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맹, 비합법 전위조직에 대한 조직사회학적 분석
조희연, <역사비평> (1992)

1. 머리말
2. 1980년대 비합법 전위조직의 전개
3. 사노맹의 구성 및 조직구조 (1) 1980년대 혁명적 인자의 존재상황
3. 사노맹의 구성 및 조직구조 (2) 사노맹의 형성과정 제헌의회그룹과 사노맹
3. 사노맹의 구성 및 조직구조 (3) 사노맹의 인적 구성과 지역적 기반
4. 사노맹 조직구조와 그 변화
5. 사노맹의 활동 및 검거 (1) 사노맹의 활동
5. 사노맹의 활동 및 검거 (2) 사노맹의 검거
6. 맺음말

1. 머리말

1991년 11월 출범선언을 통하여 세간에 자신의 존재를 공식화한 이후 숱한 화제-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를 뿌리면서 활동하였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하 '사노맹')은, 1991년 3월 그 중심인물인 박노해가 검거되고 1992년 4월 조직총책 백태웅 및 중앙위원들이 검거됨으로써 실질적인 '붕괴'상태에 돌입하였다.
사노맹에 대해서는 그간 극단적인 평가가 엇갈리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박노해의 명망성만으로 유지되는 허상(虛像)의 조직", "좌익맹동적 편향의 극단적 발현"이라고 하는 평가에서부터, "남한 비합법 전위조직운동의 맥을 계승하면서 불굴의 혁명투지를 보여준, 이 시대 사회주의혁명운동의 적자(適者)"라는 평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평가가 주어지고 있었다. 이처럼 대립되는 평가가 주어지고 있는 사노맹에 대한 운동사적 평가는 유보될 수밖에 없으나, 사노맹의 검거는(구혁명운동과 연관된 세력이 주도하였던 사회주의전위조직 결성시도라고 할 수 있는) 1960년대의 '통일혁명당 서울시창당준비위원회'나 1970년대의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하 '남민전') 등의 검거와 달리 1980년대 변혁적 운동의 발전과정에서 성장한 신세대 혁명운동인자들에 의한 '전형적인' 비합법혁명전위조직이 '붕괴'하였다는 점에서 비합법 전위조직운동의 한 커다란 전기를 상징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바로 이처럼 1980년대 이후의 혁명적 운동사의 일정한 분기점을 상징하고 있는 사노맹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그것의 실체에 대한 '조직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하고자 하는 글이다.
1980년대 한국사회 변동과정에서 나타난 중요한 현상의 하나는 변혁적 사회운동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까지의 사회운동과 달리 1980년대의 사회운동은 조직화, 대중화, '이념적 급진화'라는 측면에서 질적으로 변화되었다. 1970년대까지의 정치적 갈등은 '보수세력 내의 여야갈등'으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회운동이 정치적 갈등의 장(場)에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지 못하였으나, 1980년대 사회운동이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운동의 변동에서 변혁적 사회운동이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운동의 위상변화는 학술연구에도 영향을 미쳐 변혁적 사회운동에 대한 연구가 촉발되었고, 그에 따라 사회운동에 대한 연구는 주로 공개적이고 (半)합법적인 형태의 운동에만 집중되어 있었으며, 그것도 1980년대 이후의 운동에 국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현대 한국사회운동의 총체적 파악을 위해서는 그간 충분한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던 1980년대 이후의 다양한 비합법 전위조직운동에 대한 연구가 진척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이 논문은 사회운동에 대한 이러한 연구 상황을 극복하는 의미에서, 1980년대 비합법 전위조직들 중 사노맹을 선택하여 연구대상으로 설정하고 그에 대하여 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함으로써 그간의 사회운동에 대한 연구를 비합법운동에까지 확대하려고 하는 시도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글에서는 사노맹의 실상을 조직적 형성, 조직적 확대, 조직적 활동과 검거, 조직구조의 측면들로 나누어 분석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사노맹에 대한 운동사적 평가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상을 밝히는 데 초점이 있으므로 이념에 대한 분석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2. 1980년대 비합법 전위조직의 전개

1980년대는 1970년대까지의 반파시즘 민주화운동의 축적 위에서 사회운동이 변혁운동으로 자기정립하고 변혁운동으로서의 사상이념적, 조직적 기초가 강화되어오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에는 특히 학생운동이 변혁적 성격을 선진적으로 강화시켜왔으며, 이러한 학생운동 과정에서 형성된 변혁적 인자들을 중심으로 전위적인 지도조직을 건설하려는 시도가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1970년대까지는 혁명적 인자들의 존재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혁명적 인식을 갖는 인자들이 광범하게 형성되면서 전위조직의 건설시도 역시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 왔다. 1980년대의 전위조직은 주로 학생운동의 선진적인 인자들과 학생운동 출신 노동운동가 및 기층 출신 노동운동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운동영역을 중심으로 본다면 1970년대까지의 정치투쟁의 중심은 학생운동이었다. 그러나 광주학생은 기본계급의 성장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형태의 정치적 변혁도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학생운동 출신인자들은 목적의식적으로 노동현장으로 '존재이전'하거나 노동운동의 성장을 위한 지원투쟁을 전개하였다. 점은 1980년대 학생운동의 두 가지 논리인 현장론과 정치투쟁우위론 모두에서 중시되던 바였다. 이러한 학생운동 출신의 현장이전 및 활동, 외부지원과 노동운동의 내적 계기를 통한 선진노동자들의 성장으로 인하여, 1980년대 중반에는 목적의식적인 정치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 할 수 있는 수 있는 수준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러한 점이 현실적으로 구체화된 것은 바로 1985년 6월의 구로연대파업이었다. 이 연대투쟁의 조직적 성과로서 '서울노동운동연합(이하 '서노련)'으로 나타났는데, 이 조직은 1년여 동안 선진적인 노동운동의 정치적 투쟁체로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서노련은 노동운동이 경제투쟁으로부터 정치투쟁으로 발전해야 하는 당위성, 노동계급의 정치의식화와 조직화라고 하는 원칙적 과제를 제기하였을 뿐,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의 총체적인 변혁론을 정식화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5년 말 학생운동으로부터 변혁론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면서-당시 NL(NLPDR,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 진영)과 CA(제헌의회그룹)의 대립- 내적인 해체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비합법 조직들은 학생운동 출신 현장활동가들이 중심이 되면서 서노련 이후 부재상태가 된 민중운동의 정치적 지도조직을 건설하려는 형태들로서 나타나게 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러한 조직들의 주체는 학생운동 출신 현장활동가와 선진노동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 이후 변혁운동진영이 크게 NL진영과 반(反)NL진영으로 양분화되어 있는바, NL진영은 -모두가 다 그러한 것은 아니나 핵심적인 진영은- 자신의 전위조직을 '한국민족민주전선'(KNDF)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비합법 전위조직을 별도로 구성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반면에 반NL진영 혹은 비(非)NL진영은 한국사회의 독자적인 정치적 지도조직 혹은 전위조직을 건설하여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전위조직 건설-그것을 구체적으로 시도하건 아니면 전망으로서 제시하건 간에- 문제를 대단히 중시하고 있으며 그러한 구체적인 시도가 몇몇사건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제헌의회 그룹으로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조직들은 바로 이러한 시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이루어진 전위조직을 유형화하고자 할 때. ① 일정한 부문운동의 전위조직인 경우와 전체운동의 통일적 지도를 지향하는 전위조직인 경우, ② 조직적 결합의 수준이 협의체적 성격의 조직인 경우 '일사불란한 지휘통솔체계를 갖는 조직'인 경우, ③ 대중적 기반이 취약한 학생운동 출신 인자들이 대다수인 조직인 경우와 학생운동 출신이 많더라도 사회운동 속에 일정한 대중적 기반을 갖는 조직의 경우, ④ 조직이 소그룹적 결합의 수준을 부분적으로 넘어선 수준에 있는 경우와 동맹의 수준에 이른 경우, ⑤ 조직의 지역적 범위가 서울 및 수도권에 한정되어 있는 경우와 비록 제한되기는 하나 전국적인 범위에 걸쳐 있는 경우를 들 수 있다. 1980년대의 지하조직들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다양한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의 지하조직들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다양한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발전된 조직이라고 하면 이상과 같은 여러 측면에서 후자의 특징이 지배적인 조직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시기별로 나누어본다면, 1980년대 초반의 전위조직의 다양한 시도들로는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이하 '전민노련'), '전국민주학생연맹'(이하 '전민학련' 1980년 5월 결성, 1980년 6월 검거)이 있으며, 1980년대 중반에는 '반제동맹당'(1985년 10월경부터 활동, 1986년 10월 검거). '마르크스-레닌주의당'(1986년 10월 검거), '제헌의회그룹'(1986이 있으며, 1980년대 중반에는 반제동맹당(1985년 10월경부터 활동, 1986년 초부터 활동, 1986년 11월 검거). '노동자해방 투쟁동맹(이하 '노해동' :제2차 제헌의회그룹, 1987년 중반에 재건됨. 1988년 4월 분화),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1987년 11월 결성,『노동자의 길』발간),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연맹' (1987년 11월 결성, 『노동자의 깃발발행』, '사회주의노동자동맹'(1988년 4월 준비위 구성, 1989년 11월 정식결성), '노동계급', '자주민주통일그룹', '반제반파쇼투쟁그룹', '국제사회주의자들' (IS) 등이 있다.
먼저 전민학련과 전민노련은 1970년대 학생운동과 민주노동조합운동을 통하여 성장한 인자들이 중심이 되어 있었는데, 변혁운동과 대중운동을 선도하고자 하였다. 당시 학생운동에 대해서는 무림노선으로 대표되는 일종의 준비론적 시각을 공격하면서 학생운동의 정치투쟁에서의 선도성을 복원시키면서 전체 정치투쟁 활성화의 선도적 투쟁을 담보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투쟁과 조직화를 통일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조직으로서의 전민학련을 상정하였는데, 이 조직은 1981년 1월경 결성된다. 전민노련은 1980년 5월에 결성되었는데, 그 지도적 인물들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통하여 성장한 인자, 학생운동 출신으로서 노동운동활동가로 활동하고 있었던 인자들, 1970년대 학생운동을 통하여 성장한 인텔리 인자들이었다. 이 조직은 1981년 6월 총책 이태복씨가 연행되면서 검거되기 시작하여 8월경까지의 수사로 조직이 파괴되게 된다.
제헌의회그룹은 전민학련에 참여하였던 김철수, 윤성구, 민병두와 새롭게 최민 등이 중심이 되면서 1986년 5월경에 결성된 조직이다. 이 조직원들은 직업적 혁명가로 자처하고 비합법적인 지도그룹을 목적의식적으로 결성하려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직선제개헌을 슬로건으로 하고 있던 NL진영에 대립하여 '파쇼하의 개헌반대, 혁명으로 제헌의회 소집'을 내걸면서, 개량적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를 대표하는 신민당을 비판하면서 약 반년 동안 학생운동의 '민민투'조직을 지도하면서 '반파쇼투쟁'을 수행하였던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조직은 본격적인 전위조직 건설의 물적 토대가 사상적 통일성의 확보에 있다고 보고 전국적 정치신문(NPN)의 발간을 통하여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면서 전위조직의 건설을 구체화하려는 지향을 갖고 있었다. 이 조직은 1986년 11월경부터 1987년 1월까지의 시기에 대대적 검거를 맞아 파괴된다.
이 제헌의회 그룹이 검거로 파괴되면서 잔류성원들이 제헌의회그룹을 재건한 것이 바로 노해동이다. 이들은 1987년 4월경 정식으로'신중앙위원회'를 결성하면서 활동하고, 이 조직이 중심이 되어 1987년 대선 시기에 백기완씨를 대통령후보로 하는 독자후보전술이 전개된다.

