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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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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것만 기분 나쁜 게 아냐.

더 싫은 건 아름다움을 규격화하려는 그 권위적인 자세라고.

아름다운이란 게 사람에 따라 달리 보이지 않는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어.

 

 

  줄거리 。。。。。。。                                                 


        누구도 가까이 가고 싶어 하지 않을 정도로 못생긴 주인공 에피판. 그런 그의 앞에 어느 날 천사 같은 그녀 에텔이 나타났다. 예술영화에 출연할 추남 배우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 간 영화제작소에서 대번에 거절을 당한 에피판은(너무 못생겨서란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다가 도리어 관계자들로부터 봉변까지 당하고 만다. 비참한 마음에 피까지 흘리고 있는 그에게 다가와 친절을 베풀어 준 사람이 에텔이었다. 너무나 사람 좋은 성격에, 자신의 외모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에텔에게, 에피판은 단숨에 빠져버린다.


 

        미녀와 그를 사랑하는 추남. 어디서 많이 본 설정이다. ‘노트르담의 꼽추’. 이야기 속의 에피판의 별명 중 하나도 바로 콰지모도다. 하지만 에피판은 스스로를 콰지모도의 운명과 동일시하기를 거부한다. 자신과 에텔은 동화 속 미녀와 야수와는 다른 관계라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뇐다. 어린 시절부터 성적인 억눌림 속에서 자라왔던 그는 무의식적으로 일반적인 이야기 속의 성적인 결합으로 끝나는 해피엔딩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에피판은 놀라운 사기극을 꾸민다. 추남 모델이 되기로 한 것. 아름다운 것들로만 온통 도배가 된 무대에 식상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추남이 등장함으로써 신선한 자극을 줄 수 있고, 또 그로 인해 모델들이 더욱 돋보일 수 있다는 명목이다. 용케 이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그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게 된다. 심지어 미인대회의 심사위원이 될 정도로.


 

        자, 이제 엄청난 성공과 명예를 얻게 된 에피판. 그와 에텔의 관계는 이제 어떤 식으로 발전이 될 수 있을까? 어느 날 에텔이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이야기는 미궁으로 빠져든다.

 


  감상평 。。。。。。。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그것만으로도 뭔가 기대감을 가지고 끝까지 읽어나가도록 하는 힘이 있다.

 

 

        이 소설에서 저자는 추남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그리고 이 추남의 생각과 말을 통해 이 시대에 만연한 외모지상주의, 물신숭배사상, 각종 위선과 자기기만을 있는 그대로 폭로한다. 굳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말 그대로 일그러진 사내여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이 시대의 속물근성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천대와 무시를 받았지만, 한 번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모든 사람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고 찬사를 바친다. 이보다 더 확실한 고발이 또 있을까?

 

       하지만 더 큰 고발은 마지막에 있다. 그토록 세상을 경멸하며, 자기의 ‘숭고한’ 이상을 위해 살 것처럼 보였던 에피판 자신도, 결국 그런 세상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는 인간이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에텔의 말처럼 에피판 역시 그저 예쁘게 생겼기 때문에 에텔을 사랑하는 인물에 불과했다. 저자는 마지막에 주인공을 던져버림으로써 애초에 목적했던 바를 너무나 분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오늘날 시대사조의 위선과 자기기만에 대한 저자의 고발은 매우 통쾌하지만, 그러기에 책을 덮고 세상을 바라보면서는 왠지 모를 씁쓸함이 더 묻어나온다. 같은 저자의 이전작, ‘적의 화장법’과 비교될만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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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픔의 자서전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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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배고픔, 나는 이것을 존재 전체의 끔찍한 결핍, 옥죄는 공허함이라 생각한다.


