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건

진정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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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더 이상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그냥 느끼기를 원할 뿐이다.

생각하는 것은 옳고, 느끼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감성적인 면이 좀 더 강하고,

또 다른 사람은 이성적인 면이 강할 수 있다.

사실 모든 사람은 이 두 가지 면을 함께 가지고 있으니까.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지성과 감성.

 

일본 소설가 다나카 요시키가 말했던,

‘강철로 된 신경과 거미줄로 된 신경으로 이루어진

정교한 아름다움’은

특별난 사람만이 가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 말하려는 것은 제대로 느끼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이 글은 오늘날 사람들이 느끼는 방식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한다.

생각하기 대신 느끼는 대로 하고 싶어하지만,

그나마 제대로 느끼지도 못한다는 말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진심으로 느끼지를 못하고 있다.

진심으로 슬퍼하지도 못하고,

진심으로 기뻐하지도 않는다.

적당히 슬퍼하고, 적당히 기뻐할 뿐이다.

적당히 사랑하고, 적당히 미워한다.

정도의 차원에만 ‘적당히’라는 형용사가 붙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차원에서도 ‘적당히’는 적용된다.

 

쉽게 말하자면,

사람들은 ‘대충 느낀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렇게 제대로 느끼지 못하게 된 데에는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의 역할이 가장 크다.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적당히 눕거나 기대서,

손에는 리모컨을 들고 쉴 새 없이 이 채널, 저 채널을 돌려댄다.

적당히 돌리다가 딱 느낌이 들면

잠시 채널을 고정한다.

말 그대로 순간적인 느낌에 따라 행동한다.

하지만 이내 흥미를 잃고 또 다른 채널을 찾아 나선다.

 

 








이러는 동안 감정은 점차 단편적으로 변해간다.

감정을 느끼는 주기는 극단적으로 짧아지고,

그 깊이 또한 얕아진다.

만약 어떤 드라마에서 조금 긴 호흡으로 장면을 묘사하며

감정을 길게 늘어뜨린다면

사람들은 금새 지루하다느니, 늘어진다느니하며

비난을 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쉬지 않는 변화와 자극을 원하지,

진지하고 깊은 감동을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이런 경향은

또 다시 그런 취향에 맞는 프로그램을 양산하는 원인이 된다.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의 특성이 원래 그렇다.

방송과 관련된 모든 것은 돈으로 환산되기 때문에,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시청자의 주의를 끌만한

자극적이며 감정적 기복이 심한 영상들을 내보내기 바쁘다.

 

 

인터넷이라는 놀라운 도구는

이러한 경향을 거의 폭발적으로 가속 시켰다.

인터넷은 그 특성상 즉각적이며, 익명성이 강하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즉시 표현할 수 있으며,

이럴 경우 대개는 익명성이 보장되기에

직접 마주 대하고는 감히 하지 못할 심한 말을 쏟아낸다.

더이상 사람들은 참을 줄 모르게 되었고,

점차 자신의 순간적인 감정을

즉각적으로 표출하도록 훈련된다.

 

 

현대 물질문명의 발달은

인간의 삶을 더욱 편하게 만들어 주었을는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감성을 점차 무디게 만들고 있다.

 

 

콘서트홀에 직접 가서 느끼게 되는 감동은



결코 텔레비전으로는 재생할 수 없는 것이다.

악기를 통해 전해지는

공기의 미세한 진동을 피부로 느끼는 일은,

다른 것으로는 대체할 수 없다.

그 감동과 떨림이란...

이삼십초 마다 자극적인 영상들이 요동치는

대중매체를 통해서 나오는

디지털화 된 소리를 통해서는 진정한 감동을 느끼기 어렵다.

 

 

사람들이 이런 대중매체에 지나치게 노출된 결과,

그들은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같은 감정들을

도무지 깊게 느끼지 못한다.

기뻐 좋아하다가도 언젠가 싶다 다시 슬퍼하고,

미워하는가 싶다가도 금방 잊어버린다.

상갓집에 가서도 떠들고 놀며 즐기고,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다가도

금방 연예인들의 실없는 농담 몇 마디에 기꺼워한다.

 

 

 

 

 

엄밀히 말해 이런 것들은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키는 대로 하려는,

극도의 자기 위주의 사고에 사로잡힌 행동일 뿐이다.

이런 사람들을 부르는 적절한 표현은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라

'충동적인 사람'이다.

 

 

진정한 감정과 감동은 결코 이성과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성은 감정을 더욱 깊게 만들어 주고,

감정은 이성을 더욱 윤택하게 해 준다.

 

 

당신은 어떤가.

