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 사이언스
찰스 윈.아서 위긴스 지음, 김용완 옮김, 시드니 해리스 그림 / 이제이북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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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과학적 가설의 타당성은 과학적 방법에 기초하는 것이지,

대중적인 지지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다.

 

 

 

1. 요약 。。。。。。。

 

     두 명의 저자들은 이 세상의 옳고 그름을 책상 위에서 결정했다. 오직 ‘객관적인 과학적 정밀성’에 합당한 것들만이 진리이며, 이것으로 측정할 수 없는 것들은 모두 ‘사이비’일 뿐이라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특별히 저자들에 의해 사이비로 치부된 것에는 외계인, 임사체험, 점성술, 기독교 창조론, 초능력이 있다.

     저자들에 따르면 이것들 중 하나라도 ‘믿는’ 사람들은 ‘적절하게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이거나,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고(p. 72), ‘사기꾼으로서 사기성 있는 주장을 하는 것’이나 ‘감정에 호소’(p. 73)하는 것일 뿐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저자들은 친절하게도 ‘적절한 훈련과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서 전혀 ‘사기적 의도나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객관적이면서도 합리적인 대답’을 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2. 감상평 。。。。。。。

 

     상당히 날카로운 책이다. 저자들은 과학적 합리성이라는 예리한 칼날을 책에서 목표물로 지명한 다섯 가지 주제에 가져다 댄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저자들의 의도한 대로 성공적이었다.(그러니까 책까지 나왔을 테고)

     나도 저자들의 주장에 상당부분 동의를 한다. 외계인이나 임사체험, 점성술, 초능력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저자들과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물론 나머지 하나인 기독교 창조론에 대한 부분에서는 약간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굳이 반박이나 다른 설명을 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저자들은 그 예리한 칼날을 스스로에게는 가져다 대지 않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딜레마이다.

 

     쉽게 말해 저자들은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신화에 지나치게 빠져있다. 결국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사람’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얼마 전 출간된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이라는 책에는 이런 점이 잘 지적되어 있다. 특히 오늘날처럼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시대에 특정한 과학자가 어떤 연구 결과를 제시했다고 해서 그것을 다른 모든 과학자들이 함께 검증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아니,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그런 데에 관심도 없고, (전문분야가 아닌 이상) 검증을 할 능력도 없다. 또, 그들 대부분은 연구결과 하나하나에 당장의 생계나 명성이 달려 있기에, 혹시라도 가설과 다른 결과가 나왔다고 하더라도 좀처럼 처음의 가설을 믿고 수정하지 않는다. 그들 사이의 어두운 카르텔을 형성할 때도 있다.

     또 저자들은 ‘오캄의 면도날’이라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설명을 관습적으로 옳은 것으로 가져다 사용하고, 그나마 비판할 때는 사용하면서 정작 ‘자신들의’ 과학적 진술들을 사용할 때는 무시해 버린다. 참 안전한 면도날이다.

     ‘반증 불가능 한 것은 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없다’는 주장은 정확히 말하면 ‘과학적 도구로 설명할 수 없다’는 의미지만 책에서는 ‘과학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한다.(전자의 경우 어떤 의미에서 과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과학만이, 좀 더 정확히는 인간 이성만이 진리의 ‘기준’이라는 의미가 된다.) 말하자면 저자들의 서술을 보고 있노라면 ‘과학적 객관성’보다는 ‘과학적 독단성’이 좀 더 강하게 느껴진다.(종종 나오는 주변 글씨보다 크고 밑줄까지 쳐 있는 문장들은 마치 저자들이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과학적 진리의 타당성을 다수결이 아닌 가설의 실험적 증거에 기초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다가도(p. 176), 바로 아래에서는 ‘국제적 명성’을 가진 학자가 주창한, 그리고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 성명서는 ‘권위’가 있는 것처럼 제시하는 건 적어도 개인의 신념에 충실한 모습은 아닌 듯 싶은데 말이다.

