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원전 7세기: 초대 덴노 진무(아마테라스 여신의 5대손)
만세일계

- 기원전 3세기 ~  기원후 3세기: 야요이 시대

- 4세기 ~ 7세기: 아스카 시대 - 최초의 나라 야마토
538년 백제가 불교, 천자문, 논어 전래
587년 처음이자 마지막인 종교전쟁(불교와 신토)
607년 첫 견수사 파견
645년 나카노 오에 - 소가 세력(덴노의 외척) 제거 후 중앙집권화
660년 백제 멸망

-
690년 후자와라쿄로 천도: 니폰을 정식 나라이름으로 채택,
701년 다이카가이신(토지의국가소유), 율령제도(2관8성제, 역사책 저술)의 시작과 고대국가의 완성

- 헤이안 시대(794~1192): 귀족의 시대, 후지와라 가문의 세도정치, 일본의 정체성 확립
794년 교토(헤이안)로 천도
장원과 부시(무사)의 형성, 후지와라 가문의 세도정치
902년 장원정리령
양대 부시 가문인 미나모토 가문 - 다이라 가문의 대립
1068년 고산조 덴노 후지와라 가문 몰아냄, 장원정리령(1969)
1072년 시라카와 덴노 조우고 취임, 인세이(원정) 정치
1156년 호켄의 난: 덴노파와 조우고파로 나뉘어 전쟁 - 덴노파의 승리
1159년 헤이지의 난 - 다이라 가문의 승리 >> 부시의 힘에 의해 덴노의 자리가 좌우됨
헤이지 정권: 덴노파인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조우고 유폐, 인(원)을 폐쇄 /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反헤이지 세력 규합: 불교세력, 조우고 세력, 미나모토 가문, 중앙 부시계급
1185년 단노우라 전투
1192년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세이이다이쇼군에 취임, 가마쿠라에 바쿠후 설치(2원 정치체제)
1121년 조큐의 난: 고도바 덴노가 바쿠후 토벌 시작 / 겐지 가문 이후 호조 가문이 집권
1274년 몽고 고려 연합군의 일본 침공
1332년 덴노와 아시카가 다카우지(겐지 가문) 연합군이 가마쿠라 점령

- 에도 시대(1602~1868): 부시들의 시대


1868년 도쿄로 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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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덴노 : 고조쿠(지방호족)
- 덴노 : 셋쇼(섭정), 간바쿠
- 덴노 : 귀족
- 덴노 : 후지와라 가문
- 덴노 : 조우고(상황)
- 덴노 : 쇼군(고케닌, 싯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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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토쿠 태자: 최초의 셋쇼, 고조쿠 탄압, 관직 12계급, 17개조 헌법, 와(和)의 강조, 견수사 파견
- 나카노 오에: 소가 세력(덴노의 외척) 제거 후 중앙집권화, 고쿠시(도지사), 군시(군수) 현지 파견, 반전수수법(토지배분), 호적제도
- 다이라노 기요모리: 조우고 유폐, 인(원)을 폐쇄
- 미나모토 요리토모: 부시계급으로 슈고, 지토를 임명하여 고쿠시, 군시를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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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폰, 저펀, 제팬: 나카노 오에의 집권으로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진 다음의 일
- 세이이다이쇼군(쇼군): 동북 지방의 오랑캐 민족들 정벌을 위한 최고 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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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지배자들은 세계 자본주의의 안정을 위해 중국이 필요하다. 중국의 부상은 미국 자본주의의 산물임과 동시에 꼭 필요한 버팀목이 되어가고 있다.

- 중국의 경제호황은 몇몇 남동 연안 지방들에 한정돼 있고, 대부분 유럽과 미국으로 값싼 소비재를 수출하는 데 의존하고 있다.