그런데 이러한 대선투쟁과정에서 당면정세에 대한 판단 및 전략전술적 대응방법을 둘러싸고 이견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대립의 결과로 노해동그룹은 다수파와 소수파로 분립된다. 1988년 4월 민중집권과 민중주도성의 목적의식적 추구를 강조하던 소수파가 노해동으로부터 분리된다. 이때 잔류한 다수파 역시도 내부에 상이한 의견그룹간의 논쟁을 통하여 대립하나 일정한 의견의 수렴을 보게 된다.(다수파 내의 논쟁에 대해서는 김영수 편, 『한국사회변혁운동론의 모색-CA그룹의 자기비판과 새로운 전망』, 백산서당, 1989 참조). 그러나 이 다수파는 대중운동 속으로 산개할 것을 결의하면서 1988년 말에 스스로 해체하게 된다. 1988년 4월경 분리된 소수파가 17개월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재집결하여 결성한 한 것이 바로 '사노맹'이다. 제헌의회그룹에서 사노맹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객관적인 혁명운동의 발전을 반영하여 협의체적인 수준에서 동맹적 수준으로, 학생운동 출신 현장활동가들 중심에서 일정한 기반을 갖는 여러 계급의 성원이 확대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사노맹은 1980년대 전위조직운동의 한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사노맹을 1980년대 전위조직의 비교대상으로 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림 1>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조직분화과정

다음으로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 초반에는 학생운동의 방향을 둘러싸고 기본계급의 성장과 그를 위한 노동현장으로의 이전 및 활동을 중시하던 현장론에 따라 학생운동 과정에서 의식이 성장한 많은 인자들이 노동현장으로 '존재이전'하여 활동하게 된다. 이러한 학생운동 활동가들은 학생운동 배경에 따라 일정하게 소그룹적 연계를 갖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소그룹적 연계수준을 넘어서 지역적, 전국적 기반을 갖는 정치조직을 건설하려는 것은 운동발전의 일반적인 지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처럼 소그룹적 수준의 조직에서 탈각(脫殼)하려는 과정에서 생겨난 조직들이 사건화된 것은 바로 1980년대 중반 '반제동맹당'사건, '마르크스-레닌주의당사건' 등이라고 할 수 있다.
반제동맹당사건은 1986년 11월 검거된 조직이었다. 이 조직은 당시 학생운동에서 광범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던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에 기초하여, 노동자대중의 정치적 조직체를 건설하려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노동운동에서는 서노련의 실질적 붕괴 이후 다양한 소그룹이 분립하는 상태로 전화되고 있었는데, NL적 경향을 갖는 학생운동 출신 현장활동가들이 소그룹적 연계구조를 극복하려고 시도하며 대중적인 정치적 조직체를 건설하려던 초기과정에서 검거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인 1986년 10월말에 검거된 '마르크스-레닌주의당사건'은 주로 학생운동 출신 현장활동가들의 지역현장운동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앞서의사건도 마찬가지이겠는데, 서노련 해체 이후 새로운 노동운동의 정치적 조직을 건설하려는 과제가 현안으로 제기되고, 여기서 '지역현장운동론'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단위지역 현장에 대중적 토대를 갖춘 현장활동가가 중심이 되어 "지역현장조직→지역노동자동맹→마르크스-레닌주의당 건설"이라고 하는 건설경로를 거쳐 노동자대중의 정치조직이 발전되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당은 바로 이러한 지역현장운동론에 기초하여, 구로공단을 중심으로 지도적 인물간의 지역협의체를 운영하면서 활동하던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반제동맹당'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당 건설'은 소그룹적 결합관계를 부분적으로 벗어난 수준의 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포괄범위도 전국적인 조직이라기보다는 특정지역에 국한된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반제동맹당'사건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당 건설'사건의 내용 중 많은 부분은 수사당국의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1980년대 중반에 사건화 되지 않고 상당한 기간 동안 자신을 조직적으로 유지하여온 조직으로서는 '인천지역민주노동자동맹'(이하 '인민노련')과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을 들 수 있다. 당초 이 조직들은 서노련의 외곽지역조직으로서 인천지역 운동조직이었는바. 서노련 해체 이후 일정한 이념적 통일성 아래 소그룹적 수준의 자기조직을 유지확대하면서 전국적인 혁명적 노동운동의 한 유파로서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인민노련이나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은 반제동맹당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당의 조직적 결집수준을 넘어선 상태에 있었다고 판단된다.
인민노련은 1986년 여름 인천지역에서 소그룹으로 결집되기 시작하여 1987년 2월 '살인, 강간, 고문 정권 타도를 위한 인천지역노동자투쟁위원회'를 중간과정으로 하여, 1987년 6월 26일 인천지역의 다른 활동가그룹과 결합하여 결성된다. 이 그룹은 『노동자의 길』이라는 소책자를 계속 발간하고 있다. 1989년경부터는 내부에 이견이 발생하여 『사회주의자』라는 별도의 비합법 소책자가 발간되기도 하였다. 이 그룹의 주요 성원들은 1990년 당국에 의해 조직의 중심적인 많은 인자들이 검거되었고, 최근에 -이른바 '신(新)노선'에 기초하여 합법정당을 결성하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정당추진위원회'와 그 후신으로 탄생한 '진보정당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다음으로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은 서노련이 해체되는 상황에서 그 입장을 대체로 계승하는 그룹들이 조직적으로 자신을 유지하면서 혁명적 노동운동을 전개해온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그룹을 '신삼민'그룹이라 부른다. 이 그룹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선전하기 위하여 『노동자의 깃발』이라는 소책자를 지속적으로 발간해왔다. 이 조직 역시 1989년 8월에 당국에 의해 주요 구성원이 검거된 바 있다. 이 그룹은 주요 성원들 역시 인민노련 그룹과 함께 노동자정당추진위원회를 거쳐 진보정당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3. 사노맹의 구성 및 조직구조 (1) 1980년대 혁명적 인자의 존재상황

