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로 마라 -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첼로 이야기
볼프 본드라체크 지음, 이승은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좋은 느낌이다.

행복하다.

나는 음악을 완성하고 대가는 나를 연주한다.

이것이 악기가 누리는 축복이다.

 

 

1. 줄거리 。。。。。。。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세계적인 명장이 탄생시킨 한 악기의 생(生)을 되 집어 보는(악기한테 이렇게 써도 되나 싶긴 하지만) 책이다. 악기가 처음 제작되었을 때부터 그의 소유주가 되었던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침몰 사고로 인해 부셔졌다가 극적으로 다시 복원된 일 등 작가는 의인법을 사용해 첼로로 하여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도록 만든다.



 

2. 감상평 。。。。。。。

 

     음악에 관한 책을 하나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마침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악기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일생을 훑어보는 작업이 꽤나 흥미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처럼 음악에 대해 조예가 없는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전문적인 책을 읽기 보다는 이렇게 대각선으로 음악에 접근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판단도 들었다.

     책 자체는 딱딱한 설명 투로 되어 있지 않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해 주는가 싶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말랑말랑 했던 걸까? 첼로를 주인공으로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일종의 자서전을 쓰고자 했던 저자는 아주 자신과 첼로를 동일시했는지(사실은 그래봤자 작가 자신의 감상을 첼로의 생각을 빌어 쓴 거겠지만) 첼로가 느꼈을 감상을 서술하는데 책의 대부분을 할애해 버렸다. 자연히 수사구들은 늘어나고, 이야기는 길어지고, 당대의 느낌보다는 현대인이 당대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에 대핸 서술들만 잔뜩 등장한다.

     애초에 이 책을 골랐던 두 번째 목적인, 비껴치는 역사 읽기를 통해 음악사에 관한 단편들을 약간이라도 습득하기를 바랬던 것은 사실상 허탕으로 끝나버렸다. 책을 읽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은, 소위 명기(名器)라고 불리는 명품 급 악기들에는 최초 소유자의 이름을 붙인다는 것,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명인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초기에는 첼로의 줄을 동물의 내장으로 만들었다는 것 정도? 사실 완전한 무식쟁이가 이 정도라도 알게 된 건 아예 소득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작가의 상상력이 지나치게 뻗어나간 건 아닌가 싶은 점만 빼면 그런대로 괜찮은 책이다. 하긴 상상력에 ‘어느 정도’를 부여하기가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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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에 가 본 경험이 있는가?

만약 그런 경험이 없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다.

사방에서 전해져 오는 슬픔이라는 강렬한 자극을 온 몸으로 느끼는,

그런 끔찍한 경험을 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응급실에서 가장 중요한 미덕은 순종과 인내이다.

이리로 가라고 하면 이리로 가야하고,

차가운 금속성의 침대에 시트 한 장 없이 누우라고 해도 누워야 한다.

굵고 뾰족한 금속 바늘은 그 자리에서 대여섯 번씩 팔에 찔러 넣어도,

환자가 할 수 있는 저항이란 고작 몸을 움찔하는 것 뿐이다.

그 이상의 반항은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전한 순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환자들은 자신이 무슨 큰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된 것인 양,

재판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자신의 형량이 달려 있는 것처럼,

자칫 실수로 그의 비위라도 거스리면 큰 일이라도 나는 것 처럼,

의사의 말에 집중한다.

 

 

뿐만 아니다.

응급실에서는 인내 또한 중요한 미덕이다.

몇 번씩 찔러댄 결과로 얻어낸 피 검사를 하는데도 족히 한 시간 반 이상이 걸린다.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는 이유는,

결과가 나와도 그것을 곧바로 알려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응급실에서는 언제나 나보다 더 급한 환자들이 많은 법이다.

당연히 결과를 바로 알려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품으면 안된다.

그 것 뿐만이 아니라도 응급실에서는 기다려야 할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도,

의사가 지금 바쁘게 무엇인가를 하고 있지는 않은 지 잘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짜증스런 목소리로 무성의한 대답을 듣기 일쑤다.

