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이해하고 싶으면,

 그 사람이 어떤 책을 읽는지,

어떤 책에서 감동을 받는지를 관찰해 보면 돼.

책이란 건,

영화나 텔레비전을 보는 것과는 달라서,

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하거든.

 

 그런 노력을 기울이면서까지 읽는 책이라면,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얻은 감동이라면,

틀림없이 그 사람에 대해 뭔가를 알려주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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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고 싶은 일들

함께 가고 싶은 장소들

함께 기억하고 싶은 추억들.

 

많은 걸 꿈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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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 일기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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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 미치광이가 뒤죽박죽으로 풀어낸 사랑 이야기이다.

 

 

1. 줄거리 。。。。。。。

 

     애인과 헤어진 뒤 감정을 잃어버린 주인공은 얼마 뒤 살인청부업에 뛰어든다. 타고난 사격술에, 감정까지 사라졌으니 그에게 딱 어울리는 일이었다. 게다가 살인을 하는 과정이 자신에게 묘한 성적 흥분까지 일으킨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이제 살인을 유쾌한 오락으로 즐기기까지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장관의 가족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면서, 주인공의 삶은 크게 변한다. 장관의 딸과 일기장, 그리고 자기 방으로 날아 들어와 죽은 제비 한 마리는 그 변화의 시작 단추였다.


 

 

2. 감상평 。。。。。。。

 

     책의 마지막 부분에 쓰여 있는 한 마디 문장이 이 책의 성격을 잘 드러내 준다. 책 전체는 기준이나 판단이라는 면에 있어 뒤죽박죽이었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주인공은 갈팡질팡하는 중이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대반전을 기대하고 계속 책장을 넘겼지만, 이 책에는 그런 것이 없다. 동시에 독자는 혼란에 빠진다.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인물에 대한 평가부터(과연 이 인물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사건에 대한 판단(살인이라는 일에 담긴 사회적, 윤리적 함의)도 없으니까. 작가는 그저 ‘묘사’만 하고 있다.

     작가의 묘사력은 여전히 괜찮은 편이다. 하지만 아쉬움이 느껴지는 이유는, 왠지 마무리가 제대로 안 되어 있는 듯한 느낌 때문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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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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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잉태된 배아의 대다수가 자연적으로 유산된다는 것을

그들이 알면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그것은 일종의 자연적인 ‘품질 관리’로 보는 편이 타당할 듯하다.

 

 

1. 줄거리 。。。。。。。 

 

      작가의 극단적인 무신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쓴 책이다.

     아인슈타인 등의 과학자들이 했다는 신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에 등장하는 ‘신’은 사실 인격신이 아니라는 점을 매우 옳게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된 이야기는(1장), 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설명들이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간다.(2장과 3장) 4장에서는 아예 신부존재(神不存在) 증명을 시도한 작가는,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었던 ‘종교는 진화의 과정에 나타난 불필요한 부산물’이라고 주장한다.(5장)

     6장은 흔히 종교의 주요 기능 중 하나로 알려진 ‘도덕’은 종교 없이도 존재 가능하다는 주장에 할애되어 있다. 그리고 성경에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오히려 부도덕한 내용들이 많이 있으며(7장), 작가 개인이 경험했던 종교인들로부터의 불쾌한 경험들에 대한 푸념이 8장을 장식한다. 나아가 9장에서는 교육에까지 시선을 돌려, 아이들에게 적어도 ‘중립적인 입장’에서 종교를 바라보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사실은 무신론의 입장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마지막 장인 10장에는 그다지 새로운 내용이 없으며, 6장에서 어느 정도 언급했던, 그러니까 종교나 신의 개념 없이도 인간은 살만하다는 주장을 반복한다.