1960년대 이후 1980년대까지의 변혁운동사는 종속적 독점자본주의화의 제모순과 그러한 자본주의화에 수반된 종속적 파시즘의 모순에 대항하는 투쟁과정에서 이념성, 조직성, 대중성에서 지극히 낮은 수준에 있던 운동이 점차 높은 수준의 운동으로 성장해오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은 동시에 구혁명운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았으면서도 혁명적 인식과 실천능력을 담보한 신혁명운동인자들이 성장해오는 과정이었다. 1980년대는 이러한 혁명적 인적 자원이 전후에 새롭게 성장한 학생운동 속에서 광범하게 형성되고 혁명적 인자의 풀(pool)로서 존재하는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사진> 60년대 대표적인 조직사건인 통혁당사건 공판 모습

특히 이러한 전후세대의 혁명적 인자로의 발전은 광주민중항쟁과 그에 대한 군사정권의 '대량살륙적 제압'과 그에 대한 심화된 반성이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까지 낮은 수준의 인식에 머무르고있던 사회운동-특히 학생운동-에게 있어 광주항쟁은 폭력적 실체로서의 국가권력에 대한 본질적 인식과 그것의 혁명적 전복의 당위성, 광주항쟁에서와 같은 민중의 혁명적 진출을 올바른 방향 속에서 지도할 수 있는 목적의식적인 전위세력 및 선도조직의 필요성, 학생운동 등 인텔리 중심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서의 기층민중운동의 활성화의 필요성, 군부세력의 배후에 있는 제국주의적 지배주체로서의 미국에 대한 인식 등의 교훈을 던져주게 된다. 광주항쟁이 군사정권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된 후, 그것의 의미를 보다 심층적으로 고민하는 과정에서 구좌익운동이 직접적 영향을 받지 않은신(新)혁명운동세대들이 대거 형성되어 나오게 된다. 초기에 이러한 신혁명적 인자들은 주로 이론적 수준에서의 혁명적 인식에 도달하였을 뿐 혁명적 실천을 조직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 및 중반의 격렬한 반파시즘투쟁과정에서 전후의 잠재적인 신혁명운동인자들이 실천적으로 단련됨으로써 비합법 혁명조직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인자들이 다수 형성된다(학생운동에서의 혁명적 인자의 형성, 확대). 또한 1980년대 중반 이후의 공개적인 이념논쟁은 선진운동인자들로 하여금 용이하게 혁명적 이념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였고 혁명적 이념에 대한 거부감도 축소되게 되었다. 이로써 1980년대 이후 1970년대의 의식수준을 뛰어넘어 독자적인 혁명적 인식 위에서 독자적인 혁명적 실천을 조직할 수 있는 인자가 전후세대들 중에서 광범하게 형성됨으로써 비합법 혁명조직의 주체적 요인이 완비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학생운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까지 민주노조운동의 한계에 머무르고 있던 선진적 노동운동 역시 제5공화국 군사정권과의 투쟁과정에서 점차 정치투쟁으로 발전해가게 되며, 그 과정에서 혁명적 인자들이 배출된다. 이러한 기층노동자들 수준에서 인식의 혁명적 발전을 추동하였던 요인 중의 하나는 학생운동 선진인자들의 혁명적 인식변화와 그에 기초하는 현장으로의 투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1985년 선진노동자와 인텔리 출신 노동운동가들이 결합하여 만든 서노련은 이러한 발전의 출발점을 예시하는 것이었다. 그 후 5공정권에 대한 반파시즘운동의 고양과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실현하기 위한 생존권투쟁과정에서 노동대중들의 전반적인 의식이 상승하였고, 일부선진적인 노동자들에게는 '프롤레타리아와 혁명적 사회주의의 결합'이라고 하는 고전적인 운동의 과제가 부분적으로 현실화됨으로써, 혁명적 인자의 존재영역을 확장하게 된다. 이러한 발전은 인텔리출신 노동운동가들과 선진노동자들의 결합체인 노동운동단체들의 강화발전으로, 노동대중들의 단결조직인 노동조합의 지역적, 전국적 연합조직의 강화발전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노동자들의 인식변화는 학생운동처럼 대규모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에는 선진적인 인자들에 국한해본다면 많은 혁명적 인자들이 형성된 시기로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도 1987년의 노동자대투쟁 이전에는 일부 선진적인 노동자들에게 국한되었으나, 이후 대중운동이 활성화됨으로써 대중적인 수준에서 혁명적 인자들이 형성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이처럼 학생운동의 경계를 넘어 혁명적 인자들이 생성, 확대됨으로써(혁명적 인텔리뿐만 아니라 혁명적 민중의 생성),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지도조직의 건설시도들이 나타나게 된다.

한편 1980년대에 혁명조직운동을 주도할 수 있는 구혁명운동인자들이 연령적으로도 거의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실제 6ㆍ25 전후의 시기에 청년세대로서 일정한 구혁명운동을 하였던 세대들의 경우, 60∼70세를 넘는 등 일선에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하였다. 더구나 종속적 독점자본주의화를 통하여 한국사회가 전면적인 자본주의적 구조변화를 경험하게 되면서 혁명운동의 객관적 조건이 구혁명운동의 조건과 질적으로 차별화되고 현실적으로도 혁명조직운동을 독자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이론적 실천적 역량이 신혁명운동세대들에 의해 담보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적인 지하조직운동은 구혁명운동인자들이 주도하는 형태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으나, 1980년대에는 새롭게 성장한 신혁명운동적 인자들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었고, 그들이 독자적인 혁명적 활동능력을 일정하게 체득하게 됨으로써 주로 신혁명운동인자에 의한 비합법 전위조직이 추동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독자적인 혁명적 이론에 기초하여 혁명적 실천을 할 수 있는 인자들이 광범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에, 즉 신혁명운동과정에서 혁명적 인자들이 광범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에, 사노맹 전신으로서의 '제헌의회그룹', '노해동'은 1970년대까지의 전위조직과는 구별되는 신혁명운동인자 중심의 지도부가 구성된다. 이미 1980년대에 이르면 생물학적으로 노령화되어 구혁명운동 경험 속에 있는 인자들이 조직활동의 일선에 설 수 없는 조건 때문이기도 하나, 다른 한편에서는 전후 학생운동의 투쟁경험이 구혁명운동과는 별개로 자신의 이론과 실천을 재생산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까지는 지하조직의 결성을 추동하고 운영할 수 있는 역량이 전후 학생운동세대들에게 확보되어 있지 못하였다. 1960년대의 통혁당, 1970년대의 남민전이 자신의 조직적 활동의 정치사상적 기초, 조직활동의 전거를 전적으로 혹은 일정부분 구혁명운동에 두고 있었던 데 반해, 1980년대 이후 조직들이 구혁명운동의 역사적 경험과는 별개로 자신의 이론과 실천을 행하고, 중앙위원급 지도부들이 신혁명운동인자들로 충원되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전후 학생운동을 포함한 변혁운동이 구혁명운동에 상응하는 혁명적 인식과 실천의 수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3. 사노맹의 구성 및 조직구조 (2) 사노맹의 형성과정 제헌의회그룹과 사노맹

사노맹은 전신은 '제헌의회그룹'과 그 재건그룹으로서의 '노해동'이었다. 이 조직은 앞서 레닌이 활동하였던 19세기 말 러시아에서 결성된 '페테르스부르크 노동자계급해방동맹'의 명칭과 조직원칙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헌의회그룹은 레닌의 이원적인 전위당 조직원칙에 따라서 '사상적 중앙'과 '실천적 중앙'이라고 하는 분리된 중앙지도부를 구성하였다.(레닌,「우리의 조직적 과제에 관해 한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 홍승기 역, 『레닌저작선』, 거름, 1988. 291∼305쪽 참조). 사상적 중앙에 속한 인물들은 김철수, 유강근, 이성희였고, 실천적 중앙에 속한 인물들은 최민, 윤성구, 민병두, 김성식 등이었다. 이들은 전후에 자생적으로 성장한 혁명적 인텔리 및 학생운동 출신의 현장지향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은 모두가 1970년대 반파시즘 학생운동의 과정에서 혁명적 인텔리로 성장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이들은 1970년대 후반 긴급조치하에서 투옥되었거나 학생운동과정에서 학원으로부터 추방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해방 이후 혁명운동의 직접적 영향을 받지 않고 전후 반파시즘 학생운동과정에서 그 인식과 실천역량이 형성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인 지도적 인물로서 최민을 들 수 있는데, 최민은 1978년 대학에 입학하여 긴급조치하 학생운동의이념적 급진화과정에서 혁명적 의식을 갖게 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혁명적 의식형성의 장(場)도 학내의 공식적인 서클인 '대학문화연구회'에서였으며, 혁명적 인자로서의 실천적 경험도 역시 반유신 학생운동과정에서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제헌의회그룹의 지도적 성원들은 전적으로 전후세대 및 전후의 운동경험 속에서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제헌의회그룹들의 경우 특별한 배후세력도 존재하지 않으며, 구혁명운동으로부터 혁명적 이론과 조직적 활동경험이 전수되지 않았으며 오직 자신들의 학생운동 경험에서 이론적, 실천적 근거를 부여받고 있었다. 이처럼 구혁명운동과의 '단절'적 조건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중요한지적 원천은 주로 고전적 저작, 특히 레닌의 혁명저작들이었다. 실제 제헌의회그룹의 초기 조직의 원형은 전적으로 레닌의 저작 우리의 조직적 관제에 관해 한 동지에게 띄우는 편지에 의거하고 있었고, 반제민족해방운동의 조직적 경험이나 구남로당의 조직구조나 조직활동 등이 참고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제헌의회조직은 1986년 말경부터 당국에 의해 검거되어 조직적으로 붕괴되는데, 제1차 제헌의회조직의 중간지도부 제1차에서는 중앙지도부가 아니었음은 1차조직의 중앙지도부가 구속된 후 조직을 재건하면서 제2차 제헌의회그룹의 지도부로 부상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의 조직명을 '노해동'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이 조직의 지도부는 박종운, 김정일 등이었다. 이들 역시 1977∼1979년 사이에 대학에 입학한 학생운동 출신들이었다.

