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몸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 교회에서 구현해야 하는 장애 정의(Disability Justice)
에이미 케니 지음, 권명지 옮김 / 이레서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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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접한 용어가 있다. 에이블리즘(Ableism)이라는 말이다. 장애를 뜻하는 Disabled의 반대말인 에이블(비장애)에 ism을 붙였으니, 비장애인주의 정도로 번역해야 할 텐데, 의미를 좀 더 풀면 비장애인들이 표준이 되어 자연스럽게 장애인들을 배제(차별)하면서도 아무런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정말 이런 게 있을까 싶지만, 세상이 어떤 곳인가. 누군가를 불편하게 여기고 혐오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변태적 욕구자가 아니라도, 인간은 그동안 해 오던 것과 다른 존재, 다른 방식을 좀처럼 용납하지 않는 보수적 성격을 기본적으로 장착하고 있는 존재다. 사실 일상 가운데서 우리는 장애를 비하하는 수많은 언행들을 하고 있고, 나아가 그들이 겪는 불편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유로(특히 ‘경제적인 이유로’) 이슈화 자체를 덮어버리곤 한다.


이 책은 우리 사회의 이런 조금은 민감하고 잘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을 수면 위로 드러내기 위해 쓰였다. 어린 시절부터 한 쪽 다리에 장애를 안고 살아오면서 직접 다양한 문제들을 겪은 저자가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기에 좀 더 실감나게 다가오기도 한다.






저자는 다양한 부분에서 불평을 터뜨린다. 대개의 경우 장애라는 상황은 의학적으로 치료나 극적인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건 현실이고 그 현실 안에서 살아가는 거다. 하지만 이런 부분에서 꽤 무례한 방식으로 쑥 들어와서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기독교인들이다. 이건 저자 자신이 기독교인이기에 주변에 그런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 상황이기도 하고, 미국이라는 사회의 특성 가운데 하나이기도 할 게다.


아무튼 그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영적 능력, 혹은 기도로, 혹은 장애인 본인의 믿음의 수준에 따라 장애가 극복되거나 치료될 수 있다는 주장을 끝없이 하는 것 같다. 그런 말들이 장애인들의 속을 어떻게 파헤치는지 의식하지 못한 채로. 또, 온갖 종류의 민간요법들을 가지고 와서 마비된 다리를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달려드는 부류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장애인들을 하나같이 거짓말쟁이나 사기꾼으로 대우하면서 그들이 무슨 특혜를 부당하게 받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기도 한다. 그렇게 괴롭히지 않아도 이미 그들은 충분히 불편하고 괴로운데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이 이런 사람들을 향한 저자 나름의 대답인 것 같다. “나는 내 몸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그녀가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는다거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몸에 대해서 수용하고, 그걸 바꿔야 할 무슨 문제 상황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5장부터 시작되는 책의 두 번째 파트에서 저자는 장애라는 주제에 대한 신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성경에 나오는 다양한 장애 표현들과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피는 5장은 흥미롭다. 하나님은 장애인들이 전혀 불편함이 없이 함께 어울리는 나라를 기대하셨다.


그리고 약간의 불편했던 6장이 이어진다. 여기서는 장애를 부정적인 은유로 사용하는 언어습관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사실 여기에는 영어 표현의 특성이 많이 개입되어 있는데, 장애를 가리키는 영어 단어들(deaf, crippling, blinding, paralyzing, lame 같은)은 2차적인 의미로 뭔가 모자란 존재들을 가리키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애인 본인들에게는 그 단어가 2차적인 문맥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장애에 대한 비하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이걸 그저 민감하다고 무시해도 될까.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장애인을 빗댄 비하표현들이 결코 적지 않으니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문제는 성경에 나오는 표현들까지도 그러니까 바꿔달라는 저자의 요청이 어느 정도까지 수용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결국 이 부분은 성경의 재번역 문제, 그리고 여기에 개입될 특정한 신학적 지향(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이 부분에 관해 몇 개 장을 할애한다)의 선택 같은 좀 더 복잡한 문제와도 결부될 테니까.


하지만 교회 안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을 좀 바꾸는 정도는 좀 더 쉽게 시작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어떤 경우들은 단지 우리가 그동안 해 왔던 것을 바꾸라는 요구에 대한 불쾌함 수준 그 이상이 아니니 말이다. 십자가 앞에서 단지 우리의 고집도 내려놓지 못한다면 그는 과연 무엇을 믿는 걸까.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많아진다. 이 정도의 자극을 해 주는 책이라면 내 기준으로는 좋은 책에 들어간다. 물론 책의 모든 내용이 100% 동의가 되지는 않는다. 특히 장애를 기준으로 세워가는 신학 부분은 저자의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만들어 지지는 않는 법이다.


