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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평점 :
나는 잉태된 배아의 대다수가 자연적으로 유산된다는 것을
그들이 알면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그것은 일종의 자연적인 ‘품질 관리’로 보는 편이 타당할 듯하다.
1. 줄거리 。。。。。。。
작가의 극단적인 무신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쓴 책이다.
아인슈타인 등의 과학자들이 했다는 신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에 등장하는 ‘신’은 사실 인격신이 아니라는 점을 매우 옳게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된 이야기는(1장), 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설명들이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간다.(2장과 3장) 4장에서는 아예 신부존재(神不存在) 증명을 시도한 작가는,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었던 ‘종교는 진화의 과정에 나타난 불필요한 부산물’이라고 주장한다.(5장)
6장은 흔히 종교의 주요 기능 중 하나로 알려진 ‘도덕’은 종교 없이도 존재 가능하다는 주장에 할애되어 있다. 그리고 성경에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오히려 부도덕한 내용들이 많이 있으며(7장), 작가 개인이 경험했던 종교인들로부터의 불쾌한 경험들에 대한 푸념이 8장을 장식한다. 나아가 9장에서는 교육에까지 시선을 돌려, 아이들에게 적어도 ‘중립적인 입장’에서 종교를 바라보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사실은 무신론의 입장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마지막 장인 10장에는 그다지 새로운 내용이 없으며, 6장에서 어느 정도 언급했던, 그러니까 종교나 신의 개념 없이도 인간은 살만하다는 주장을 반복한다.
2. 감상평 。。。。。。。
작가는 대단히 ‘편한’ 도발을 걸고 있다. 그는 종교 전반에 걸쳐 공격을 퍼붓고 있지만,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중 한 쪽에서만 변호(혹은 반론)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지휘계통이 일원화 되지 않은 대군(大軍)은 일원화 되어 있는 작은 부대보다 못하다는 전략의 기본이 제대로 구현되어 있는 형세다. 또, 작가가 상정하고 있는 ‘종교’란 그 실체가 불분명하다. 어느 특정 종파나 교단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말하자면 그저 모호한 상태인데, 이럴 경우 공격하기는 쉬워도 방어하기는 어렵다. 방어하는 쪽은 ‘모호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것을 가리켜야 하니까. 작가는 본인이 퍽이나 불리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유리한 전장을 설정해 두고 싸움을 걸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작가는 무신론자에 대한 ‘편견’이 자신들과 같은 무신론자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느끼는 듯하다. 하지만 오히려 ‘유신론자에 대한 편견’이 더 판을 치는 세상이 아닌가 싶다. 이에 대한 판단을 좀 뒤로 미루더라도, 그의 말대로 오늘날 무신론자들이 ‘공격을 받는 (약한) 입장’에 있다면, 그건 진화에서 탈락할 징조가 아닌가? 적자생존이야말로 진화론의 핵심 뼈대 중 하나니까.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종교’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도 매우 작위적으로 예를 드는 데 사용한다. 자신이 보기에 과거에 문제가 되었으나 현재는 그렇지 않은 것이 있으면 과거를 들어 공격하고, 그 반대일 경우 현재의 일을 들어 공격한다. 또, 사실상 정치적 이유로 벌어지는 문제들 - 예를 들면 팔레스타인 분쟁 -까지도 종교적 문제인 양 묘사한다.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목적을 위해 호도한 것인지, 정말로 문제의 본질을 모르고 쓴 것인지 궁금하다.