 

 요약 。。。。。。。                                                  

 

        유명한 아멜리 노통브의 자전적 소설의 완결판인 듯 하다. 이전에 읽었던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이 그의 세살 이전의 유아기를 다루고 있고, ‘사랑의 파괴’에서는 유년기의 이야기를 그렸다면(그리고 아직 읽지 않은 ‘두려움과 떨림’이 나머지 기간을 그렸다고 한다), 이 책 ‘배고픔의 자서전’은 작가 자신의 이전 모든 책들을 종합한 유소년 시기에 대한 종합적 그림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벨기에 외교관의 딸로, 일본에서 태어나 세 살까지 지내다가 중국으로 이주, 다시 뉴욕과 방글라데시, 동남아의 여러 나라들을 거치면서 자아를 형성했던 저자의 독특한 이력이 이 책을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은 단순히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나열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전작인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에서는 어린아이 특유의 자기중심적 사고를 키워드로 해 사물을 분석해냈고, ‘사랑의 파괴’에서는 이데올로기라는 문제를 유년기 아이의 눈으로 그려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배고픔’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저자가 생각하는 ‘배고픔’은 단순히 위장이 비었음을 알려주는 신호가 아니다. 저자는 존재 자체가 보여주는 근원적인 ‘결핍’을 배고픔이라는 말로 그려낸다. 이 작품에서 어린 아멜리는 사랑에 배고파하고, 점차 뒤로 사라져가는 어린시절을 안타까워한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책을 읽고, 더 많은 사고를 하며 생각의 깊이를 키워나가는 주인공. 이제는 저자의 글쓰기 스타일에 빠지게 되어버렸다.


 

 

 감상평 。。。。。。。                                             

 

        언제부턴가 그 이름만으로 책을 펼치게 만드는 몇 명의 작가들이 생겼다. 이 책의 저자 아멜리 노통브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다. 어린 시절 경험했던 많은 여행들은 역시 사람의 생각의 지평을 많이 넓혀주는 듯 하다. 외교관 아버지를 둔 것이 작가로서의 저자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는 데는 매우 큰 영향을  준 부분인 듯.(내 경우는 아쉽게도 그다지 많은 경험이 없는 부분이다.)

 


        책에 등장하는 여러 나라들의 모습을 인상적인 단상의 형태로 그려내는 능력은 어린 시절 형성된 것일까? 나도 배우고 싶은 능력이다. 깊은 사색이 담긴 한 문장. 나도 당장 여행이라도 떠나야 하는 건가.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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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심술이라는 초능력이 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을 말하는데,

염력, 텔레파시 등과 함께 초능력의 주요 범주 안에 들어가는 능력이다.

여기서 초능력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이라는 데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좋을까?

만약 그런 능력이 있다면, 다른 사람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상당히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인간들에게서 보여지는 다툼의 대부분은,

상대방의 기분이나 감정을 생각하지 않고,(혹은 모르고)

무심코 내뱉은 말 때문에 일어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상대방의 의사에 대한 오해도 없어질 것이므로,

이 역시 인간들의 다툼을 줄이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물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게 됨으로 인해 생기는 어려움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란 족속들이 워낙 나쁜 생각을 많이 하니까..

그런 생각들을 다 알고 사람을 대한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닐 터..





혹자는 이런 능력이 보통 사람에게 불가능 한 일이니

굳이 이런식으로 사고력의 낭비를 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생각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초능력과 같은 비정상적인 능력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치밀한 관찰력과, 충분한 추리력을 바탕으로 한 능력이다.

상대방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올바로 추측할 수 있다면,

그것이 상대의 마음을 읽는 것이라고 할 수있지 않은가?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기 원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일부러 하느냐, 무의식적으로 하느냐 혹은, 드러내는 정도의 강약의 차이만 있을 뿐,

대개의 경우 자신을 나타내려는 여러가지 동작, 모습을 겉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바로 이 점에 집중한다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도 아주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자~ 그럼 내 글을 여기까지 진지하게 읽고 있는 당신을 위해서,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지침을 알려주겠다. 기억해 두시라.. ^^;;


일단 상대방의 목소리 톤으로 그 사람의 심리를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다.

