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 신곡 강의 - 서양 고전 읽기의 典範
이마미치 도모노부 지음, 이영미 옮김 / 안티쿠스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단테는 신의 노래를 그대로 번역한 호메로스가 아니라

베르길리우스의 입장, 즉 스스로 미토스를 창조하면서도

뮤즈의 여신에 의지해 노래한 위대한 시인을 모범으로 삼는다.

 

 


1. 줄거리 。。。。。。。

 

     단테가 쓴 ‘신곡’에 빠져 수 십 년 동안 독자적인 연구를 해 온 한 일본인 교수가 쓴 강의록이다.(정확히는 그가 한 강의를 녹화해 책으로 엮은 것이다.)

     서론 격에 해당하는 세 개의 강의에서, 저자는 단테를 이해하기 위한 세 개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 -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그리스도교 -에 대해 흥미로운 설명을 제시한다. 저자에 따르면 단테는 호메로스의 전통, 즉 신들만이 알려줄 수 있는 장엄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베르길리우스적인 면모, 즉 그 이야기를 ‘내가’ 말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함께 가지고 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적인 세계관이 더해지면서 ‘신곡’이라는 걸작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열 두 개의 강의는 ‘신곡’의 구조를 따라 각각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을 설명하는 데 네 시간씩 할애되어 있다. 저자는 각각의 이야기 중 특별히 인상 깊은 부분들을 뽑아 주석을 달고, 그 내용의 현대적 적용을 하는 방식으로 책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2. 감상평 。。。。。。。

 

     어떤 한 문학작품에 빠져 평생을 두고 읽으며 연구를 하는 일은 참 멋진 삶의 방식이다. 더구나 그 작품이 ‘신곡’ 같은 고전이라면 삶의 품격까지 높여주지 않는가.

 

     저자가 신곡을 읽어 나가는 방식은 독특하다. 저자는 본문을 읽어 나가다가 특별히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명구들을 발견하면 우선 이탈리아어로 본문을 읽어본다. 이어 일본어 번역들을 몇 가지 살핀 후, 자신이 생각하는 본문의 의미를 덧붙인다. 여기에 그 내용이 현대인들에게 어떤 가능성과 의미를 주는지에 대한 저자의 생각까지 함께 실리는데, 마치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한 편의 설교문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아마도 저자의 종교가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긍정적으로 보면 고전의 현대적 부활을 위한 재미있는 시도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지적할 만한 사항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우선 지나치게 주관적 기준으로 자신의 마음에 드는 구절들만을 위주로 자의적 해석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지옥과 연옥의 의미를 희망의 유무로 단정 지어 몇 페이지에 걸쳐 강조하는 부분이 특히 그렇다.) 단지 ‘문학작품’일 뿐인 신곡을 종교적 경전의 수준으로까지 높이는 듯(이것도 저자의 종교적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한데, 결과적으로는 좀 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독학으로 공부한 사람은 자유로운 면이 있다. 작게는 책을 읽는 순서에서부터, 학문적인 추측이나 추론, 나아가 결론에까지 자유스러운 데가 있다. 그래서 재미가 있고, 매력이 있다.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가 그 예인데, 이 책은 단테를 가지고 시오노 여사와 유사한 작업을 해봤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이야기’로서 글을 풀어내는 면은 좀 부족해 보이지만 말이다.(재미는 좀 덜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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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 1주일 동안의 유격훈련을 마치고,
 
오늘부터 내일까지 1박 2일간 첫 외박을 나왔습니다.

오랫만에 노트북 자판을 누르고 있으려니

손이 굳어선지 잘 안 되네요.. ㅎㅎ

 

 

암튼 이제 유격훈련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건 다 끝났으니까..

다음주부터 시작될 1주일간의 병체험훈련을 빼고는

남은 5주 동안은 매일매일 강의만 듣게 될 듯 하네요.

 
 

내일 들어갈 때는 책이나 두 권 싸들고 가야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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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0일 군대 갑니다.
 
그래도 오늘 투표는 하고 들어오라는군요.. ㅋ
 
 
11주 교육 후면 본격적으로 블로그 활동을 재개할 수 있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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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4-09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란가방님, 잘 다녀오세요
이 덧글 보실 수 있으려나....

