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적으로 들리는 철제(鐵題)의 마찰음.

그것과 동시에 들려오는 인공색(人工色)이 진한 경적음.

웅성이는 소리.

플라스틱과 석재가 맞부딛히며 발생시키는 소리...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할까봐 걱정이 되어선지,

아니면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런 방식으로 알리고 싶은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지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인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만의 소리를 내는 곳이 있다.


 

매일 아침 타는 지하철이 바로 그 곳이다.
 

 


혹시나 조금 여유가 있을 때,

아니면 급작스럽게 여유를 가져야만 할 때(?)가 생긴다면,

지하철 승강장에 설치된 의자에 잠시 앉아

내가 아침 저녁으로 이용하는 지하철이란 곳에서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소음이 들리는지 들어보는 것도 꽤나 흥미로운 일이 될 듯 싶다.

 


지하철과 "관계된(매일, 일정 시간에, 일정장소를 방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장소와 뭔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군상들이 발생시키는 소음을 듣고 있자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너무 시끄러운 소리들로 가득차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의식을 하던, 그렇지 않던

우리들은 하루종일 너무나 복잡하면서도 미묘한,

그리고 다채로운 소음을 발생시킨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각종 소음을 발생시키는 것 같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그러한 소음들은 동료 인간들에게 불쾌함으로 다가온다.

 

 

 

한 번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만약 이 지구상에서 모든 인간들이 사라지고,

그들이 만들어 낸 소음을 발생시키는 수많은 인공구조물들까지 없어진다면,

그래도 이 세상은 이렇게 시끄러울까 하는..

 


물론 인간 이외의 것들도 소리를 발생시킨다.

우리 인간들의 청력이 지금보다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자연이 쉴새없이 쏟아내는 그 수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쩌면 매우 혼란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쉴 새 없이 바닥을 기어가는 개미들의 발자국 소리,

여름이면 연못을 점령해버리는 소금쟁이, 물방개들이

헤엄치는 소리들로 금새 귀가 가득차게 될테니 말이다.

어쩌면 우리를 괴롭히는 모기들의 날개짓 소리가

100배는 더 크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ㅡㅡ;

 


그런 소리들과 인간이 만들어 내는 소음이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그 모든 소리들은 적어도 자신의 동료들에게 불쾌감과 고통으로 다가오지는 않는 다는 점이다.

새 소리가 동료 새에게 불쾌감을 유발시킬까?

매미 소리가 다른 매미에게 고통으로 느껴질까?

(오히려 반대다. 매미들은 동료가 우는 소리에 용기를 얻는다.)

 


똑같이 지하로 다니더라도

지하철이 내는 소음과 두더지가 내는 소리는 천지차이다.

두더지의 그것을 지하철의 그 찢어지는 소음에 비교할 수나 있을까.

(옆에서 쉬고 있는 개미에게는 크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ㅡㅡ)

 


문제는 조화를 이루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유달리 조화에 익숙치 않은 것 같다.

조화를 이루려고 자신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외부의 사물을 변용시키고, 부수고, 깍아내고, 찢어놓는다.

 


물리적인 사물 뿐만 아니라, 소리의 영역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그 것이 우리가 말하는 "소음"인 것이다.

주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소리. 

그 것이 바로 소음이다.

 


이렇게 세상이 시끄러운 걸 보면,

인간이란 존재는 어지간히 어울리지 못하는 존재인가 보다.

 

 

 

한 번쯤은 시끄러운 소리 내기를 그치고,

다른 사물들과 조화를 이뤄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보다 어렵지만은 않은 일이다.

 


조금만 천천히 걷고,

조금만 말 소리를 낮추고,

조금만 주위에 귀를 기울여보면 된다.

조금만 주위를 더 느껴보면 된다.

 


단지 그것으로 족한데 말이다.

 

 

 

들으려고 하는 사람보다,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
 
귀는 두 개고, 입은 하나인데..
 