 

     저자들은 책의 서두에 사이비종교에 빠져 집단 자살을 했던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를 실어 놓았다. 사이비 종교가 종종 위험하다는 데에는 나도 동의를 한다. 하지만 인간을 순수한 물질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일부 과학자들, 혹은 과학철학자들의 시도는 더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1, 2차 세계대전에서 ‘과학이 개발해 낸 무기’로 희생된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잘 증명해 주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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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서 만나는 기독교 영성
클라이브 마쉬 외 엮음, 김도훈 옮김 / 살림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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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화가 신학적 성찰을 자극하는 것은

주제나 특별한 모티브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형식과 성격 때문이다.

 

 

 

1. 요약 。。。。。。。

 

     제목에 나온 것처럼 신학과 영화 사이의 토론을 제공해주려는 목적으로 쓰인 책이다. 두 명의 저자들은 책의 전체 내용을 쓴 것이 아니라 여러 학자들이 쓴 글을 주제에 맞춰 엮는 역할을 했다.

     편저자들이 따로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저자들의 성격이 묻어나온 건지, 크게 3부로 구성된 책은 전형적인 논문 형식인 서론, 본론, 결론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1부에서는 신학과 영화의 대화라는 것이 과연 가치가 있는 일인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그것이 가능한 지에 대한 학문적인 논설이 이루어졌고, 2부에서는 신학과 영화 사이의 실제적인 대화가 어떻게 가능한 지를 여러 저자들의 글을 통해 실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3부에서는 책 전체의 논의를 정리하면서 지속적인 토론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저자들이 생각하는 영화와 신학 사이의 대화는 몇몇 예술영화나 철학적 사색이 드러나는 영화뿐만이 아니라 대중적인 영화들을 참여시키는 것으로, ‘가위손’이나 ‘사랑의 블랙홀’ 등의 영화들이 본문 안에 주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것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2. 감상평 。。。。。。。

 

     먼저 이 책의 예상 독자가 어떤 사람들일지에 대해 제대로 정리가 필요할 듯싶다. 저자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이 책의 주요 독자들은 일반적인 수준의 기독교인들, 혹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전문적인 영화(혹은 문화)평론가들이나 신학자들, 그리고 둘 사이의 학문적인 연계를 추구하는 문화 사역자들이다. 다시 말해 서술의 수준이 제법 전문적이라서 내용 모두를 이해하는 데는 적지 않은 사전지식이 필요하다.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가능한 대중적인 느낌을 주려고 애쓴 흔적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미학적인 용어들과 철학적인 논지의 전개들은 글의 흐름을 따라가기 어렵게 만든다.

     본론부에 있는 여러 편의 글을 서로 다른 사람들이 기고했다는 점은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책의 장점이다. 영화와 신학 사이를 일률적인 패턴으로 계속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매우 다른 각도에서 소통시키고자 하는 노력들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종 서로 다른 신학적 전제들 위에서 나오는 문장들은 책의 내용을 일관성 있는 신뢰도로 읽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 요소가 되기도 한다. 쉽게 말해 어떤 부분은 좋은데, 또 다른 부분은 나로서는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 담겨 있다.

 

     영화는 책과 달라서 시간적인 요소가 매우 크게 작용한다. 책은 한 번 출판되면 얼마든지 시간을 두고 반복하거나 두고 읽을 수 있다. 10년 전 출판된 책이라고 하더라도 새롭게 읽을 수 있고, 그것을 토대로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상영되어야만 감상할 수 있기 때문에 책에 비해 시간적인 한계를 많이 갖고 있다. 물론 DVD와 같은 도구들을 사용해 다시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일부에 불과하고 광범위한 사람들에게 통하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영화에 관해 폭넓은 영향력을 가진 대화를 하려면 영화가 개봉되기 직전이나 개봉되고 있는 중이어야 한다. 그래야 충분히 대중성을 갖출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이 가진 한계도 여기에 있다. 저자들은 나름대로 대중성을 부여하기 위해 대중영화들을 선택해 이야기를 진행했지만, 아쉽게도 책에 등장하는 ‘대중영화’는 대부분 개봉된 지 10년 이상 된 영화들이다. 물론 시간이 있어야 충분한 반성작업이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아쉬운 것이 사실.

