앓다.

 '앓다'라는 말에는 뭔가 특별한 감정이 느껴진다.

ㄹ과 ㅎ이라는 아름다운 조합으로 이루어진 받침과

앓을 때 덮는 부드러운 이불의 따뜻함.

그리고 긴 잠.

 

 

이번에 앓고 나면

모든 것이 꿈인 것처럼 깨어날 수 있기를.

머리는 어지럽고, 목은 간지럽고, 몸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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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8-12-03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살을 앓으셨나봐요..저도 이제 몸 추스리고 긴잠에서 해방된듯 하네요.
앓는다는것 참 힘들고 고달프더라구요.
맛있는것 많이 드시고 푹 주무시고 얼른 힘이 팍~! 팍~! 나시길~!

노란가방 2008-12-03 21:2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근데 이제 막 시작이랍니다. ^^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전에 지니고 살았던 감정, 과거에 우리가 사는 모습을 규정하던 감정은

우리가 눈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눈이 없으면 감정도 다른 것이 되어버려,

 

 

 

1. 줄거리 。。。。。。。

 

      어느 날 도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차 한 대가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그냥 멈춰서 있다.뒤에 있는 차는 빨리 출발하라며 경적을 울려대지만, 그 차는 좀처럼 출발을 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차 밖으로 나와 가장 앞에 있는 차에 따지려고 갔을 때, 가장 앞 차의 운전자는 이렇게 외친다. “눈이 안 보여.”

 

     이 난감한 외침으로 책은 시작한다. 그냥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곳까지 멀쩡히 차를 몰고 왔는데, 말 그대로 갑자기다. 온 세상이 그저 하얗게만 보인다는 것. 다행히 옆에 있던 사람이 차를 대신 운전해 차 주인은 집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당장 보이지 않는 눈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다음 날 안과를 찾아가 봤지만 의사도 눈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말 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차를 대신 운전해 차주인을 집으로 데려다 주고 몰래 차를 훔쳐 도망갔던 사람도 곧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안과의 의사도, 안과에서 만난 다른 환자들도 차례로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 정부는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깨닫고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사람들을 집단으로 수용할 장소를 찾는다. 그렇게 찾아낸 곳이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한 정신병원. 치료법을 찾아주겠다는 말은 했지만 사실상 정부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군인들을 동원해 병원을 봉쇄하고 끼니를 제공할 뿐. 그것이 전부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없게 되고, 그에 따라 수용되는 인원도 점점 많아진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 더 이상 식사가 제공되지 않게 되고, 병원을 감시하던 군인들도 모두 사라져버린다.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게 된 것이다.

 

2. 감상평 。。。。。。。 

 

     줄거리 자체가 매우 흥미로운 소설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한 도시 안의 모든 사람들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사실 일찍부터 사람들은 이와 비슷한 상상을 해 보기를 좋아했었다. 국가의 기원에 관한 정치학자들의 논의(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니, 사회 계약설이니 하는 것들이 그 예이다)에서, 이미 사람들은 인류가 현재 가지고 있는 문명들을 만들어 내기 이전의 소위 ‘원시 사회’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라는 질문에 서로 다른 답을 하며 자신들의 논지를 전개해 왔다. 또, 인간이 최초에는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갓난아이를 돌보는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아기가 스스로 말을 할 수 있도록 지켜보는 실험도 하지 않았다던가.

     길게 보면 이 책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다. 다만 저자의 독특성은 굳이 현재 인간이 가진 모든 문명적 도구들을 제거해야하는 어려운 시도를 하는 대신, 그저 모든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간단한 작업으로 그 가정을 재현했다는 데 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명품 나부랭이를 몸에 걸칠 필요도 없고, 대형차와 넓은 아파트도 그 본래의 중요한 목적 - ‘나 이런 사람이요’하면서 뻐기기 위한 -을 상실해 버린다. 대신 이제 사람들에게는 먹고, 입고, 자고, 배설하는, 매우 기초적인 것들만이 중요해진다. 놀랍지 않은가, 단 하나만 제거해버렸을 뿐인데 말이다. 저자의 창의력 하나에는 박수를 보낸다.

 

     그럼 저자는 왜 이런 시도들을 했을까? 아마도 저자는 현재 인간들이 걸치고 있는 모든 종류의 허례들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을 때, 인간 본성이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때문에 저자는 모두의 눈을 멀게 함으로써, 우리 모두의 본성을 발가벗기고, 바로 거기에 이야기의 초점을 맞춘다.

