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짐을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더 튼튼한 허리를 달라고 기도하라.

- 어느 형제

 
Don't pray for lighter burdens,

but for stronger backs.

- An unknown 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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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한문으로 쓰면 '誤解'라고 쓴다.

그릇될 '오'에, 풀 '해'를 사용한다.

말하자면 오해란 '잘못 풀어냈다'는 뜻이다.







무엇을 잘못 풀어낸 것일까?

아마도 오해를 하게 된 대상이 지닌

본래의 사실이나 의미, 의도를 잘못 풀어낸 것이 아닐까 싶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많은 오해를 하게 된다.

어떤 질병에 대해 오해를 해서

병에 걸린 사람들을 두 배, 세 배 힘들게 만들기도 하고,

특정한 사건의 전후관계에 대한 오해를 해서

엉뚱한 피해자를 만들기도 한다.

에이즈나 한센병과 같은 질병에 대한 오해가

전자의 예가 될 것이고,

실미도라는 영화로 인해 졸지에 범죄자들로 몰린

- 하지만 사실은 국가 권력에 의해 강제 납치된 -

젊은이들이 후자의 예가 될 것이다.






사람에 대한 오해도 매우 자주 일어난다.

아니, 사람들이 가장 자주 하는 오해의 종류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사람에 대한 오해'는,

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정상적으로 진행되던 관계라고 하더라도,

한 순간의 오해로 말미암아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의처증, 의붓증으로 불리는 배우자에 대한 의심은

오해가 때로는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깨닫게 만드는 예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은 오해라는 것을 할까?

오해의 원인을 안다면,

그것이 가져오는 해악을 조금이라도 감소시킬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오해란......

자신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물어보지도 않고

완전하고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그런 오만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오해란, 실제는 그렇지 않은데 내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왜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그렇다고 믿어버리는 것일까?

그건 충분하고 정확한 정보를 구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전에 그런 정보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정확한 정보, 불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판단을 내리면서,

자신의 판단이 정확할 것으로 강하게 믿어버리는 태도.

그것이 오해이다.

이 얼마나 오만한 태도인가.







물론 어떤 오해는 얻을 수 있는 모든 자료를 가지고 내렸을 수도 있다.

한 개인이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이란 대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오해는 오만함의 범주에서 예외로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오해는 그런 오만함에 다름이 아니다.






그런 오만함으로 시작했기에

오해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나오기 쉽다.

그의 해명(대개는 변명으로 받아들인다)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을 되풀이하며 상대에게 받아들일것을 요구한다.





오해에 빠진 대부분의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은,

시간이 갈 수록 오해에 대한 신념이 점점 굳어져간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단지 '느낌'의 영역에 속해있었던 것에 불과했다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사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만이 옳은 것이 되어버린다.





왜 그렇게 될까?

사람의 말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말은 사실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일단 한 사람이 어떤 말을 해 버리고 나면,

그 말로 인해 그 사람의 생각, 행동까지 달라지게 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한 말에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맞춰가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일종의 자기암시라고나 할까.






그걸 자기암시라고 부르던, 말의 힘이라고 부르던 간에,

그렇기 때문에 한 번 오해에 빠진 사람들은

스스로 그 오해에서 빠져나오기가 매우 힘들다.

때문에 오해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한 번 빠져버리고 나면,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오해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간단한 얘기지만

오해를 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충분한 커뮤니케이션이다.

서로간의 충분한 의사소통이야말로 오해를 피해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사실 새로운 것도 없는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현실세계에서는

이 방법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

상대에 대한 선입관이 방해를 하고,

때로는 자존심이 이 방법을 취하는 것을 반대하기도 한다.

역시 '각각 자기를 남보다 낫게 여기기' 때문이다.







대화를 하는 대개의 사람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 보다는,

그 얘기에 내가 어떻게 대답을 해줄까를

더 공들여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건 내가 생각해 낸 말이 아니라 『인간성에 관한 풍자 511』이라는 책에 나온 말이다.)

당연히 상대방의 이야기를 정확히 듣지 못하고,

충분한 의사소통 따위는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자기 중심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선입관도, 

자신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도 갖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한 번 해 보는 건 어떨까.

그냥 잘 들어주는 것이다.

상대는 나의 조언에서 해답을 찾기 보다는,

자신의 말에 관심을 갖고 잘 들어주는 내 모습에서 용기를 얻고

돌아가서 스스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꺼라고 믿어보는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들어보자.





결국 오해란,

내가 얼마나 상대방의 입장에 서고자 노력했느냐에 따라

빠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 아닐까.

'나'를 내려놓고, '너'가 되어 보는 것.

그리고 '나'의 입장에서 내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상대의 입장에서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상대의 생각까지도 내가 대신 판단하려는 오만함을 놓을 때,

오해의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런거라면.... 나도 아직 먼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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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꿈'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밝고 환한 빛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아니면 어둡고 공허한 느낌이 드는가?





