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을 확인하던 중 알라딘에서 보내 온 메일을 발견했다.

 

내가 쓴 영화 리뷰가 '이주의 리뷰'에 당선돼서

 

적립금 1만원을 넣어 준단다. 호호..

 

책 리뷰 당선 됐을 땐 5만원 넣어 주더니..

 

영화는 좀 짜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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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9-08-05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체적으로 다 1만원으로 내렸어요. ㅎㅎ 글 보시고 확인해보니 저도 ㅋㅋㅋㅋㅋㅋ
1만원으로 깎이고 첫타자 동지가 됐군요 ㅋㅋㅋㅋㅋㅋㅋ

노란가방 2009-08-06 00:33   좋아요 0 | URL
그런 거였어요.. 세계적인 불황의 영향일까요..;
웬디양님도 당선되셨군요. 축하축하..
(오랫만입니다. ㅎㅎ)
 
친밀한 적 - The intimate Enemy
영화
평점 :
상영종료




 

1. 제목 。。。。。。。

 

     친밀한 적

 

2. 감독/주연 。。。。。。。

 

     플로렌트 에밀리오 시리 감독

 

     브누아 마지멜(테리앙 소위 역)
     알버트 듀퐁텔(두냑 상사 역)
     오를레앙 르코앵(베솔 역) 
 

 




 

3. 줄거리 。。。。。。。

 

     2차 세계대전 이후 북아프리카에 갖고 있었던 식민지들이 하나 둘 독립하게 되면서 프랑스의 그 지역에 대한 영향력은 급속도로 약화되게 된다. 그리고 그 흐름의 결정타는 알제리 지방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이었고, 프랑스는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수십만에 달하는 젊은이들을 징집해 보낸다.

 

     테리앙은 그렇게 국가에 의해 북아프리카로 보내진 신임 소위였다. 반군(지극히 프랑스 편의 시선으로 볼 때 그렇다는 거다) 지도자가 이끄는 무장 세력을 찾아 내 소탕하는 것이 그가 맡게 된 소대의 임무. 하지만 이제 갓 임관을 한 테리앙에게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민간인 학살과 고문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고, 그는 임무를 수행할 때마다 좀처럼 정신적 충격을 이겨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전우들이 하나 둘 죽어가면서 테리앙 역시 서서히 전쟁기계로 변해 갔고, 이에 크게 실망한 한 소년이 있었다.  

 




4. 감상평 。。。。。。。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이런저런 이유들을 댈 수 있겠지만, 크게 보면 대개 정치적 이유에 의해 발생한다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텔레비전에 나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온갖 쇼를 하는 그런 지극히 좁디좁은 의미 말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일련의 과정을 넓은 의미의 ‘정치적 활동’이라고 할 때, 전쟁이란 힘을 동원해 자신의 주장을 상대방으로 하여금 받아들이도록 만들려는 정치적 행위의 한 가지이다. 사실 대부분의 전쟁은 정의와 사악함 사이의 대결이 아니라,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게 자신의 주장을 강압하려 할 때 벌어진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했던 걸프전이나, 미국의 부시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을 상대로 벌였던 전쟁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정말 좁은 의미의 ‘방어적 전쟁’은 제외하고 말이다. 굳이 ‘좁은 의미’라는 단어를 붙이는 이유는, 요새는 방어를 위한 선제적 공격과 같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일부 인사들이 헛소리를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전쟁이라도 막상 시작되고 나면, 선과 악의 대결 양상으로 변하고 만다. 내가 죽여야 죽지 않는 전쟁터라는 상황이니, 한 사람이라도 더 죽이는 것을 옳을 행동으로 칭송해야 하는데, 나와 똑같은 사람을 향해 칼과 창을 휘두르고 방아쇠를 당기는 일이 어찌 쉬울까. 양심의 가책을 묻어두는 이 어려운 일은, 상대를 죽여야 마땅한 악으로 몰아세우지 않고는 좀처럼 달성되기 어렵고, 그렇게 막상 상대를 악으로 몰아버리는 순간 교전 당사자들은 그것을 자의든 타이든 믿어버려 평소라면 상상조차 못할 비도덕적이고 잔인한 일들마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합리화시켜버린다. 이것이 숙명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전쟁의 잔인한 속성이다.