밝고 대체로 높은 톤의 목소리는 그 사람의 심리상태가 긍정적인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의미하고,

무겁고 낮은 톤의 목소리는 그 반대라는 것 쯤은 다들 알 것이다.

특히 아주 낮은 목소리로 톤의 변화가 없이 말하고 있을 때는 좀 위험한데,

이는 대개의 경우 큰 분노나 슬픔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기에, 내가 굳이 여기서 말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두 번째는 말할 때의 그 사람의 행동, 동작을 관찰하라는 것이다.

무릎이나 다리를 떠는 동작은 긴장을 풀기 위한 것이다.

이는 그 사람이 지금 뭔가가 마음에 걸리거나 초초한 상태라는 것을 보여준다.

상대방의 말에 맞장구를 자주 치는 사람은 상대방과 친해지고 싶다는 의미이다.

입술을 빠는 스타일은 상대방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심리가 드러나는 것이며,

어떤 경우에는 뭔가 숨기고 있다는 뜻이다.

미간을 찌뿌리는 행동은, 상대방에게 경계심을 보이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 밖에도 대화할 때 상대방의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지켜보는 것도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주요 코드이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마음이 가는 곳에 눈을 두게 되어 있다.





세 번째는, 대화시가 아닌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행동을 관찰하기이다.

이것은 그 사람의 성격 유형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며,

그렇게 알게된 성격은, 그 사람의 여러 행동들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 사람이 어떤 형식의 시계를 차고 있느냐에서부터,

지하철을 탈 때 표를 어떻게 지니고 있는가, 즐겨입는 옷차림은 어떤 스타일인가 등등,

대단히 여러가지 요소가 고려의 대상이 된다.

예를 들면, 로마 문자가 쓰여진 시계, 화려한 장식이 달린 시계, 특이한 디자인의 시계, 숫자가 없는 시계 등은 각기 그것을 선호하는 사람의 성격을 나타낸다.

로마 문자는, 대체적으로 성실하고, 꼼꼼하며, 화려한 장식은 폼잡는 것을 즐겨하는 사람이다.

특이한 디자인의 시계를 좋아하는 사람은 어린아이 같은 경향이 보일 수 있으며,

숫자가 없는 스타일은 대개 형식을 거부하는 자유주의자들이다.

이 방식에서 주의할 점은, 어느 한 가지로 그 사람의 성격 전체를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실패하기 가장 좋은 경우는, 그 사람의 부모님이 사다주신 시계를 차고 있을 때다. ㅡㅡ;;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위의 세가지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각각은 상황과 여건에 따라 다른 의미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네 번째 요소가 가장 중요한데,

그것은 바로 감(感)이다.

혹자는 '감'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느냐고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감은, 단순한 '찍기'가 아니라 좀 더 고도의 추리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감'은 다른 말로 '느낌'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데,

이것은 상대가 겉으로 보여주는 모든 징후들을 종합해 내리는 최종적인 판단이다.

상대가 말할 때 쓰는 어휘, 눈빛, 시선, 자세, 말의 빠르기, 말의 고저, 주기적으로 하는 행동, 내가 어떤 말을 했을 때 상대방의 반응, 대답하기까지 걸리는 시간 등등

좀 더 많은 것을 고려하면 고려할수록, '감'의 정확도는 향상된다.





이런 것들은 단지 직접 만나서 대화를 할 때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컴퓨터로 채팅을 할 때도 그 사람이 자주 사용하는 어휘, 반응의 속도(타자수를 고려해서)와 같은 요소들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여기 제시된 한 두가지 뿐만 아니라 좀 더 많은 요소들이 작용한다)





감을 키워주는데 좋은 것들로는, 많은 양의 독서를 들 수 있다.

특히 인간 대중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이 좋다.

여러 소설류도 괜찮고, 뉴스나 신문(이것들은 지난 번 글에서 말했듯이 왜곡이 많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잡지 등도 유용하다.

