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그런 신정론을 다룬다. 책의 볼륨 자체가 작기도 하고, 읽다 보면 곧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애초에 책의 배경이 되는 글은 저자가 한 신문에 기고했던 칼럼이기도 해서(이 칼럼을 확대하고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한 게 이 책이다), 전반적인 논지가 복잡하지는 않다.
저자는 이 책에 두 가지 전선을 설정한다. 첫 번째 전선은 세속주의자들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그어진다. 그들의 공격은 앞에서 언급한 내용과 같은데, 이 세상에 이렇게 악과 고통이 가득하다면 전능하면서도 선한 신은 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는 식이다. 신이 선하다면 세상이 악과 고통에 시달리도록 내버려둘 리가 없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걸 보면, 그런 능력이 없거나, 애초에 그럴 의사가 없다는 식.
하지만 저자는 이런 식의 사고를 신인동형론적 발상에 근거한 허수아비 때리기에 불과하다고 답한다. 신을 인간적 차원에서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과 잣대로 그의 선택과 행동을 평가할 수 있다는 가정과,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보고 있는 물리적 우주에 국한되는 것이라는 가정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그들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라 딱 자기들 수준의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공격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저자는 “유물론자는 누군가가 부당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일종의 주술적 사고에 사로잡혀, 현실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도덕적 질서가 없으니 물질의 인과 관계를 초월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즉각적으로 결론짓는다”고 말한다.
또 하나의 전선은 흥미롭게도 동료 그리스도인과의 사이에 그어진다. 이들은 악과 고통의 문제에 관해 하나님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지나치게 성급하고, 많은 말을 내뱉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이들이 악과 고통이 어떤 식으로는 하나님의 더 큰 선을 이루는 데 필요한 일이라고 말할 때 커진다. 이렇게 될 때 악과 고통은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가 되어 버리고, 그렇게 되면 애초의 목적과 다르게 하나님을 악의 원인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저자의 이 두 번째 전선의 하위 전선이 이른바 칼뱅주의와의 사이에 그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중예정(구원받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모두가 예정되어 있다는 주장)과 제한 속죄(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을 받을 사람들을 위해서만 죽으셨다는 주장)라는 교리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기 위한 논리적인 결론으로 나온 것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위와 같은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
저자는 이에 대해 “하느님께서 죄와 죽음의 역사,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당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영원히 의지하신다는 말과, 하느님은 영원부터 피조물을 선하게 청조하셨으며 악조차 은총이 작용하는 계기가 될 정도로 만물이 선을 향하도록 질서를 잡으심으로써 피조물들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선을 이루신다는 말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진정한 섭리란 후자 쪽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