우리가 1980년대 전위조직의 한 전형으로 상정한 사노맹은 앞서 지적하였듯이 1986년 말 제헌의회그룹의 지도부가 구속되고 난 후 결성된 '노해동'의 지도부 중 '소수파'가 1988년 4월 조직적으로 분리되면서 만들어진 조직이었고, 그래서 조직의 중앙지도부는 노해동에 참여하였던 인자들로 구성된다. 노해동 내부에서 다수파와 소수파의 대립은 그 이전에도 존재하고 있었으나, 1987년 대선투쟁과정에서 그리고 13대 국회의원 선거투쟁과정에서의 대응방안을 둘러싸고 첨예화되었고, 그것이 급기야는 조직적 분열로 나아갔다는 것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다. 다수파는 주로 조직국 성원으로 구성되고 있었으며, 소수파는 주로 편집국 성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 노해동에서는『선봉』이라는 비합법 기관지를 발간하고 있었는데, 편집국이라고 하면 바로 이 『선봉』편집부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 양자간의 이론적, 실천적 대립은 주요하게는 대선국면에서의 선전의 방향과 전술적 방침을 둘러싸고 심화되었는데, 1988년 13대 총선이 종결된 후 과거의 실천을 평가반성하는 과정에서, 1988년 4월 소수파는 '사회주의를 명확히 내건 노동자계급의 전위정당 결성'을 목표로 노해동으로부터 분리하여 '사회주의 노동자동맹 출범준비위원회'를 결성하게 된다. 이때의 인적 규모는 학생 및 현장활동가를 포함하여 200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고 한다(분리 당시 소수파의 규모는 현장활동가 120명 정도, - 성남 45명, 인천 18명, 편집부 18명, 노도운동단체, 지방 및 여타 지역 등 학생운동활동가 80여 명 정도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분리선언서에서는 ① 노동계급 전위정당 건설을 구체적인 일정으로 올려놓는 일, ② 당면 계급투쟁전선에서 프롤레타리아트계급의 영도를 부인하는 기회주의적 노선에 대한 비판, ③ 사회주의에 대한 전면적이고 목적의식적인 선전선동계획의 필요성 등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1988년 6월 조직결성을 위한 구체적인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사노맹 출범의 역사적 의의와 사노맹준비위의 당면임무」라는 문건(일명 TASK)을 작성하여, 사노맹의 조직사상적 기본방향을 확정하고 구체적인 조직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제헌의회그룹'부터 사노맹에 이르기까지 중앙지도부는 과거의 혁명운동과는 단절된 전후, 특히 1970년대의 학생운동 출신인자들로 구성되는바, 사노맹 중앙 지도부 역시 전원 전후의 혁명인자들로 구성된다. 사노맹의 초기 중앙위원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백태웅, 박기평(박노해), 남진현 등이었다. 1992년 5월 15일 국가안전기획부의 발표에 따르면, 1991년 조직개편시 대거 중앙위원의 교체가 있었는데, 구속되어 있는 박노해 등 특별중앙위원 2인 외에, 백태웅을 포함하여 7인의 중앙위원, 도합 9인의 중앙위원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국가안전기회부,『사회주의 혁명 지하조직의 활동전모), 1992. 5; 『사회주의 혁명 지하조직의 활동전모 보조자료』, 1992. 5 참조).
사노맹은 조직적으로 제헌의회그룹의 연장선상에 존재하고 있으나, 제헌의회 그룹과 비교하여 갖는 특징은 제1차 제헌의회그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전위조직'을 자임하고 있기는 하였으나, 주로 프롤레타리아적 성원이기보다는 현장활동 경험이 일천한 인텔리 출신이라고 할 수 있으나, 노해동에 이르면 ①학생운동과정에서 성장한 현장지향적 인텔리 활동가뿐만 아니라 (혁명적 인텔리). ② 학생운동과정에서 성장한 경우라고 할 수 있으나 상당한 기간동안 지역노동운동 혹은 현장노동운동 관련영역에서 활동함으로써 혁명적 활동가로서 일정한 자기기반을 갖는 인자들과, ③ 기층출신으로서 1980년대 신혁명운동의 발전과정에서 혁명적인 활동가로 성장한 선진노동자들(혁명적 민중)도 참여하게 된다. 기층민중 출신 현장활동가들의 참여는 박노해 같은 인물로 대표된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박노해는 부친이 해방 이후의 좌익운동 출신이기는 하나 자신이 혁명적 활동가로 성장하는 일련의 과정은 1970년대 이후 일련의 반파시즘 투쟁과정에서, 파시즘하에서의 자생적인 노동운동을 통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②, ③의 경우는 우리의 주목을 끌게 되는 부분인데, 1980년대 초반 학생운동은 학생운동의 위상 및 전체 혁명운동의 발전전망을 둘러싼 일련의 논쟁과정에서, 기층민중의 혁명적 발전 및 주력군으로서의 성장이 담보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형태의 혁명적 변화도 불가능하다는 인식과 '현장론'이라는 논거하에서 노동자로 존재이전하거나 현장노동운동의 외곽에서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1980년대 초반 선진 학생운동인자들은 대규모로 현장 혹은 현장 관련영역으로 이전하게 되는데, 이러한 활동과정을 통하여 지역적 기초에서, 개별사업장에서, 더 나아가 노동운동 속에서 자기기반을 확보하고 그것을 확대하는 경우도 많이 나오게 된다. 1980년대 후반 사노맹에서는 바로 이러한 발전이 반영되어 일정한 자기기반을 갖는 학생운동 출신의 활동가들, 현장에서 성장한 혁명적 선진노동자들이 참여하게 되며, 이것이 1980년대 초중반의 혁명조직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노맹 지도부의 구성은 1960, 70년대의 좌익조직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서, 신혁명운동인자들로 충원되기 시작하였음을, 전후의 운동과정에서 성장한 운동인자들이 본격적인 혁명적 좌익으로 성장하였음을, 나아가 신혁명운동인자들이 혁명적 인텔리 출신만이 아니라 기층출신 인자들까지 포함하는 발전적 구성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드러내준다. 사노맹은 '자신을 자생적인 사회주의자들의 전위조직', '노동자계급의 비합법 전위조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인적 구성하에서 사노맹은 1988년 4월 사노맹 준비위를 구성한 이후 1989년 11월 12일 '지역ㆍ업종별 노조 전국회의'가 서울대에서 개최한 전국노동자대회에서 공식적인 출범선언을 하게 된다.