노란가방 2008-05-17 14:40   좋아요 0 | URL
좀 늦게 확인했습니다.
오늘은 첫 번째 외박 나온 날이에요~
고맙습니다. ^^
 

■ 연쇄살인범에 대한 관심들

     최근, 부녀자 십 수 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아니, 비단 이런 일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늘에 이르러 새롭게 발생한 일은 아니니, ‘최근’이라는 부사구를 붙이는 것은 과거에 대한 지나친 미화일지도 모르겠다. 좀처럼 잡히지 않고 끔직한 살인을 계속하는 연쇄살인범 - 사람들은 종종 이런 사람들에게 인간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마(魔)’ 자를 붙여 ‘연쇄살인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라는 소재는, 대중들에게 두려움과 동시에 흥미를 불러 일으켰고, 각종 소설과 영화로 새롭게 태어나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나라에도 화성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살인의 추억’ 같은 영화는 끊이지 않고 제작되었으니까.

     그런데 이번 살인범에 관한 언론의 보도 내용에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다. ‘사이코패스’라는 단어였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 그것이 사이코패스다. 언론 특유의 호들갑스러움은 ‘전문가님’을 모셔다가 해설을 들려주며,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명했고, 스스로를 ‘교양프로그램’이라고 소개하는 KBS의 한 쇼프로그램에서는 ‘사이코 패스가 매우 지능적이며 계획적인 성격을 가진 잠재적 살인범’이라고 이해할 만한 메시지를 전해주기까지 했다.

 


 

■ 감정의 부재. 사이코패스

     ‘사이코패스’라는 생소한 정신의학용어를 일반인들에게 인식시켜준 것은, 지난해 여름 개봉했던 영화 ‘검은 집’이 처음이었다. 동명의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에서 사이코패스는 울고 있는 사람과 웃고 있는 사람을 구별하지 못하는, 즉 감정을 인식하지 못하는, 그래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워 사람들을 죽이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사이코패스가 단순히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라, 통증까지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 약간 어이없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영화의 교육적 기능은 사이코패스에 관한 이러한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새겨 넣었다.

     언론의 보도든, 영화의 내용이든 사이코패스는 괴물처럼 묘사되고 있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좀 순화시켜 표현하더라도 그들은 ‘비정상적인’, 혹은 ‘이상한’ 사람들이다. 다른 모든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단지 감정의 영역에서의 문제만으로도 말이다. 감정의 부재. 사람들은 분명히 그것을 이상한 무엇으로 받아들인다.


■ 감정을 제거하려는 노력들

     감정이나 도덕, (판단기준으로서의) 윤리 같은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전부 사회, 문화적인 산물로 봐야 한다는 두 부류의 극단적인 사람들이 있다. 둘 다 극단적인 유물론적 관점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유물론자들인데, 하나는 사회주의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주의자(과학적으로 설명되는 것만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스스로를 호르몬의 우연한 대량분비 때문에 결혼하고, ‘밈’이라는 ‘문화적 유전자’ - 그 실체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의 숙주일 뿐이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는)들이다.

     물론 그 사람들이 항상 감정이나 도덕, 윤리를 적대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정적인 상황이 오면 그들은 항상 자신들의 사상이나 과학적 증명이라는 요소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경향을 모든 사람에게 퍼뜨리기 위해 ‘학교’라는 좋은 매체를 이용한다. 과거 소수의 특권층들만 다닐 수 있었던 학교라는 기관이 보통교육과 의무교육화 되면서, 그들의 학교를 중심으로 한 전략은 더욱 효과적인 것이 되었다. 사실 근대 이후의 교육이란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주도해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래서 나타난 결과는 뭘까? 오늘날 어떤 사람이 윤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따는 문제는, 더 이상 그 사람이 얼마나 윤리적으로 사느냐 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저 대상을 얼마나 ‘이념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잘 분석하고, 설명할 수 있느냐에 해당하는, 전적으로 기술적인 문제일 뿐이다. 과학과 윤리를 떼어 놓으려는 태도는 지극히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로 여겨졌고, 자연유산(自然遺産)은 ‘품질관리’로 승화된다.(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449쪽) 그들의 견해를 일관되게 끝까지 밀고 나갔을 때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인간의 도구화’, ‘인간의 기계화’, ‘인간의 물질화’라는 자기 파괴적인 내용이다. 범죄율은 점점 더 높아가고, 그 방법은 좀 더 끔찍해지고 있으며, 피해의 범위는 훨씬 더 광범위해졌다.