- (중국 초기 경제발전의) 핵심은 소비를 제한하고, 농업 집산화로 농민을 더 효과적으로 착취해서 뽑아낸 잉여를 이용해 세계 경제로부터 고립된 국가 주도 중공업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 덩샤오핑은 1978년에 4대 현대화를 시작했다. 해외 투자와 기술 이전, 농업과 많은 공업분야에 시장 도입, 중앙 정부의 경제 통제 해체, 등. 하지만, 중국 경제 호황의 첫 단계는 농업 개혁의 부산물인 향진기업의 예상치 못한 성장 덕분에 가능했다. 이미 향진기업의 생산가치는 농촌 총생산가치의 절반을 차지했고, 1992년에는 2/3에 달했다. 1988년에 이르러, 중국 전체 인구의 17%를 차지하는 연안 3성이 전체 농촌 공업 산출량의 절반을 생산했다.

- 경제가 성장할 수록, 중앙의 계획대로는 되지 않았고 이것은 권력 다툼과 연관이 있다. 부패가 없었다면 향진기업도 없었을 것이다.

- 1988년의 인플레이션 심화. 지방 정부가 식료품 보조금 삭감하자 광적인 사재기와 은행 현금 인출 시작.

- 1989년 이후에는 신규 외국인 투자 덕분. 투자 원천은 대부분 홍콩 자본. 1992년 이후 중국 경제의 부활은 조립과 소규모 제조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 물결에 기초하고 있었다. 1998년까지 수입 가치가 수출 가치보다 많았고, 지금도 둘 간의 차이는 근소하다. 1990년대 중반에는 많은 국영기업들이 도산 일보직전이었다.

- 1997년. 외국인 투자와 무역이 침체했고, 동아시아 시장이 축소되었으며, 주료 식료품 가격 상승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도시 노동자들에게 식료품 보조금을 지원하든지, 아니면 물가상승에 항의하는 도시 노동자들의 반란에 직면할 위험을 감수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 그렇게 많은 것을 잃을 텐데 중국은 왜 그토록 WTO 가입을 바라는가? 중앙의 지배계급은 WTO규정을 이용해 지방 관료와 기업 경영자들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 1945년 국민당은 대만 통치권을 회복하고, 체계적으로 약탈. 본토인에 대한 분노. 1947년 가장 거대한 항쟁 발생. 1949~67년까지 본토인 카스트가 지뱋나느 군사독재 국가. 강력한 국가통제. 48%를 국영기업이 생산. 1986년 민주진보당 창당. 2000년 민진당 천수이볜이 총통에 당선. 민족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쟁점으로 선거.

- 신자유주의 경제이론대로라면, 중국과 대만의 경제적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군사적 긴장도 완화되어야 한다. 세계적 통합으로 군사적 경쟁이 자동으로 완화되리라는 신자유주의자들의 몽상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

- 중국 수출업체 중 대미 수출 상위 50위 중 7개는 미국 회사, 이들은 환율 유지에 이해관계 있다.

- 언론과 예술의 발달, 일부 농촌에서 씨족이나 혈연 조직의 부활, 토착 종교와 기독교의 부활 등 두드러지게 정치적이지 않은 형태로 나타났다. 아동결혼, 아동중매, 결혼신부값 며느리가 시어너미에게 철저하게 복종한다는 전통적 관념도 되살아났다.

- 의료비 지출은 도시에 집중.

- 1980년대 학생시위증가. 공개적인 반체제 조직이 등장. 최소한 15개 도시에서 독립노동자연맹이 창설. 1949년 이후 공개적 노동자 조직이 결성. 톈안먼 항쟁 이후 지하노조 건설을 시작하거나, 합법적 통로를 이용해 의견을 표현. 파룬궁 운동. 수만명 체포.

- 내몽고, 신장, 티베트. 반이슬람 테러에 동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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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호어 / 다함께 / 2500원

- 反전 反자본주의를 표방하며 활동하고 있는 다함께에서 발행한 소책자입니다. 저자인 찰리 호어는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 당원이며, 꾸준히 중국과 관련해 글쓰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호어는 이전에도 중국의 역사를 국가자본주의 이론으로 분석한 <천안문으로 가는 길> (책갈피)를 썼고, 이번 <21세기는 중국의 세기가 될 것인가?>에서는 중국경제의 전망에 대한 주류적인 시각을 비판적으로 살피고 있습니다.