3. 사노맹의 구성 및 조직구조 (3) 사노맹의 인적 구성과 지역적 기반

사노맹의 경우 1980년대 이후 성장한 기층민중운동, 그 과정에서 기층출신의 변혁적 인자들의 형성확대 등의 조건 때문에 1960, 70년대에 비하여 변화된 구성을 보이게 된다. 즉 1960, 70년대까지의 전위조직들이 학생운동에서 성장한 인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데 반하여, 기본계급 출신(노동계급, 농민 등)의 인자들도 상당한 규모로 참여하고 있다. 1970년대까지의 비합법운동이 기본적으로 인텔리운동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고 학생운동의 이념적 발전에 기반하는 측면이 강한 반면에, 1980년대 운동은 기층운동 지향성이 보다 명확하고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실체화하려는 시도가 강하게 나타나는바, 사노맹은 이러한 기반 위에 서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즉 비록 광범한 대중적 기반위에서 서는 것은 아니었으나, 객관적인 조건을 반영하여 1980년대적 전위조직의 한 형태로서의 사노맹은 선진적인 혁명적 인텔리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혁명적 민중들이 참여하는 조직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사노맹이 1988년 4월경 '제헌의회그룹'으로부터 분리할 때 조직원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200여 명에 이르고 있었는데, 1990년 10월 안기부의 수사 발표시에는 1,600여 명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그 후 1991년 4월 안기부의 발표에 따르면 정조직원이 500여 명에 이르고 지지자들이 2,500여 명, 전체는 3,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안기부의 발표는 수사의 공적을 과장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압수된 기밀문서에 따르면 사노맹 정조직원의 규모는 300여 명에 정도에 이르고 지지자들까지 포함한다면 1,500여명 내외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비밀조직이므로 조직원의 규모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970년대의 비합법조직의 정조직원이 100명 이하의 수준이었다면, 1980년대 비합법조직의 하나로서 사노맹의 경우 비록 조직원은 아니나 지지자 혹은 협조자의 위치에 있는 인원들이 1960, 70년대에 비하여 훨씬 많아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규모는 1970년대적 조직에 비하여 1980년대적 전위조직의 인적인 확대의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내주는 것으로 파악된다.
사노맹의 주요한 사업 중의 하나가 바로 공장소조의 결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안기부의 발표에 따르면 사노맹의 공장소조원은 포항제철, 선경화학, 서광, 해태 등 전국 500여 개의 공장 및 230여 개 노동단체에 달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박노해는 재판과정에서 자신이 구속되기 전, 전국적으로 100여 군데에 공장세포 창설작업을 하려는 과정에서 구속되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물론 이러한 숫자는 과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기부의 경우 자신들의 수사대상을 증폭시켜서 발표하는 것이 상례가 되어 있기 때문에, 또한 박노해 진술의 경우 재판이라는 특수상황에서 나온 언명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으나, 1987년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의 획기적 고양과 확산, 현장에서의 파업활동 등을 통한 혁명적 의식의 제고 등으로 사노맹의 인적 확대과정의 중요한 대상의 하나가 노동자들이 되고 있으며, 현장노동자에 대하여 일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점만은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압수된 극비문건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수도권위원회와 영남위원회는 역할이 맞먹는 정도이나, UC(울산-필자)등은 대공장의 존재로 영향력으로 보면 비중이 더 크다. 특히 MC(마산창원 필자), PH(포항 필자) 지역 대공장에는 우리의 영향력이 있다. 수도권에서는 공장에 영향력은 아직 적고, 단체 파견역량이 많다. "(국가안전기획부,『소위 확대개편된 사노맹의 조직실체』, 1991. 4, 163쪽)]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고 정치적 노동운동의 중요한 구성은 사실 학생 운동 출신의 현장활동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주체적 역량이 제고되면서 사실 학생운동 출신의 도움 없이도 현장역량만으로 운동이 전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기실 일부 사업장에서는 학생운동 출신의 활동가들에 의해 현장운동의 자연스런 발전이 장애를 받는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현장운동의 중요역량만으로 운동이 전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기실 일부 사업장에서는 학생운동 출신의 활동가들에 의해 현장운동의 자연스런 발전이 장애를 받는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현장 운동의 중요역량이 기층출신에서 충원되는 방향으로 전화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사노맹의 조직확대에서도 부분적으로나마 반영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한편 충원범위인 지역적 확장은 반파시즘대중운동이 1980년대에 들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때문에 보다 구체화된다. 사실 부마항쟁 이후 반파시즘운동의 지역적 협애성(狹碍性)은 완전하게 타파된다. 특히 1980년 봄의 정치적 경험, 1987년 대투쟁의 경험은 반파시즘운동이 일정지역에서만 전개되는 상황을 완전하게 반전시키는 기회로 작용하였다. 사노맹은 기존 노해동의 다수파가 아닌 소수파로 분리되어 만들어졌으므로 초기에는 특정지역에 한정되는 결과를 갖게 된다. 즉 사노맹의 초기 지역적 기반은 성남, 인천, 부천, 안양, 서울 중심의 활동가들로 한정된다. 그리고 과거 '제헌의회그룹'의 영향하에 있던 학생운동 역시 서울 및 일부지역에 한정되는 결과를 갖는다.
사노맹이 제헌의회의 다수파로부터 분리되는 1988년 4월부터 사노맹이 정식으로 외화되는 1989년 11월까지는 바로 사노맹의 형성과정이자 초기의 조직적 확대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기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1989년 초까지는 주로 내적 조직정비 및 훈련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조직확대라는 측면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1989년 초 대중사업의 활성화를 향한 '일대전환'을 한 이후 인천, 서울 정도에 머무르고 있던 사노맹 조직은 점차 대중활동이 강화되면서 시위원회의 형태로 서울, 인천, 경기, 마창, 울산, 부산, 포항, 대구, 구미 등으로까지 그 조직적 기반이 부분적으로 확대해가게 된다. 특히 지방에서 노동자 밀집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울산, 구미 등지에도 일정한 기반을 확보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1970년대까지의 전위조직의 한계를 일정하게 극복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1년 초의 조직개편에서는 지방사업의 활성화로 인하여, 지방위원회를 각 지방별로 분권화하여 일정하게 의사결정권을 갖는 활동단위로 전화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점 역시 사노맹의 지역적 기반이 확장된다는 것을 부분적으로나마 확인케 해준다. 실제로 분권화 요구는 하부단위의 강화를 의미하는 것인바, 2년여에 이르는 조직사업을 통하여 이미 일정한 정도로 그 지역적 기반이 확장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사노맹의 지역적 확대과정은 그 영향력하에 있는 사노맹계열 학생운동의 지역적 확대과정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회주의노동자동맹 준비위원회' 시기에 사노맹의 외곽학생조직이었던 '통일민주학생연맹'은 학내 기반이 주로 서울의 일부대학이었고 그 내실이 약하였던 데 반하여, 1989년 초 일대전환 이후 본격적인 외부조직사업을 하는 시기의 학생외곽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지역민주주의학생연맹 (서민학련, SDSL)의 경우에는 상당한 조직적 기반을 서울권 대학에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서민학련은 1990년 5월 '전국민주주의학생연맹'(전민학련, 통상 민주주의학생연맹이라고 한다. JDSL)으로 확대되는데, 안기부의 발표에 따르면 전민학련은 서울대 등 전국 45개 대학에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대학 2학년 이상의 공식조직원은 400∼500 여 명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서술을 종합하여 볼 때, 1970년대의 혁명전위조직에 비하여 사노맹은 변화된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조직적 성원이 보다 확대된 수준에 이르고 있으며, 학생운동 출신의 혁명적 선진인자까지를 부분적으로나마 포괄하는 조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1970년대의 남민전은 서울 중신의 조직이라는 성격을 부분적으로밖에 탈각하지 못하였으나, 사노맹에 이르면 지방조직이 전국의 주요 도시를 일정하게 포괄하는 정도로까지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필자는 여기서 사노맹의 인적 지역적 기반이 이전 시기에 비해 절대적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지, 사노맹의 대중적 기초가 대단히 광범위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4. 사노맹 조직구조와 그 변화

조직적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사노맹이 1960, 70년대 비합법 전위조직에 비하여 진일보한 측면은, 사노맹에서는 골간조직의 설치 및 그 분화, 외곽조직의 분화 및 독자적 활동, 각 대중조직에서의 프랙션조직 가동 등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사노맹의 조직적 발전의 특징을 사노맹의 시계열적인 조직분화과정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사노맹의 조직적 발전 및 분화과정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단계는 사노맹 결성의 준비단계로서, 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노동자동맹 준비위원회'(이하 '사준위') 시기를 들 수 있다. 이 시기는 분리선언이 이루어진 1988년 4월경부터 1989년 11월 사노맹 정식출범 시기까지이다. 이 시기는 다시 두 개의 소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소시기는 '일대전환'이 이루어지는 1989년 초까지이며 제2소시기는 '일대전환' 이후의 시기이다. 다음 조직적 분화의 제2단계는 사노맹 정식 출범에서부터 1990년 후반의 검거선풍에 맞서 조직보위와 개편을 이루어내는 1991년 초까지의 시기이다. 다음 제3단계는 대규모 조직개편 이후 1992년 5월 중앙위원의 대규모 검거사건까지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사노맹 조직의 결성준비단계인 제1단계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1988년 4월 1일 노해동으로부터 소수파가 분리선언을 하고 1988년 6월 1일 「사노맹 출범의 역사적 의의와 사노맹 준비위의 당면임무」라는 창립취지문을 작성 배포함으로써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1년 7개월에 이르는 기간을 통하여 사준위 상태에서 조직의 정식 결성을 준비하게 된다.
먼저 제1소시기인 1989년 초까지 사준위는 지옥훈련 및 조직훈련을 통하여 조직원으로서의 사상적, 육체적 자기준비, 조직결성의 물적 확보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게 된다. 일대전환 이전에 사준위는 주로 조직체계의 재구축, 조직결성의 인적 준비작업(혁명적 인자의 육성작업)과 물적 기반 확보작업에 집중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이 시기에 사준위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라고 자부할 수 있는 자격요건을 확보하기 위한 '지옥훈련'과 당장 실천에 옮겨야 할 조직사업, 물적 조건 확보와 선동 등 '필수실천'"을 두 개의 주요한 사업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1988년 6월부터 10월경까지 중앙 및 지방의 핵심조직원 50여 명이 사상교육, 체력단련, 무술습득 등을 완료하게 된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전위'를 자임하는 조직원들이 그러한 자임에 부응하는 자질을 확보하고자 하는 자발적 훈련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사준위는 조직체계를 재정비하면서 제헌의회 시기를 뛰어넘는 새로운 조직적 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당초 분리선언 후 6개월의 준비를 거쳐 1988년 9월 1일을 기해 출범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주체적 조건의 확보를 위한 준비가 여의치 않아 출범은 거의 1년여가 늦어지게 된다.
제1소기기 말의 조직구조는 다음 그림과 같았다. 사준위 이후의 준비기를 거치면서 조직체계를 재정비하여 다음과 같은 조직구조를 완비해내게 된다.