예컨대 저자는 장애인들에게 나와 천국에서는 그들의 장애가 없어질 거라는 식의 위로를 하는 것이 현재 자신의 몸에 대한 부정으로 느껴진다고 강하게 반발한다(1장). 비슷한 맥락으로 찬양 가사 중에 일어서라거나 달리라거나 하는 표현들이 불편하게 느껴진다고도 말한다(6장). 그러면서 성경에서는 장애가 천국의 복됨을 설명하는 한 가지 요소라고 선언한다(5장). 자, 그러면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라고 말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 35:6)은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물론 이 책은 신학책이 아니고, 특별히 교회 내(그리고 일부 사회 안의) 장애에 대한 편견과 오해, 그리고 차별적 조치들을 환기하고, 문제를 풀어가자는 내용이 중심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라면 우리가 충분히 곱씹어 들어야 할 내용이다. 무엇보다 장애인들이 교회에서도 환영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기독교인들)는 뭔가 중요한 건 놓치고 있다는 뜻이다.


특별히 교회의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우리는 불가능한 일을 요구받고 있는 게 아니라, 주님이 무엇보다 관심을 갖고 계셨던 사람들을 돌아볼 것을 요구받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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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국 안 책방 - 아직 독립은 못 했습니다만 딴딴 시리즈 2
박훌륭 지음 / 인디고(글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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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약국에서 화장품도 팔았다. 사실 외국에선 드러그 스토어라고 해서 약국에서 온갖 것들을 파는 걸 보긴 했는데, 우리나라에선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뭐 그랬었다. 하지만 올리브영이니 뭐니 하는 화장품 멀티샵이 늘어나면서 이 기능을 거의 가져가 버렸다. 현직 약사인 이 책의 작가는 그렇게 (화장품이 빠지면서) 비어버리게 된 자리에 책을 채워놓기로 한다. 이른바 샵인샵 책방의 시작이다.


이 책은 그렇게 조금은 충동적(?)으로 시작한 책방 경영기다. 경영기라고 해서 무슨 전문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는 건 아니고, 그저 소소한 작가의 경험들, 책방을 운영하며 있었던 일들 중 기억에 남는 장면들 등을 소소하게 엮어낸 책이다.





비슷한 종류의 작은 서점의 운영자들이 쓴 책을 몇 권 본적이 있는데, 이건 또 약국 안에 있는 책방이라는 콘셉트가 흥미로웠다. 작은 동네서점의 가장 큰 고민은 임대료 같은 고정비용지출 부분인데, 확실히 약국이라는 기본적인 시설이 바탕에 있어서 그런지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적다. 이와 관련해 책 표지에도 적혀 있는 “아직 독립은 못 했다”는 문구는 아쉬움 보다는 일종의 여유가 느껴지는 표현이다.


사실 저자는 굳이 서점을 독립시키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듯하다. 요새 유행하는 일종의 부캐 느낌이랄까. 약국 안에 책을 들여놓고 서점을 찾아오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데서 느끼는 소소한 즐거움, 또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조금 더 싸게 들여올 수 있다는 이득이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요인인 것 같다. 먹고 살 걱정만 없으면 책만 보며 책에 관한 일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에겐 그저 부러울 따름.




책 말미에는 작은 책방을 운영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몇 가지 조언이 실려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책방을 생계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뛰어드는 사람들을 위한 경영적 차원에서의 조언은 아니다. 그건 애초에 부업으로 시작한 동네서점 이야기라는 한계이겠지만, 뭐 이런 모양으로 또 하나의 책방이 만들어지는 것도 재미있긴 하니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나와의 공통점도 느껴진다. ‘역시 책 좀 보는 사람은 저런 데가 있지’ 하면서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얇은 책이라 금세 마지막 장에 이른다. 작가의 즐거운 도전이 좀 더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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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적 설교는

하나님을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분으로 만드는

보수주의에서 탈피해야 한다.

그러한 형식적 하나님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설교는 우리가 제멋대로 경영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자유주의에서도 탈피해야 한다.

경영은 결코 생명을 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월터 브루그만, 『마침내 시인이 온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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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비판을 싫어하기 때문에 많은 경우 그냥 숨어버리거나,

부정적인 피드백을 회피하곤 하는데,

이리하여 성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난관을 헤치고 나가는 유일한 방법이 리마커블해지는 것이고,

비난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 지겹지만 안전하게 행동하는 것이라면,

이런 것도 과연 선택이라고 해야 하는가?


