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때문에 본의 아니게 몇 개월 동안 병원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의사나 간호사 지망생을 빼고는 누가 병원 생활을 좋아할까만은,
나도 역시 그 때의 경험은 다시 되풀이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어지간히 몸이 고단하기도 했거니와,
병원 생활이 길어지면서 그 곳에서 여러 사람들의 기분 나쁜 면을 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가 지금 쓰려고 하는 '없는 사람 취급하기'다.

 

병원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몇 달씩 병이 지속될 경우 환자는 물론 그 주위 사람들도 서서히 지쳐가게 된다.
더구나 그 병이 언제 나을 지 기한이 없다면 이제 조건은 거의 다 갖춰진다.





상황 1.
환자는 오랜 병으로 쇠약해진 상태.
환자의 친구가 문병을 와서 환자의 다리를 잡고 말한다.
"아이고 이거.. 이래서 걸을 수나 있겠어?"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란 건 안다.
(어쩌면 그냥 자신의 무심함을 드러내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꼭 그 말을 오랜 침대 생활로 다리에 힘이 없어
어쩌면 다시 걷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환자에게,
그래서 겨우 희망을 주며 격려를 해 놓은 환자에게 할 필요가 있을까?

 

상황 2.
심혈관질환(심장에 붙은 혈관에 문제가 있는 병) 환자들은
종종 가슴 부위에 통증을 느끼기도 한다.
특히 그 부위에 수술을 받은 후나 신체의 다른 이상이 있을 때 특히나 그렇다.
그렇게 통증이 생기면 간호사를 불러 의사의 처방을 요구하고,
간호사는 처방을 받아 적절한 약물을 투입한다.
문제는 이 통증이 일정치 않다는 데 있다.
항상 같은 처방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통증이 일어날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 있는 간호사로서는 매 순간 긴장을 해야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호출을 받고 가도 금방 진정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경우에는 환자의 상태를 의사에게 전달해도 '기다려보자'는 대답이 돌아오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환자가 통증을 호소해도
크게 여기지 않는 상태까지 이르게 된다는 데 있다.
환자가 일정 시간 안에 연속적으로 강한 통증을 호소하지 않는 이상
환자가 호출을 했다는 사실까지도 잊어버리는 것이다.
통증이 가라앉지 않는 환자로서는 분통이 터지는 일.
환자는 간호사의 머리속에서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없는 사람 취급하기.
줄여서 '무시'.
이것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상대의 기분이나 상황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함부로 말을 하거나,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은 척 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사실 여기에 의도적인지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무의식적으로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이미 그런 태도가 체득화 되어 있다는 뜻일테니까.
대신 여기에는 거의 필수적인 요소가 한 가지 있는데,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사람이 그런 취급을 하는 사람에 비해 '약자'라는 것이다.
무시란 나보다 약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강자의 태도이다.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을 무시할까?
가장 큰 이유는 손해를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귀찮아서'라는 이유도 그 때문에 내 시간과 여유를 사용하기 싫다는 말일 뿐이다.
비슷한 이유로 '나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라는 것도 있다.
결국 나를 위해 다른 사람을 버릴 수도 있다는 태도이다.

 

무시를 하는 또 한 가지의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적어도 '직접적 논란'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공개적인 조롱이나 공격은 비난의 대상이 되지만,
무시는 암묵적으로 용납이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무시를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명예나 품위를 지키면서 손해까지 보지 않을 수 있는
경제적으로 아주 효율적인 태도가 '무시'이다.





최초의 얼마간을 예외로 한다면, 인간은 항상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왔다.
무시는 그런 삶의 방식을 뒷면으로(정면으로의 반대말?) 거부하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이기적인 인간들에게
그나마 어느 정도 선을 강제할 수 있는 요소가
'다른 사람의 눈', 즉 명예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인데,
무시란 그 보이지 않는 고리 마저 끊어버리는 강력한 도구다.
무시가 일반화 된 공동체는 더이상 공동체가 아니다.
당연히 (경제적, 정치적, 물리적) 힘이 센 놈만 잘살게 된다.
약육강식의 비인간적 세상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은 내 의식 속에서 그의 존재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소극적인 의미지만, 인격적인 살인이다.
그것도 절대로 처벌받지 않는 살인 말이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일일히 반응을 보여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건 어지간히 우리를 소진시키는 일이기도 할 뿐더러,
종종 단지 우리를 귀찮게 할 목적으로 요청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정도의 구분이나 판단마저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다른 사람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나 우리 자신에게나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너무나 쉽게 다른 사람을 의식 속에서 제거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여전히 다른 사람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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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크 독트린 - 자본주의 재앙의 도래
나오미 클라인 지음, 김소희 옮김 / 살림Biz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무수한 국가와 개인들의 신체에 가한 잔인한 강압 속에서

근본주의적 자본주의가 출현했다는 사실을 밝힐 것이다.