사실 '꿈'이라는 단어만큼

 

상반된 이미지를 가진 어휘도 없는 것 같다.





흔히들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때의 꿈은 '비전', '희망' 등과도

 

유사한 이미지를 가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긍정적인 의미의 '꿈'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너무나 기쁘고 좋은 일이 있을 때,

'꿈만 같다'는 표현을 쓴다.

그 정도로 꿈이라는 어휘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갖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런 '꿈'은 사람에게 힘을 준다.

어쩌면, 비록 현재는 어렵고 힘들지만

 

언젠가는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꿈'이 있기에,

이 땅에 사는 수천만의 '보통, 혹은 그 이하의 사람들'이

모두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길을 택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꿈이라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마취제와 비슷해서

현재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러한 고통을 잊어버릴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다.







수 년 동안 좁은 방 안에 틀어밖혀서

 

오로지 책과만 씨름하는 고시생들을 보라.

그들이 제대로 여가생활을 즐기지도 않으면서,

오직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고통스럽고 힘든 나날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은,

딱 한 가지,

고시에 합격한 뒤의 자신의 모습을 계속 꿈꾸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다고 그들이 모두 합격한다는 보장은 없다.

말 그대로 '꿈으로 지탱되는 삶'인 것이다.






또 다른 예는 복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주일의 기쁨, 일분의 실망'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복권이란 사람들의 기대심리를 절묘하게 이용해서

 

영리를 얻는 고도의 심리적인 산업이다.
(순간.. 복권을 주제로 한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복권을 사는 순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복권에 당첨될 경우를 꿈꾼다.

그리고는 복권이 추첨되는 하루를 일주일 내내 기다린다.

한 주 내내 기대감을 갖고 살도록 만든다는 것,

세상의 어떤 약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꿈의 힘이다.







역사상 많은 '현명한 지도자'들은 바로 이런 점을 이용해 왔다.

오늘보다 내일이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환상을

 

백성들에게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믿도록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추종자, 혹은 피지배자들로 하여금

 

꿈을 품게 할 수 있는 지도자라면,

그에 대한 지지는 결코 철회되지 않을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도 이러한 양상은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는데,

물론 과연 통치자들이 약속한 그러한 꿈들이

 

실제로 가능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비록 현재는 어렵고 힘들지만,

언젠가는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

미래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사람들은 그런 것으로 하루하루의 아픔과 시름을 잊는다.

사람들에게 꿈이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꿈'이라는 어휘에는 정반대의 의미도 있다.

'일장춘몽', '꿈에 불과한 이야기' 등의 사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꿈이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꿈은 결국 언젠가는 깨기 마련이다.

그래서 꿈에는

 

'안타까움' '잡을 수 없는 것', '환상'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하나같이 우울한 이미지들이다.






생각해보면,

꿈이 가지고 있는 좋은 이미지들조차,

이 어두운 이미지들을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꿈이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그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더 큰 공허함,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꿈 속에서 너무나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났던 경험이 있는가?

그 순간만큼은 너무나 행복할테지만,

그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당신은 너무나 불행해질 것이다.

더구나 그 사람을 실제로는 만날 수 없을 경우 이 불행은 배가 된다.








꿈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던 사람에게

그 꿈이 깨졌다고,

이제 그 꿈에서 깰 때가 되었다는 말을 듣는 것만큼

 

충격은 없을 것이다.

마치 큰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에서 마취가 깰 때처럼 말이다.

정신적 마취제인 꿈이 사라져버렸을 때,

그의 영혼이 느끼게 될 아픔이란......








이처럼 꿈이라는 어휘에는 상반되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그 결국은 대개 꿈이 깨어지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가장 좋은 경우는,

꿈에서 깨지 않고 그 꿈이 실현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법.

그렇다면 세상에 살면서 꿈이란 것은

 

절대 가지지 않는 것이 안전할수도 있지만,

그건 너무 가혹한 듯 싶기도 하고..








이렇게 해 보는 것은 어떨까?

우선 꿈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다.

꿈을 가진 사람은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그 사람의 하루하루에 활기를 제공한다.

앞으로 강력하게 달려갈 수 있는 힘도, 꿈에서 얻을 수 있다.

꿈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에 비해서,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훨씬 더 풍성하게 생활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본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그 꿈에서 깨어야만 할 상황이 온다면,

정말 그런 상황이 온다면.....






꿈이라는 것의 속성에서

 

어느정도 위안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어떤 꿈이든 깨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꿈이 비현실적으로 크고 멋진 꿈이라면

깨어날 확률은 더 높아질 것이다.






또, 꿈이란 깨어나면서부터 잊혀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행복한 꿈이라도,

아침이 되는 순간 점점 잊혀지고 만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꿈에서 깨는 충격도

 

서서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꿈을 꾸는 것이 인간.

행복한 꿈에서 깨어났다고 너무 슬퍼하지는 말자.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테니 말이다.







꿈이란 어차피 깨도록 되어있다.