가끔씩이라도 찾아와주는 의사, 간호사들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어지간히 중한 상태여서 당장 수술을 해야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서너시간을 앉아서 기다리는 것도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

 

 

절대적 순종과 한 없는 인내라..

응급실에서 교회를 개척하면 금방이라도 부흥할 것 같다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친다.

이렇게 훌륭한 자질을 지닌 성도들이 또 어디 있겠는가.

고대 이집트나 바벨로니아의 사제들이 의술까지도 담당했던 이유가 짐작이 된다.

 

 


벌써 12시가 훨씬 넘어 이제 1시가 다 되어간다.

늦어도 9시 이전에는 여기 도착했으니 벌써 4시간 째이다.

그러고보니 저녁도 건너 뛰어버렸다.

배가 고픈건 둘째치고, 무엇보다도 무료한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조금 전부터는 무료함을 이기기 위해,

교회에 가려고 가져왔던 성경책 사이에 꽂아있던 작은 종이 쪼가리 하나에

정신없이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방금 깨달은 사실 두 가지.

아무도 내가 무엇인가를 정신없이 적고 있다는데 신경을 쓰지 않는다.

(뭐.. 사실 응급실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그리고 두 번째는, 아버지가 누워계신 이동식 간이 침대의 난간 옆에,

검붉게 말라비틀어진 핏자국이 남아 있다는 것.

우리가 오기 전, 누군가 흘린 피이리라..

 

 
 

이전에도 아버지 때문에 응급실을 찾은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받은 인상은 하나같이 나쁜 것들이었다.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레지던트들이 한결같이 불친절했기 때문이다.

물론, 레지던트들이 제대로 잠도, 식사도 대충해결하기 일쑤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더구나 매일 같이 보는 사람들이라고는 온통 병들고 상처입은 사람들 뿐이니,

짜증이 날 만도 하다.

하지만 그래도 아프다는 사람을 놔두고 저희들끼리 웃고 떠드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앉아 있는 응급실에서 만난 의사는 친절했다.

한 이틀은 면도도 못한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전에 보았던 사람들과는 달리 전혀 고압적인 자세도 아니었고,

시종일관 웃는 인상이었다.

환자나 보호자에게 짜증스럽거나 무성의한 목소리로 말하는 법이 없다.

응급실 의사들에 대한 생각을 조금은 바꿔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벌써 2시다. 

글 쓰는 속도가 점점 늦어진다.

 

 

새벽 3시.

한 시간 정도 깜빡 졸았나보다.

여전히 응급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아버지는 여전히 주무신다.

좀 나아지셨는지...

 

 
 

좀 전에는 채 두 살도 안 돼 보이는 아기 하나가 들어왔다.

뭘 하는지 아이는 계속 울어대고,

간호사 5명이 달려들어 아기에게 무엇인가를 한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저렇게 어린 아기가 왜 이런 곳에 있어야 하는지..

 

 


잠시 든 생각 하나.

오늘날 응급실에서는 수시로 피를 뺀다.

환자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서란다.

자기들이 고치기 어려운 병만 만나면 피가 더러워서 그렇다는 이유를 대며,

무조건 피를 빼다가 종종 사람을 죽이곤 했던,

중세 유럽의 의사들이 떠오르는 이유는 뭔지..

 

 

 
온 몸이 결려온다.

너무 오래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나 보다.

허리가 너무 아프다.

 

 


새벽 4시.

또 아버지에게 굵은 바늘을 꽂고 피를 뺀다.

XXXX,

내 살에 바늘을 찌르는 것 같다.

피를 빼지 않고는 환자의 상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현대 의학의 수준은 낮은 건가..

 

 


응급실이 잠시 조용해 진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던 앰브런스도 지금은 좀 잦아들었다.

다시 피곤이 몰려온다.

하지만 몸 한 번 편히 펴고 잘 수 있는 공간이 내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앉은 채 눈이라도 쉬게 해 줄 수 밖에..

 

 

6시다.

집으로 가는 택시 안.

의사는 좀 더 정밀한 검사를 해 보라고 하는데...

........

 

 


휴.... 모르겠다.
 

 

 

지금은 오후 8시 14분.

6시에 집에 들어와서 잠시 눈을 붙였다.

