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땐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었다.

내가 줄 수 있는 것도 없었고,

나에게 있는 거라곤,

단지 가능성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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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돌리드 논쟁
징 클로드 카이에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샘터사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몇 세기 동안 유례가 없었던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고도로 조직된 두 제국이 서로에 대한 풍문조차

 듣지 못해 서로 생판 모르는 채로 만난 것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무수한 사람들이 지구에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에 양쪽 모두 경악했다.

 

 

1. 줄거리 。。。。。。。

 

     콜럼부스 이래로 유럽인들의 남아메리카 이주가 시작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하고 있었던 에스파냐의 칼 5세는 즉각 교황으로부터 새로운 대륙에 대한 에스파냐의 권리를 인정받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금과 특산품으로 돈을 벌기 위해 식민지를 설치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비정상적인 우월의식을 가지고 건너간 에스파냐인들은 원주민들을 그 땅의 원래 주민이었던 인디오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하거나 강탈하고, 노예화했다. 한편에서는 이런 일들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또 다른 한 편에서는 현재의 상황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벌어진 논쟁. 시대가 시대인지라 논쟁은 신학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교황청은 바야돌리드에서 인디오들이 과연 유럽인과 같은 인간으로 보아야 하는가가 주제였다. 인디오들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라스카사스 수사와 그에 반대하는 철학자 세풀베다 교수는 추기경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교황청의 공식입장으로 채택하도록 하기 위해 토론을 시작한다.

     5일간 이어지는 토론의 결론은 무엇일지 궁금하다면 책을 손에 드시길..


 

 

2. 감상평 。。。。。。。

 

     문제의 본질은 ‘인간의 특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무엇을 갖추고 있기에 인간은 독특한가. 감정과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인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인지, 도구를 만들거나 종교를 갖고 있다는 것인지, ‘인간다움’은 무엇에 근거하고 있느냐가 겉으로 드러난 토론의 주제이다.

     하지만 좀 더 깊숙이 들어가 보면 중요한 문제는 약간 다른 데 있다. 어떤 존재가 인간인지를 구분하는 판정을 ‘누가’ 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세풀베다 교수는 자신들을 포함한 유럽인들이 - 그러니까 인간이 - 그 판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라스카사스 수사는 그 기준은 다른 그 무엇 - 아마도 인간의 의식을 뛰어넘는 그 이상의 -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가는 모든 걸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 측정하고, 계산하고, 해답을 제시하려는 인간들의 시도는 종종 매우 어이없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책 내용의 대부분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한 토론으로 구성되어 있어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구조지만, 작가는 적당한 상상력을 발휘해 작품이 늘어지는 것을 막고 있다. 되레 긴박감마저 느껴질 정도다. 비록 문헌들을 참고했다고는 하나, 각각의 인물들 편에 서서 그들의 세계관에 맞는 논리를 하나의 변론으로 재구성하는 저자의 작업은 매우 훌륭하다.

     흥미도 있으면서 생각할 거리까지 던져주는 괜찮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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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방법.

요즘따라 내가 쓰는 글의 제목이 길어진다.

생각이 많아지는 건지,

글의 내용을 모두 담을 수 있는 제목을 찾아내는 능력이 줄어드는 건지..

아무튼, 이번 글의 제목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방법'이다.




그동안 내가 몇 가지 책들을 통해

역사상 군주들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지배해왔는가에 대해 몇 가지 지침(?)을 얻을 수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그렇게 얻은 자료들을 토대로 간단히 정리를 해 보려고 한다.





우선,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혹은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들을 분열시켜야 한다.


민중, 대중이라는 사람들은 일단 모이기 시작하면

사회의 불안을 조장하게 된다.

대중의 힘이란 모이는데서부터 생기기 때문이다.




때문에 역사상 많은 지도자들은

그들이 다스리는 신민들을 분열시키고자 했다.

그 중 한 가지 방법이 '피지배자들을 다르게 대접하기'였다.

만약 A라는 사람이 100명을 다스리는 사람이라면,

그 중 10명은 나머지 사람보다 더 높은자리에 올려두어야 한다.