<그림 2> 1988년경 사노맹 준비위원회 조직구도

먼저 분리 당시에는 주로 조직국과 『선봉』편집국이라고 하는 두 중심기구 중에서 『선봉』편집국에 소속된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기 때문에, 과거 편집국 성원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으며, 지방조직에서는 주로 안양ㆍ성남지역과 인천ㆍ서울지역 등 수도권위원회 소속성원들과 일부 영남위원회 성원들이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점에서는 주로 내적 준비작업에 집중하였고 외곽조직을 발전시킨다거나 프랙션망을 파견해낸다거나 하는 외적 작업은 유보된 상태였기 때문에, 주로 분리 당시의 조직체계를 재구축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시점에서는 골간조직의 분화수준이 낮고 골간조직의 지방조직 역시 지극히 미미하였다. 또한 외곽조직의 분화발전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으며, 프랙션조직 역시 본격적인 가동단계에 있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제헌의회그룹'의 초기 조직구조가 협의체적 관계에 있는 두 개의 중앙(사상적 중앙과 실천적 중앙)이 존재하는 구조였다고 한다면, 재건중앙(노해동)은 단일한 지도력을 갖는 하나의 중앙 밑에(과거 두 개의 중앙 역할에 해당하는) 조직국과 편집국을 두었다. 사준위 역시 이러한 노해동의 조직방식을 따라 초기에는 중앙위 산하에 편집국과 조직국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중앙위에 편집국과 조직국의 2인이 각각 참여하여 의사결정을 하고 집행하는 식이었다. 이때는 엄밀한 의미에서 최종결정기관으로서의 중앙위가 실질적으로 가동되지 않고 있었고, 실제적인 지도력을 가진 상임중앙위원이 조직을 지도하는 형태였던 것으로 판단된다(그들이 모이는 모임을 중앙상임위원회라고 불렀다).
여기서 편집국은 사상적 지도의 의무를 담당하는 기구였으며, 주로 사회주의적 선전선동을 내용적으로 담보하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에는 대외적인 선전선동매체를 발행하는 임무도 부여되어 있었다. 조직국은 조직사업, 연락업무 및 사무업무를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조직국은 백태웅을 중심으로 남진현 등이, 편집국은 박노해 등이 지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이 시기 중앙상임위나 편집국 혹은 조직국은 임시적 성격이 강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지방조직은 수도권위만 가동되는 상태였고 이 수도권위에서는 서울, 성남, 인천, 안양지역의 활동이 활발했으며, 여타 지역에서는 수임자들이 파견되어 활동하기 시작하는 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 수임자들은 지역별로 2∼3명이었는데, 경북지역의 수임자가 다른 지역에 비하여 조금 많은 정도에 머무르고 있었고, 조직사업은 본격화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조직상태에 있던 사준위는 조직의 정식 결성을 위한 내적 준비작업이 완료되고 각 지역에서의 기초적인 인적 확충작업이 완료된 후에, 외적인 대중사업을 본격화하게 되면서 사준위 단계의 제2소시기로 이행해가게 된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을 이루는 요인으로는, 1988년 10월 말경부터 구속자들이 석방되고 수배자들이 수배가 해제되며 동시에 광주ㆍ5공청문회를 통하여 대중적인 반정부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내적 준비 차원으로부터 전환하여 외적인 대중사업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들 수 있다. 1989년 초 이후의 이러한 사업의 기본방향을 정식화한 것이 바로 『일대전환』이라는 팜플렛이다. 이 팜플렛에서는 대중사업방식에서의 일대전환을 표방하였는데, 대중사업방식, 노동조합활동방식, 비합법 정파활동방식 등의 대중적 전환을 표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SJD 선생 회견록」, 국가 안전기획부,『소위 확대개편된 사노맹 조직실체』, 163쪽 참조).
이 일대전환 이후 사준위는 대중활동을 대폭 강화하게 된다. 여기서 대중활동이라고 할 때는 대중운동 및 그 조직들에 개입해 들어가는 것, 그러한 운동들 속에서 조직원을 발굴하여 참여케 하는 것, 학생운동 등에 개입하여 정치적 지도를 수행하면서 과거 제헌의회그룹의 영향력하에 있던 학생운동세력을 정비하여 하나의 조직적 대오로 편제해내는 것, 『월간 노동해방문학』의 발간을 통하여 사준위의 정치적 방침을 일반화해내는 것 등이 포함될 수 있겠다.
이 제2소시기를 경과하면서 사노준위는 <그림 3>와 같은 조직구조로 발전해가게 된다. 일대전환 이후의 조직체계에서는 중앙골간조직에 일정한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즉 중앙상임위원을 없애고 중앙위가 실질적인 권한과 결정권을 갖도록 한 것이며, 부분적으로 하부지도기관의 독자적 권한을 확대하였다. 1989년 말 사노맹 출범시까지 이루어진 조직적 발전으로서는 먼저 중앙골간조직의 분화와 지방조직의 분화, 외곽조직 및 프랙션조직의 건성을 들 수 있다.

<그림 3> 1989년경 사노맹 준비위원회의 조직구도

먼저 편집위의 경우 연구정책기능을 강화하여 그 산하에 정치, 경제, 노동, 농민, 학생문제연구팀을 만들고 각각에 연구원을 위촉하여 일종의 내동자(內動煮)로서 정세분석자료를 만들거나 문서를 작성하는 등의 활동을 하게 된다.

중앙조직에서는 기존에 조직국으로 통합되어 있던 업무가 대폭 분화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먼저 조직규모가 확대되고 조직원이 증대되면서 내부의사 전달을 전담할 사무국, 즉 조직문건 수발을 전담할 부서가 분화 신설된다. 그리고 조직국의 고유한 업무인 조직사업활동이 분화되는데, 외곽기관(예컨대 노동문학사와 같은 부설기관)이 만들어지고, 그것을 지도할 프랙션이 설정되고, 시도 및 지방위원회가 보다 활성화가 되어 각계 대중조직(예컨대 전국회의 등)에 대한 프랙션이 가동되게 된다. 이 시기의 조직구조 변화의 중요한 의의는 그 이전 시기에는 중앙상임위원(백태웅, 박노해)이 편집사업과 조직사업을 각각을 직접 관장하면서 중앙과 하부가 실질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각 지방위원회와 편집위원회, 각종 프랙션조직이 이전 시기와 달리 분화된 자율성을 가지고 활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는 외곽조직(사노맹 내적으로는 편집위원회나, 사무국 등은 부속기관으로 설정하고 있고, 노동문학사나 남한사회주의과학원 등은 부설기관으로 상정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노맹은 골간조직을 중앙위, 지방위 및 부속기관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외곽 방계조직이라고 한 것은 부설기관을 지칭한다)으로서 노동문학사(『월간 노동해방문학』 발간)와 노동자대학, 민주주의학생연맹(민학련) 등도 만들어지게 된다. 먼저 1989년 4월호부터 발간된 『월간 노동해방문학』은 정치적 선전사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기에 상당한 조직력이 투여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발행인 밑에 실질적으로 내용적 지도를 담보하는 상임기획위원장이 있고, 그 산하에 편집국과 사무국, 영업국으로 나뉘어 운영되었다. 사노맹은 편집위의 지도 아래 상임기획위원장(사노맹의 조직원)이 운영을 전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보인다. 형식적인 의미에서는 독자적인 기관이며 프랙션이 파견, 지도하는 기관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사준위의 부설기관 혹은 외곽조직으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노동자대학을 들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노동자대학은 사준위만이 추진하는 것은 아니고 노동운동의 여러 그룹이 연합하여 추진하는 것이나, 사준위의 영향력 및 지도력이 강한 상태였던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다름으로 사준위의 외곽사업으로서 민학련에 대한 지도를 들 수 있다. 사준위는 제1소시기에서부터 학생운동파견망을 설정하여 그간 제헌의회그룹 노선에 동의하고 있던 학생운동세력을 자파의 외곽 학생운동조직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사노맹은 통일민주학생연맹(이하 '통민학련')의 구성과정, 서민학련의 결성 및 전민학련으로의 확대과정에 주도적으로 관여하여 학생운동에 대한 조직적 지도의 '구조화'를 시도하게 된다.
사준위는 공식적 출범을 준비하기 위하여 사노맹의 본견적인 활동을 가능케하는 각 운동 단체의 파견망 구축, 각계 영역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의 조직화를 시도하게 된다. 그 결과 당시 사회운동단체에 파견망이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구축된다. 즉 전국회의, 전국농민회총 연맹, 노동자대학,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여러 대중단체들(예컨대 종교단체)등이었다. 사준위는 당시 변혁운동 진영의 대중조직들에 파견망을 파견하여 단순정보의 수집에서부터 정치적 지도력의 행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외적 사업을 하게 된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조직적 발전으로서는 지방조직이 시위원회체계로 분화발전하게 된다는 점이다. 사준위 초기에는 인천ㆍ서울지역위원회와 안양ㆍ성남지역위원회로만 분화되어 있었는데 각 지역별 특수성에 따라 조직사업을 확대하기 위하여 시위원회체계의 체계로 지역조직을 분화해가게 된다는 점이다. 이 시위원회는 서울, 인천, 경기, 마창, 울산, 포항, 부산, 대구, 구미 및 기타 시수임자로 구성된다. 사준위의 시기가 지나면서 수임자가 시위원회로 발전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하면 시위원회로 전환시키고, 그렇지 못한 수임자들은 시수임자로 설정 운영하게 된다. 이 시기의 시위원회는 지역적 조직을 완결해내고 필요한 조직에 프랙션망을 건설하는 것으로 상정될 수 있는데, 이러한 사업은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서 9개 지역위원회가 모두 활발한 활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수도권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그리고 영남지방의 대공장 밀집지역을 중심으로 지방위원회의 구성 및 활동이 일정하게나마 활성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제2소시기를 통하여 그 이전과는 달리 골간조직이 분화될 뿐만 아니라, 골간조직, 프랙션조직, 외곽조직의 구분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상과 같은 사준위의 시기를 거쳐 1989년 11월 노동자대회장에서 사노맹의 정식출범을 선언하게 되면서 사준위 상태에서 사노맹으로 정식 전환하게 되며, 이에 따라 조직적 분화의 제2단계로 이행하게 된다. 이 시기는 1991년 1월 중앙위에서의 조직개편시까지의 시기를 설정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정식출범한 이후 준비과정에서 확보된 조직적 기반에 의거하여 자신의 조직적 목표를 구현하기 위한 일련의 조직적 활동을 수행하며, 이에 대해 권력의 집중적인 탄압이 주어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이데올로기적 지형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합법적 활동이 불가능한 조건이므로 출범 이후 사노맹은 권력의 집중적인 추적과 탄압을 받게 된다. 따라서 사노맹의 경우 본격적인 활동시기는 권력의 집중적인 탄압과의 대결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계 말의 조직구도를 본다면 다음과 같다. 먼저 조직적 측면에서는, 출범까지 골간조직을 확보한 후 그것을 분화시켜가며 나아가 외곽조직을 확산시켜가고 그것에 대한 지도력을 강화해가며, 동시에 여타의 정파, 민중진영의 대중조직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프랙션조직을 더욱 확대해가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림 4> 1990년경 사노맹의 조직구도