 
     영화 속 테리앙의 모습은 이렇게 점점 잔인하게 변해가는 전쟁 당사자의 심리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처음에는 고문과 비 교전 당사자에 대한 가혹행위에 노이로제 반응을 보일 정도로 경계하던 그였지만, 적들이 자신의 부하를 죽였다는 이유로(그 ‘적’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속한 부대도 마찬가지일 텐데) 이전의 양심의 가책을 잠재우고 만다. 사랑스러운 아내와 아들을 둔 평범한 가장을 이렇게 변화시킨 것은 역시 전쟁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잔혹함이다.

     영화 말미에 테리앙과 함께 싸웠던 베타랑 전사였던 두냑 상사는, ‘알제리는 독립하였다.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언제인지 모를 뿐이었다. 우리는 허무하게 싸웠고, 전우들은 의미 없이 죽어갔다.’고 씁쓸한 독백을 한다. 식민지를 유지하겠다는 이유로 전쟁을 벌여, 수만 명에 달하는 자국의 젊은이들과 그 수십 배에 달하는 알제리 사람들이 죽게 한 책임은 누가 지는 걸까. 이 질문은 전쟁을 일으킨 모든 책임자들에게도 물어야겠지만, 아무도 책임은 대답은 하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친밀한 적’이라는 영화 제목은, 어제까지 한 편에 서서 함께 싸웠던 동료가(식민지 시기의 알제리 사람들은 프랑스군으로 함께 세계대전에 참전했었으니까) 이제 서로가 적이 되어 총을 겨누게 된 비극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프랑스 군으로 싸우고 있는 한 알제리 인 병사는 이 슬픈 상황을 극대화 시킨 인물. 하지만 전쟁이란 게 어차피 외계인과 싸우지 않는 이상 ‘동료 인간’을 죽이는 것이니, 어디 영화 속 어제의 전우들과의 싸움에만 해당되는 말이겠는가.  

 

 

        헐리웃의 영웅 이야기처럼 멋있고 화려하지 않은, 전쟁에 관한 사실적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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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08-06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새로웠습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나찌에 맞서 싸웠던 알제리와 프랑스 연합이 전후 식민지 독립 과정에서 피비린내나는 전쟁터에서 적으로 마주치는 모습. 더불어 프랑스의 잔인한 식민지사 등등.. 이런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전쟁으로 인해 몰락해가는 인간상까지 세밀하게 묘사해주더군요.

영화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노란가방 2009-08-06 20:10   좋아요 0 | URL
네.. 괜찮은 영화죠.
축하 감사드립니다. ^^
 
로마인 이야기 2 - 한니발 전쟁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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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위기가 닥치면 국론이 분열되지만, 

로마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1. 요약 。。。。。。。

     1권에서 어떻게 주변국가들 보다 건설시기도, 발전도 늦었던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는가를 기술했던 시오노 나나미는, 이제 반도 내에서의 패권을 어떻게 고작 100여 년에 달하는 기간 만에 어떻게 지중해 전역으로 확장시킬 수 있었는지를 다룬다.

     이 시기 로마는 페니키아의 후손들이 건설한 해양국인 카르타고와의 두 차례의 큰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로마와 카르타고, 그리고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들의 운명을 바꾸게 된 그 전쟁은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거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우발적인 사건들의 연속으로 발생되었다.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 섬에 있던 여러 도시들의 다툼이 당시 강대국이었던 카르타도와 로마의 대리전 양상으로 확대되었고, 결국 로마의 승리로 끝난다.

     하지만 전쟁에 패배한 카르타고의 장군 하밀카르는 포기하지 않고 카르타고가 있던 북아프리카를 떠나 오늘날의 스페인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해 힘을 기르기 시작했고, 로마를 굴복시키겠다는 그의 꿈은 아들인 한니발에 의해 실제 행동으로 옮겨진다. 그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기동력을 이용한 적의 주력의 무력화’라는 전술을 사용해 이탈리아 전역을 종횡무진 휩쓸지만, 목표 달성의 중요한 요건이었던 로마 연합의 해체에 실패하며 결국 전쟁에서 패하고 만다.