혹시 스스로를 감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실은 충동적인 사람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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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국가의 괴물화를 막아야 할 법률가들이

오히려 괴물이 된 국가 권력의 손발이 되어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한 사례는

세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제 정신을 되찾은 후에도,

괴물의 수족이 되었던 법률가들이

우리나라처럼 떳떳하게 잘살고 있는 사례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1. 요약 。。。。。。。

 

     스스로를 이류 법학자, 이류 법조인이라고 소개하는 한 소장 법률가가 본 한국 사회의 단면이 기록된 책이다. 자신이 어떻게 법조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전적인 기록인 서장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법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저자는 법의 특성에 대해 그것이 절대로 불변하는 객관적인 진리나 사실이라기보다는 ‘리걸 마인드’로 상징되는, 매우 주관적인 기준임을 지적한다.(1장) 때문에 누가 법을 다루느냐, 어떻게 다루느냐가 매우 중요하며, 특히 법은 국가라는 괴물을 통제하는 적절한 수단으로 작용할 때 그 원래의 목적에 부합한다는 것이다.(2장)

     3장부터 5장까지는 이런 원칙에 비추어 오늘날 우리나라 법조계의 현실은 어떤지 집어가는 부분이다. ‘법률가’라는 ‘특별한 계급’이 탄생되기까지의 과정을 냉정하게 진단한 저자는(3장), 출세와 성공만을 가리키는 이러한 방향에서 벗어나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고민하고 노력할 수 있는 사람들이 좀 더 많이 나타나야 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법률적 제반 여건들에 대해 집어간다.(4장) 5장에서는 대한민국에서 검찰이라는 신분이 갖는 여러 특별한 권리와 권력들에 대해 지적하며, 적절한 개선방안에 대해 고민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6-8장은 헌법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권리인 사상의 자유, 묵비권, 평등권 등에 대해 논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이런 권리들이 보장되지 않는 이유로 법조계나 사법당국의 편의주의식 일처리 관행을 지적하며, 대한민국이 진정으로 헌법정신이 구현되는 법치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부분부터 시급히 시정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2. 감상평 。。。。。。。

 

     여전히 ‘보통 사람들’에게는 높고 어려운 대상인 법과 법원, 검찰, 그리고 여기에서 돈을 버는 법률가들에 관해 저자는 쉽게 설명하고자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 담겨 있는 가장 흥미로운 소식은, 소위 법으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그 모든 법의 상위에 있는 헌법의 내용은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너무나 쉽게 무시해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헌법 정신의 실종, 저자가 진단하는 한국 사회의 병명이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법 중 어느 것 하나 사연이 없을까 만은, 역시 사연이 많기로는 헌법이 단연 앞설 것이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자유나 평등을 말하지만, 그 당연한 가치들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내기까지는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시민들이 권력자들을 상대로 얻어낸 권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자신들만의 성을 쌓은 새로운 권력자들에게 빼앗겨버렸다. 교묘하게 시민들의 권리를 규정한 헌법 조항들을 무시하고 자기들에게 유리한 식으로 해석하면서.


     책이 출간된 지 4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권력자들의 성은 무너지지 않은 것 같다. 아니, 소위 ‘정체성이 확립된’ 정권은 이전보다 더욱 높고 두꺼운 벽을 쌓아 자신들만의 바벨탑을 쌓고 있다. 시민들은 이제 함께 모여(집회의 자유) 이야기를 하는(언론의 자유) 것도, 자신과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끼리 뭉치는 것(결사의 자유)도, 심지어 특정한 책을 읽거나(출판의 자유), 위에서 내려주는 대로 생각하지 않을 자유까지도(사상의 자유) 제한을 받고 있거나 곧 받게 될 처지에 놓였다. 재미있는 건 그렇게 민주주의의 원칙들을 짓밟으면서도 자신들을 민주주의를 지키는 수호자인 것처럼 치장한다는(어쩌면 정말로 그런 줄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점이다.

     저자는 법률가 자신들이 특권의식에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고, 자신들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 시민들의 권리를 위해 일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진단하고 있지만, 난 여기에 더 이상 정의나 공정함 같은 가치보다는 당장의 이익만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 대다수 시민들의 물질주의적 세계관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문제는 한두 명, 혹은 한 직업군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의식개선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 혹은 세계관의 전환이 필요한 때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의 기독교 세계관은 좋은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에 입각해 직업을 하나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맡은 일을 통해 다른 사람과 하나님을 섬기는 청지기의 역할을 하는 것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앞서 말한 물질주의적 세계관의 일반화로 종교나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크게 저하된 상황이기는 하지만, 물질적 이익과는 상관없는 동기로 사람을 움직이도록 하는 데 종교(나는 그 중에서도 기독교의 설명이 탁월하다고 여긴다)를 제쳐두고서는 결코 대안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사실 직접적으로 이런 종교를 의지하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조차 ‘인간 이성’이라는 새로운 신을 절대시하는 하나의 종교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사실이니까.

