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철학자들의 고백 - 세계의 석학 11인이 들려주는 영적 자서전
켈리 제임스 클락 엮음, 양성만 옮김 / 살림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도스토예프스키 등이 반복해서 지적한 바와 같이

형이상학이나 신학은 오래 전에 버림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낙태를 비롯한 다른 형태의 부당한 살생과 착취에 대한

관대한 태도가 생기는 것이다.

 

 

1. 줄거리 。。。。。。。

 

     흔히 기독교에 대해 자주 하는 오해 중 하나는, ‘덮어 놓고 믿으라는 종교’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현대의 과학적 결과물들을 인정하는 교양 있는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식이다. 이 책의 저자인 켈리 제임스 클락은 그러한 통설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저자는 이 책에 오늘날 영미 쪽에서 큰 영향을 끼치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모아 놓았다.(저자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받은 일종의 자서전을 모아 편집한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한데 모인 이유는 단지 그들이 예일, 옥스퍼드, 컬럼비아 등의 명문대에서 가르쳤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들이 가진 신앙을 학문적 작업에 반영하기 위해 여러 방향에서 노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 책의 편집자에게 선택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작업은 이제 비기독교인 철학자들에게도 제시되고, 토론되고 있다.

     책에 등장하는 철학자들은 각자 다른 가정환경과 인생을 경험했다.(고백록이라는 형식의 글이기 때문에 부각되는 면이다) 어떤 이는 오랫동안 동성애를 해 왔으며, 또 다른 이는 기독교를 부정하는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도 있었고, 유대교인인 아버지를 둔 사람도 있었다. 또, 그들이 가진 기독교 신앙도 성공회 신자와 로마 카톨릭신자, 그리고 개혁주의 교회신자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다만 공통적인 것은, 그들은 신앙을 이성에 종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합리주의 기독교신자로서가 아니라, 이성을 무시하지 않는 기독교 신자로서 그들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덮어 놓고 믿으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극렬하게 화를 낼 것 같은 기독교 신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가 태만한 가운데 근대 지식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섬뜩한 느낌을 갖는다.’



 

 

2. 감상평 。。。。。。。

 

     책을 어느 정도 읽다보면 출판사마다 떠오르는 인상이 있다. 이 책 수준의 필진에, 편저자, 추천자, 그리고 번역자라... 문득 떠오르는 출판사는 IVP. 내 책장 분류에서 이 내용과 관련된 부분에 꽂혀 있는 책의 거의 절반이 그 출판사에서 나왔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책장에 새롭게 꽂혀가는 책 가운데 이 책의 출판사인 ‘살림’이 늘어가고 있다. 이 출판사… 한 번 조사를 해 봐야 할 것 같은 느낌...;;

 

     훌륭한 책이다. 사실 이 정도 인물들이 쓴 고백록을 모아 놓는다는 시도 자체만 해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인데, 내용까지 괜찮으니 금상첨화다. 철학은 세상을 해석하는 학문이다.(물론 비트겐슈타인 이래로 언어분석철학이니 뭐니 하며 철학의 범위를 극단적으로 축소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사실 그가 기존의 거대 담론들을 다루는 철학에 대해 했던 비판의 날은 그 자신에게는 충분히 겨눠지지 않은 면이 있었다.) 때문에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회의 모습이 달라진다. 그런 이유에서라도 철학은 충분한 반성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세상을 뒤덮고 있는 유물론에 기반을 둔 철학은 그런 반성의 장치는 생략한 채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인간을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물질의 혼합체로, 그리고 사회는 그런 물질들의 상호작용만 있는 곳으로 볼 때 인간다움이 무너지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그런 사회에서는 ‘인간다움’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 자체가 사라져버린다. 인간들 자신이 인간들을 부정하는 참 모순적인 철학임에도, 용케도 오랫동안 그것은 비난을 피해왔다.

     이 책에 등장하는 유신론적 철학자들은 그러한 비인간화의 경향에 반대한다. 아마 그래서 더 내 마음에 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기독교라고는 하지만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신앙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 내가 속해 있는 교단의 사상과 꼭 같지만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폭넓은 연대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책 속의 어느 인물이 한 말처럼, 우리의 힘은 서로를 헐뜯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의 위기에 대항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하니까 말이다.(내가 보기에 당면한 가장 큰 위기는 인간성의 상실을 가져온 철학적 세계관이다)

 

     고백록의 형식을 띄고 있기는 하지만, 다들 본업이 철학자인지라 본문에 필연적으로 여러 철학적 논증들이 등장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나보다. 책을 약간 어렵게 만들 수도 있는 부분이긴 한데, 다들 책의 독자가 철학자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쓴 것이니만큼 아예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차분히 논리들을 따라가 본다면 책의 진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추천하는 부분은 역시나 월터스토프나 플란팅가의 자서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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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본 칭기즈칸이 말했다.
 

"고양이를 어디에다 쓰지? 털도 못 쓰고, 젖도 못짜는데 말이야."

 

 

어쩌면 요즘 사람들은


단지 화사함을 위해
 

지나치게 많은 고양이들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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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자서전 - 어느 베스트셀러의 기이한 운명
안드레아 케르베이커 지음, 이현경 옮김 / 열대림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어떤 책이 읽히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최악의 종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줄거리 。。。。。。。

 

     1930년 대에 출판된 책 한 권이 자신의 ‘서생역정(書生歷程))’을 풀어 놓기 시작한다.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의 책도, 그렇다고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것도 아니었기에,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책의 주인이 된 것은 고작 네 사람.(사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책이 여러 명의 ‘주인’을 만나는 건 드문 일이다.) 작가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책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이야기를 풀어 놓게 만든다.