     이후 카르타고는 로마에 의해 완전히 도시가 파괴되며 역사에서 이름이 사라지고, 로마는 이후 지중해의 패권국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2. 감상평 。。。。。。。

     2권으로 들어서면서 남겨진 사료들의 양도 늘고, 저자가 매력을 느낄만한 두 명의 인물- 한니발과 스키피오 -도 등장해서인지 책의 두께가 훨씬 두꺼워졌다. 하지만 그렇게 두꺼워진 책의 두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내용은 짧아진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책은 전혀 지루함 없이 내용을 채워가고 있다. 작가 자신이 신나게 써 내려갔기 때문인 것 같다. 역시나 글이란 본인이 재미가 없으면 읽는 사람에게도 재미가 없는 법이다. 논문이 재미가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2권의 핵심은 역시나 책 전체의 부제이기도 한 ‘한니발 전쟁’이다. 희대의 전술가였던 한니발의 침공으로 이제 막 기지개를 켜던 로마는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싸우는 족족 승리를 거두는 상승장군(常勝將軍)의 앞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로마에 없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로마 쪽의 희생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한 명의 뛰어난 영웅의 활약은 로마연합이라는 단단한 시스템을 깨뜨릴 수 없었다. 부러지지 않는 나무를 계속 치다보면 결국 자신의 손이 아픈 법.

     그렇다면 이 두 번째 책의 핵심은 한니발의 뛰어난 전술이 아니라, 결국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로마의 전략, 나아가 정략(政略)이 될 것이다. 1권에서 저자가 찬양해 마지않았던 ‘패자까지도 동화시켰던 로마의 방식’이 그 유효성을 확인했던 걸까. 물론 이 설명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는 지나치게 시스템에 의한 승리라는 측면만을 강조시킨 면이 있다. 시스템이 아무리 좋아도 결국 그것을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다. 일이년도 아닌 십 수 년의 전쟁 기간 동안 끊임없이 병역을 졌던 로마와 인근 도시의 시민들이 아니었다면 또, 전쟁을 용병들에게 맡겼던 카르타고와는 달리 직접 병역을 수행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로마 시민들의 피와 땀이 아니었다면, 전쟁은 훨씬 일찍 카르타고 쪽으로 기울었을 지도 모른다.
 


     강대국이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소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실히 자신의 일을 하는 수많은 일반인들에 의해 건설되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나라란, 그런 성실한 다수가 인정받는, 그래서 그들이 자신의 나라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나라일 것이다. 그런 나라의 국민이라면 굳이 누가 국가를 위한 희생과 헌신을 강요하지 않더라도, 자발적으로 나서게 될 터.

     진정으로 중요한 가치는 인간이 되어야지, 시스템의 유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국가의 운영자들의 시야에서 사람이 사라지고 시스템만 남게 될 때, 사람은 시스템을 돌리기 위한 부속품으로 전락해버리게 된다. 당연히 사람은 대체할 수 있는 무엇으로 생각되기에, 얼마든지 폭력을 가하고, 제거할 수 있다.(이 시대 선진국과 저개발국, 독재국가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를 막론하고 전 지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실처럼.) 적어도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는 시스템보다는 사람을 좀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그들은 결코 양반과 상민이 함께 싸울 수 없다는 식의 어리석은 신분질서를 끝까지 옹호하지 않았다), 결국 그런 태도는 시스템까지도 유지시키는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인간인가, 시스템인가.(물론 고작 자기의 영달을 추구하는 시답잖은 부류들은 처음부터 생각 외로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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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 사회평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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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에 입각해 확신하는 습관,

증거가 확실하게 보장하는 정도까지만 확신하는 습관이 일반화된다면

현재 세계가 앓고 있는 질환의 대부분이 치유될 것이다.

 

 

1. 요약 。。。。。。。

     스스로를 대단히 철두철미한 합리주의자라고 생각했던 러셀이 쓴 여러 글들과 연설문들을 모아 놓은 문집이다. 다분히 도발적인 이 책의 제목은 그가 쓴 한 글의 제목(Why I am not a christian)을 옮긴 것이다. 그는 이 글에서 그에게 가장 익숙한 종교였던 기독교를 믿을 수 없는 이유를 열거하며 나아가 종교는 공포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지극히 익숙한 주장으로 나아간다. 이후의 글들에서는 이 주장을 기반으로 종교는 인류의 지적인 면이나 도덕적인 면, 사회적인 면에 있어서 해악만을 끼쳤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2. 감상평 。。。。。。。

     이 과할 정도의 자신만만함이 느껴지는 글들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아마도 러셀은 자신이 확고한 진리 위에 서 있다고 생각했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눈부신 과학 발전은 그로 하여금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으며, 반드시 그래야만 정확하고 바른 것이라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으리라.
 