- 중국 역사에서 덩 샤오핑의 집권이 하나의 전환기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집권 후에 대대적인 개혁 개방, 구체적으로는 해외 투자와 기술 이전, 농업과 공업 분야의 시장 도입, 중앙 정부의 경제 통제 축소, 등의 조치를 취했죠. 하지만, 우리는 덩 샤오핑의 경제 정책과 함께 그의 정치적 조치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오쩌둥의 4인방에 대한 재판과 류사오치의 복권과 같은 것들이죠. 이는 소비에트연방의 고르바쵸프가 뻬레스트로이카(개혁)와 더불어 글라스노스트(정보공개)를 취해야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다고 보여집니다.

- 어떤 시대이든지 밥줄을 움켜쥔(생산수단을 소유한) 이들이 동시에 강력한 정치권력을 휘두르기 마련입니다. 생산수단을 국가가 독점했던 마오 쩌둥의 중국에서는 국가관료들이 그러했죠. 이들 역시 덩 샤오핑과 마찬가지로 중국 경제에 대규모의 자본을 형성하고 싶어했지만, 덩 샤오핑과 달리 대가를 치르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즉, 세계 경제와의 연관을 맺고 싶지 않았던 것이죠. 좀 더 구체적으로는 자국 경제에 대한 자신들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덩 샤오핑 초기의 중국에서는, 경제적 변화와 더불어 정치적 변화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수치로만은 파악할 수 없는, 지난 30여년간의 중국 경제의 실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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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몰리뉴, 레온 트로츠키 外 / 다함께 / 1000원

- 반전 반자본주의 단체인 다함께에서 발행한 소책자입니다. 30여쪽이 채 안되는 분량이지만, 트로츠키의 「테러리즘 비판」을 포함해 다각적으로 테러리즘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테러를 빌미로 사회운동 전체를 억누르려 하는 지배계급에 대한 비판 외에도, 테러리즘 자체가 가진 심리적 사회적 배경, 그리고 문제점을 명쾌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 저자는 테러리즘과 테러리스트에 대한 태도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테러리즘은 비판하되 테러리스트에 대해서는 옹호해야 한다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테러리즘은 단지 소수가 다수에 저항하기 위한 '방법'의 문제이지만, 테러리스트는 '피지배계급'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지배계급은 '테러리즘과의 전쟁'이 아니라 '테러와의 전쟁'을 하고 있죠. 어떤 전쟁도 이념(테러리즘)을 없앨 수는 없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결국 테러와의 전쟁이 의미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피지배계급에 대한 전쟁'이 될 것입니다.

- 테러를 수행한 빈 라덴의 세력이, 몇년 전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의 세력 확장을 막으려 했던 미국 CIA의 물질적 재정적 지원을 받아왔다는 상징적인 사실 외에도, 중동의 반세기 역사는 자원과 영토를 둘러싼 열강들의 침략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테러와의 전쟁'은 이것의 연장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 따라서,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오직 '테러리즘'에 대한 비판입니다. 저자는 테러주의가 (1) 테러의 대상이 된 지배계급을 연민의 대상으로 만들어 지배계급에게 탄압의 빌미를 주며 (2) 대중운동에 대한 무기력감을 확산시키기 때문에 비판합니다. 테러리즘의 심리적 근원 역시, (1) 대중운동에 대한 실망과 (2) 지배계급 요인에 대한 과대평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합니다.

- 저자는 19세기 후반의 러시아 사회운동을 예로 들어보입니다. 우리에게 테러리스트 조직으로 알려진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들은, 본디 (당시 러시아의 절대 다수였던) 농민 대중운동을 위해 대거 농촌으로 투신했던 지식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농민들을 설득하고 조직하는데 실패했고, 그 결과 이내 분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중운동에 실망해버린 이들이 '나로드라야 볼야(인민의 의지)'를 결성하고 테러를 수행하기 시작한 것이죠.

- 이들은 19세기 후반 짜르 정부의 요인들에 대한 테러를 수차례 시도했고, 그들 역시 목숨을 담보로 하는 대가를 치뤄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희생은,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많은 혁명가들이 혁명운동에 뛰어드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레온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쟁쟁한 혁명가들 역시 어린 시절 나로드니키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죠.