 






■ 감정의 제거에 대한 우려

 

     감정이 완전히 제거된 미래 사회를 우려섞인 눈으로 그린 영화로 ‘이퀼리브리엄’이 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영화 속 도구들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리 멀지 않은 미래로, 미래 사회의 통치자는 감정이야말로 모든 분쟁과 문제의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모든 사람들에게서 감정을 제거하려고 한다. 예술과 종교는 금지되고, 모든 사람은 비슷한 디자인과 비슷한 색상의 옷을 입고, 비슷한 음식을 먹으며, 표준화된 주거환경에서 생활한다. 앞서 언급했던 두 부류의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모습일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통일성(제복)과 과학지상주의자들이 꿈꾸는 첨단기술(감정을 제거하는 약물)의 절묘한 결합이다. 거기에서는 꿈을 꾸는 것이 허락되지 않으며, 클래식 음악을 듣고, 애완용 강아지를 키운다는 것만으로도 강제구속의 사유가 된다.

     후설은 서양에서 갈릴레오로 시작된 과학주의가 ‘자연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세계는 진정한 세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졌다고 지적한다. 쉽게 말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버린다는 것이다. 과학주의는 과학과는 구분된다. 과학이 학문적인 차원이라면 과학주의는 공산주의와 같은 신념에 관한 문제이다. 따라서 ‘과학주의’는 가치중립적인 무엇이 아니다. 이미 여기에는 한 가지 판단, 즉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것만이 의미 있는 일이고 중요한 것’이라는 판단이 개입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쉽게 그 사실을 무시한다.

 

     문제는 학교에서 이들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현대의 많은 교육이론이 이런 과학주의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이다. 과학으로 위장된 유물론적 과학주의가 절대적 진리인 것처럼 가르쳐지고 있고, 그 결과는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충분히 끔찍하다. 학교에서는 감성을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윤리와 도덕을 무시하는 법을 (간접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느냐 와는 상관없이, 누가 더 많이 암기하고, 누가 더 문제를 잘 풀어내며, 누가 더 학자들을 잘 인용하는지에 따라 성적을 받고 상을 탈 수 있으니 말이다. 경쟁회사의 상품을 ‘적당히’ 베끼는 것은 (매출을 늘릴 수만 있다면) 장려될만한 일이고, 사주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환자들에게 의료보험금을 지급하기를 거절하는 민간보험사 소속 의사들의 이야기는 이제 영화로 만들어 고발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회사에서 쫓겨나고, 경쟁에서 탈락하고,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난다. 이미 우리 사회의 어떤 부분은 ‘이퀼리브리엄’에서 묘사된 모습으로 진행되어 가고 있는지 모른다. 유물론에 기초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 오늘날의 학교는, 말하자면 사이코패스를 키우는 기관으로 전락해버렸다.(이건 명백히 비유적인 표현이다)

 





■ 사이코패스와 교육

     이미 반세기도 전에 이러한 우려를 표명한 저자가 있었다. 영문학자이자 소설가, 평론가로도 활동했던 C. S. 루이스이다. 그는 『인간 폐지』(홍성사 역간)에서 영국의 교육가들이 그들의 이론을 세우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증거주의에 입각한 교육으로 대문호의 작품들을 값싼 감상주의로 치부하는 현대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루이스는 말한다.

     “현대의 교육자들이 해야 할 임무는 정글의 나무를 베는 게 아니라 사막에 물을 대는 것입니다. 잘못된 감정에 대비하는 최선의 방책은 올바른 감정을 심어 주는 것입니다. 학생들의 감수성을 굶겨 죽이고 나면, 그들은 온갖 선전에 더 쉽게 희생될 뿐입니다.”

     옛 교육은 학생들에게 무엇인가를 전수하는 반면, 새 교육은 ‘조건화’할 뿐이라, 어미 새가 새끼 새를 기르듯 가르치지 못하고, 가금업자가 새끼 새를 다루듯 하고 있다는 그의 말은 곱씹어 볼만한 말이다.