 

 

     우연찮게 손에 들게 된 책인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흡족함을 주는 책이었다. 법학 전공이 아니라도 꼭 한 번은 읽어봐야 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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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빵맨 2008-10-25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법과 입법(혹은 정치)는 분명한 거리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경계가 불분명해진 것을 많이 봅니다. 특히 특정한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방향으로 사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에 문제를 많이 봅니다. 이 책도 읽고 싶네요.ㅡㅠ

며칠 전에 스타벅스 컵에 써진 The Way I See 라는 시리즈(한국은 잘 모르겠는데, 미국은 스타벅스 컵에 각종 유명인사들의 자신이 보는 관점이 표현된 공간이 있습니다)에서 Stephen Elliott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Politics is about getting outside of yourself and your own problems for a little while and fully immersing yourself in the lies and deceit of others."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정치는 거짓말과 속임수가 너무 많은 곳이고, 그러한 정치가 사법에 영향을 크게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걱정스럽네요.

너무 부정적인가요? ^^

노란가방 2008-10-25 09:15   좋아요 0 | URL
비판적인 것과 부정적인 건 구분해야 되지 않나 싶어요.
비판적이면서도 희망을 볼 수 있으니까요.
문제는 비판을 금지하려는 태도가 아닐까요.
그런 사회나 집단은 얼마 가지 않아 돌처럼 굳어버려, 외부의 충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없어 그냥 깨져버리게 되겠죠.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문학세계사 / 2002년 2월
평점 :
품절


아멜리 노통이라는 이름의 작가의 자전적인 작품입니다.

‘자전적’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이 책을 어느 정도 읽고 난 뒤에야 알게 된 사실입니다.



사실 이 작품의 시작은 알 수 없는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 차 있어서,

앞부분만 본다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배경아래 쓰여진 사상서나,

극단적인 심리주의 기법을 따라가고 있는 ‘어려운’ 책인가 보다 하고 착각할 만도 하죠.

하지만 조금 더 읽어 나가면, 저자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식물인간 상태로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저자.

하지만 3년째 기적적으로 신체의 기능이 회복(‘정상으로 돌아왔다’라는 표현은 저자가 싫어할 듯 하네요...)되었고,

어린 나이의 소녀는 그동안 직접 접해보지 못했던 외부 세계에 대한

경의와 감탄을 폭발적으로 터뜨리죠.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외부 세계에 대한 경의와 놀람, 감탄, 동경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자의 시점이 세 살짜리 어린아이기 때문에

(위에 인용해 놓은 말대로 3살 짜리의 시점),

그 사고 또한 어린이의 그것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같이 귀여운 생각들과, 적절한 오해,

그리고 제법 스스로는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모습 등은

작품의 흥미도를 높이는 역할을 하죠.



거기에 저자가 자라면서 느끼고, 생각해 왔

인생,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인간 등에 대한 여러 가지 깊은 사고들이

서로 어울려서 작품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는듯 합니다.



오랜만에 읽은 수필식의 책이라서 그런지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느낌이었습니다.

(제법 잘 쓰여진 책이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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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빵맨 2008-10-24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읽고 싶은 책이네요.
저는 미국에 살아서 이런 책을 구입하기가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네요. ㅡㅠ

노란가방 2008-10-25 09:09   좋아요 0 | URL
미국에 사시는 군요- ^^
미국은 공공도서관이 많이 발달해 있지 않나요?
알라딘은 해외로 배송 안해주려나...;;

반갑습니다. ^^
 
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 - 보편주의적 복지국가를 향한 새로운 좌파 선언의 전략
사민+복지 기획위원회 엮음 / 산책자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자본주의적 경쟁 원칙만이 지배하게 된다면 사회와 개인은 피폐해지고

‘자유’와 ‘평등’은 껍데기만 남게 된다.

반대로 연대의 공간이 확장될수록

이웃에 대한 연민과 우정, 인간적 여유와 정서적 고양과 같은

소중한 인격적 가치들이 만개할 수 있다.

