같을 정도다.
아무튼 종교에 관한 이런 생각은 이 책에 실린 종교에 관한 러셀의 의견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물론 때와 장소가 다른 곳에서 쓰였기 때문이겠지만,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그들에서 특별한 논리의 발전 없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종교의 근원에 관한 저자의 이 연속적인 생각은 논리적일지는 모르나 충분히 합리적이지는 않다. 예컨대 종교의 근원이 공포심이라는 언명은 여전히 저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과학적 증거’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 생각은 ‘모든 것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어야만 진리이다’라는 그 자체로 또다시 어떤 증명이 필요한(하지만 증명하기 좀처럼 쉽지 않은) 명제에서 나온 결론일 뿐이다.(이런 면은 코플스턴과의 대화에서 지적을 받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약점은 러셀 혼자 말하는 글들이 아닌 ‘대화’의 정황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종교는 거짓이며 신은 없다고 강력히 무신론을 표방하던 저자는 코플스턴과의 대화 국면에 나오면 불가지론으로 한 발 후퇴하고 만다. 물론, 증명할 수 없으니 없는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다는 식으로 다시 원래의 궤적으로 돌아가려는 시도가 엿보이지만, 사실 그건 엄밀히 말해 합리적인 설명보다는 러셀 자신의 논리적 관성에 가깝다.
러셀 자신은 종교의 무가치성을 널리 알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가 살고 있었던 당시 종교적 영향력이 강했는지는 모르겠지만(사실 이 부분도 좀 과장이 섞여 있는 것 같지만), 그 이후 세계는 점점 더 종교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이 사실이라는 데 누구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물론 이런 현상이 사람들이 러셀의 주장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러기엔 러셀의 글이 좀처럼 쉽게 읽히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이 종교에 대한 관심이 줄었기 때문에 세상이 좀 더 행복한 곳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러셀은 ‘증거에 입각해 확신하는 습관이 세계가 앓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p. 13) 그런 생각이 일반화 된 오늘날의 법정은 실제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는 진실보다, 남아 있는 증거가 어떤 사실을 구성해주느냐 하는 법리적 사실이 좀 더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그 결과 실제로 아무리 악한 일을 하고 많은 사람들을 어려움에 빠뜨린 사람이라도, 그리고 그에 대한 증언이 아무리 많더라도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아무런 대가를 치루지 않고 도리어 더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산업 기술이 만인에게 넉넉한 물질을 제공할 것’이라는 주장(p. 70)은 러셀이 사망한 지 40년이 지나 엄청난 기술의 발전을 이룬 지금도 굶어 죽는 사람이 하루에도 수천 명씩 되는 현실을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의 일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으며, ‘산업 기술’을 가지고 있는 국가들은 저개발국가들의 인적, 물적 자원들을 착취해야만 그것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다.
저자가 찬양해 마지않는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p. 84)이란 참 좋은 것이다. 하지만 무엇으로 사람들을 그리로 인도할 것인가? 저자는 ‘건전한 성격에 활력 있는 사람이라면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 자연스런 충동’(p. 55)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자연스러운 충동’이 아니라는 것을 최근 10년 새 급증하고 있는 범죄율을 통해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어떤 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려면, 그것은 ‘일반적인’ 행동이어야 하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식’일 것이므로, 점차 확대되어야 할 것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죄란, 교육을 좌지우지하는 자들이 싫어하는 것’이라는 생각(p. 201)이 일반화 될 때, 사람들은 점점 더 건전하게 생활하려고 할까, 아니면 사회적 합의나 규칙들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믿는 바를 얼마든지 진술할 수 있다. 특정 부류나 집단을 비판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대화를 하자고 말하고 싶다면 특정 신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어떤 행위에 대해, 쉽게 ‘경멸감’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p. 41) 그다지 좋은 대화방식은 아닌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생전에 참여했던 핵 철폐 운동이나 평화주의적 관점에 입각한 사회참여 등의 이력이 평가절하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