특히 그 자체가 인간 대중을 다루고 있는 역사 서적은 대단히 유용하다.





독서를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다른 사람의 겉으로 나타나는 징후들을 충분히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춰졌다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 만은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주의점.

상대방의 마음을 읽기 위해서는 내가 객관적일 필요가 있다.

객관적이라는 말은, 상대와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만 망원경으로 산을 관찰하듯, 상대방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정말로 망원경으로 관찰하라는 말은 아니다. 시도하지 말자.)

돋보기로는 산을 볼 수 없다.

그것은 작은 부분을 너무 크게 확대시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상대방에게 일정거리 이상으로 가까이 갈 경우,

위의 여러 방법들은 실패할 확률이 높아진다.

치밀한 관찰력과 주의력은 상대방의 의미없는 행동을 확대 해석해, 지나치게 큰 결과를 도출해 낼 위험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빠지는 함정이 여기에 있다.





객관성을 잃은 채,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으려 한다면,

읽히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그 사람의 생각이 될 뿐이다.

때문에 늘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한 채,

편견(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없이 상대를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정말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의 마음은 읽을 수 없는 것이냐고?

걱정하지 마시라..

정말 가까워진다면, 굳이 읽으려고 하지 않아도 서로 느낄수 있지 않을까?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둘은 한 몸을 이룰'것이기 때문이다.

비단 남녀사이 뿐만 아니라, 진정한 친구, 선후배, 선생님과 제자 사이에도 이런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진정으로 상대방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생각, 느낌까지도 내게 전달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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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땅을 기경하라
김남준 / 솔로몬 / 199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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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흐를수록 기독교적 분위기에는 익숙해져가나

복음에는 낯설어져 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조국의 교회가 사도행전의 교회와는 다른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요약 。。。。。。。                                                   

 

        거의 해마다(아니 어쩌면 한 해에도 몇 권씩) 새로운 책을 내어 놓는 다작가(多作家), 그러면서도 한 권 한 권이 결코 가벼운 주제로 쓰이지 않은 대단한 필력의 소유자인 김남준 목사님의 책이다. 출판사항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최근에 나온 책은 아니고, 지금으로부터 무려 15년 전에 나왔던 책이다. 책의 뒤편에 실린 ‘이 작은 책자에 실린 글은 어느 이름 있는 설교가의 설교문도 아니고, 매주일 강단에서 많은 회중을 섬기는 유력한 목회자의 이야기도 아닙니다.’라는 문구가 빙긋이 미소를 짓게 만든다. 아마도 ‘이름 있는 설교가’이자, ‘유력한 목회자’가 된 저자의 현재 모습이 오버랩 되기 때문이리라.


 

        이 책은 저자의 다른 책들이 그렇듯, 유사한 주제로 강론된 설교문들을 모아서 엮어낸 책이다. 총 네 편의 설교문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주제를 굳이 말하자면, ‘교회의 영광스러운 본 모습인 부흥을 회복하자’라는 것. 이를 위해 저자는 우선 현실이 ‘묵은 땅’과 같은 부정적인 모습이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한 후(1장), 이런 상태에서 영광스러운 교회의 참 모습을 회복하기 위한 본질적인 방법들을 제시한다.(2~4장)


 

 

 감상평 。。。。。。。                                               

 

        학교 구내서점에서 저자의 이름만으로 골라든 책이다. 그리고 몇 달 동안 책장에 꽂아 있다가 얼마 전에야 책을 열어보았는데, 아뿔싸, 설교집이었다. 내 독서 리스트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장르이다. 물론, 앞서 말한 대로 저자의 다른 책들도 대부분 설교문들을 모은 것이지만, 최근에 읽어본 책은 좀 더 분석적이다. 비교적 초기의 저술에는 보다 웅변적인 느낌이 강했다.