또 그 중 1명 정도는 그 10명 보다 높은 자리를 주는 것도 괜찮다.




이 때 중요한 것은 하위 90명의 사람들도

경우에 따라서 상위 10명 중 한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상위의 9명의 사람들 중 한 명이

최상위 1명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가능성만 존재하면 된다.

그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지의 여부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어차피 그 100명 모두 지배를 받는 위치에 있지만,

그런식으로 지배당하는 사람들 사이에

계층적 차이를 조장해 두는 것은 안전핀 구실을 한다.




우선, 피지배층에서 지배자에 대한 반감이 고조될 때,

한결같이 단합해서 지배자에게 반기를 들 가능성이 낮아진다.

아무래도 가진 것이 더 많은 중간지배층은

최하위의 계층보다는 체제에 덜 반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자칫 자신이 가진 것 마저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자신도 더 높은 계층에 올라갈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은,

그들로 하여금 하위계층의 불온한 움직임을

충직하게 보고하려는 마음을 품게 만들 수도 있다.




로마가 바로 그러했다.

역사상 많은 고대국가들이 노예제를 유지했지만,

로마만큼 노예반란이 적은 나라도 없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 이유를 위의 두 가지로 설명한다.

노예라고 하더라도 몇 가지 계층이 있어서

중간, 혹은 상위의 노예들은

최하위 노예들의 불만에 동조하지 않는 경우가 흔했고,

경우에 따라 자유민이 될 수 있는 가능성,

또 공직을 통해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었기 때문에

노예반란이 적었다는 설명이다.

사실 그런 가능성이란

채 한줌도 안되는 소수에게만 열려있었긴 하지만 말이다.




피지배자들을 분열시키는 두 번째 방법은,

피지배층 서로간의 신뢰를 깨뜨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서로 고발을 하도록 만드는 것' 보다 좋은 것은 없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어쩌면 나의 말과 행동을

다른 사람에게 퍼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더이상 그 사람에게 마음을 터놓고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게 된다.

서로 간의 의사소통이 중지되면,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은 더해진다.




신뢰라는 것은 도미노 게임과 비슷해서,

한 번 깨지고 나면


연달아 다른 모든 부분에서도 신뢰를 하지 못하게 된다.

서로 고발을 하는 것은 이 신뢰 깨뜨리기라는 도미노 게임의

첫 번째 블럭을 넘어뜨리는 것과 같다.

지배자로서는, 고발자에게 주는 몇 푼 안되는 돈이나 지위 정도는,

자신의 지위를 위협당하는 위기상태에 처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고발을 적극 이용해야 한다.




고대 중국의 시황제는 이런 방법을 잘 이용했던 사람이었다.

엄격한 법가의 사상을 신봉했던 그는,

백성들이 서로 고발하게 만듦으로써

자신에 대한 위협세력이 성장하는 것을 막았다.




피지배층을 분열시키는 세 번째 방법은 '여론조작'이다.

이 것은 피지배층의 판단에 혼란을 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지배를 용이하게 만든다.

이를 위해 고래로부터 가장 자주 사용되는 방법은

'가상의 강대한 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대부분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고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을

지상목표로 삼는데,

바로 이런 심리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외부의 적대세력만큼 내부를 단결시키는 것은 없다.




평소에는 외국의 유명메이커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던 젊은이들이,

단지 자국보다 실력이 좋은 축구팀과

자국의 팀이 경기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평소 같으면 거들떠도 보지 않을 값싼 티셔츠 한 장을 입고

거리에 뛰어나오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하물며 자신이 사는 국가에 외국이 침략을 해서

자신의 삶에 큰 위기가 닥칠 때는 어떻겠는가.

그것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지 국민들에게 외부의 막강한 적이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두려움을 갖도록 조장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강대한 제국 페르시아가 침략을 해 온다는 소식을 듣자

대동단결하여 페르시아군을 물리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각 폴리스들이 평소에 보여주었던

반목과 질시, 적대감을 생각한다면 실로 놀라운 일이다.

