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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E.H.CHRR / 다문 / 1991년 2월
평점 :
품절
# 들어가며
'역사란 대체 얼마만큼 객관적일 수 있을까'
역사의 대상이 되는 것은 '과거의 사건과 인물'.
유일하게 진실인 하나의 행적이 존재한다 한들,
너무 많은 역사가가 너무 많은 사료를 바탕으로 지어낸 저마다의 역사가 그것과 합치하는지 알게 뭐람.
이 의문을 해결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루에도 몇번씩 과거의 사건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그 의의에 대해서, 교훈에 대해서 얘기를 한다니.
어쩌면, 내 입맛에 맞는 역사만을, 내 입장에 유리한 역사만을 취사적으로 선택한 것은 아닌지.
한번쯤 고민해보셨을겁니다.
# 역사가와 사실
" 시저가 루비콘이라는 작은 강을 건넜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 본 것은 역사가들이 자기들의 비유에 따라 관심을 갖고 결정한 것이지 그 전에나 그 후에 수백만의 다른 사람들이 루비콘 강을 건넌 사실에 대해서는 어떤 역사가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
사실성을 전제한다면, 사료 자체는 절대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역사가가 과거의 특정 사실에 주목하여 취사선택하여 사료로 삼는 그 순간,
이미 과거의 인물과 사건이라는 객관적 실체는, 역사가 개인의 주관을 통해 한번 걸러지게 되는 셈이니까요.
우리가 일컫는 역사는, '역사가의 주관'과 '과거의 사실' 과의 만남을 통해서 비로소 시작됩니다.
여기서 저 유명한 한구절이 등장하는군요.
"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 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
그리고, 역사학자 Carr 는 조언합니다. 역사를 연구하기에 앞서, 역사가를 연구하라고.
# 사회와 개인
" 인간을 개인으로서 취급하는 것은 전기이고, 인간을 전체의 일부분으로서 취급하는 것은 역사라고 구분한다는 것은 그럴 듯 하고,
또한 좋은 전기는 나쁜 역사를 만든다는 생각도 그럴 듯해 보인다. "
그런데, '과거의 사실' 이야 이렇다 저렇다 할 말이 많지 않으니, '역사가의 주관' 을 좀 더 들여다보도록 하죠.
역사라는 것이 역사가의 '주관'에 달린 문제라면, 대체 어디에서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단 말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Carr 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역사가의 '주관' 이란, 사실 '주관' 이 아니다..
갸우뚱하던 독자에게, 이 온화해보이는 역사학자는 다시 일갈합니다.
" '주관'이라는 것이 대체 있기는한가? "
역사가 역시도 하나의 사회 현상이고 자기가 속한 사회의 산물인 동시에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그 사회의 대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 조언을 덧붙입니다.
역사책을 집어들 때에는 표지에 적혀있는 저자명을 찾아보는 것 만으로서는 충분치 못하다. 간행자나 집행 시일도 아울러 유의해야 한다고.
# 역사와 과학과 도덕
" 관찰자와 그 대상, 사회 과학자와 수집된 자료, 역사가와 사실들, 이들의 관계는 연속적인 것이고 부단히 변화한다. "
그래, 좋다. 역사가도 연구하고, 간행자와 집행 시일도 아우러 유의하지.
그럼에도 독자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 그래도 역사란 별로 믿을게 못되는 것 같은데. 쩝
그러자, 역사학자 Carr, 드디어 성이 났나 봅니다.
" 이제껏 무엇을 들으셨소? 역사란 '믿는다/안믿는다' 처럼, 정체되어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오. "
엥. 이제껏 몇편 안되는 역사책을 뒤적이며, '아 이런 일이 있었군' 내지는 '아 이래서 저렇게 된거였군' 따위의 감탄사를 연발하기 바빴던 독자.
통념은 깨어졌고, 심기는 불편해졌습니다. 이제서야 진지하게 이 역사학자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도 이제 친절하게 재차 설명해줍니다.
" 내가 강조하고 싶은 단 한 가지 요점은, 추상적 초역사적인 기준을 세워 놓고서 그것에 의하여 역사적 행동을 판가름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오늘날 완전한 독립성을 주장할 수 있는 과학이란 거의 있을 리 없고, 사회과학의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
#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 역사에 있어서 인과관계라는 논의의 열쇠는 바로 앞에서 본 목적이라는 관념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반드시 가치 판단을 포함하게 된다. (중략) 역사에 있어서의 해석은 언제나 가치 판단과 결부되고, 인과 관계는 해석과 결부된다. "
말씀드렸다시피, 이제 독자의 통념은 깨어졌습니다.
같은 시대를 다르게 서술해놓은 두권의 역사책을 제 앞에 놓아둔다해도, 흥분하지 않을 자신이 생겼습니다.
저자와 시대적 배경을 포함해 두권 모두 고루 읽은 다음 해야할 일은, 옳게 쓰여진 한권을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각자에 담겨진 역사의 인과관계 - 이러저러한 사건이 '왜' 일어났는가 - 를 모두 주목해야겠죠.