 

  

2. 감상평 。。。。。。。

 

     작가는 대단히 ‘편한’ 도발을 걸고 있다. 그는 종교 전반에 걸쳐 공격을 퍼붓고 있지만,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중 한 쪽에서만 변호(혹은 반론)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지휘계통이 일원화 되지 않은 대군(大軍)은 일원화 되어 있는 작은 부대보다 못하다는 전략의 기본이 제대로 구현되어 있는 형세다. 또, 작가가 상정하고 있는 ‘종교’란 그 실체가 불분명하다. 어느 특정 종파나 교단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말하자면 그저 모호한 상태인데, 이럴 경우 공격하기는 쉬워도 방어하기는 어렵다. 방어하는 쪽은 ‘모호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것을 가리켜야 하니까. 작가는 본인이 퍽이나 불리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유리한 전장을 설정해 두고 싸움을 걸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작가는 무신론자에 대한 ‘편견’이 자신들과 같은 무신론자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느끼는 듯하다. 하지만 오히려 ‘유신론자에 대한 편견’이 더 판을 치는 세상이 아닌가 싶다. 이에 대한 판단을 좀 뒤로 미루더라도, 그의 말대로 오늘날 무신론자들이 ‘공격을 받는 (약한) 입장’에 있다면, 그건 진화에서 탈락할 징조가 아닌가? 적자생존이야말로 진화론의 핵심 뼈대 중 하나니까.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종교’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도 매우 작위적으로 예를 드는 데 사용한다. 자신이 보기에 과거에 문제가 되었으나 현재는 그렇지 않은 것이 있으면 과거를 들어 공격하고, 그 반대일 경우 현재의 일을 들어 공격한다. 또, 사실상 정치적 이유로 벌어지는 문제들 - 예를 들면 팔레스타인 분쟁 -까지도 종교적 문제인 양 묘사한다.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목적을 위해 호도한 것인지, 정말로 문제의 본질을 모르고 쓴 것인지 궁금하다.

     작가가 알고 있는 기독교에 관한 지식들은 매우 작위적인 구성을 거쳤으며, 작가의 ‘섭리’에 대한 이해도 매우 제한적이다. 신은 매순간 수십 조 개 이상의 원자들을 가지고 저글링을 할 필요는 없다.(232쪽 참고) 또, 원문의 의미나 원저자의 사상을 고려하지 않는 작위적 인용도 보이니(290쪽의 루터의 말), 이쯤 하면 책의 어느 부분에는 분명히 신뢰도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역자 후기를 보면 번역자는 도킨스가 ‘에둘러 말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그의 장점으로 꼽지만, 정말로 그런가? 도킨스는 필요할 때마다 자신의 구미에 맞는 ‘악의적인 예’들만을 인용해 비난하고는 던져버린다. 그런 자신의 태도가 무리했다는 점을 본인도 알고 있었는지 슬쩍 한 발을 빼기도 한다.(396쪽) 또, ‘기원의 문제’를 다룰 때는 추측성 문장들만 나열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넘어가더라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도킨스는 자신의 주장이 ‘가치중립적’인 사실에 근거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논리적 비약이 있다. 그는 ‘모든 진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어야만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데, 저자는 그 명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길 뿐, 그것이 하나의 ‘전제’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끊임없는 근원으로의 회귀사고는 곧 옳은 것’이라는 전제 역시 ‘증명’되지는 않은 일종의 공리에 해당하는 명제이다. 저자의 말처럼 진화론이 사실이기 때문에 무신론이 자연스러운 결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118쪽), 오히려 그 반대로 무신론적 입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화론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주장이 충분히 고려할만한 견해가 아닌가.

     저자는 종교에서 다윈주의에로의 헌신으로 갈아타는 과정을 ‘안경을 바꿔 쓰는 비유’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는 매우 탁월한 비유다. 바로 다윈주의도 하나의 ‘안경’이라는(하나의 관점이라는) 사실 말이다.더구나 저자가 신봉하고 있는 ‘다윈주의’는 단지 생물학적 가설만이 아니라 종교적 함의까지 담고 있는 ‘사조’라는 점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 잘 드러난다.