그리고 차차 잊혀질 것이다.

꿈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이제 조금 용기가 생기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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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인터넷 설치가 완료!!

덕분에 한 달에 3만원씩 내야한다..;;

 

근데.. 새로 들어온 아파트에

불은 두 개가 안 들어오고..;;

화장실에 물은 계속 똑똑똑 떨어지고...;;

청소를 제대로 안해서 묵은 때가 잔뜩....;;;

날 잡아서 대대적으로 손을 봐야할 지..

앞으로 3년은 여기서 살아야 할텐데 말이지.

 
 

오늘은 사단 신고를 했다.

참모장님부터 사단장님, 인사처장님, 부사단장님 두 분..

연대로 와서는

어제 인사했던 인사과장님, 작전과장님 이외에

오늘은 연대 직할대대장 중 몇 명과

주임원사님을 만나 인사를 했다.

만날 때마다 차를 한 잔씩.....;;

차 마시는 게 일이다.

 


내일은 드디어 깐깐하기로 유명한

연대장님 앞에서 신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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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신학. 영성이 하나 된 기독교 상담
마크 맥민 지음, 채규만 옮김 / 두란노 / 2001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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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상담은 우리의 목적 자체가 복합적이기 때문에 여타의 상담 형태보다 더 복잡하다.

행동주의자들이 증상의 제거에,

정신분석학자들이 자아강도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반면,

기독교 상담자들은 정신 건강뿐만 아니라 영적인 성장에 관심을 가진다.

 

 

 

1. 줄거리 。。。。。。。 

 

     저자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 의식은 본문에서 뽑은 다음 구절에 잘 드러나 있다.

 

     “병행하는 능력이 없는 상담자들은 문제의 일부분만을 다루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만약 상담자가 심리학적 세계를 이해하지만, 반면에 신학적이고 영적인 것을 무시한다면, 하나님을 향한 수잔의 깊은 갈망들을 상담과정에서 결코 이해되지 못하고 무가치하게 될 것이다. 만약 상담자가 영적 생활만 강조하고 심리학과 신학을 간과한다면, 그는 아마 주권적인 하나님을 겸손하게 사랑하는 것에서 오는 진정한 자기이해를 회피하고, 내적인 아이, 내적 안내자 또는 내적 빛을 필사적으로 추구하여 쓸데없는 내적 탐구로 이끌려지게 될 것이다. 만약 상담자가 신학만을 강조한다면, 그는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무기력감을 느끼는 반면,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305)”
 

     즉, 저자가 생각하기에 좋은 ‘기독교 상담’이란 신리학 이론에 근거한 방법론들을 건전한 신학적 틀 안에서 사용하되, 피상적인 행동이나 감정, 확신만이 아닌 깊은 영적 차원의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는 상담이다.

     저자는 이런 목표 아래 상담에서 기도나 성경과 같은 도구들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그리고 그 과정이 실제 상담에서 일으킬 수 있는 기술적 ․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도), 또 용서나 죄, 구속과 같은 개념들이 어떻게 상담에 적용될 수 있는지 여러 측면에서 전문가적인 관점으로 살피고 있다.

 


 


2. 감상평 。。。。。。。 

 

     꽤 괜찮은 책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이제까지 내가 읽은 상담, 혹은 심리학 관련 책 중에서(그래봤자 몇 권 안 되기는 하지만) 가장 나은 책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책의 저자와 같은 고민을 한다. 그들은 상담기법들이 가져다 주는 효과들을 필요로 하면서도 동시에 그 이론들의 기반이 되는, 인간이 세상의 전부인 양 생각하는(그래서 인간 내부에서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를 찾으려는) 세계관을 경계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신학적 질문과 대답으로만 환원시키려는 태도도 원하지 않는다. 물론 신학이 필연적으로 인간 실존과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기는 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구원의 길과 방법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적용에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히 사람들은 이 둘의 조화를 떠올리지만, 이런 시도들은 신학 어휘들을 사용한 심리학책이나 심리학 어휘들을 사용한 신학책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책은 이 어려운 작업을 어느 정도 훌륭히 소화해 냈다!!

     하지만 이 책의 무엇보다 독특하면서도 강한 점은 이런 이론적, 방법론적인 면에 영성이라는 깊은 부분까지 조화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흔히 ‘영성’하면 신비주의적인 무엇을 떠올리기 쉽지만, 저자는 가깝게는 달라스 윌라드나 리차드 포스터를, 멀게는 토마스 아 켐피스나 아퀴나스 같은 인물들에게로 전해지는 건전한 영성추구의 길을 따라가고 있어 더욱 만족스럽게 느껴진다.

     공동 저자로 참여한 채규만 교수의 작업으로 이 책이 단지 서양에만 해당되는 상황들만이 아니라 한국적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는 책이 된 것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물론 이 책 한 권이 기독교 상담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기독교 상담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첫 번째로 권해주고 싶은 책이라고는 분명히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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