     종교에 관한 저자의 생각은 앞서 간단하게 언급했던 것처럼, 종교란 공포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더 이상 이전 시대의 공포의 대상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 이 시대에는 종교의 존재를 지지할 만한 어떤 근거도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종교를 계속 유지하면 할수록 인류 사회에 피해만 주므로 마땅히 제거되어야 한다는 식이다. 최근 유사한 책들을 쓰고 있는 크리스토퍼 히친스나,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들의 주장의 오리지널이라고나 할까. 이들 아류작들은 사실 주제면에 있어서 거의 발전을 하지 못한 것 같을 정도다.

     아무튼 종교에 관한 이런 생각은 이 책에 실린 종교에 관한 러셀의 의견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물론 때와 장소가 다른 곳에서 쓰였기 때문이겠지만,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그들에서 특별한 논리의 발전 없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종교의 근원에 관한 저자의 이 연속적인 생각은 논리적일지는 모르나 충분히 합리적이지는 않다. 예컨대 종교의 근원이 공포심이라는 언명은 여전히 저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과학적 증거’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 생각은 ‘모든 것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어야만 진리이다’라는 그 자체로 또다시 어떤 증명이 필요한(하지만 증명하기 좀처럼 쉽지 않은) 명제에서 나온 결론일 뿐이다.(이런 면은 코플스턴과의 대화에서 지적을 받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약점은 러셀 혼자 말하는 글들이 아닌 ‘대화’의 정황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종교는 거짓이며 신은 없다고 강력히 무신론을 표방하던 저자는 코플스턴과의 대화 국면에 나오면 불가지론으로 한 발 후퇴하고 만다. 물론, 증명할 수 없으니 없는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다는 식으로 다시 원래의 궤적으로 돌아가려는 시도가 엿보이지만, 사실 그건 엄밀히 말해 합리적인 설명보다는 러셀 자신의 논리적 관성에 가깝다.
 


     러셀 자신은 종교의 무가치성을 널리 알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가 살고 있었던 당시 종교적 영향력이 강했는지는 모르겠지만(사실 이 부분도 좀 과장이 섞여 있는 것 같지만), 그 이후 세계는 점점 더 종교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이 사실이라는 데 누구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물론 이런 현상이 사람들이 러셀의 주장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러기엔 러셀의 글이 좀처럼 쉽게 읽히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이 종교에 대한 관심이 줄었기 때문에 세상이 좀 더 행복한 곳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러셀은 ‘증거에 입각해 확신하는 습관이 세계가 앓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p. 13) 그런 생각이 일반화 된 오늘날의 법정은 실제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는 진실보다, 남아 있는 증거가 어떤 사실을 구성해주느냐 하는 법리적 사실이 좀 더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그 결과 실제로 아무리 악한 일을 하고 많은 사람들을 어려움에 빠뜨린 사람이라도, 그리고 그에 대한 증언이 아무리 많더라도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아무런 대가를 치루지 않고 도리어 더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산업 기술이 만인에게 넉넉한 물질을 제공할 것’이라는 주장(p. 70)은 러셀이 사망한 지 40년이 지나 엄청난 기술의 발전을 이룬 지금도 굶어 죽는 사람이 하루에도 수천 명씩 되는 현실을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의 일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으며, ‘산업 기술’을 가지고 있는 국가들은 저개발국가들의 인적, 물적 자원들을 착취해야만 그것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다.

     저자가 찬양해 마지않는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p. 84)이란 참 좋은 것이다. 하지만 무엇으로 사람들을 그리로 인도할 것인가? 저자는 ‘건전한 성격에 활력 있는 사람이라면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 자연스런 충동’(p. 55)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자연스러운 충동’이 아니라는 것을 최근 10년 새 급증하고 있는 범죄율을 통해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어떤 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려면, 그것은 ‘일반적인’ 행동이어야 하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식’일 것이므로, 점차 확대되어야 할 것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죄란, 교육을 좌지우지하는 자들이 싫어하는 것’이라는 생각(p. 201)이 일반화 될 때, 사람들은 점점 더 건전하게 생활하려고 할까, 아니면 사회적 합의나 규칙들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믿는 바를 얼마든지 진술할 수 있다. 특정 부류나 집단을 비판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대화를 하자고 말하고 싶다면 특정 신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어떤 행위에 대해, 쉽게 ‘경멸감’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p. 41) 그다지 좋은 대화방식은 아닌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생전에 참여했던 핵 철폐 운동이나 평화주의적 관점에 입각한 사회참여 등의 이력이 평가절하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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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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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실패하면 그 민족에 치명적이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성공해도 그 민족의 성격을 결정하고

그에 따라 그 민족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까지 결정지어버리기 때문이다.