작가가 알고 있는 기독교에 관한 지식들은 매우 작위적인 구성을 거쳤으며, 작가의 ‘섭리’에 대한 이해도 매우 제한적이다. 신은 매순간 수십 조 개 이상의 원자들을 가지고 저글링을 할 필요는 없다.(232쪽 참고) 또, 원문의 의미나 원저자의 사상을 고려하지 않는 작위적 인용도 보이니(290쪽의 루터의 말), 이쯤 하면 책의 어느 부분에는 분명히 신뢰도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역자 후기를 보면 번역자는 도킨스가 ‘에둘러 말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그의 장점으로 꼽지만, 정말로 그런가? 도킨스는 필요할 때마다 자신의 구미에 맞는 ‘악의적인 예’들만을 인용해 비난하고는 던져버린다. 그런 자신의 태도가 무리했다는 점을 본인도 알고 있었는지 슬쩍 한 발을 빼기도 한다.(396쪽) 또, ‘기원의 문제’를 다룰 때는 추측성 문장들만 나열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넘어가더라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도킨스는 자신의 주장이 ‘가치중립적’인 사실에 근거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논리적 비약이 있다. 그는 ‘모든 진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어야만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데, 저자는 그 명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길 뿐, 그것이 하나의 ‘전제’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끊임없는 근원으로의 회귀사고는 곧 옳은 것’이라는 전제 역시 ‘증명’되지는 않은 일종의 공리에 해당하는 명제이다. 저자의 말처럼 진화론이 사실이기 때문에 무신론이 자연스러운 결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118쪽), 오히려 그 반대로 무신론적 입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화론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주장이 충분히 고려할만한 견해가 아닌가.
저자는 종교에서 다윈주의에로의 헌신으로 갈아타는 과정을 ‘안경을 바꿔 쓰는 비유’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는 매우 탁월한 비유다. 바로 다윈주의도 하나의 ‘안경’이라는(하나의 관점이라는) 사실 말이다.더구나 저자가 신봉하고 있는 ‘다윈주의’는 단지 생물학적 가설만이 아니라 종교적 함의까지 담고 있는 ‘사조’라는 점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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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비록 다윈주의가 무생물의 세계(가령 우주론)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생물학 본연의 영역 너머에 있는 분야들에서도 우리의 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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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윈주의의 기저에 깔려 있는 ‘효용성’의 신화(248쪽)에도 우려가 든다. 낭비를 표적으로 삼아 일일이 제거하는 하는 것이 다윈주의의 본질이라면, 사회적 입장에서 노인이나 장애인, 어린이와 여자 등을 도와야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런 생각이 경제의 영역으로 넘어갈 때 곧바로 신자유주의는 곧 선이라는 신화적 사고와 이어질 소지가 다분하다.(이미 책에도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문장이 등장한다. 도킨스는 자연유산을 ‘품질관리’로 보고 있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 중 하나는 종교와 사랑에 빠지는 매커니즘 사이의 비교를 다룬 부분이었다.(283쪽) 하지만 그 둘을 전적으로 기계적 반응으로만 설명하려는 저자의 시도는 왠지 애처롭기까지 하다. 당신은 당신이 그(혹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가 단지 호르몬의 작용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제정신으로 결혼을 할 수 있겠는가?
언젠가 『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보고 ‘출판 자체가 낭비적인 책’이라는 제목의 서평을 쓴 적이 있었다. 책이 담고 있는 세속적 가치관은 굳이 책을 내지 않아도 텔레비전만 켜면 충분히 듣고 볼 수 있는 내용이었을 뿐더러, 책이 표방하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 역시 이유는 다르지만 ‘대단히 낭비적인 책’이라는 제목을 붙여주고 싶다. 나는 이 책만큼 오직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모욕하고 조롱하기 위해 두껍게 쓰인 책을 아직까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기독교인이 이슬람교도나 불교도를 보고 당장에 제거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최소한의 ‘교양’이다. 하지만 도킨스는 ‘성서의 괴물’이라는 표현까지도 가리지 않고 뱉어낸다. 교양 없음, 혹은 지적 세계의 천박함의 증거가 아닐까. 책에서는 특별히 ‘건설적 목표’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가래침을 뱉고자 하는 목적’만 보인다. 그나마 자신의 주장에 철저하지도 못하다. 정말로 낭비적인 책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