오늘은 토요일.

내일 예배 준비하려면 교회가서 할 일이 많다.

 

 


좀 전에야 집에 돌아왔다.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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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신부의 동심 동서 미스터리 북스 5
G. K. 체스터튼 지음, 박용숙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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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선량한 생활이라면 일정한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쁜 짓으로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다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야.

악의 길은 오로지 떨어져 내릴 뿐이지.

 

 

 

1. 줄거리 。。。。。。。

 

     셜록 홈즈와 함께 고전 탐정 소설 시대를 풍미했던 브라운 신부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소설집이다.(요새는 도서관에서 이 시리즈의 책을 골라 보는 데 아주 맛이 들었다.)

     브라운 신부가 등장한 대표작 ‘푸른 십자가’, 뛰어난 관찰력과 추리력의 절묘한 조화를 잘 보여주는 ‘기묘한 발자국 소리’, 인간의 고정관념을 절묘하게 뒤집어 버리는 ‘보이지 않는 남자’, 사건을 애매하게 만드는 트릭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맛이 있는 ‘이즈레일 가우의 명예’와 ‘아폴론의 눈’ 등의 작품들이 실려 있다.

 

 

2. 감상평 。。。。。。。

 

     개인적으로는 홈즈나 뤼팽이 등장하는 소설이나 아가사 크리스티 류의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읽지 못했던 작품들이다. 그래도 퍽이나 유명한 작가라서, 요약본 형태로나마 몇 개의 작품들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브라운 신부가 등장하는 작품의 특징이라면 역시나 작고 통통한 체형을 가진 그가 거구의 전직 도둑인 프랑보우와 함께 다니는 설정상의 아이러니다. 정 반대의 체구에 성격을 가진 두 사람이 뭐가 그리 마음이 잘 맞는지 늘 함께 다닌다. 더구나 브라운 신부는 본업(?)은 뒷전인지 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굳이 남들이 의뢰하지도 않은 사건들에 끼어들어 조용히 일을 처리하고는, 또 그렇게 조용히 사라져버린다. 영국식 젠틀맨의 전통일까?(작가가 영국인이다.)

     체스터튼의 대에 이르면 추리소설도 나름대로의 전통이 확립된다. 뒤팽의 앨런 포가 자신만의 환상적 세계에 빠져서 혼자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식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면, 브라운 신부가 등장하는 작품들에서는 이제 어느 정도 독자들이 추리를 할 수 있는 여지를 던져 주는 데까지 이른다. 이 책에 실려 있는 ‘푸른 십자가’와 같은 작품에 그런 면이 잘 드러난다. 독자는 두 명의 신부들을 쫓아가는 형사의 입장이 되어서 시내에서 일어난 각종 이상한 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나름대로 추적을 할 수 있다. 보기만 하는 소설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는 소설로 전환되는 중인 것이다.

 

     마지막 하나. 이 책의 제목인 ‘브라운 신부의 동심’은 참 어색하다. ‘동심’으로 번역된 단어는 'innocence'인데, 'The innocence of Father Brown'을 꼭 그렇게 번역해야 했을까.. 그냥 ‘브라운 신부의 순수함’ 정도로 번역했으면 좋았을 것을.. ‘동심’이라니.. 애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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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년 동안 알차게 타고 다녔던 빨간 마티즈를 팔고 왔습니다.



살 때 가격이랑 팔 때 가격을 계산해 보니

2년 새에 200만원이나 떨어졌더군요... 휴.....;;

고작 한 달에 60만원 벌었던 학생이

무슨 정신으로 차를 굴리고 다녔는지.. ㅋㅋ



암튼... 이제 차까지 팔았으니

군대 가기 전에 정리해야 할 것들은 거의 됐나봅니다. ^^



오늘 오랫만에(?) 밖에 나갔더니 무지하게 춥더군요.

다들 옷 따따시 입고 다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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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사이언스
찰스 윈.아서 위긴스 지음, 김용완 옮김, 시드니 해리스 그림 / 이제이북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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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과학적 가설의 타당성은 과학적 방법에 기초하는 것이지,

대중적인 지지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다.