이상한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8월 15일의 신화 - 일본 역사 교과서, 미디어의 정치학
사토 다쿠미 지음, 원용진.오카모토 마사미 옮김 / 궁리 / 200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주리호에서의 ‘항복’이 아니라 옥음방송의 ‘종전’을 기억하고 싶었던 일본 국민에게

옥음사진은 존재하지 않으면 창조해야 할 필요가 있는 증거사진이었던 셈이다.

 

 

1. 요약 。。。。。。。

 

     일본에게 있어서 8월 15일은 종전일인가 패전일인가. 한 글자 차이지만 그 의미는 크게 다르다. 종전이라는 말은 우열의 판단이 배제된 어휘지만, 패전은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전공인 미디어 연구를 통해 1945년 이후 일본의 미디어들이 어떻게 그 날의 기억을 윤색하고 창조해왔는지를 밝혀낸다.

     사실상 8월 15일에는 소위 옥음방송(일왕의 종전교서를 라디오를 통해 내 보낸 것)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교서가 실제로 녹음된 것은 8월 14일이었고, 실제적으로 항복문서에 조인을 한 것은 9월 2일이었다.(그래서 미국이나 유럽 쪽 연합군 측에서는 9월 2일을 대일전승기념일로 기념한다) 우익은 우익대로 원자폭탄을 강조하며 스스로를 피해자로 둔갑시켰는가하면(왕의 결단으로 전쟁이 ‘끝났을’ 뿐이라는), 좌익은 좌익대로 당시 왕과 각료들을 파시스트로 몰아붙이며 그들로부터 해방된 날(그러니까 소위 민중들은 파시스트의 압제 아래 있었다는, 어찌 됐건 대중은 죄가 없다는 식)로 8월 15일의 이미지를 ‘창조’해 낸다.

     원자폭탄, 야스쿠니 신사 참배, 교과서 등이 복잡하게 얽힌 이 문제를 풀어나가며, 저자는 일본인들이 좀 더 정직하게 그 날을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8월 15일을 일본 고유의 명절인 오봉과 함께 전몰자들을 추도하는 날로 기린다면, 9월 2일은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으로서 그에 대한 반성을 하는 날로 말이다.

 

 

2. 감상평 。。。。。。。

 

     우리나라에서는 ‘광복절’이라고 부르는 그 날. 별다른 생각 없이 그 날을 그렇게 생각해 왔었다. 이런 질문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무엇을 기준으로 그 날을 광복절이라고 부르는가?’ 일왕이 라디오로 ‘종전교서’를 발표한 것을 기준으로? 남의 나라를 무단으로 점령해 수십 년 동안 갖은 약탈을 하다가, 이제 간다고 말하면 그냥 그 날을 기뻐하는 건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던 부분을 일깨워준 책이다.

     종전교서를 기준으로 한다면 실제로 그것을 반포한 8월 14일을 기념하는 것이 옳다. 교서에도 날짜는 14일로 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로도 일제는 이 땅에서 금방 물러간 것이 아니다. 실제로 중국 등지에서는 여전히 일본군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얼마 전 읽었던 장준하의 ‘돌베개’에도 실려 있듯 일본군은 그날 이후에도 임시정부의 환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본은 8월 15일의 신화, 즉 그들의 천왕이 거룩한 결단으로 국민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종전을 선택했다는 환상을 각종 미디어를 통해 주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미국 전함 미주리 호 갑판에서 이루어졌던 항복문서 조인식은 차차 잊혀 갔다. 이제 일본은 8월 15일에는 A급 전범들까지 합사 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 각료들과 국회의원들이 참배를 하며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날로 삼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침에 생중계 되는 기념식 말고는 그냥 노는 날일 뿐이다. 답답한 노릇이다.