 

 

1. 요약 。。。。。。。

 

     ‘좌파의 재정립’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한국의 좌파 세력에 대한 잘못되거나 편향된 이미지를 재고하고, 좀 더 ‘실현가능한’ 좌파적 정책대안들을 제시하기 위해 쓴 글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서언 격인 제 1장은 새로운 좌파의 길로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념을 제시하고, 그것은 기존의 시장이나 자유라는 소중한 가치들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으면서 평등과 복지 같은 소위 ‘좌파적’ 가치들을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임을 밝힌다.

     두 개의 묶음으로 구성된 이 책의 첫 번째 부분은 ‘한국적 사회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장으로, 여운형, 조봉암까지 올라갔다가 80년대의 민주화 투쟁과 2008년의 민노당 분당사태까지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을 살피며 각각의 사건들이 갖는 진보정치세력에의 함의들에 대해 논한다.

     두 번째 부분은 사회민주주의나 그와 유사한 정책들을 택하고 있는 세계 여러 나라들의 예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우리나라에서의 사회민주주의적 정책들의 실현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내용을 제시한다.


 


2. 감상평 。。。。。。。

 

     한국만큼 좌파와 우파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가 판을 치는 나라도 많지 않을 것이다.(굳이 꼽자면 미국 정도?) 책에도 언급된 것처럼 자신들이 퍽이나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져있는 진보적 지식인들은 ‘파쇼’니 ‘국가주의자’니 하는 식의 선동적 어구들을 남발하고, 우파 인사들도 별로 다르지 않아 ‘평등’이니 ‘공공’이니 하는 말만 써도 금새 ‘빨갱이’ 운운하는 형국이니 말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진심이 담긴 토론 따위는 애초부터 찾아보기 어렵고, 어느새 그저 말을 위한 토론, 말 위에 말을 쌓는 식의 난잡하고 번잡스러움만이 가득 차게 되었다. 결국 정치세력의 근본적인 목표가 단지 정권을 잡고 한 목씩 챙기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 데 있다는 걸 인식한다면, 좌나 우나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고, 때로는 양보도 하며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는 게 전체를 위해 이롭다는 데 당연히 결론이 모아질 텐데,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의 목표는 꼭 그렇지는 않나보다.

     이 책은 ‘실현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사회민주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시장경제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복지나 평등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추진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저자들이 생각하는 사민주의의 가장 큰 장점인데, 참 실용적인 발상이 아닌가.(요새 ‘실용’ 운운하며 실은 개인적 이득에 목을 매달고 있는 듯한 어떤 인사들보다 훨씬 더)

 

     ‘이 땅의 진보 세력의 실천에는 이념 정치는 존재할지 몰라도 정책 정치는 존재한 적이 없다(하지만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책 속의 한 지적이 기억에 남는다. 적어도 사민주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확실히 실제적인 대안을 가지고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민주의의 기본 가치와 목표에 어느 정도 공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주장에 대해 약간의 우려가 되는 부분도 있다. 바로 이 운동의 에너지나 역동성의 근원이 ‘인류의 능력’이라는 데 있다.

     쉽게 말해 인류의 능력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이나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능력’은 모든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만약 그랬다면 진작에 온 세상이 사민주의국가로 나아갔으리라), ‘교육받은’, 혹은 ‘훈련된’ 사람들에게 기대될 수 있는 것이다. 체 게바라는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며 함께 투쟁에 참여하기 원했지만, 결국 그의 이 ‘소박한(?)’ 기대는 실패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난 저자들처럼 북유럽 복지선진국들의 자세한 상황이나 현실에 대한 조예가 거의 없지만, 그 나라들은 정말로 책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처럼 유토피아 혹은 천국의 모습일까. 인간성의 호의에 기댄 사회민주주의는 과연 만능일까? 사상교육(혹은 개조)으로 가능한 무엇이나 인간들이 만드는 낙원(역사적으로 ‘자기 자신만을 위한’ 소수의 ‘이기적 낙원’은 있었다)이라는 개념이라면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여기에 ‘모든 이념은 상대적으로만 진리’라는 포스트모던적 명제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부분도 자칫 ‘인류의 공통적 가치관’, ‘도덕’, ‘윤리’, ‘선함’과 같은 소중한 부분들을 배제시키는 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부분에서도 우려가 든다. 모든 이념이 상대적으로만 진리라면 우리는 왜 다른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어야(혹은 다른 이들의 어려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전부(全部)가 아니면 전무(全無)라는 말이 아니다. 세상은 항상 그 가운데 어딘가에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 중간의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의 안녕과 평안을 위해 실현성이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만은 인정할 필요가 있다. ‘좌파적 대안’이라는 말 자체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어리석음만 아니라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제안이다. 사민주의자들이 생각의 유연성을 잃고 교조주의로 변하지 않는다면 언젠간 우리나라에서도 이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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