이 시기에 이루어지는 외곽조직의 분화로, 먼저 노동문학사라고 하는 문예창작부를 독립적 문예조직인 노동해방문학실(이하 '노문실')로 확대개편한 것을 들 수 있다. 노문실은 1990년 2월 노동문학사에서 비합법 조직으로 분리 독립하여 개설된다. 이 노문실은 여러 문학계열(민족해방문학계열, 민중적 민족문학계열, 민족문학계열, 노동해방문학계열 등) 중에서 노동해방문학계열에 속한 문예활동가들의 비합법 문예전문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노문실은 '민중문학통일전선' 형성의 일환으로 '노동자문학가동맹' 결성을 추진하는 것으로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였다. 이 노문실은 전국규모의 조직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지부의 결성을 시도하고 지부 결성의 일환으로 '노문실 대학생위원회'를 설치하여 그 주도하에 마산ㆍ창원의 대학생문예조직(전선의 불꽃)을 결성하게 된다(1990. 5).
다음 중앙위원인 백태웅은 대학원 및 인텔리 출신의 전문연구역량을 갖는 소수의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남한사회주의과학원'(이하 '사과원')을 수립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이는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와 사노맹의 선전선동활동의 자료개발및 노동계 급당 강령작성을 위한 이론적 토대구축작업을 수행하는 기구라고 판단된다. 이 조직은 1990년 5월 '준비위원회' 명의의 내부제안문을 제출하였으며, 사과원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8월 8일 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으며, 1990년 11월 창립제안서를 배포하게 된다. 그 후 1991년 1월에 정식으로 출범하며 1991년 6월에 재개편한 것으로 판단된다. 사과원은 사상투쟁, 이론투쟁의 영역에서 전위정당 건설을 위한 투쟁에 복무하는 사노맹의 외곽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공식적인 표현에 따르면 사노맹은 사관원이 독자적인 연구단체로서 일종의 연구자전위조직일 뿐, 사노맹의 조직원으로만 구성된 것도 아니며 다양한 연구자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음 사노맹의 외곽조직으로서 사회주의학생연구소의 설립을 들 수 있다. 1990년 1월 중앙위원 백태웅, 남진현을 중심으로 하여 사노맹과 동일한 이념적 기초 위에서 활동하는 '선진적인 학생정치조직'으로서의 전민학련에 대한 조직적 지도를 수행하고자 설립한 것이 바로 사회주의학생연구소이다. 사노맹은 서민학련을 중심으로 전민학련 구성을 실질적으로 지도하였으며, 사회주의 학생연구소를 통하여 실질적인 조직적 지도를 행하고 있다. 사회주의학생연구소의 건설은 학생운동 파견망의 위상을 격상시켜 그것을 별도의 부설조직으로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파견자망 구축시도를 들 수 있는데, 대중운동의 발전과정에서 결성된 각종 대중단체 및 운동단체에 조직원을 파견하여 각 대중단체의 활동에 조직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고, 이것은 출범 당시에 비하여 상당히 확대된 규모로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민주노동조합의 전국적 단일조직인 전노협, 민중당 등에 파견자망을 구축하여 사회주의운동세력의 확대 및 대중운동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시도를 행하였다. 전국농민회총연맹에도 파견자를 보내 내부에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조직발전의 제2단계에서는 1989년의 조직구도가 유지되면서, 즉 기본구조의 변화보다는 외곽조직의 확대분화(예컨대 사회주의학생 연구소, 노동해방 문학 실 등), 프랙션 활동의 확대(전농 등) 등 부분적인 변화가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직발전의 제2단계 시기는 조직원들의 검거사태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제1차 검거는 1990년 9월 17일 사노맹중간책임자인 현정덕의 구속을 계기로 한 일련의 구속사건 (제1차 보위사고), 그 후 10월 1일 중앙위원 남진현의 구속을 계기로 한 일련의 구속이 그것이다(제2차 보위사고).

<사진> 1991년 3월 12일 구속된 사노맹 중앙위원 박노해

이러한 검거사태를 계기로 사노맹은 조직을 쇄신하면서 대규모 조직개편을 단행하고, 그로 인해 조직적 분화의 제3단계로 변화해간다. 1991년 2월경까지를 통하여 완결된 조직개편은 제1차 보위사고와 제2차 보위사고를 맞아 조직을 복원하고 종래 활동방식을 혁신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사노맹의 내부문건인 『조직개편 투쟁에 관 한 지침』(국가안전기회부, 『사노맹 유인물분석』 제8집, 1991.10, 98∼106쪽)에 따르면 조직개편 투쟁의 기본적 목표로서 ① 중앙지도 기관의 강화 ② 지방조직의 건설과 분권화 ③ 프랙션의 독자활동 단위화, 분권화 ④ 통일성의 강화 ⑤ 사업의 공식화와 사무전산화 ⑥ 강령과 규약의 명문화 ⑦ 대중성의 강화 ⑧ 물적 조건의 안정화 등이다. 즉 사노맹은 중앙기관의 통일성 있는 지도와 각 하부기관의 독자적인 활동성이 통일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하고, 지방기관과 프랙션조직의 분권화 및 독자활동단위화라는 원칙 위에서 조직을 개편하고, 그에 대한 중앙위의 통일적 지도능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의식하에서 조직개편을 단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림 5> 1991년 1월 조직개편 이후의 사노맹 조직구도