- 세스 고딘, 『보랏 빛 소가 온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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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여자들 3 - 4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4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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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여자들’ 시리즈의 마지막 권이다. 이번 권에서는 드디어 삼두정치가 결성되는 장면이 나온다. 전직 법무관 신분으로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방해로 당시 로마 남자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영예인 개선식을 포기하고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다.(늘 상식을 깨뜨리는 카이사르다.)


그렇게 수석 집정관에 당선되었지만, 하필 그의 동료가 카이사르가 하는 모든 일을 방해하겠다는 작심으로 나선 비블루스였다. 그리고 이제 카이사르의 반대편에는 모든 면에서 원로원 계급의 이익을 지키겠다고 나선 보니파라는 정치적 파벌이 있었다. 애초에 집정관 당선이 자신의 정치 인생의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카이사르로서는 더 큰 한 발을 내딛기 위해 이런 상황을 타계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여기서 삼두정치가 등장한다.


당대 최고의 군사적 업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태생적 한계 때문에 원로원파로부터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던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전쟁에서 싸운 병사들에게 배분할 땅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또 새롭게 얻은 동방속주의 세금 징수업무에 나섰다가 큰 손해를 보게 된 기사계급은 크라수스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으나 크라수스 역시 원로원의 반대로 막혀 있었다. 카이사르는 이 두 사람과 손을 잡고 현직 집정관의 힘으로 그들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면서 동시에 자신이 원하던 갈리아 정복을 위한 합법적 지위를 얻어낸다.






마침 유튜브 채널에 카이사르 시기를 다룬 로마인 이야기 읽기 영상을 올리는 중이라 같은 시기를 어떻게 다르게 써 내려가는지 비교하며 보는 맛이 있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경우 삼두가 결성되자마자 모든 문제가 명쾌하게 해결되고 보니파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 것처럼 서술을 하지만, 콜린 매컬로는 삼두 결성 이후에도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는 로마의 정치상황을 묘사한다. 아무래도 이쪽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갖는 글의 여유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에 비해 “로마인 이야기”는 로마사 전체를 써가고 있으니까.


그렇게 꽉 막힌 로마의 정치 상황을 한참 읽다 보면, 카이사르가 이런 뭐 하나 되는 일없는 체제를 뒤엎어버려야겠다는 결심을 한 이유가 실감나게 와 닿는다. 겨우 1년 밖에 안 되는 집정관 임기를 오로지 동료 집정관인 카이사르가 하는 일을 막기 위해 쓰는 행태는, 오늘날의 정치 상황에도 그대로 오버랩 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이런 행동의 배경에는 원로원 계급이라는 기득권층의 이익을 철저하게 보호하겠다는 속셈이 있었으니...


결국 정치가 자기 계급의 이익을 위해서만 치달으면 엉망이 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평민들의 이익만을 위해 나섰던 포퓰리스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국가 정치는 좀 더 큰 공동체를 위해 운영되어야 하지만, 요새는 소위 정체성 정치의 일환으로 소수그룹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만이 정당하고 옳은 일인 양 착각하는 정치인들이 참 많다.





애초에 선거로 뽑힌 정치인들이 국정을 운영한다는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그래서 그런지 밥 먹고 하는 일이 온통 이런 고민뿐이었던 고대 철학자들 중에 의외로 민주정을 혐오하던 이들이 적지 않다) 또, 소위 표계산이 쉬운 소선거구제 아래서는, 어떻게 하든 상대 후보보다 1표만 더 받으면 이길 수 있으니, 진영을 가리지 않고 오직 자기편에 더 강한 방식으로 소구하려는 정치인들이 나오기 더 쉬운 것 같기도 하다. 선거가 충성투표 쟁, 정체성 전투의 현장이 되어버린 상황에서는 백약이 무효다.


물론 그렇다고 카이사르의 삼두정치 같은 해결책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결국 삼두정치란 실력자들의 야합이었고, 폼페이우스나 크라수스는 결국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으니까. 만약 그 중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던 카이사르까지도 자신의 정체성에 몰입하는 인물이었다면 로마의 상황은 훨씬 더 안 좋아졌을 것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카이사르가 만들어 낸 1인 중심의 체제에는, 그 1인의 자질에 너무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이제 카이사르는 갈리아로 떠났다. 그 유명한 갈리아 전쟁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풀려나올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 보자.(그 전에 읽어야 할 책들이 몇 권 대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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