 

     말했지만, 신학과 영화를 ‘쉽게’ 소통시키는 방법을 적어 놓은 책은 아니다. 이 책은 하나의 제안이고, 동시에 다양한 제안들을 담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이쪽 분야에 대해 평범한 수준 보다는 좀 더 깊은 내용을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읽어볼 만한 책이지만, 선뜻 추천하기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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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토론을 하기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주장하기 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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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이란 건

참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물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단순히 공기의 흐름이 막히거나 굴절되거나 하면서 발생하는

일종의 소음의 연속인데 말이죠.

(물리학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학문인지를 말해주는 듯.. ㅡㅡ;)

 

 

 

악이 단순한 소음의 연속이 아니라는 것은,

그것을 접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얼마나 크고 대단한가를 지켜보면 알 수가 있죠.

때로는 기뻐서 자신도 모르게 몸이 들썩이기도 하고,

때로는 매우 단조로운 선율의 음 서 너개만 눌렀을 뿐인데도

눈물이 떨어지기도 하니까요.

음악은 우리의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게 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흩어지게도 할 수 있죠.

 

 

 

악이란 결국,

우리의 정신적인 영역,

즉 우리의 영혼의 영역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악은 어렸을 때부터 제가 제일 싫어했던 과목이었습니다.

음... 성적이 안 나와서요..

다른 과목은 다 '수'인데, 음악과 체육은 '우'더라구요..

(엇.. 멀리서 돌 날아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ㅡㅡ;)

 

 



악이라는 것이 사실,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영역 아니겠습니까.

그 것을 실제로 생산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동안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하니까요.

오늘날엔 단지 생산 뿐만 아니라, 그것을 향유하기 위해서도

오랜 시간 동안의 학습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는 것도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아무튼, 이런 복잡한 이야기는 약간 미루도록 하구요..

(이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글이니까요)

 

 

 

악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게 된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간 이후였습니다.

필그림이라는 합창단에 들어가게 되었거든요.

노래를 한다는 것, 음악을 생산한다는 것, 그리고 음악을 듣는 것..

이 모든 걸 거기서 배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이제 고급음악을 충분히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건 아니죠.

하지만 음악을 감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걸음마 정도는 뗀 것 같습니다.







서 말한 것처럼,

음악이란 것은 우리의 영혼을 만져주는 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힘을 이용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젠가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죠.

글을 쓸 때마다 음악을 듣는다고.

평화와 따뜻함을 서술할 때는 그런 음악을 듣고,

위기와 격정을 써 내려갈 때는 또 그런 음악을 듣고..

그걸 읽고 참 괜찮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당장 저도 그 방법을 사용해봤죠.

효과가 전혀 없지는 않더라구요.

 

 

 
즘은 무엇인가를 긁적일 때마다 항상 음악을 듣습니다.

이렇게 개인적인 잡문들을 쓸 때나,

레포트를 쓸 때도 듣죠. ^^

 

 

 

가 주로 듣는 음악은 영화음악입니다.

(요즘에는 가사가 들어있는 노래를 좀 듣기도 합니다만..)

영화음악은 상상력을 자극하거든요.

남의 것을 베끼는 글이 아닌 이상,

무엇인가를 쓰면서 상상력만큼 중요한 건 없는 듯 싶습니다.

특별한 가사가 나오지 않더라도,

영화음악을 듣고 있으면 머릿속에 뭔가가 그려지는 느낌이 들어요.

 

 

 

화음악이라고 해서 아무거나 다 좋다는 식은 아니구요..

일단 '선곡과정'을 거친 후에야

제 감상 리스트에 오를 수가 있습니다.

