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는 하나님에 대한 말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로 바꿉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방식에 대해서 듣거나 읽은 것을 가져다가
하나님의 복음의 개인적 선포로 바꾸는 게 설교입니다.
설교는 물을 포도주로 바꿉니다.
설교는 빵의 명사와 포도주의 동사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바꿉니다.
- 유진 피터슨, 『물총새에 불이 붙듯』 중에서
책 좀 읽어 본 사람이라면 켈트라는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주로 아일랜드 일대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이 외에도 켈트족이라는 고대 민족이 떠오른다면 역사덕후일 가능성이 높고, 셀틱 FC라는 축구팀을 떠올린다면 해외축구빠일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스코틀랜드에 있는 이 축구팀에 셀틱(Celtic)이라는 명칭이 붙은 건, 아일랜드 이주민들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팀이라서 그렇다. 비슷한 케이스로 NBA에 있는 보스턴 셀틱스라는 농구팀도,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그 동네 많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두 팀 모두 메인 색상은 녹색이다.
신학 쪽에서는 켈트 교회라는 명칭이 익숙할 수도 있겠다.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이 바로 그 켈트 교회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켈트, 즉 아일랜드 지역은 유럽의 서쪽 가장자리에 있다. 지리적으로도 가장 멀고, 로마나 파리, 마드리드 같은 오래된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들로부터도 멀다.
중세 초 기독교가 전래되었으니, 그 시기도 다른 데에 비하면 꽤 늦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더해지면서 켈트 교회 특유의 분위기가 형성된다. 다른 지역과 왕래가 많지 않으니 외부의 영향을 적게 받고, 반대로 자체적인 문화가 깊게 발달했다. 물론 그 때문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비주류라는 느낌이 강하지만. 그래도 제법 잘 알려진 켈트 십자가나 클로버 모양의 상징, 그리고 녹색이라는 상징색 정도를 빼면 사실 나도 아는 게 많지 않다.
이 책은 바로 그 켈트 교회의 여러 전통들을 다룬다. 분명 내용상으로는 신학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신학책으로 분류하기엔 또 내용이 좀 말랑말랑하다. 책 제목에 “기도”라는 단어가 들어있는데, 저자는 켈트 교회 전통 안에서 작성된 여러 기도문과 시(기도의 성격이 강한)들을 통해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신앙의 모습에 대한 스케치를 제시한다.
저자가 켈트 신앙 전통을 소개하기 위해 시나 시처럼 읽히는 기도를 선택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초기 켈트 사회는 하나님에 관해 말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장르를 산문이 아니라 운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71). 심지어 그들은 수도원 규칙조차 시의 형태로 작성했다. 여기서부터 신학대전이라는 거대한 논문에 닻을 내리고자 했던 중세의 주류 신학과 차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책에는 켈트 교회 신앙의 다양한 양상들이 설명된다. 삶을 여행으로 보는 독특한 관점부터, 일상 속에서 삼위일체를 가까이 경험하는 방식, 시간의 흐름을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시켜 인식하는 방법, 고독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세상의 악을 피하고 십자가를 의지하는 삶 등등. 다분히 소박하고 목가적인 삶의 정황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느끼고, 경험하며, 동행하는 법을 전수해 왔다.
서방의 주류 신학이 앞서 말했던 대로 이지적인 차원에 집중해왔다면, 켈트 교회의 신학의 가장 큰 특징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점인 듯하다. 그리고 이건 대체로 서방신학 전통을 이어받은 오늘날의 개신교인들에게 그들의 신앙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주된 이유일 것이다.
앞서 이 책이 신학책이라기엔 내용이 좀 말랑말랑하다고 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저자가 켈트 신학을 담담하게 분석하고 서술하기 보다는 경탄의 자세로 바라보며 계속 닮고자, 그리고 닮아야 한다는 요청과 함께 길을 써 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좀 과한 건 아닌가, 그들에게는 수만 명씩 모이는 복잡한 도시라는 배경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삶이 가능했던 건 아닌가 하는 식의 반문이 가끔 떠오르는 것도 사실.