외부의 강대한 적은 이렇게 내부의 불만세력을 잠재우는 역할을 한다.




외부의 위협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시점에서,

내부의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은 백안시 당하기 십상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일단 살아남는 것이

모두의 지상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은 이런 점을 잘 이용해 내부의 불만을 무마하곤 했다.




피지배자들을 분열시키는 네 번째 방법은 

통치자의 이익이 피지배자들의 이익과 일치한다고 선전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은 모두 국민을 위하는 일이며,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홍보하는 것을 게을리 하면 안된다.



 
광고 하나쯤이야 무슨 큰 효과가 있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람이란 사실 그런 부분에 매우 약하다.

처음에는 무심코 듣고 보는 광고라고 하더라도,

계속 듣다보면 결국 광고가 하는 이야기를 믿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통치자는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더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피지배자들을 위한 일이라고 해야한다.

과거 히틀러의 게르만 민족 우월주의나,

김일성 김정일 식의 공산주의는

모두 적어도 겉으로는 자민족,

인민 모두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홍보해왔다.

뿐만 아니다.

현대의 많은 국가들에도 정부의 일을 홍보하는 기구를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군에서도 이를 이용한다.




물론 소수의 깨어있는 사람들은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깨닫고 반항하겠지만,

그런 경우에는 또 각각 방법이 있다.

바로 다음에 살펴볼 것이

통치에 반기를 드는 사람을 다루는 방법이다.




가장 고전적인 수법으로는

통치자의 통치행위에 불만을 품은 세력의

지도자가 되는 사람에 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는 것
이다.

고래로부터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방법이다.

어느 나라나 자국과 전쟁을 치루는 상대국은 '악'으로 규정한다.

훈족을 비롯한 여러 유목민족의 침입으로 곤경에 빠진

유럽인들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유목민족의 모습을 그려보라.

생고기를 먹으며, 말과 몸이 하나로 붙어있고,

닥치는대로 죽이고 불태우는 것밖에 모르는 야만인의 모습이다.

과연 그러한가.




이런 예는 우리나라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해방 후 한창 반공교육이 이루어졌을 때

북한 사람들을 그리라고 하면

온통 빨간색에 머리에는 뿔이 난 괴물을 그렸다는 일화를

누구나 알 것이다.




통치자는 자신의 적대자들을 이런식으로 공격해왔다.

특히 도덕성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적대자의 도덕적 결함을 밝히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무기가 된다.




두 번째는 첫 번째와 연관되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바로 거짓 증인과 증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상대방에 관한 악의적인 소문을

더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거짓 증거가 필수적이다.

거짓증거를 만들었을 경우에는 일단 되도록 크게 퍼뜨려야 한다.

나중에 그 증거가 거짓으로 드러나더라도

그다지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국민들이란 그런 것들은 금방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깜짝홍보성 시혜를 내려준다면 더욱 쉽게 무마를 시킬수 있다.

하지만 한 번 상처를 입은 상대방의 세력은 훨씬 약해지고 만다.




재미있는 것은,

거짓말의 크기가 크면 클 수록


그것이 들통날 가능성은 낮아진다는 것이다.

이왕이면 큰 거짓말을 해야한다.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 영웅으로 대접받았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거짓말을 잘하기 위해서는 이중적 기준이 필수이다.

상대의 잘못은 크게 부풀리고,

자신의 잘못은 덮어버리는 것이다.

상대의 잘못은 뼛 속 깊이 스며든 악 때문이고,

자신의 잘못은 어쩔수 없는 상황에서의 실수라고 강조하라.

국민들은 결국 큰 목소리를 따르게 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여론조작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통치자가 가장 멀리해야할 사람들은

'분배'를 강조하는 사람들이다.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특히 더 조심해야 한다.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통치자의 권위까지도 나눌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보기에는 통치자의 권위도

결국 백성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권력을 그 주인인 백성에게 돌려주는 것이

정의에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통치자에게 이것보다 큰 위협은 없다.