     모두가 눈이 보이지 않게 되자,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사람들은 내키는 대로 행동을 한다. 아무데나 배설을 하고, 더러운 오물 위에서 잠을 자고, 온통 먹는 문제로만 고민이 집중된다. 여기서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사람들은 그 와중에서도 자연스럽게 일종의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모두가 눈이 멀게 되자 사람들은 아무 빈집에라도 들어가 살 수 있고, 뒤에 온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가야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작 자신의 생명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을 때만이 가능한 규칙이라는 점에서 제한점을 갖는다. 사람들은 먹을 것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위협하고, 속이기를 주저하지 않고, 음식을 향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양보 없이 달려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깔려 죽기도 한다. 부패하고 무능한 공무원과 정치인들의 모습은 책 속에도 그대로 등장한다. 또, 사람들은 자기 것을 차지하기 위해 무한히 서로 다투고 투쟁한다. 뿐만 아니라 책 속에는 단 한 사람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데, 이는 현대인의 익명성과 무관심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저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게 바로 여러분의 본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런 중에서도 서로를 경쟁자가 아닌 공동체로 보고자 했던 한 그룹의 모습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그들 모두가 개인으로 있을 때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그래서 눈앞의 이익만을 쫓아 사는 사람들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이 멀고 나서야 비로소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서로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자 좀 더 먼 전망을 보게 되었고,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아마도 이 책의 주제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동료 인간들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사랑, 연대의식이 이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힘 가운데 하나이다’라는.

     오랜만에 멋진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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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교육학 - 민주주의와 윤리 그리고 시민적 용기
파울로 프레이리 지음, 사람대사람 옮김 / 아침이슬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사실 ‘올바르게’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비록 가끔씩 잘못 생각하는 일이 있기는 해도,

‘올바른’ 생각하기를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1. 줄거리 。。。。。。。 

 

     『페다고지』로 유명한 브라질의 교육학자인 프레이리의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교육의 본질을 ‘자유’라는 주제로 엮어 내고 있다.

 
     프레이리는 인간을 ‘결정된 존재’가 아니라 ‘형성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존재이므로 스스로의 노력에 따라 실제로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의 교육에 관한 정의가 등장한다. 교육이란 단지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인간이 완성으로 가는 과정이라는 것.


     자연히 이런 의미의 교육에는 ‘대화’가 중요해진다. 특히 교사는 단순히 자신의 지식과 정보를 학생에게 입력시키는 사람이 아니고, 가르치는 동시에 배우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전제를 잊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그는 학생으로 하여금 세상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학생에게 가르치는 내용과 학생이 처한 상황을 연결시켜 가르쳐야 한다.(프레이리는 이를 ‘정치적’이여야 한다는 말로 표현한다)

     특히 프레이리는 세계의 억압 받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들이 받는 억압은 소위 하늘이 내린 것이 아니라 억압적 질서를 옹호하는 사람들에 의한 것이며 참 교육은 그런 억압적 질서로부터의 진정한 자유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자유의 교육학’이라는 책의 제목을 떠올리게 한다.




 

2. 감상평 。。。。。。。   

 

     『페다고지』를 워낙에 흥미롭게 읽었던 터라 이 책 또한 기대감을 가지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단순한 교사나 교육학자라기보다는 교육사상가에 가까운 저자였기에 책에 등장하는 개념들이 읽기에 쉽지만은 않았지만, 한 번 흐름을 타기 시작하니 또 그리 어렵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는 교육에 관한 저자의 정의이다. 단지 체제에 순응하는 군중을 만들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자유로운 시민을 길러내는 하나의 정치적 작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물론 여기서 말하는 ‘정치적’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익히 통하는 ‘막무가내 식의 아집’이라는 말이 아니라 ‘현실 참여적’이라는 의미이다.) 말 그대로 자유의 교육학이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나라의 교육 상황은 프레이리가 지적하는 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정부의 교육정책은 단지 학생에게 지식만을 쌓는 ‘은행 저금식 교육’을 지향하고 있고, 교육은 더 이상 교육이 아니라 단순한 훈련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런 ‘훈련’의 결과인지 최근 일부에서는 ‘좌편향 교육에 대한 시정’이라는 어이없는 주장(자기들은 꽤나 중립적이라는 착각에 빠져 실은 우편향으로 치닫는)을 실제로 믿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이런 교육의 붕괴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결국 현재의 왜곡된 사회구조는 시간이 갈수록 고착화되어 더 이상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변화를 일으킬 수 없는 악한 상황으로 전락해갈지도 모른다. 학대와 억압을 받는 사람들은 점점 그 정도를 더해갈 것이고, 최악의 경우는 (상상하기 싫은) 폭력과 분쟁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문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쉽게 자기 입맛에 맞게 바꾸는 교육에 있다.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서 그 ‘가능성’의 현실화를 위한 중요한 양분이 교육인데, 그 가능성의 실현으로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특권을 잃을까 염려하는 사람들이 교육 정책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으니 말은 다 했지 뭐.