하지만 기독교 전통 안의 풍성한 다양성을 인식하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다. 지나치게 지적인 영역만 강조하는 건 신앙의 다른 부분을 파괴하기도 한다. 믿음은 머리로만 갖는 게 아니니까. 특히 일상의 삶과 믿음을 강력하게 결합시키는 켈트 교회의 신앙은, 삶과 신앙이 유리되기 일쑤인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분명 좋은 자극과 도움을 줄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있어 보인다.
“암흑시대”를 둘러싼 집요한 신화들 중 하나는
그 시대에 과학이 없었고 미신이 세계를 지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실한 주장이다.
700년 이상의 역사에 누적된 지식이 없다면서
사람들과 사료들을 냉소적이고 편협하게 해석한 것이다.
- 매슈 게이브리얼, 데이비드 M. 페리, 『빛의 시대, 중세』 중에서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서사의 위기에 빠져있다고 진단한다. 서사의 위기란, 이야기가 사라지고 정보만 남는 현상을 말한다. 그 주요한 이유는 오늘날 세상이 “정보로 과포화”되어 있기 때문이다(16). 엄청나게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그 모든 이야기의 전체 윤곽을 가늠할 틈이 없이 그저 눈앞의 뉴스에 온통 관심을 빼앗겨 버린다. 서사의 큰 특징인 원격성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우리는 더 이상 일의 전모를 파악할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대학에 들어갔을 때 한창 다음(Daum)의 카페가 유행했었다. 하지만 그 유행은 얼마 후 싸이월드 미니홈피로 옮겨갔고, 또 네이버 블로그로 이동했다. 하지만 다시 사람들의 관심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얼마 전 X로 이름을 바꾼)와 같은 매체로 넘어가더니, 이제는 인스타그램이나 틱톡이 대세다. 이 흐름에는 일관된 방향성이 있는데, 바로 “점점 더 짧게”다.
사람들은 더 이상 긴 글을 읽지 않는다. 짧게 요약된 내용, 그나마 글이 아닌 영상, 혹은 해시태그가 포함된 사진 몇 장으로 모든 걸 파악하고 표현하려 한다. 그러나 이런 짧은 정보뭉치로는 무엇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그저 끝없는 자극만 있는 정보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점차 몽롱해진 채로 알고리즘에 예속되고 만다.
그뿐 아니다. 저자는 정보만 남은 사회는 외설적이라고 말한다. “정보는 그것을 감싸는 껍질이 없기 때문에 포르노적”(65)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 유명한 배우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다. 마약 혐의를 받고 있었지만, 정작 검사에서는 마약 성분이 나오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하지만 사건을 전후해 경찰은 큰 소리로 해당 배우의 혐의를 떠들어 댔고, 소위 사이버 렉카라고 불리는 저열한 유튜버들은 날마다 온갖 개인적인 사안을 폭로하며 돈을 구걸했다. 정보의 자극성, 그리고 그 자극을 위해 한 사람을 발가벗기고 구경하는 집단적인 관음증, 포르노였다.
조금만 생각하면 이게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정보와 소통에 취해버린 대중은 그럴 의지도, 사고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 또한 서사의 위기가 낳은 결과 중 하나였다.
저자는 “인터넷에는 더 이상 꿈의 새가 살 둥지가 없다”(22)고 말한다. 오늘날 보이는 서사의 위기는 모든 것을 인과율로 환원시키고자 했던 근대의 대 프로젝트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소위 과학주의가 절대적인 도그마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세상에 담긴 이야기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신화는 그렇게 부정되고 잊혔다.
문제는 인간이 그렇게만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 오로지 인과율로만 만들어진 관계에서는 깊은 교류가 일어날 수 없다. 피상적이고 기계적인 관계만 있는 곳에서 우리는 도무지 버틸 수가 없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빠지고, 허무함을 토로하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는 지도 모른다.
책은 서사의 위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설명해 준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저자의 다른 책들처럼 그리 분명한 조언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미 문제 제기 속에서 어느 정도 대안도 나와 있지 않나 싶다. 우리는 파편적인 정보로 가득한 인터넷 세계에서 나와, 실제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관계를 맺어야 한다. 우리를 고립시키는 주류 문화에 우리는 저항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