때문에 통치자를 비롯한 기득권자들은

정의, 특히 분배의 정의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위험인물로 인식한다.

그리고 내가 위에서 서술한 많은 방법을 사용해

이런 사람들을 제거하려고 한다.

이런 분배론자들은 국가나 공동체의 기틀을 흔드는

이적행위자로 몰아붙이는 경우가 많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방법이 크게 힘을 얻어왔으며,

실제로 자주 사용되곤 했다.

조광조가 그러했고, 율곡이 그러했다.

근대사에 들어서서 얼마나 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반민족행위자라는 오명을 쓰고 죽어갔는가.




때문에 통치자나 기득권자들은

'정의'라는 개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의 통치에 별로 큰 이익이 되지도 않을 뿐더러,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통치자는 이런 사람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많은 방법을 사용해왔다.

특별히, '천박하고 근시안적인 지식인들'

주위에 두는 것은 유효한 효과를 나타낸다.

어느 국가이고, 체제에 무조건적인 맹종을 보이는

값싼 지식인들은 널려있기 마련이다.

통치자들은 이런 사람들을 적당히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값싼 지식인들의 장기는,

반대를 위한 반대, 무조건적인 반대, 우기기 등이다.

이들이 말하는 궤변을 듣고 있노라면 식자들은 한숨만 나오지만,

대다수의 백성들은 이들의 궤변을 진리로 듣는 경우가 많다.




이상의 생각들은

내가 그동안 읽어온 몇 권 안되는 책을 통해 얻은 내용들이다.

과연 그럴듯 하지 않은가?

인류가 남긴 수많은 역사서들의 극히 일부만 살펴보더라도,

내가 위에서 간략하게 언급했던 내용의 실례를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각종 고대의 정치학과 관련된 책들도

결국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국민들을 지배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일화는 비단 정치, 군주와 관련된 책 뿐만 아니라

문화나 정신적인 영역에도 비슷하게 적용이 되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와 현대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심지어 내가 이 글을 쓰면서 참고한 자료 중에는

수 천 년 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쿠르드족의 신화와 관련된 책에서 나온 것도 있다.



 



규모가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고,

보다 노골적인지, 덜 노골적인지의 다름만 있을 뿐,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시도는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아주 먼 곳에서 바로 우리 주변에서도

그 실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이상하게도,

이런 식의 남을 지배하고, 억압하고, 통제하고, 길들이는 방법을 다룬 책은 많지만,

남을 섬기고, 봉사하고, 남을 위해 희생을하는 방법을 다룬 책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역시 인간이란,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자신의 편안함을 누리는데에는

많은 관심을 보이지만,

남을 섬기는데는 그다지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좋은 증거가 아닐까.




괜히 씁쓸해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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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위대하지 않다 (양장)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하지만 인본주의는 잘못을 사과하고 바로잡기 위해

자신의 근간을 이루는 불변의 신념체계를 뒤흔들거나 거기에 도전할 필요까지는 없다.

 

 

1. 줄거리 。。。。。。。

 

     저자 자신이 왜 종교를 증오하는지 그 이유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은 책이다.

     별다른 이유의 제시 없이 그저 종교는 악하다고 주장한 저자는(1장), 종교인들의 말이나 행동으로 인한 피해들(2-4장)을 그 이유로 제시하는 듯하다. 5장에서 종교의 형이상학적 주장에 대한 ‘형이하학적’ 분석을 하며 종교의 무가치성에 대해 열변을 토한 후에는, 우주에 대한 ‘지적설계’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폭언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6장)

     7장부터 10장에서 구약과 신약, 코란 등 유력 종교의 경전들을 현대적 기준으로 비난한 저자는, 11-12장에서는 현대의 사이비종교의 탄생을 예로 들며 모든 종교의 시작은 그와 같다는 식의 비논리적인 유비추리를 전개한다. 13장은 2장의 내용과 같으며, 14장에서는 자신의 동양종교에 대한 몰이해를 여지없이 보여주며 그것들을 비난한다. 15장은 7-10장의 내용의 반복이고, 16장은 다시 2장과 유사한 내용인데, 이 장들의 가장 큰 특색은 특별한 ‘증명’ 없이 그저 자신이 경험한(어쩌면 경험하지도 못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욕설을 퍼붓고 있다는 점이다.