   
       “그리고 비록 다윈주의가 무생물의 세계(가령 우주론)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생물학 본연의 영역 너머에 있는 분야들에서도 우리의 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176쪽)
 
   

 

     또, 다윈주의의 기저에 깔려 있는 ‘효용성’의 신화(248쪽)에도 우려가 든다. 낭비를 표적으로 삼아 일일이 제거하는 하는 것이 다윈주의의 본질이라면, 사회적 입장에서 노인이나 장애인, 어린이와 여자 등을 도와야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런 생각이 경제의 영역으로 넘어갈 때 곧바로 신자유주의는 곧 선이라는 신화적 사고와 이어질 소지가 다분하다.(이미 책에도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문장이 등장한다. 도킨스는 자연유산을 ‘품질관리’로 보고 있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 중 하나는 종교와 사랑에 빠지는 매커니즘 사이의 비교를 다룬 부분이었다.(283쪽) 하지만 그 둘을 전적으로 기계적 반응으로만 설명하려는 저자의 시도는 왠지 애처롭기까지 하다. 당신은 당신이 그(혹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가 단지 호르몬의 작용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제정신으로 결혼을 할 수 있겠는가?

 

 

     언젠가 『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보고 ‘출판 자체가 낭비적인 책’이라는 제목의 서평을 쓴 적이 있었다. 책이 담고 있는 세속적 가치관은 굳이 책을 내지 않아도 텔레비전만 켜면 충분히 듣고 볼 수 있는 내용이었을 뿐더러, 책이 표방하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 역시 이유는 다르지만 ‘대단히 낭비적인 책’이라는 제목을 붙여주고 싶다. 나는 이 책만큼 오직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모욕하고 조롱하기 위해 두껍게 쓰인 책을 아직까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기독교인이 이슬람교도나 불교도를 보고 당장에 제거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최소한의 ‘교양’이다. 하지만 도킨스는 ‘성서의 괴물’이라는 표현까지도 가리지 않고 뱉어낸다. 교양 없음, 혹은 지적 세계의 천박함의 증거가 아닐까. 책에서는 특별히 ‘건설적 목표’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가래침을 뱉고자 하는 목적’만 보인다. 그나마 자신의 주장에 철저하지도 못하다. 정말로 낭비적인 책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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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ckle 2008-03-11 0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히 낭비적인 서평

노란가방 2008-03-11 07:57   좋아요 0 | URL
그렇게 생각하시는 '논리적 이유'라도 함께 제시해주셨다면 더 좋았을텐데요.

군자란 2008-03-12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신을 놓고 종교인이 아닌분(????)이 이렇게 도발적으로 쓰신것을 보니 한편으로 부럽기도 합니다.사실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눈먼시계공....을 읽으면서 경이감을 느끼기도 했는데 사실 만신을 그렇게 평가하기에는 저의 역량이 아직은 모자란듯 싶습니다.
하지만 도킨스의 논리가 약간은 과장된면도 있겠지만 무시할수 없는 진실이 숨어 있기에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지 않을까요....

노란가방 2008-03-17 13:04   좋아요 0 | URL
책에 담긴 모든 내용이 조작이라거나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죠. 맞습니다.
도킨스가 고발한 것처럼 문제가 있는 종교인들의 행위들은
마땅히 비판과 수정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데에 저도 동의합니다.
다만 도킨스 자신이 종교를 비난하는 중요한 이유인 '증명되지 않은 전제(믿음)'는 도킨스 자신도 가지고 이있다는 데서 그의 주장의 인식론적 모순이 발견된다는 점과, 소위 다윈주의가 가져올 인간파괴의 전조들, 또 책의 주요한 특징인 모욕과 욕설은 분명히 지적을 받아야 한다는 게 제 의견이에요.