 

 

        시종일관 저자는 ‘교회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떠올리고 있다. 진정한 부흥이 일어났던 사도행전의 이야기와, 세계적인 부흥 사건들이 온전히 저자를 사로잡고 있는 모습이다. 물론 저자가 말하려는 ‘부흥’은 흔히 말하는 ‘수적 증가’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교회의 본질에 충실해서, 그리스도인들 자신은 물론 사회에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던 그런 모습 말이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들었던 의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저자가 그토록 바라는 모습의 ‘대 격변과 같은 부흥’은 왜 손에 꼽힐 정도로 적을까 하는 점이고, 두 번째는 그런 ‘부흥’이 오늘날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정말로 회개가 부족하고, 말씀에 입각한 설교가 부족하고, 성령에 대한 의존이나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일까 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그 사이사이, 그리고 오늘날에는 진실한 가르침과 그 실천이 정말로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하나님은 각 시대마다 그 분의 진실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남아 있었을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다. 예수님이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쇠락할 수 있는가. 단지 수에만 집중하기에 이런 생각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물론 저자의 의견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주장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이런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것)


 

 

        진정한 회개에 이은 진실한 말씀에 대한 사모, 그리고 여기에 이어지는 성령의 능력에 대한 갈구와 기도의 능력을 의지하는 삶. 어느 시대, 어느 사람들에게라도 결코 가벼이 여겨질 수 없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부분이 잘 강조되어 있는 설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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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에 관한 세 번째 관찰은 '두려움'에 관한 것이다.

익숙해짐이나 애착 못지 않게, 사람들의 사고를 강하게 지배하는 것이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두려움을 갖게된다.

어머니의 자궁에 있을 때 아기는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그 안에는 어떤 위험요소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양수라는 따뜻한 물에 잠겨 있으면서,

어떤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

배고픔을 느끼면 탯줄을 통해서 어머니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으면 되고,

피곤하면 그냥 그대로 자버리면 되는것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태아는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즐겁게 놀기도(?)한다고 한다. ㅡㅡ;

뭐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그 곳이다.




더구나 자궁 안은 사시사철 일정한 온도로 맞춰져있다.

난방, 냉방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태아가 잠겨있는 양수는, 웬만한 외부의 충격을 흡수하는 쿠션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 곳에는 이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온갖 종류의 혼란함도, 소음도, 매연도 없다.

태아에게 있어서 그 곳은 낙원인 것이다.

에덴동산이 그 곳과 비견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아닐까?





하지만 모두들 알다시피, 태아는 영원히 그 곳에서 살 수는 없다.

10개월의 기간이 지나면, 태아는 그 낙원에서 혼란한 세상으로 밀려나오게 되는 것이다.

아마 태아도 직감적으로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전에는 한없이 편안하기만 했던 그 곳이,

이제는 자기의 자라버린 몸을 겨우 담고 있는 크기로 줄어든 것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낙원에서 세상으로 나와야 할 때,

아기는 엄청난 두려움에 접하게 된다.





아기가 처음 보고 느끼는 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요즘에야 거의 대부분 산부인과를 찾아가서 출산을 하니,
(난 집에서 태어났다는... ㅡㅡㆀ)

대부분의 아기들은 병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대한 첫 이미지를 갖게 될 것이다.

한 번 아기의 입장이 되어보자.




'한 두달 전부터 내가 있는 곳이 갑갑하게 느껴진다.

전에는 참 편했는데 말이다.

이제 여기 말고 좀 더 편한 곳으로 나가고 싶다.

지난 열 달간 계속 나랑 얘기하던 누군가한테 말해야겠다.

하지만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난 말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좋은 수가 생겼다.

바디 랭귀지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내가 답답하다는 것을 몸으로 알려주자.




아.. 뭔가 감이 온다.

헛.. 갑자기 내가 있는 곳이 더 답답해져온다.

이대로 있다가는 깔려 죽을지도 모르겠다.