     17장에서는 ‘저자 자신이 정한’ 종교인들의 ‘최후의 주장’에 대한 (반론이 아닌) 경멸이 등장하며, 18장에서는 역사상의 ‘위대한 무신론자들’의 예를 열거하며 낯간지러운 무신론 찬양을 외친다. 결론부인 19장은 비록 약간의 시행착오가 있을지라도 무신론은 인간을 진정한 유토피아로 이끌 것이라는 확신으로 마친다.

 

 

 

2. 감상평 。。。。。。。 

 

     무신론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만한 책이다. 여기서 백과사전이란 폭넓고 깊은 진리들의 모음집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전후 내용들이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채 잡다하게 늘어 놓여 있는 상태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거기에 필요 이상의 반복적인 내용으로 책의 두께가 두꺼워졌다는 의미도 추가할 수 있겠다.

     이 과격하고 자극적인 욕설로 도배가 되어 있는 두꺼운 책의 표지에 어째서 ‘최근 쏟아져 나오고 있는 같은 종류의 책 가운데 단연 최고’라는 찬사가 인쇄되어 있는 지 쉽게 추측할 수 없다. 사실 책 표지에 인쇄된 찬사들은 책에 대한 지배적 의견이라기보다는 출판사 관계자의 구미에 맞는 노골적이고 낯간지러운 원초적 찬양일색인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해도 말이다. 차라리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은 ‘생물학’이라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기라도 했지만, 이 책의 경우는 그런 부분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역시 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원색적인 욕설과 조롱이다. 예컨대 “하지만 종교는 나 같은 행동을 할 능력이 없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리고 여러분이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종교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여러분과 나를 파멸시킬 계획, 인류가 힘들게 얻은 모든 성과를 파괴할 계획을 짜고 있을 것이다. 종교는 모든 것을 망가뜨린다.”(29쪽)와 같은 문장들에서는 저자가 피해망상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저자는 ‘조금만 자극을 받아도 야만적인 반응을 보이는’ 종교인들을 비난하지만(49쪽) 조금만 자극을 받아도 야만적인 반응을 보이는 ‘무신론자들’은 보지 못했나보다.

     저자의 사회적 차원에서의 교양 없음은 130쪽에도 등장한다. 저자는 단지 ‘이론’이라는 말에 자신과 다른 정의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상대를 ‘멍청한’이라고 조롱한다. 누군가 공식석상에서 이런 말을 했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왜 책에서는 이러한 조롱이 허용되어야 하는가? 이 책이 삼류 포르노 잡지도 아닌데 말이다. 그 뿐 아니라 저자는 단지 소설 내용을 근거로 종교를 비난하는가 하면(317쪽) 저질 스포츠 신문에서 스크랩 한 듯한 종교에 관한 온갖 가십꺼리들을 모든 종교에 해당되는 양 제시하기도 한다.(87쪽) 사실 도킨스의 책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노골적인 비난과 조롱, 경멸은 ‘고상하신 무신론자님들’의 특성인 듯싶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결국 이 책에 가득한 종교에 대한 경멸과 욕설은, 단지 저자가 선한 종교인들을 ‘경험’해 보지 못해봤다는 이유일 뿐인 것 같다.(276-77쪽)

 

 

     이와는 반대급부로 무신론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도 문제다. 저자는 세상을 참 간편하게 이해하는데, 모든 악은 종교로, 모든 선은 이성으로라는 이분법적 구도이다.(cf. 45쪽) 무신론에 대해 거의 반사적인 칭송을 하려다 보니 약간은 혼란하지만 자생적인 문화적 발전보다는 ‘식민지 시대의 장엄한 건물들’을 찬양하기도 하고(38쪽,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던 대학교수가 있었지 않던가? 일제시대는 우리민족 발전의 전기였다고.) 만약 종교인이 그랬다면 당장에 비난과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을 만한 윤리적 문제도 무신론자가 그랬다면 관대하게 넘어간다.(274쪽)