 

 

 

1. 요약 。。。。。。。

 

     두 명의 저자들은 이 세상의 옳고 그름을 책상 위에서 결정했다. 오직 ‘객관적인 과학적 정밀성’에 합당한 것들만이 진리이며, 이것으로 측정할 수 없는 것들은 모두 ‘사이비’일 뿐이라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특별히 저자들에 의해 사이비로 치부된 것에는 외계인, 임사체험, 점성술, 기독교 창조론, 초능력이 있다.

     저자들에 따르면 이것들 중 하나라도 ‘믿는’ 사람들은 ‘적절하게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이거나,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고(p. 72), ‘사기꾼으로서 사기성 있는 주장을 하는 것’이나 ‘감정에 호소’(p. 73)하는 것일 뿐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저자들은 친절하게도 ‘적절한 훈련과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서 전혀 ‘사기적 의도나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객관적이면서도 합리적인 대답’을 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2. 감상평 。。。。。。。

 

     상당히 날카로운 책이다. 저자들은 과학적 합리성이라는 예리한 칼날을 책에서 목표물로 지명한 다섯 가지 주제에 가져다 댄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저자들의 의도한 대로 성공적이었다.(그러니까 책까지 나왔을 테고)

     나도 저자들의 주장에 상당부분 동의를 한다. 외계인이나 임사체험, 점성술, 초능력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저자들과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물론 나머지 하나인 기독교 창조론에 대한 부분에서는 약간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굳이 반박이나 다른 설명을 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저자들은 그 예리한 칼날을 스스로에게는 가져다 대지 않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딜레마이다.

 

     쉽게 말해 저자들은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신화에 지나치게 빠져있다. 결국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사람’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얼마 전 출간된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이라는 책에는 이런 점이 잘 지적되어 있다. 특히 오늘날처럼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시대에 특정한 과학자가 어떤 연구 결과를 제시했다고 해서 그것을 다른 모든 과학자들이 함께 검증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아니,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그런 데에 관심도 없고, (전문분야가 아닌 이상) 검증을 할 능력도 없다. 또, 그들 대부분은 연구결과 하나하나에 당장의 생계나 명성이 달려 있기에, 혹시라도 가설과 다른 결과가 나왔다고 하더라도 좀처럼 처음의 가설을 믿고 수정하지 않는다. 그들 사이의 어두운 카르텔을 형성할 때도 있다.

     또 저자들은 ‘오캄의 면도날’이라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설명을 관습적으로 옳은 것으로 가져다 사용하고, 그나마 비판할 때는 사용하면서 정작 ‘자신들의’ 과학적 진술들을 사용할 때는 무시해 버린다. 참 안전한 면도날이다.

     ‘반증 불가능 한 것은 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없다’는 주장은 정확히 말하면 ‘과학적 도구로 설명할 수 없다’는 의미지만 책에서는 ‘과학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한다.(전자의 경우 어떤 의미에서 과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과학만이, 좀 더 정확히는 인간 이성만이 진리의 ‘기준’이라는 의미가 된다.) 말하자면 저자들의 서술을 보고 있노라면 ‘과학적 객관성’보다는 ‘과학적 독단성’이 좀 더 강하게 느껴진다.(종종 나오는 주변 글씨보다 크고 밑줄까지 쳐 있는 문장들은 마치 저자들이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과학적 진리의 타당성을 다수결이 아닌 가설의 실험적 증거에 기초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다가도(p. 176), 바로 아래에서는 ‘국제적 명성’을 가진 학자가 주창한, 그리고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 성명서는 ‘권위’가 있는 것처럼 제시하는 건 적어도 개인의 신념에 충실한 모습은 아닌 듯 싶은데 말이다.

 

     저자들은 책의 서두에 사이비종교에 빠져 집단 자살을 했던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를 실어 놓았다. 사이비 종교가 종종 위험하다는 데에는 나도 동의를 한다. 하지만 인간을 순수한 물질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일부 과학자들, 혹은 과학철학자들의 시도는 더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1, 2차 세계대전에서 ‘과학이 개발해 낸 무기’로 희생된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잘 증명해 주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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