     왜 이런 책이 일본인들에 의해 쓰일 때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 지 아쉬울 뿐이다. 특히 책의 말미에 일본의 초중고 교과서들을 분석하며 어구 하나, 문장 하나에 담긴 전제들을 상세하게 밝히는 부분은, 독도 문제, 정신대 문제, 새 일본 역사 교과서 문제가 나올 때에만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우리나라의 모습과 너무나 비교가 되어 무안할 정도였다. 이미 일본이 다 연구해 나름대로의 논리를 확고하게 구축 한 뒤 문제를 공론화 시킬 때에야 연구를 시작하는 식으로는 언제까지나 당하기만 할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황금벌레 동서 미스터리 북스 1
에드거 앨런 포 지음, 김병철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분석력을 단순히 추리력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분석가는 하나같이 추리에 능하지만 추리에 능하면서도

 의외로 분석적이지 못한 사람은 많기 때문이다.

흔히 추리력은 구성력 내지는 결합능력이라는 형태로 표출된다.

 

 

1. 줄거리 。。。。。。。

 

     추리소설의 창시자로 알려진 애드가 앨런 포의 단편소설들을 모아 만든 단편집이다. 세계 최초의 탐정인 ‘오귀스트 뒤팡’이 등장하는 최초의 추리소설 ‘모르그 거리의 살인’, 그리고 단지 신문에 난 기사들만을 토대로 미궁에 빠진 실제 살인사건을 해결한 것으로 유명한 ‘마리 로제의 수수께끼’, 뒤팡이 등장하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소설인 ‘도둑맞은 편지’ 등과 함께 앨런 포 특유의 심리 스릴러을 예술적으로 구현한 ‘검은 고양이’ 등의 괴기, 환상 소설들이 실려 있다.

 

2. 감상평 。。。。。。。

 

     내가 어렸을 땐 탐정이 되는 게 꿈이었던 시기가 있었다. 빌려 온 추리소설을 밤을 새워 읽기도 했고, 탐정이 되는 법이라는 책도 사 봤던 것 같다. 탐정이 되기 위해 필요한 각종 도구들을 세트로 만들어 광고하는 상품을 사고 싶었지만 차마 돈이 없어 그것까지는 어떻게 하지 못했던… 그런 시기가 있었다.

     그 때 즐겨 보던 작가들이 셜록 홈즈로 유명한 코난 도일, 뤼팽 시리즈로 유명했던 모리스 르블랑,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전집은 번번히 읽으려다 실패했고, 목을 잘라 T자형 십자가에 매단 이야기로 유명한 앨러리 퀸 등이었다. 모두 추리소설의 고전시기 작가들이라고 할까. 그래봤자 100년 전후의 사람들이지만 말이다. 시드니 셀던과 같은 현대 추리소설 작가들의 작품도 읽었지만, 아무래도 멋스러움이 좀 부족하게 느껴졌던 것은 워낙에 고전 추리소설들을 많이 봤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읽었던 작품들이 많은 소설집이었지만, 이 책을 다시 꺼낸 것도 도서관에 갔다가 갑자기 이런 향수가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좀 오랜만에 읽어서일까, 아니면 그동안 현대에 쓰인 책들을 많이 봐서일까. 한편으로 작품들이 지나치게 심리적 흐름이 강조되어 있다는 느낌도 든다. ‘검은 고양이’처럼 현대 소설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작품도 있었지만, ‘라이지아’처럼 지나치게 과장된 수식어들의 사용이 읽기에 방해되는 작품도 있었다. 역시나 시간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기 때문일까.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소설은 ‘윌리엄 윌슨’이었다. 현대 작가인 아멜리 노통브의 『적의 화장법』을 읽고서 정말로 기발한 착상을 한 천재 작가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이미 백 여 년 전에 그런 착상을 했던 작가가 있었다니.

     오랜만에 어린 시절 친구를 만난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쉽게 읽는 돌베개
장준하 지음, 이성자 옮김 / 세계사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우리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


 

1. 줄거리 。。。。。。。

 

     장준하 선생님이 쓴 자서전의 일부이다.

     일제시절 학도병으로 끌려간 그는 동료들과 함께 탈출에 성공한다. 중국에 있던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에 들어가 서울 진공작전을 준비했지만, 불과 며칠 차로 해방을 맞아 임시정부의 수행원 중 한 명으로 고국에 들어왔던 그의 이력을 담고 있다.