자유시장의 역사는 쇼크 속에서 쓰였다.

 

1. 줄거리 。。。。。。。

 

     책은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충격적인 ‘실험’ 이야기로 시작한다. 1950년대 CIA가 이완 카메론이라는 몬트리올의 한 의사를 후원해 심리치료 환자들에게 잔인한 실험을 실시했다. 환자들은 잠을 잘 수 없었고 몇 주 동안 외부와 격리되었으며 전기 쇼크와 환각제들을 투여 받았다. 환자를 유아상태로 되돌려 정신분열적 증세가 나타나기 이전의 순수한 백지상태로 만든다는 것이 실험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실험은 사람들을 순수한 백지상태로 돌아가게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정상적인 인격을 파괴해 극단적인 분열 상태로 만들었다. 연구자들은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 이전의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이유를 댔지만, 결과적으로 남은 것은 철저하게 파괴된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 뿐. 그들은 ‘손상’과 ‘치료’를 구분할 능력이 없었다.

     이런 미치광이 같은 생각과 실험이 어떻게 경제정책에 적용되었는가가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시카고 대학의 밀턴 프리드먼은 앞서의 카메론처럼 ‘인간의 개입으로 사회 패턴이 왜곡되기 이전의 조화로운 상태’에 관한 신화를 바탕으로, 극단적인 자유방임형태의 경제구조를 열렬히 찬양했다. 그는 시카고 보이즈(시카고 대학에서 배운 그의 제자들)와 함께 전 세계에 이 급진적인 사조를 퍼트리는 데 일평생을 바친다.

    칠레,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중국, 인도네시아, 폴란드, 러시아에서 그의 이론은 실험되었으나 그 결과는 한결같았다. 공공기관의 민영화와 사회보장예산의 대대적 삭감, 경제적 안전망을 구성하는 모든 규제의 철폐는 국민의 대다수를 극빈층으로 전락시켰고, 때문에 극렬한 반대를 맞닥뜨려야 했다. 때문에 이 때 필요한 것이 ‘쇼크 요법’이었다. 대규모의 지진, 전쟁, 폭력과 고문, 탄압 같은 충격적 요법은 국민들을 ‘백지 상태’로 만들고, 그 기회를 틈 타 이런 ‘급진적인’ 정책들을 도입하면 된다는 논리였다.(독재자가 되라는 말과 거의 구분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프리드먼주의는 전 세계에 더욱 큰 악영향을 끼치는데, 이제 그들은 노골적으로 ‘재난 자본주의’를 자신들보다 약한 나라들에 강요하기에 이른다. 90년대 후반 금융위기를 맞았던,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에게 그랬고, 미국의 거짓말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이 그랬다.

     결론부에서 저자는 이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덫으로부터 느리지만 확실하게 벗어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이전의 쇼크로 인해 크게 당했기에, 쇼크에 대한 일종의 내성이 생긴 사람들이었다. 아직 희망은 남아 있다.



 

2. 감상평 。。。。。。。

 

     “위기에 처한 국민들은 마법과 같은 해법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권력을 넘겨준다.”

     “OOO은 파괴와 창조 혹은 손상과 치료를 구별하지 못했다.”

     “만능 물대포는 사람들이 쓰레기인 것처럼 싹 쓸어버렸다. 이제 거리는 반들거리고 깨끗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텅 비어 있었다.”

     “사람들은 여기서는 의료혜택을 줄이고 저기서는 무역정책을 바꾸는 점진적 변화에는 대응할 수 있다. 그러나 수십 가지 정책 변화가 단번에 전면적으로 시행된다면 대중은 무기력해지면서 맥없이 지쳐버린다.”

     “그들은 기꺼이 정적들을 제거하고, 저항을 일절 허용하지 않으며, 백지상태에서 새롭게 시작하려 했다.”

     책에서 따온 인용구들이다. 어느 것 하나 우리나라를 가리키지 않지만, 참 어이없게도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내용들이 아닌가. 우리는 이미 프리드먼 식의 쇼크요법을 받고 있었다. 모든 국내 경제지표가 사상 최대의 성장률을 보여주고 있는데도 일부 신문에서 조장한 위기설에 위축된 국민들은 자기가 경제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사람에게 기꺼이 권력을 넘겨주었다. 하지만 그는 시민들을 쓰레기처럼 물대포로 ‘청소’하기에 바빴고, 가차 없이 반대자들을 구속시키고 정적들을 제거하고 있다. 결국 그의 목표는 민영화와 복지예산 삭감, 사회의 여러 공적 안전장치의 해제로 나타나고 있다. 참 무서운 일이다.