2008-03-17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karneit 2008-04-19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란 타이틀을 본 순간엔 '과학자가 넘어서는 안될 영역을 건넜군. 어쩌면 건방진 과학자의 삐뚤어진 모습이 아닐까?' 이것이 저의 첫인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미국 내 창조론자들의 반동적 행위에 관한 기사(리차드 도킨스의 <<조상 이야기>>,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 과학TV에서 방영된 '진화론의 명암')들을 접하면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 대한 저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 기사 내용은 미국 내 한 지방의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사건인데, 이 고등학교에 소속된 광신적 기독교 신자 학부모들이 수적인면에서 소수이지만 학부모 모임 중요 직책을 장악하면서 사건이 시작되었죠. 그들은 교과목인 생물 교과서 내에 언급한 다윈과 관련된 내용을 지적함과 동시에 그 내용을 삭제 할 것과 대신 창조론적 내용과 지적 설계론자들의 내용들을 생물 과목 부분에 채택하여 교육할 것을 종용한 사건이었죠. 이는 엄연히 정교분리를 제창한 미국 건국 정신에 위배된 사건으로 그 지방 법원의 재판까지 벌어질 정도로 미국 전체의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죠.
이는 분명 종교계가 그들의 영역을 넘어서 교육계와 과학계에 가한 테러라 여겨집니다. 더구나 극소수에 불과한 일부 광신도들의 무지에 의해 이루어진 일련의 사건에 오직 침묵(왜냐하면 과학계에서 대응하면 오히려 광신도들의 움직임을 대외에 널리 알리는 효과가 있을 것이므로)으로 일관해 오던 도킨스를 비롯한 정식 과학계 인사들의 반성과 구체적 행동으로 옮겨야 할 필요성으로 나온 책이 <<만들어진 신>>입니다.
그러기에 이 책은 한 과학자가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소신을 밝힌 용기 있는 책으로 읽혀져야 하며 우리나라 정서와는 다른 서구 사회에서의 기독교 중심 분위기를 염두해 둔 체 읽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도발은 종교계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도킨스의 이 책이 나왔습니다. 결국 역사적 반동으로 이어질 일련의 움직임에 대한 과학자로써의 최소한의 반응이며, 단결력 하나만은 인정해야 할 소수의 광신도들에 의한 움직임을 성토하고 이에 대한 무신론자들의 주의와 단결을 최소한 끌어내려는 움직이라 보시면 될 듯 하군요.

노란가방 2008-05-17 14:51   좋아요 0 | URL
네.. 관점에 따라서는 그렇게 볼 수 있는 여지도 있어 보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란 없는 법이니까요.

다만, 이 문제는 좀 복잡한 철학적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저는 '진화와 창조'를 '과학과 종교'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시도 자체가
이미 한 편으로 기울어진 저울에 이 문제를 올려 놓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생물의 기원이나 발전에 관한 문제는 엄밀히 말해
'과학적 검증'을 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필연적으로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추론'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데,
이 때 추론을 하는 당사자가 어떤 사전의 관점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크게 달라질 테니까요..
하지만 저자는 이런 부분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채 '과학적 설명 = 진리'라는 매우 간단한 도식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데, 제가 문제삼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죠.