 

2. 감상평 。。。。。。。

 

     이제 책이 책을 말하는 것도 그다지 새로운 경향이 아닌 것 같다. 내 기억에도 책을 소재로 한 책이 이것까지 벌 써 세 권이다. 책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흡입력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위험한 책』의 주제였다면, 얼마 전 읽었던 『애서광 이야기』는 책에 대한 중독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제시하고자 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번 책 『책의 자서전』은 아주 책 자신이 독자에게 말을 거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제의 진화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이 책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음악이 음악을 말하는 것이나, 미술이 미술을 말하는 것처럼 뭐 이상할 게 있느냐는 반응도 가능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주제가 고갈된 건 아닌가(작가의 상상력 부족?)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이 책의 내용이 퍽이나 밋밋했기 때문에 더 그런 느낌이 드는지도.)

 

     60년의 인생. 잘만하면 엄청나게 풍부한 이야기꺼리가 만들어질 만도 하지만, 그다지 인기 없는 책에겐 그냥 시간이 흘러갔을 뿐이다. 몇몇 주인의 손을 거치기도 했지만, 주인들의 모습을 통한 사회 풍자나 세태에 대한 통찰은 그저 약간의 시도에 머물 뿐이었다. 좀 더 깊이 나아가지 못한 면이 아쉽다.

     책이 그 안에 쓰여 있는 내용과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는 설정은 꽤나 흥미로웠지만, 약간 단조로운 느낌도 든다. 괄괄한 성격의 철학책이나, 우울한 성격의 만화잡지 같은 소재들은 듣기만 해도 꽤나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

 

     짧다는 게 가장 큰 미덕이었던 책. 짧지만 깊은 여운을 기대했던 건 내 잘못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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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에는 총 11권의 책을 읽었군요.

 

에드거 앨런 포의 추리소설『황금벌레』,

사토 다쿠미라는 일본 교수가 쓴 『8월 15일의 신화』,

질 페이턴 월시의 전쟁을 겪어 나가는 소년과 소녀 이야기 『분홍 바늘꽃』,

클라이브 마쉬와 가이 오르티즈가 편집한,

꽤나 수준있는 기독교 문화 이론서『영화관에서 만난 기독교 영성』,

찰스 윈과 아서 위긴스의 완고한 증거주의적 세계관에 기초한 선동서인 『사이비 사이언스』,

브라운 신부를 주인공으로 하는 체스터튼의 추리소설 『브라운 신부의 동심』,

첼로가 주인공인 약간 이색적인 음악사적 소설 『첼로 마라』,

사토 가츠히코라는 일본인이 쓴 물리학 이론서 『양자론이 뭐야?』,

구스타브 플로베르를 주 저자로 한 책에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애서광 이야기』,

움베르토 에코의 칼럼집『작은 일기』,

단테가 쓴 명작 『신곡』까지.

 

 

 

이 열 한 권의 책 중에서 1월의 추천도서로 선정된 책은.....

바로 『양자론이 뭐야?』입니다.!!! 짝짝짝.

뭐... 개인적 선정이라 따로 부상이나 상금은 없지만.... ㅋㅋ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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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론이 뭐야?- 개정판
사토 가츠히코 지음, 김선규 감수 / 비타민북 / 2006년 8월
9,000원 → 8,100원(10%할인) / 마일리지 450원(5% 적립)
2008년 02월 01일에 저장
절판
약간 어려울 수도 있는 물리학 이론서였는데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해서 그런지 쉽게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습니다.

일상에서 쉽게 접해보지 못했던 주제여서 꽤나 흥미롭게 읽혔던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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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사진은 아닙니다..;;


 

 배구 경기 중계를 보다가ㅡ

'비디오 판정'이라는 게 나왔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비디오 판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나이가 퍽이나 들어보이는게 아닌가.

사실 비디오 판정이란 게

심판이 눈으로 정확히 보지 못한 것을

영상을 이용해 정확히 판단하려고 만든 것.

그렇다면 얼마나 영상을 정확히 분석할 수 있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그러면 비디오 전문가나,

적어도 눈이 좋은 젊은이들에게 맡기는 게 맞지 않을까?

물론 오랜 배구계 생활을 통해 '노련함'이 쌓일수도 있다고 하지만,

어차피 그 '노련함'으로 판결이 어려운 사안을 커버하기 위해 만든 제도라면

아예 더욱 철저하게 하는 게 낫다.

 

 

 

선수들이 항의를 하니까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노려보던

비디오 판정관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당연히(?) 영상과는 반대로 항의하는 선수들에게 불리한 판정이 나왔다.

 

 

 

뻔히 보이는 것조차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건ㅡ

비디오 판정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나쁘던지,

그것도 아니면

일에서까지 자기 기분을 앞세울 정도로 고집만 부리는

자기통제가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일 터.

 

 

 

연장자 대우도 좋고,

경력자 예우도 좋은데,

꼭 이런 식으로 한 자리씩 안겨주는 게 능사일까?

그 노련함과 완숙함, 경력과 공로를

좀 더 멋지게 사용할 수는 없는 걸까.

 

 

 

어디 스포츠계 뿐일까.

우리 사회 전반에는 여전히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장(長)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물론 나이가 많다는 건 충분히 공경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되지만,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한 자리씩 가져가는 건

조직을 경직시키고,

원칙과 질서를 무너뜨리기도 하며,

종종 정말 일하려고 하는 사람의 의욕을 꺾을 뿐이다.

 

 

 

논공행상 식의 자리 나눠주기가 아니라

연장자 예우 격의 처분이 아니라

정말 일할 줄 아는 사람이,

그리고 그 조직을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될 사람이,

조금 더 바란다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일 하는 자리에 앉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참 멋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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