같은 영화에 실린 음악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곡은 선택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곡은 제외될 수도 있죠.

평가기준은.....

뭐, 제 느낌이죠. ^^; 

 

 


만히 제 감상 리스트에 오른 곡들을 듣고 있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은,

피아노 연주곡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곡도 있긴 하지만,

절반 이상이 피아노 연주곡이더라구요.

 

 

 
마도 피아노 연주라는 것에 제 영혼이 매력을 느끼나 봅니다. ^^

(그래서 피아노 연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좋아하나... ㅡㅡ;;)

정작 저 자신은 피아노라는 걸 치지 못하지만,

피아노 건반이 내는 소리 자체,

그리고 그것들이 이어지면서 만들어내는 선율..

참 매력적인 악기인 것 같아요.

사람의 영혼을 저 밑바닥부터 떨리게 만들 수 있는..

(그렇다고 다른 악기들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니 이해하세요. 어디까지나 저 개인의 생각입니다.^^;)

 

 

 
무튼,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내내 음악을 듣고 있으니까요.

참고로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은 영화 '아는여자'에 나왔던 음악들입니다.

영화 자체는 그다지 슬프지 않은데 음악 자체는 안 그러네요. 



 

 

시나,

아직도 제가 쓰는 이 방법을 써보지 못하신 분이 있다면,

강력하게 추천해 드립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만 할 때,

그것이 글이 되었든, 계획이 되었든, 그밖에 무엇이던간에

음악이 여러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꺼에요.

뭐... 개인적인 편차야 존재할 수도 있고... 에... 또...

궁시렁궁시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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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바늘꽃 카르페디엠 15
질 페이턴 월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나는 혼자가 아니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이제 나도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생겨서

주위 사람들이 자기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외로운 섬처럼 혼자 누워 있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1. 줄거리 。。。。。。。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영국 런던. 전쟁이 지속되면서 영국 정부는 어린 아이들을 우선적으로 시골로 대피시키기 시작한다. 아버지, 고모와 함께 살던 빌도 그렇게 시골로 떠나는 기차에 올라타게 된다. 하지만 빌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한 시골집에서 며칠을 머물던 빌은 아버지를 찾아 다시 런던으로 떠난다.

     하지만 이미 런던 시내는 전장이 된 지 오래였고, 군대에 간 빌의 아버지는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 빌의 앞에 새롭게 나타난 사람이 있었으니 빌처럼 피난을 가려다가 배가 침몰해 겨우 돌아오게 된 소녀 줄리였다. 누구 하나 믿고 의지할 사람 없는 전쟁의 한 가운데서 서로를 의지하며 버텨나가는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

  
 

2. 감상평 。。。。。。。

 

     내 방을 정리하시던 어머니가 책을 집어 드시더니 책장을 쭉 넘겨 훑어보신다. 읽으려고 그러시냐고 했더니 책 제목이 마음이 들어서 읽을 만한 책인가 해서 보셨다고 하신다. 제목이 썩 ‘예쁘게’ 지어진 책이다.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는 독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준다. 특히 전쟁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소년과 소녀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사람이라서(이탈리아는 독일, 일본과 함께 2차 대전의 추축국 중 하나) 사람들에게 경원시 당하면서도 어눌한 영어로 빌과 줄리에게 따뜻한 식사를 대접해 주는 마르코, 부자지간인 큰 버트와 작은 버트 등은 전쟁이 반드시 인간을 잔인하게 만든다던가 하는 생각에 반대를 하는 인물들이다.

     여기에 소년을 시점으로 하는 서술(1인칭 주인공 시점)은 소녀에 대한 소년의 미묘한 감정을 드러내는 데 매우 좋은 선택이었다. 자신이 정확히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조차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소년의 순수한 사랑은 잔잔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현대 작가들에게서 보이는 날카로움이나 세련됨은 좀 부족해 보이지만, 황순원의 ‘소나기’ 등에서 느껴지는 느낌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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