     종교를 비난하기 위해서라면 자료의 인용도 제멋대로다. 마이모니데스라는 중세의 철학자를 예로 들면, 저자는 이 한 명의 인물이 남긴 저작의 신뢰도를 한편에서는 부정하고(100쪽), 다른 한편에서는 그대로 인정한다.(325쪽) 하지만 둘 다 결론은 ‘그러니까 종교는 나쁘다’는 것이다. 정확한 연구 없이 단지 기분에 따라 악평을 써 내려가기도 하고,(283쪽) ‘남아프리카 사회가 야만성과 내부 붕괴로부터 구원될 수 있었던 것은 호전적 불가지론자들과 무신론자들 때문’이라는 낯간지러운 찬양도 보인다.(365-66쪽)

     아마도 저자는 ‘상징적인 행위’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갖추지 못했음이 거의 틀림없는데, 간디의 물레를 단순히 ‘문명에 대한 비이성적인 종교적 거부’로 비아냥거리는 걸 보면 말이다.(271쪽) 저자는 그야말로 굉장한 문자적 해석을 하는 근본주의자가 아니라면,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한 나라의 독립운동가를 편협한 전통주의자로 비난하는 꼴이다.(아마도 윤봉길 의사가 어떤 종교신자임을 알게 된다면 당장에 종교적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하지 않았을까?)

 

 

     만약 시간만 주어진다면 나는 이 책의 정확한 반대내용을 담고 있는 책을 쓸 수도 있다. 무신론자들과 불가지론자들이 저지른 역사상의 만행과 오류에 대한 사례들을 잔뜩 수집해서 아무렇게나 늘어놓으면 되니까 말이다. 물론 이 때 양을 필요 이상으로 늘리거나, 그렇지 않다면 두꺼운 종이로 출판을 해 ‘권위’가 있는 척 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종교인들의 조심성 없는 말과 행동에 실망한다. 때때로 자신의 욕심을 위해 고의적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모습에는 히친스의 편에 서서 함께 공격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도덕하고 비인간적이며 악질적인 과학자를 본다고 하더라도 과학을 경멸하지는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이성적인 관점’은 이런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과학’과 ‘과학주의’를 적절하게 구별하지 못한 채 이 편의 것은 무조건 옳다는 오류에 빠져있고, 이는 그다지 ‘이성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쉽게 말하면 과학은 ‘현상을 설명하는 기술적 도구’이고, 과학주의는 ‘모든 것은 과학으로만 설명해야 한다는 신념체계’이다. 저자의 엄격한 ‘과학주의(혹은 증거주의나 기초주의)’를 택한다면 우리는 이 책의 내용을 하나도 믿을 수 없어야 한다. 이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과학적 근거를 저자 자신의 문장 이외에는 전혀 얻을 수 없으니까. 물론 책에 등장한 사례들을 일일이 조사해 본 후에는 이 책의 내용을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른다.(그런 시도가 성공할 지는 미지수다)

     저자는 ‘하지만 인본주의는 잘못을 사과하고 바로잡기 위해 자신의 근간을 이루는 불변의 신념체계를 뒤흔들거나 거기에 도전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단언하는데(363쪽), 이러한 단언이야말로 인본주의의 신앙으로서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즐겨 먹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이토록 극렬한 분노를 터뜨리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는 듯하다.(70쪽) 이해 비해 저자의 철학에 대한 몰이해(‘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말을 그럼 신이 언젠가는 존재했었다는 뜻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것으로 보아, 104쪽)나 신학적 진술에 대한 몰이해(주로 할례의 대상과 범위에 관한, 328쪽)는 오히려 작은 문제다.