 

     물론 나는 지금 우리의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이 사악한 음모를 가지고 국가를 전복시키려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이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고 밝혀지면 어떤 사람들의 마음은 통쾌할지 모르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해야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소망과는 다르게 참 우려스러운 것은,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동시다발적인(마치 쇼크를 주려는 것처럼) 자유방임주의적 정책들 때문이다. 모든 것이 ‘경제’라는 두 글자의 단어면 해결이 되는, 그리고 그 ‘경제’라는 카테고리 안에는 참 다양한 방식이 있는데도 오직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이 ‘경제’라는 경전에 담긴 유일한 진리인 것처럼 밀어붙이는 방식이 너무나 걱정된다. 세계 조류(사실 그 ‘조류’도 한 가지가 아닌데도)에 편승하는 것만이 우리의 하나뿐인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너무나 두렵다. 세계적인 실험의 결과 그 방식은 절대 다수의 국민들을 빈곤으로 몰아넣고, 소수의 거대자본가들만 그 모든 이익을 빨아먹는 결과로 나타났는데도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옹고집이 참 답답하다.

 

     시민들의 깨어 있는 의식이 정부 당국자들과 재난 자본주의자들의 욕심을 무산시키는 책의 마지막 부분은 참 인상적이다. 그 ‘의식’의 중심에는 건전한 공동체 정신이 있었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자신의 것을 나누어 채워주는 전통적 가치라면 우리에게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있으니까. 지금도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이웃집과 함께 김장을 돌아가며 하고, 받은 호의에 대한 답을 돈이 아닌 또 다른 호의로 갚는 것이 드물지 않다. 기회비용을 따지기 보다는 사람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직은 헛소리로 치부되지 않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보게 되기를 소원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책은 왜 이렇게 한결같이 두껍고 어려울 것처럼 생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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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다음 블로그에 영화평을 쭉 써서 올린 게 이번에 UCC AWARDS 후보작으로 선정되었다는군요!! 

그래서 상품권 5만원이 도착..  

한 만 원 더 더해서 싼 패딩 점퍼라도 하나 사 입어야겠어요.. ㅎㅎ 

 

 

1등에 당첨되면 100만원이나 준다는.. 컥..  

욕심이 나긴 한데...ㅋ 

지금 투표중이랍니다. ^^ 

(꼭 절 찍어달라는 건 아니구요.. ㅋㅋ)

 
http://promotion.search.daum.net/event_2008UCCAwards/main.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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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이상하게 서재 방문자수가 많다. 

3, 40명이나 될까 말까에서 

하루에 3, 400명이나 들어오니 이거...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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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예수와 함께한 학교생활
김옥 지음, 박영미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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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시골에서 서울 학교로 전학을 온 예준이. 아빠와 엄마는 하루 종일 일을 하러 나가시고, 그렇다고 마땅히 학원도 다니지 않는 예준이는 하루하루가 너무 지루하고 싫었다. 새로 가게 된 학교의 친구들은 물론 선생님들도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으니 정붙일 곳은 하나도 없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 일일 교사로 예수님이 오신다. 외로움을 느끼던 예준이는 그의 출현에도 시큰둥하지만, 선생님의 진심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그리고 찾아 나서기 시작한 천국의 열쇠. 과연 예준이는 그 열쇠를 찾을 수 있을까.

 



 

2. 감상평 。。。。。。。    

 

     오랜만에 읽은 초등학생 용 도서다. 데이비드 그레고리가 쓴 ‘예수와 함께한…’ 시리즈를 모티프로 삼아서 쓴 책. 주인공은 아이로 바뀌었고, 주제인 복음을 설명하는 방식도 아이들이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배경인 ‘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어린이용 도서다보니 주제 전달에 있어서 복잡한 논증 같은 것은 사용하지 않았고, 대신 좀 더 단도직입적이고 단순한 이야기서술 구조를 택하고 있다.

 

     띠지에 쓰여 있는 문구처럼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책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우선은 책의 원형인 그레고리의 것에 비해 지나치게 단순화된 느낌이 들기 때문이고, 무엇인가를 따라한다는 것에 대한 약간의 저항감이 이런 생각이 들도록 만드는 듯하다.

     하지만 다행히 책에 담겨 있는 내용은 폭넓은 공감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공인된 내용들이기에, 기꺼이 추천을 할 수 있겠다. 사실 교회에 다니는 어린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제대로 된 책이 많지 않기에 그 선택지가 충분히 넓지 않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책의 출간이 반가운 것도 사실이다.

 

     초등학교 3학년 이상의 어린이들이라면 부모님들과 함께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고, 책 뒤편에 부록은 부모와 아이가 서로 질문과 답변을 하며 친밀감을 높여가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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