어디 살길을 찾아야 하는데... 아, 저기 통로가 있는것 같다.

좀 작아보이긴 하지만, 지금 난 살기 위한 투쟁을 하는 것이다.

저 밖에 뭐가 있을지 걱정이 되긴 하지만, 일단 도전해보자.





드디어!! 내 머리가 빠져 나왔다.

아.. 근데 여긴 너무 이상하다.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큰 소리로 떠들고 있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기도 하다.

여기 저기 많은 존재들이 움직이는 것 같다.

그렇다고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고,(아직 난 눈을 뜨지 못했다.)

하지만 뭔가가 바쁘게 왔다갔다 하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내 섬세한 피부도 갑작스런 자극에 놀라는 것 같다.

다시 들어가야겠다.

여기는 내가 살 곳이 못되는거 같아.

조금 불편하긴 해도 전에 그 곳이 더 나아.

헛.. 근데 들어갈 수 없다.

들어가려고 몸부림을 칠 수록 자꾸자꾸 빠져나오기만 한다.





아.. 결국 완전히 빠져나오고 말았다.

이런 괴물들이 사는 곳에 나 혼자 떨어져 나오게 된 것이다.

아얏! 누가 날 때렸다.

슬프다. 이제 이렇게 난 맞아 죽는 것인가...'





약간의 과장과 상상이 들어갔지만,

태아는 분명 이 과정에서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인간은 '급격한 환경의 변화에서 두려움을 느끼게 마련'이라는 점이다.






변화라는 것은 양면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반면,

또 다른 사람에게 그것은 안정된 현재의 위치를 잃게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권력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그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한심한 작태를 연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단 권력자들 뿐만 아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에게 뺏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갖게 만드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돈이나 물건 등 여러가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그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비이성적인 행위까지 서슴지 않도록 만든다.

요즘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의처증이나 의붓증이 이런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미래에 어떤 것이 있을지 알 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 때문에 발생하는 두려움도 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불확실성으로 인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까이에서 찾아보자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수능을 앞둔 수험생들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자그만치 12년 동안의 공교육을 받은 결과를 측정하는 단 한 번의 시험.

물론 많은 준비를 해왔겠지만,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법.

안심하고 시험에 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같은 맥락에서 취업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두려움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이 성취하고 싶은 목적을 이룰지 못할까봐 갖는 두려움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러면 우리의 눈을 좀 더 크게 떠 보자.

이 모든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은 없을까?

급격한 변화로 인한 두려움, 상실에 대한 두려움, 불확실성으로 인한 두려움..

이런 두려움들이 점점 확장되어서 가장 극치에 이를 때가 언제일까?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변화는?

죽음보다 더 극적이고 큰 변화가 있을까.

인간이 상실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자신의 생명을 잃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

인간이 예상할 수 없는 가장 큰 상태는?

죽음 이후의 상태일 것이다.






뭐.. 너무 작위적이지 않느냐고 반문을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렇지만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죽음은 너무나고 급작스럽고 큰 변화이며,

인간이 잃을 수 있는 가장 큰 것을 잃는 것이고,

죽음 이후의 상태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내가 믿기로는 단 하나의 예외적인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이 비록 급작스러운 변화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보다 앞서서 그 변화를 경험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시리라고 약속하시는 분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통해 생명이라는 큰 자산을 잃어버리기는 하지만,

앞서 말한 그 분이 그들에게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비록 그리스도인들도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위에서 말한 그 분이 그들에게, 그들이 죽은 다음 있을 곳은 좋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이보다 더 크고 확실한 증거가 필요한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두려움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조차,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자, 그러면 이제 시선을 다시 우리에게로 돌려보자.

우리는 이미 가장 큰 두려움을 극복한 상태이다.

조금 전 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에 관한 것이었는가?

그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크게 느껴지는가?

그런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그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이미 우리는 그것보다 훨씬 더 큰 두려움을 극복한 상태인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인간은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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