     ‘쉽게 읽는’이라는 어구가 제목에 덧붙여져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그의 자서전 ‘돌베개’를 모두 담고 있지는 않으며, 출판사측의 설명으로는 중복되는 부분은 삭제하고, 대신 50여 장의 사진을 넣어 말 그대로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약간의 가공을 거친 책이다.

 

 

2. 감상평 。。。。。。。

 

     학도병 탈출과 광복군 입대, 임시정부의 수행원이라는 수식어들은 이 책이 박진감 넘치는 본격 스릴러물이나 적어도 감동의 드라마를 담고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품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책은 그런 것들과는 좀 거리가 있다. 저자인 장준하 선생은 무엇인가를 꾸며대는 데에 익숙지 않아 보인다.

     대신 책 전체에는 비탄과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 있다. 나라를 빼앗긴 서러움이 개인적 차원에서(학도병을 탈출해 중경의 임시정부까지 가는 동안 겪었던 어려움들), 그리고 민족적 차원에서(떠돌이 임시정부에 대한 홀대들) 담담하게 서술되고 있다. 나라를 잃었는데도 서로 자기 밥그릇 싸움에 골몰하고, 해방 후에도 전혀 변하지 않는 정치꾼들의 작태는 어제나 오늘이나 왜 도무지 변하지 않는지 의문이 들 뿐이다.

 

     “우리는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는 그와 동지들의 결심은 어쩌면 그들보다는 오늘 이 나라의 정치인들과 위정자들에게 더 필요한 구호일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 폐지 정본 C. S. 루이스 클래식 9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옮김 / 홍성사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여러분은 사물을 ‘꿰뚫어보는’ 일을 영원히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무언가를 꿰뚫어보는 목적은 그것을 통해 무언가를 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투명한 창문이 좋은 이유는 그 너머에 있는

거리나 정원이 불투명한 사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정원조차 꿰뚫어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일 원리를 ‘꿰뚫어보려고’ 애쓰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1. 요약 。。。。。。。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의 영국. 당시 영국에서는 실용주의와 증거주의(Evidentialism)에 입각한 교육이 유행세를 타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과학적’ 증거가 없는 것들은 사실이 아니며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오직 인간 이성에 기초한 과학적 사실(요새 자주 들리는 ‘실체적 진실’이 떠오르는 건 왜...;)뿐이라는 ‘신념’이다.

     당연히 인간의 감성부에 해당하는 것들은 모두 무시되어야 한다. 감정이란 하나의 착각일 뿐이니 말이다. 시인들과 작가들은 허무맹랑한 말을 지어내는 사람들이고, 나아가 특정한 윤리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말조차 웃음꺼리가 될 뿐이다. 윤리는 과학에서 나오지 않으니까.

     저자인 C. S. 루이스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깊이 물고 늘어진다. 그는 지금과 같은 교육으로는 가슴은 없고 머리만 남은 인간을 만들 뿐이며, 결국 인간 폐지로 이어지는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2. 감상평 。。。。。。。

 

     영문학 전공자로서의 C. S. 루이스의 특징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책이다. 오랫동안 영문학 교수로 재직해왔기에 당시의 교육학의 동향에 대해 누구 못지않게 잘 파악하고 있었을 터. 여기에 논리적인 글쓰기 훈련까지 받아왔던 터라, 책 전체가 한 편의 잘 짜인 논리학 교과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루이스는 현대의 비인간성적 교육의 한계와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잘 지적하고 있다. 하늘을 경외하고 땅을 사랑하는 인간다운 인간보다는 자기 밥벌이에 소용되는 기술들만 배우는 기술자들만을 양산하는 현실. 여기에는 철저한 상대주의가 핵심 사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사조도 한 몫을 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의 교육도 이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성공지향적 인간들로만 채워지고 있는 현실에서, 이 책은 비록 70년 전에 쓰였지만 여전히 유효한 내용들을 갖고 있다.

 

     다음과 같은 이들에게 추천한다.

     1. 논리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2. 교육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3. 기독교 세계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