 

1. 요약 。。。。。。。

     서양에서는 드물게 수백 년(‘비잔틴 제국’으로 불리는 동로마 제국을 기준으로 하면 천 년)을 버텨왔던 로마 제국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다. 앞으로 열다섯 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을 집필하기 위해서인지(물론 1권을 집필할 때는 정확히 언제 끝날지 작가 자신도 몰랐을 테지만), 로마 건국 초기의 여러 상황들에 대해 다방면에 걸쳐서 천천히 고찰하고 있다. 물론 남아 있는 자료 자체가 너무나 적었기 때문인지, 로마를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를 알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한참 그리스에 관한 서술로 넘어갔다가 돌아오긴 하지만 말이다. 

     건국 초기의 왕정 시대와 이어지는 공화정 시대에 관한 서술에서 두드러지는 부분은 이탈리아 북부의 에트루리아인, 중부의 삼니움족, 남부의 그리스계 여러 도시들과의 투쟁이다. 여느 국가들처럼 로마도 차례차례 인근의 부족들을 복속시키며 점차 세력을 넓혀갔지만, 역시 로마만의 특징이라면 패배자들까지 자신들에게 동화시키는 정책이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피정복민들과 자신들의 권리를 온전히 공유하고, 심지어 그들 가운데 자신들의 왕을 선출하기까지 했던 로마인들의 ‘유연함’을 그들의 가장 큰 장점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2. 감상평 。。。。。。。                      

     패자를 동화시키는 정책은 과연 로마만의 독특한 전통이었을까? 사실 이런 모습은 비단 로마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가야계 왕족이었던 김유신은 신라의 귀족이 되었고, 결국 삼국통일의 주역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니까. 심지어 일제도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한 후에 친일파들을 통치에 사용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피정복부족을 자신들의 왕으로까지 추대하지 않았느냐는 반론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저자도 밝혔듯이 사료가 워낙에 적고 불명확하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부분이다. 책 속에도 언급되듯 ‘에트루리아 계에게 로마가 지배를 당했다’는 학문적 설명을 하는 학자도 있다니까.

     요컨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로마식의 패배자들 중에서의 인재등용은 딱히 로마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차피 당시는 아직 민족 개념이 두드러지던 근대도 아니고 고대 사회다. 당시 그리스 세계와 비교하면 로마 사회의 개방성이 뛰어난 것이라는 저자의 설명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지만, 사실 세력이 약하고, 그래서 인물이 적은 국가나 도시의 경우 인근 부족이나 도시를 ‘흡수’해서 온전한 ‘자신의 살’로 만드는 것은 그리 역사적으로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로마만의 독특한 점이라면 역시 귀족과 평민 사이의 차별의 벽을 부셔버렸다는 데 있지 않을까. 진통은 있었지만 결국 평민들에게도 공직의 문을 완전히 개방하고, 그들의 권리를 수호할 수 있는 호민관이라는 직책까지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획기적인 정치 체제를 형성시킨 아테네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정신적 유연성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나아가 자유민과 노예 사이의 신분적 벽을 ‘넘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이 체제는 안정적으로 확립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훌륭한 점은 그런 정책을 앞으로 수백 년 동안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는 점이다. 강한 내부의 결속은 분쟁이 일상화된 강한 적을 이길 수 있는 중요한 무형의 힘이다.

     이런 관점에서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면 암담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가진 자는 자신이 가진 것을 영속화시키고 나누지 않기 위해 온갖 불법과 편법, 합법적 수단을 악용해 지키려고만 하고, 못 가진 자는 그런 가진 자들을 향해 분노와 절망만을 품고 있다. 차별을 줄이는 쪽이 아닌 가진 자들만을 위한 질서로 재편되어 가는 보며, 왜 오늘 우리나라는 로마제국과 같이 앞으로 뻗어나가지 못하는가를 알 것 같다. 같은 반도 국가이기 때문에 국가의 모습 또한 비슷해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오늘날의 이탈리아는 더 이상 예전의 로마 제국이 아니라, 언론장악과 부정부패와 섹스 스캔들로 점철된 총리가 몇 번이나 재선되는 그저 그런 나라가 되었으니까.)

     역사는 사람을 지혜롭게 해 준다. 하지만 당장 눈앞의 이익이 더 중요한 정치인들에게는 역사책을 읽을 만한 시간적 여유는 없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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