# 진보로서의 역사 & 넓어져 가는 지평
" 진보를 믿는 것은 결코 어떠한 자동적인 불가피한 과정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가능성의 계속적인 발전을 믿는다는 뜻이다. 진보라는 말은 추상적인 것이다. 인류가 추구하는 구체적 목적은 역사 진행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지 역사의 외부에 있는 원천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
Carr 는 마지막 두장에서 지금껏 펼쳐놓은 얼개를 실제 세계사에 대입하고 있습니다.
그가 초판을 낸 것은 냉전이 한참이던 1961년. 냉전은 산업혁명 이래로 믿어왔던 일련의 진보, 즉 인류의 역사가 직선으로 발전한다는 헛된 믿음이 학문의 세계에서 그리고 현실세계에서 저만치 물러가던 시기였습니다.
영국의 경험주의자들로부터 근대철학을 구해내고자 했던 칸트처럼,
Carr 역시도 냉전의 한복판의 회의주의와 시니시즘으로부터 '인간 가능성의 계속적인 발전'을 구해내고자 했던 거겠죠.
# 보탬 - 포퍼의 결정론에 대해
이등병 시절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제목도 자극적이었을 뿐더러, 저자 또한 조지 소로스라는 걸출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생각없이 집어들었죠.
제 기억이 맞다면, 이 책은 굉장히 친절하게 쓰여있습니다.
1부와 2부로 나누어, 1부에는 2부에 사용할 개념들을 미리 소개하고 있거든요.
오류성이니 반사성이니 평형에의 접근이니 하는 것들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개념을 소개하기 이전에 그의 스승, 칼 포퍼를 소개하고 있구요.
역사학자의 책을 읽다가 뜬금없이 옛생각이 났던 이유가 아마 포퍼 때문이었을겁니다.
Carr 가 「역사와 과학과 도덕」에서 제시하고 있는 논지가 포퍼의 그것과 굉장히 흡사하기 때문이죠.
이른바, 완전히 독립적인 과학이란 없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를테면, 경제학이나 사회과학 - 역사학도 물론이겠지만 - 의 영역에서, 주체 자체가 사건으로부터 독립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역사란 역사가의 의식을 반영하고, 경제는 경제학자의 예측을 반영하고, 사회는 사회과학자의 논술을 반영한다는 것이죠.
한국은행의 경기예측과 삼성경제연구원의 경기예측이 단지 예측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들의 심리와 행동에 일정정도 영향을 끼치는 것 처럼.
그런데, 재밌는 것은, 포퍼의 논지는 일찌감치 나왔건만,
실제 포퍼는 다음 단락 「역사에서의 인과 관계」에 등장해 Carr 로부터 '죽은 말에 채찍질을 해서 산 말처럼 보이게 하려는 자' 라는 싫은 소리를 듣고있다는겁니다.
Carr 가 포퍼를 비판하는 이유는, 단락의 제목이 암시하고 있습니다. '역사에서의 인과관계'에 대한 입장이 달랐던거죠.
포퍼는 그의 저서 - <과학적 연구의 논리>, <열린 사회와 그 적들> - 에서 헤겔과 마르크스의 역사관에 대해 '역사주의', '결정론적 역사철학'이라고 혹평한 적이 있습니다.
제목부터 좀 따분하긴 합니다만, 오늘날 까지도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보면 충분히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을겁니다.
포퍼는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을 두고, 편협하게 물질의 변화에 의해서만 세계의 변화를 해석하고 있으며, 역사라는 일련의 운동에 '물질'과 같은 불가항력적인 요소는 있을 수 없다고 비판합니다.
그에 대한 Carr 의 재치있는 反비판을 인용합니다.
" 당신은 하루 일을 시작할 때 항상 스미스를 만난다. 당신은 날씨나 대학 사정에 대해 친절하지만 무의미하게 인사하며, 스미스도 마찬가지로 날씨나 대학 형편 등에 대해 친절하지만 무의미하게 답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스미스가 늘 하던 방식으로 답례하지 않고 당신의 외양이나 성격에 대해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고 하자.
이에 당신은 어깨를 으쓱하며, 이야말로 스미스의 의지가 자유롭다는 뚜렷한 증거이고 인간사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분명한 증거로 생각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반대로 아마 당신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불쌍한 스미스! 그래 저 친구의 부친은 정신 병원에서 돌아가셨지.' 또는 '가엾은 스미스! 마누라와 또 싸운 모양이군.' 즉, 당신은 뭔가 원인이 틀림없이 있다고 생각하고 얼핏 보기에 원인이 없는 듯한 스미스의 행동을 파악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두려워 하는 것은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포퍼'(원문에는 포퍼와 같은 논지를 지녔던 '아이자이어 버린경'으로 되어있습니다.) 의 분노를 사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포퍼는 스미스의 행동을 인과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당신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결정론적 전제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스미스를 못된 사람으로 비난해야 할 덩신의 의무를 몹시 게을리했다고 탄식할 것이니까. "
책을 내려놓고 키득대며 웃었던 구절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