karneit 2008-05-20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란가방님의 말씀 알겠습니다. 하지만 님의 생각은 또다시 바꿔서 생각해볼 수 있을 듯 합니다. 바로 '성경말씀(신의 말씀)=진리' 도식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싶군요. 예를 들어, 과학자들은 소위 고대 및 중세적 신 중심의 세계관인 (천동설)에 대한 생각에 반대를 했습니다. 처음엔 지동설도 '추론'에서 시작되었지요. 과학자는 말도 안 되는 추론을 통하여 끊임없는 실험, 관찰, 계산과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이 시행착오 중엔 종교계의 강압적인 협박, 무지, 정치적 개입 등이 압도적인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과학의 편이었죠. 종교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단순한 생각과 아집, 무지와 고대 서적의 일부 말도 안 되는 억측이 아니라 과학자의 실증적 연구 자세와 과학적 증명 편에 있었던 거죠.
어떤 연구는 수 백년이 지나는 동안 증명이 되지 않다가 축적된 연구 성과와 천재적인 발상 내지 다른 분야와의 연계를 통해 '추론'을 '학설'로 바꿔 놓기도 하죠(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는 과정). 이것이 과학입니다. 도킨스는 이러한 노력에 감명을 받아 생명과학의 과학자가 된 것이고, 찰스 다윈의 과학적 노력에 탐복했다 봅니다.
생명의 창조에 관해서도 지금 그 말이 적용될 듯 하군요. 우주천문학, 유기화학, 생명과학 중 특히 유전공학의 발전은 이러한 생명 탄생에 대한 연구에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과학자들은 생명 창조에 대한 '추론'(생명의 창조는 물질의 우주적 진화과정 결과 나온 하나의 결과물이라는 것이죠)을 제시하고 끊임없이 연구와 연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도킨스는 자신의 다른 저작인 <<조상 이야기>>에서 이러한 연구 결과로 진화론에 반하는 과학적 증거가 단 한 개라도 나오면 그는 진화론의 매커니즘인 '자연선택'을 폐기처분 할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는 결코 '과학적 설명=진리'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명백한 과학적 증명과 사례가 뒷받침 될 때라야 비로소 학설이 되는 것이죠. 물론 이 학설도 언제라도 반증이 나오면 폐기처분 될 것이라 그는 말합니다.
단지 어떤 성역을 설정하여 그 분야에 뛰어드는 것을 원천 봉쇄하려는 종교계야 말로 도식적 생각과 강요(소위 철학,논리라 칭하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군요. 바로 이러한 움직임 때문에 부득이 '진화와 창조'를 '과학과 종교'의 문제로 보이게 하는 부조리한 흐름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싶군요(절대 환원이 아닙니다).

노란가방 2008-06-06 18:33   좋아요 0 | URL
말씀에 저도 일부 동감합니다.
충분히 사려깊지 못한 '과학주의자'들만큼,
충분히 사려깊지 못한 '종교주의자'도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말씀하신 내용 중에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진리를 향한 과학자들의 노력을 막은 '압도적 부분'을
종교의 탓으로 말씀하시는 부분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초기 과학자들의 대부분은 종교적 신념을 위해 연구를 계속했고,
종교(아마도 기독교겠지요)는 이를 지원했습니다.
천문학자인 케플러, 만유인력과 열역학법칙의 뉴턴, 원자론의 돌턴 등이 그 예이죠.

무엇인가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설명하고, 검증하려는 노력은
마땅히 칭찬을 받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설명되고, 검증된 것만이 옳은 것이라는 생각은
(제가 보기엔 도킨스 박사는 이런 전제를 가지고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철학자 후설은 서양에서 갈릴레오로 시작된 과학주의가
‘자연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세계는
진정한 세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졌다고 지적하는데,
전 도킨스와 같은 과학주의자들의 생각이 가져올 파괴적 문제들도 염려되구요.

무엇보다 모든 걸 차치하고서라도
이 책처럼 욕설과 비난으로 도배를 하는 식으로는
저자 자신이 무엇인가 욕구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 이외에는
그다지 많은 걸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답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군에서 훈련을 받는 중이라서요..;)
 


사람들이 즐겨하는 잔인한 행동이 하나 있다.

 바로 저항할 수 없는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물리적, 혹은 사회적 힘 때문에

상대가 나의 공격에 저항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상대방에게 공격하는 것으로 만족을 얻는 모습.

 

아니, 어쩌면 상대가 자신에게 저항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비정상적인 우월의식을 느끼는.

 

 상대방의 그런 상황을 뒤늦게 알았는데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모습은

이와 거의 유사한 행위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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