 

 

■ 과학주의와 교육의 적절한 관계

     ‘보통교육’은 ‘도서관’과 함께 인류의 지적 성장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위대한 발명품이다. 하지만 이 교육이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키우는 데 목적을 두지 않고 있다면, 당장은 효율과 발전을 가져오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자기 다리를 잘라 먹으며 배고픔을 채우는 문어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최소한 ‘과학주의’가 가치중립적이고 보편타당한 무엇인 것처럼 호도하는 일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삶에 관계된 상당부분을 정당하게 설명해주지 못하는 제한된 세계관이다. 그것은 우리가 김홍도의 풍속화를 보며 느끼는 감정을 설명하지 못하고, 꽃을 보며 따뜻해지는 마음을 해설하지 못하며,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애틋함을 분석할 수 없다.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도와주어야 할 필요성은 과학주의의 하위범주에 속하는 모든 종류의 진화론 - 생물학에 근거한 진화론이나 사회진화론 및 정치, 경제 제 분야에 적용되는 모든 진화론의 계열들 -에서 이유를 찾아낼 수 없다. 오히려 강간당하는 여성들을 보면서 강간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이유는 그것이 무엇인가 진화론적 효용성이 있다는 사이코패스적인 주장을 종종 해 우리를 당황케 한다.(마치 자연적으로 유산이 되는 이유를 ‘품질관리’로 설명하는 것처럼)

     과학의 모든 유익을 버리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영혼과 가슴을 제거해 놓고 동료 인간을 사랑하라고 주문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과학주의는 어린이와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비열한 범죄들과 사회의 연대의식을 약화시키는 사회지도층들의 극단적 이기주의를 비난하고 경계할 수 있는 기관을 우리에게서 거세시켜버렸다. 과학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우리의 교육이 인간을 인간답게 길러내는 원래의 목표를 회복하는 것이 거세된 기관을 복구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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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로빈 쿡 지음, 박종윤 옮김 / 열림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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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의사는 환자를 잃을 때 제일 힘든 것 같아요.”

리오나가 말했다.

“때로는 살아남은 사람을 다루는 게 더 힘들지.”

 

 

1. 줄거리 。。。。。。。

 

     주인공 크레이그는 얼마 전부터 ‘전담진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소수의 환자에게 미리 돈을 받고, 환자가 필요한 시간에 환자가 필요한 장소에서 충분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전담진료’의 핵심. 대신 일반적인 진료보다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런 크레이그에게는 소위 ‘문제 환자’들이 있다. ‘건강염려증’이라는 병 아닌 병을 앓고 있는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의사를 불러내지만, 막상 가보면 별 일이 아닌 경우가 다반사. 그래도 의사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 있는 크레이그는 새벽이든, 한 밤중이든 달려나간다.

     어느 날 밤, ‘문제 환자’ 중 한 사람이었던 페이션스 스탠호프라는 한 여 환자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죽게 되면서 일은 시작된다. 얼마 후 그녀의 남편으로부터 의료과실 혐의로 고소를 당하게 된 것이다. 완벽주의적 성격을 가진 크레이그에게 고소는 그 자체로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고, 여기에 그의 복잡한 가정문제가 더해지면서 사태는 점점 꼬여가기 시작한다.

 

 

2. 감상평 。。。。。。。

 

     좋게 말하자면 현대의 기계화되고 비인간적인 의료산업을 탈피해 충분한 시간을 들여 깊이 있는 진료를 할 수 있게 하는 ‘전담진료’. 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좀 더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좀 더 좋은 의료서비스를 해 준다는 또 하나의 비인간적인 제도이다. 소설에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의료서비스를 제공받아야 한다는 ‘의료정의’의 문제와, 지나치게 많은 환자들로 인해 환자를 대충 진료하는 것도 옳지 않다는 ‘의료의 질’ 문제가 함께 제기되며 독자의 생각을 자극한다. 꽤나 수준 있는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소설이다.

     독자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크레이그의 처남이자 법의관인 잭과 함께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게 되는데, 로빈 쿡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이러한 설정은 극에 스릴을 더해주는 효과가 있다. 이번 작품에서도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임에도 독자는 숨 가쁘게 사건을 추적해 가느라 지루함도 잊은 채 달려가게 된다. 탁월한 작가 중 한 명이다.

     인물들의 성격도 선명하고, 특히 잭의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음모론 추리는 극의 재미를 더해준다. 게다가 소설 막판에 등장하는 엄청난 반전!!! 로빈 쿡 의학 스릴러는 이런 맛으로 읽는다고 할 수 있다. 들고 다니면 심심하지 않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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