 

     가르침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인지, 교육과 그것의 실현, 그것이 지향하는 바, 현실 참여적인 교육의 개념, 그리고 억눌리고 약한 사람들에 관한 관심까지 참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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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빵맨 2008-12-04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ulo Freire는 저도 참 존경하는 교육사상가입니다. 제가 공부하고 있는 학교에서는 모든 학생들이 읽어야 하는 필독서가 되었고요. 미국 내의 교육대학원들은 Freire의 교육에 대한 이해가 mainstream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는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한국의 '전교조'도 Freire의 철학으로부터 시작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의 전교조는 학생들의 '의식화'를 등한시하고, 학생들로 하여금 사회정치적 행동을 실천할 수 있도록 의식화하는 대신 교육의 민주화라는 자신들의 어젠다를 교사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비판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Freire 당시의 브라질은 글을 읽고 쓸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대통령 선거에 대한 투표권을 주지 않았다고 하네요. 그런 이유에서 좁은 의미에서는 문맹자들로 하여금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질 수 있도록 문맹교육을 실시하는 것으로 부터 나왔고, 서방에서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 교육과 의식화를 통해서 특히 소수자들에게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으로써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아요. 가르침과 축복을 통해서 왜곡된 사회구조를 고착화시키는 종교가 되어버린 기독교가 잃어버린 사회 정의의 목소리를 해방신학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Freire를 읽으면서 해방신학을 도매금으로 비난했던 제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답니다. ^^

노란가방 2008-12-04 22:08   좋아요 0 | URL
미국에서는 그 정도의 대접을 받고 있군요. 고무적인 일입니다.
우리나라 교육당국자들은 무조건적으로 미국을 추종하면서
그런 부분은 왜 안 본받는지..

프레이리와 해방신학이라..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네요.
WCC쪽에서 일하기도 했던 걸 보면 분명히 뭔가 관련이 있었겠죠.
종교의 사회적 책임에 관해서는 저도 누구보다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랍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관련해서 말이죠.
재미있게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가르치다보니 자연스럽게 프레이리식의 교육방식을 사용하게 되더군요. 역시 탁월한 사상가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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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란 게 다 할 때가 있는 법인디……

나는 평생 니 엄마한테 말을 안하거나 할 때를 놓치거나 알아주겠거니 하며 살었어야.

인자는 무슨 말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디 들을 사람이 없구나.

 

1. 줄거리 。。。。。。。

 

     생일을 맞아 서울에 사는 자녀들을 보기 위해 기차를 타고 올라온 부모님. 평소같았으면 누군가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갔으련만, 일이 그렇게 되려고 그랬는지 그 날은 부모님들이 지하철을 타고 직접 찾아오시겠다고 하셨다. 걸음이 빠른 아버지는 어머니를 뒤에 남겨둔 채 먼저 지하철에 올랐고, 결국 두 정거장이나 지나서야 아내가 지하철에 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엄마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전단지를 만들어 나누어주고, 신문에 광고도 내고 하며 찾아다니지만, 쉽게 찾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 엄마를 찾아다니면서, 이전에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엄마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 보게 된다.
   

 

 

2. 감상평 。。。。。。。    

 

     엄마를 잃어버렸다. 아니, 엄마는 무슨 물건이 아니니까 ‘잃어버렸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은 어휘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엄마를 자신들과 똑같은 한 명의 ‘사람’보다는, 그저 편하게 의지할 수 있는 나무 그루터기처럼, 혹은 필요한 것을 딱딱 내어 놓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사물화’ 시키곤 한다. 이 책은 마치 숨은그림찾기처럼 분명히 그 자리에 있는데도 잘 보이지 않았던 ‘엄마’를, 이야기의 중심부로 끌어내고 있다. 엄마도 딸이었고, 소녀였고, 여자였다.

 

 

     작가는 ‘엄마의 실종’이라는 사건에 대처하는 세 명의 사람들(딸, 아들, 남편)의 시선을 통해 엄마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다. 각각의 사람들은 누구보다 엄마와 가까운 사람들이었지만, 정작 엄마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머리가 굵어진 이후로 그녀와 진지한 대화를 해 본 경험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독자는 어느새 자신의 부모님과 언제 진지하게 대화를 해 보았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단지 여기에서만 끝났다면 이 소설은 부모님, 혹은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아쉬움을 그려내는 평범한 소설에 그쳤을 테지만, 작가는 여기에 한 개의 장(章)을 더한다. ‘엄마’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풀어내는 부분이 그것. 앞서의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그 사람’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라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어머니도 여자이고, 한 명의 인격체라는 것을 좀 더 실감나게 보여준다.