- 하지만, 정작 나로드니키들이 영향을 주어야 했던 러시아의 대중들은 대답이 없었고, 파괴하려 했던 짜르정부 역시 건재했습니다. 이내 새로운 관료가 빈 자리를 채웠던 것이죠. 저자는 이렇듯, '피지배계급의 저항수단'이라는 측면에서 테러를 바라봅니다. 수단으로서 테러는 효과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효과로 기대하는 '대중들의 심리적 고양' 역시, 기대와는 반대로 대중운동에 대한 무기력감을 퍼뜨린다고 주장합니다.

-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계급사회의 소멸'이라는 사회의 발전이, 지배계급 일부에 대한 테러를 통해 인위적으로 강제될 수는 없으며, 오로지 역사적 조건을 통해 발전해 나오는 혁명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테러 행위를 반대하는 것은 단지 한 가지 이유, 즉 개인적 복수가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기 대문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도 커서, 장관이라는 관리 한 명이 그것을 다 처리할 수는 없다. 왜곡된 체제에 반대하는 집단적 투쟁 속에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불타는 적개심이 최고의 도덕적 만족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레온 트로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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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민일보)



삶의 숨결이 오롯이 배어있는 민속촌은 시간이 정지된 마을이다. 감이 익어가는 고샅길에 들어서면 처마를 맞댄 초가집과 기와집이 두런두런 정담을 나누고 장독대를 수놓은 가을꽃은 빛바랜 앨범 속 사진처럼 정겹다.

충남 아산 송악면의 외암민속마을은 살아있는 민속박물관이다.

중요민속자료 제326호로 지정된 외암민속마을은 광덕산과 설화산 자락에 자리잡은 500년 역사의 양반촌으로 예안 이씨의 세거지. 영암댁 참판댁 송화댁 교수댁 감찰댁 등 10여 가구의 기와집과 50여 가구의 초가집 대부분이 조선시대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다 양반가의 넓은 마당엔 전통 정원이 꾸며져 있어 당시의 생활모습과 풍류를 짐작하게 한다.

실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왼쪽의 소나무 숲과 오른쪽의 황금들판 사이로 난 고샅길로 들어서면 맨 먼저 초가집과 기와집을 둘러싼 돌담이 반긴다. 외암민속마을의 돌담은 모두 5300m로,굳이 발돋움을 하지 않더라도 뜰 안에 심어놓은 감나무 살구나무 밤나무 은행나무 등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낮다.

외암민속마을은 다른 민속촌과 달리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거미줄 같은 골목길을 거닐다보면 호미 등 농기구를 든 마을주민과 고무줄놀이를 하는 아이들은 물론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디딜방아 등도 만날 수 있어 정겨움을 더한다.

마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집은 외암참판댁. 19세기 말에 지어진 집으로 구한말 참판을 지낸 이정렬이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집으로 전해진다. 건재고택의 안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 중 하나로 손꼽힌다. 설화산에서 내려온 물길을 마당에 흐르게 하고 사랑채 앞마당에 학의 모양을 한 연못을 만들었다. 외암민속마을은 TV드라마 ‘덕이’ ‘옥이이모’ ‘야인시대’ ‘임꺽정’을 비롯해 영화 ‘취화선’과 ‘태극기 휘날리며’의 배경으로도 유명하다.

마을 입구에 있는 외암민속관은 조선시대 생활용품 등 1000여점을 전시해놓은 전통문화 교육의 장으로 계절별로 다양한 농촌 전통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전통국악공연,둘째 주와 넷째 주 일요일에는 예약객을 대상으로 전통혼례도 올려준다. 짚풀문화제가 열리는 10월20∼22일엔 이엉엮기 짚풀공예 민속놀이 떡메치기 등 다채로운 민속놀이와 체험행사가 곁들여진다(041-544-8290).

외암민속마을 부근에 있는 온양온천,아산온천,도고온천은 아산의 3대 온천으로 귀성 및 귀향길에 지친 몸을 달랠만하다. 솔잎탕 사과탕 복분자탕 등 20여개의 아이템탕을 운영 중인 아산스파비스온천은 30일부터 10월8일까지 3인 이상 가족이 입장하면 20% 할인해준다 (041-539-2080).

글·사진 박강섭 기자 ks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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