 

 

 

     앞서 언급했듯 ‘최근 쏟아져 나오고 있는 같은 종류의 책 가운데 단연 최고’라는 소개글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유사한 책인 『만들어진 신』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과 상당부분이 겹치고 있으며(서평까지도 거의 같아야 할 정도다. 그냥 앞선 서평을 읽어보면 될 것 같다), 그나마 독창적인 점이라고는 좀 더 원색적인 욕설과 조롱이 등장한다는 점과 좀 더 많은 모순적 문장들이 등장한다는 점, 그리고 책 표지가 내가 좋아하는 밝은 노란색으로 되어 있다는 것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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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용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왜 우리는 항상 같은 도식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거지?」

「인간이란 존재를 쉽게 변화시킬 수 없으니까요.」

 

 

 

1. 줄거리 。。。。。。。

 

     과밀한 인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테러, 끊임없이 소모적인 논쟁만 벌이는 정치인들과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종교인들, 이 모든 것은 더 이상 지구에 소망이 없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우주과학자인 이브 크라메르는 아버지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우주범선을 제작할 꿈을 꾼다. 양자로 구성된 빛을 이용해 우주선에 돛을 달아 움직인다는 생각이었다. 말기 암으로 더 이상의 치료가 불가능했던 억만장자 맥 나마라의 자금력은 이 황당한 프로젝트가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제공해주었다. 여기에 이브가 일으킨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 전직 요트 항해사 엘리자베트까지 합류하면서 얼추 프로젝트 팀은 완성되었다.

     이브의 계획은 태양계 밖의 새로운 행성을 찾아 ‘건강한’ 사람들만을 정착시키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기술력으로는 아무리 빨리 날아가도 족히 1,000년은 걸리는 이 여행의 가장 큰 적은 시간이었다. 이브는 완전히 새로운 발상 - 우주선 안에서 계속 생명을 번식시키겠다는 -으로 이 난관을 헤쳐 나가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현대판 노아의 방주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2. 감상평 。。。。。。。

 

     기독교 신자든 아니든 ‘노아의 방주’라는 말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작가는 아마도 노아의 방주로부터 모티프를 얻어 이 이야기를 써 내려간 듯 보인다. 또 그것 말고도 책 전반에는 성경 이야기에 대한 패러디들이 많이 엿보인다. 144,000명은 요한계시록의 상징적인 숫자(12 X 12 X 1,000)이고, 탐험에 참가할 사람의 숫자를 줄여내는 작업은 사사기의 기드온 이야기를 떠올리게 만든다. 사람과 동물이 쌍을 이루어 배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이나, 마지막 장의 창세기 패러디는 작가의 재치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성경적’이라거나 ‘기독교적’이라는 말은 아니다.(오히려 작품 전체에는 종교에 대한 반감이 좀 더 자주 드러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첫 작품인 『개미』에서부터 작가의 작품들이 일관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신과 함께 사는 인간’이 아니라 ‘혼자서도 충분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주제도 ‘인간’이다. 특히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아쿠아리움’, 혹은 ‘마이크로 월드’에는 이런 소망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외부의 간섭(신?)없이 완벽하게 돌아가는 ‘닫힌 세계’가 그것이다.

     외부의 개입을 완전히 거부하니 자연히 남는 것은 인간들 자신의 의지뿐이다. 이런 세계가 망하지 않으려면 인간 개개인에게 ‘선한 무엇’이 갖춰져 있어야만 한다. 자연으로 돌아가자, 혹은 원시공산주의로 돌아가자는 히피나 공산주의자, 또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주장은 여기에 근거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만이 그들의 주장이 설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해 주니 말이다.

     하지만 인류 역사는 그 반대증언을 자주 하고 있다는 데 어려움이 있다. 작품 안에서도 파노라마식으로 보이듯 사람들은 정부도 군대도 종교도 없는 세상, 곧 모든 종류의 인위적 질서를 없애버린 세상에선 오래 살 수 없었다는 것이 현실이니까. 이브의 탐험이 결국 ‘실패 같은 성공’을 남긴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들은 인간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고, 인간은 그들의 생각처럼 기계와 같은 정밀성으로 움직이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멋진 상상력을 접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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