 

     누가 자신을 효자, 효녀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냐 만은, 책을 읽으며 자꾸만 제대로 효도도 못 해 드린 아버지, 어머니가 떠오른다. 그분들도 늘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고, 기대고 싶은 분들이라는 생각. 날도 쌀쌀해져가는 요즘, 책을 읽으며 가족에 대한 애틋함을 회복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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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순간도 많은 사람들이 완전한 사랑을 꿈꾼다.
그, 혹은 그녀가 아니면 절대로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영혼과 영혼이 서로를 알아본다는 그런 사랑.
멋지지 않은가, 그런 사랑을 한다는 건.

 

요즘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 소설들을 보면,
온통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로만 가득하다.
아, 여기에 대중가요도 물론 추가해야 겠다.
요즘 나오는 가요들의 주제는 극단적으로 말해 딱 두 개밖에 없다.
사랑하게 되어서 기쁘다는 내용 아니면,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슬프다는 내용.
그 빈곤한 상상력의 가련함이란....

 

그야말로 사랑의 홍수 시대이다.

 
 
내가 쓴 글들을 꾸준히 읽은 사람들이라면,
이제 슬슬 눈치를 채고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사랑은 좋은 것이 아니냐고,
왜 거기에 시비를 걸 준비를 하느냐고 말이다.

 

만약 정말로 여기까지 생각을 한 사람이 있다면,
당신을 내 매니아로 임명한다. ㅎㅎ


 
사랑, 물론 좋은 것이다.
그렇다면 신문과 방송, 모든 매체들에서 사랑을 떠들어대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과연 행복한가?

 
 

불행히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사랑의 홍수 시대에도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완전한 사랑을 찾고자 하지만,
결국은 실패의 쓴잔을 들이키곤 한다.
왜 그럴까? 무엇이 문제일까?
 

 
지나치게 긴 글이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여기서 여러 종류의 사랑들 가운데
남녀 사이의 사랑만을 주제로 삼겠다.
하지만 다른 관계의 사랑(부모와 자녀, 친구, 이웃 등의)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완전한 사랑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그들의 그러한 시도는 십중팔구 실패하기 마련이다.
완전한 사랑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며,
심지어 공상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완전한 사랑, 아니 적어도 그에 상당한 사랑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실패를 하는 걸까?

 
 

어떤 사람은 자신의 완전한 사랑을 첫사랑의 대상에게서 찾고,
또 다른 사람은 헤어진 연인에게서 찾는다.
심지어 드라마, 영화 속의 주인공의 모습에서
자신의 완전한 사랑의 대상을 찾기도 한다.

 

지나간 과거의 연인에게서 찾으려는 사람은,
그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데서 오는 슬픔과 자기연민에 빠져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 혹은 그녀야 말로 자신의 완전한 사랑이기에,
더 이상 다른 사람과는 사랑할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영화나 드라마, 자신의 상상 속에서 완전한 사랑을 찾는 사람은
상상 속의 그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를 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 상상과 일치하지 않으면,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고 상대와의 관계를 끊어 버린다.

 

완전한 사랑을 찾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시기’를 제대로 선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완전한 사랑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남녀 사이에 있어서의 완전한 사랑이란
두 사람이 결혼이라는 특별하고도 거룩한 관계 속에 들어갔을 때에야 가능하다.
‘둘이 한 몸이 되는 것’.
성경이 결혼을 이르는 말이다.
완전한 사랑에 대해 이보다 더 멋진 표현이 또 있을까.
원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인격체가
결혼이라는 관계를 통해 하나의 인격체로 태어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완전한 사랑이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완전한 사랑을 찾아야, 결혼을 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아니, 결혼의 유일한 조건으로 ‘사랑’을 꼽는 위험한 생각도 판을 친다.

과연 사랑만이 결혼의 유일한 조건이 될 수 있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는 그 감정의 지배에 따라
결혼이라는 신성한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 옳을까.
사랑만이 삶의 유일한 이유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세속적인 드라마와 소설이 우리에게 주입하는 위험한 사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결혼의 '조건'을 생각하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다.

문제는 어떤 조건을 택하느냐 하는 것이다.

나와 깊은 사귐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인지,

그의 삶의 질서가 제대로 잡혀 있는지,

이런 조건들은 우리가 충분히 고려해야 할 ‘조건’들이다.
두 사람이 하나의 인격체를 이루는데 매우 큰 영향을 끼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완전한 사랑'이란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세속적인 대중매채에서 떠드는,
운명적이며 완전한 사랑을 언젠간 만나게 될 것이라는 환상을 버리지 않는 한,
완전한 사랑은 결코 당신 곁에 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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