구체적으로 조직개편을 보자. 먼저 중앙위가 기존의 4인에서 9인으로 확대되는데, 이에는 구속된 박노해와 남진현 등 특별중앙위원 2인 외에 중앙상임위원 2인, 정책위원장, 조직위원장, 수도권위원장 등 7인을 포괄하여 총 9인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조직의 최고 심의ㆍ결정기구로서의 중앙위원의 확대는 조직의 분권화라는 각도에서 각 중요기관의 책임자가 결정기구에 참여함으로써 의사결정과정의 중복을 막고 각 중요기구가 자신의 관할영역을 최종책임지는 독자적인 사업단위로서의 성격을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핵심적으로 지방위를 중심으로 한 지방조직의 분권화와 독자사업단위화라는 문제의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중앙상임위원은 중앙위로부터 위임된 범위 내에서 일상적인 조직의 결정을 내리고 조직을 총괄지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조직개편이 이루어지면서 기존의 중앙위가 각 조직의 중요사항을 모두 최종 결정하였던 상태에서 탈피하여, 분기별로 회합하여 주요 방침만 결정하고 나머지 집행을 각 기관에 위임하는 방식으로 전화하게 된다.
다음으로 그간의 조직활동의 확대를 반영하여 중앙정책위와 조직위가 분화되었는데, 정책위는 "당면정세와 전술방침 수립 등 사노맹 투쟁노선에 입각하는 선전선동의 내용을 안출해내고 외곽조직 및 파견망 조직의 활동방침, 대중단체의 투쟁방침을 안출하는" 등 정책적 지도임무를 주로 하게 되는데, 이는 경제분과, 통일국제분과, 정치분과, 대중단체 분과, 편집부로 나뉜다. 여기서 편집부는 기존에 편집위가 주요하게 담당하였던 『월간 노동해방문학』발간지도사업과 사노맹 명의의 각종 유인물의 내용을 책임지게 된다.
다음 조직위는 조직적 지도임무를 담당하는데 연락통신부와 사무부(총무부), 지방사업부, 대중사업부(파견부)로 나누어진다. 조직체계상 조직국에 해당하는 일을 담당하는데, 연락 통신부는 부서간, 부서와 외곽조직, 부서와 파견자 및 조직간의 연락, 통신, 문서 수발을 담당하고, 사무부는 각종 자료의 관리 및 재정사업을 총괄하며, 지방사업부는 지방조직의 확대추진, 각 지방위 하부조직의 결성 및 지도관리를 담당한다. 그리고 대중사업부는 그간 중앙위 산하에서 관장되던 각 운동단체의 프랙션조직망을 일괄 관리하며 대중운동 단체의 투쟁방향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과제로 한다.

지방위는 이젠 체계에서는 9개의 지역위원회로 되어 있었는데, 각 지방위를 광역화하여 4개 권역으로 나누어 활동하게 된다. 기존의 각 지방위는 독자적인 결정권한이 제한되었으나, 분권화하면서 광역 지방위는 자신의 관할사업에 대해서 독자적인 결정권한을 갖게 된다. 여기서 수도권위는 서울, 인천, 경기지역 위원회로 구성된다. 영남위는 울산준위, 마창준위, 대구ㆍ포항 수임자, 부산수임자 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수도권위와 영남위의 역량이 거의 동등한 수준이라고 하는데, 영남위는 대공장에 대한 영향력이 일정정도 확보되어 있으며, 그 주요한 기반이 공장역량으로 구성되는데 반해, 수도권위는 대부분의 역량이 단체파견역량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남위의 경우 대구지역위는 안동, 원주, 포항, 구미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선진노동자에 대한 조직사업이 확장되었으나, 보위사고 이후 대구와 포항으로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다음으로 중부위와 호남위는 준비위 상태로 존재하고 있고, 강원, 태백, 경기도 이천 등의 지역에는 수임자가 활동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각 지방위는 각자의 실정에 따라 중앙의 기관들에 준하는 하부실무 전문조직을 가동하게 된다. 편집국, 사무국, 연락사무국, (정치)선전국 등이 그것이다.
개별 지방위 산하에는 국이 존재하고 있으며 지역사업 담당 국장과 부속기관 국장이 지방위의 구성요원이다. 부속기관은 지역에 따라 다를 수는 있으나, 실무적인 일을 담당하는 사무국, 선전선동 담당부서, 공장사업 담당부서, 지역의 여타 정파에 대한정치적 사업을 담당하는 정파 담당부서 등이 존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방위의 하부에는 공장 소조 담당부서가 있는데, 각 공장에 소조를 확대하여 이것을 공장프랙션 조직, 나아가 공장세포위원회로 발전시키려는 지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공장소조의 조직화 사업의 진전 정도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명확히 단정할 수 없으나,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일정한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활발한 지방의 경우 지역을 더욱 세분화하여 지역국을 두는 경우도 있다. 영남위의 경우 발전속도가 빨라 8개월 사이에 200여 명의 수준으로까지 발전하였다고 한다. 영남의 경우 울산, 부산, 구미 등의 지역국을 설치하고 있으며, 주 업무는 일반사업부(민족민주운동단체사업, 노동운동단체사업)와 공장사업으로 나뉘어 있다. 호남지역이나 기타 농민지역의 경우는 농민사업부를 두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조직구도는 1991년 초의 상황에서 구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1991년 3월에 박노해 및 김진주가 구속되는 등 제3차 조직보위사고가 발생하게 되면서 조직개편에 관한 문건들이 발견됨으로써 조직개편의 윤곽이 제시되었는바, 비합법조직의 특성상 조직구조가 노출되었으므로 1991년 5월 중앙위에서 보위사고에 대응한 부분적인 체제개편을 단행하게 된다.
이때 이루어진 조직개편의 내용으로는 ① 중앙조직위를 중앙조직국으로 중앙정책위를 중앙정책국으로 개편한다. ② '중앙상임위원회' 제도를 폐지하고 총책인 백태웅, 중앙조직국장(丁明燮), 중앙정책국장(殷秀美)으로 구성된 '중앙상임위'를 신설하여 중앙단위의 일상적 집행업무를 담당하게 한다. ③ '전산부', '시각매체연구소' 등을 비서실 산하에 신설한다. 중앙골간조직 부속기관인 전산부는 '조직 효율적 관리 및 조직보위', '조직의 사무의 전산화'를 가속화하기 위하여 설립된 전문연구기관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며 중앙상임집행위원장의 직속기관으로 위치지어진 것 같다. 시각매체연구소는 비디오그래픽 등 시각매체를 이용하여 선전선동물 제작업무를 담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1991년 5월 이후에 이전 단계와 달리 형성된 중앙부속기관으로서는 '노동자영상교육센터'(노동자들에게 노동해방사상을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교육하기 위한 '노동자정치교육기관' 설립을 목표로 하는 기관)가 있다.
다음으로 파견망이 확대됨으로써 프랙션조직을 구축하여 각계에 조직적기반을 확대하려는 시도도 지속되었는데, '민중진영 단일정당추진위원회'에 파견망을 보냈고, 보건의료 분야 및 종교기관에 파견망을 확대하여 조직의 외부영향력을 높이려는 시도를 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사노맹은 각 지역의 공장소조를 구축하려는 작업에 많은 힘을 투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골간조직의 건설 및 분화, 외곽부문조직의 분화 및 조직적 활동의 확대, 각 대중조직에서의 프랙션조직의 가동이라는 점을 볼 때 1970년대의 남민 전에 비하여 사노맹은 그 조직적 발전정도가 더욱 진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외곽 방계조직에서 외부 대중운동에 상응하는 부문별 조직분화를 시켜내고 그에 기초하여 각 계의 변혁운동에 대한 일정한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는, 1970년대와 비교하여 상당한 조직적 발전의 측면을 찾아볼 수 있다.

5. 사노맹의 활동 및 검거 (1) 사노맹의 활동

1980년대의 전위조직활동이 1970년대의 그것과 비교하여 갖는 두드러진 특징은 투쟁의 전명화 및 대중투쟁에의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의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1980년대에는 변혁적 인식이 선진활동가들의 수준에서 그리고 선진대중의 수준에서 확산 되어가고, 따라서 전위적 인식과 대중적 인식의 괴리가 일정하게 극복되며, 또한 합법적 논의공간에서 일정하게 자유롭게 제시될 수 있는 정도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사노맹의 활동은 1970년대적 수준을 뛰어넘는 수준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사노맹의 조직활동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로 사노맹의 대외적인 투쟁활동,둘째로 대중투쟁과 관련한 활동, 셋째로 혁명조직의 기본사업이 라고 할 수 있는 내부교양사업, 넷째로 '보급투쟁' 활동을 들 수 있다.
먼저 사노맹에서 대외투쟁이 갖는 비중은 1970년대까지의 비합법 전위조직에 비하여 더욱 큰 중요성을 갖게 된다. 1960년대 조직에서 주안점을 두고 있었던 정간(精幹)요원의 육성ㆍ은폐의 과제는 대중운동 속에서 혁명적 인자들이 자생적으로 육성되어 나오고 완전 한 은폐의 필요성이 감소하기 때문에, 그 과제는 약화되고 대회투쟁에 일차적인 주안점이 두어지게 된다. 즉 '방어형 조직'이라는 성격보다는 '투쟁형 조직'으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된다는 것이다. 1960년대 통일혁명당은 그 자체가 비밀조직적 성격을 띠면서 일종의장기적인 준비조직으로서 활동을 하였고, 1970년대 남민전에서도 한편으로 당면 파쇼정권에 대한 투쟁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면서도 그 기조는 정간요원의 발굴 육성이라는 장기적인 과제 수행에 조직의 상당한 역량을 투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점에서 1980 년대 조직으로서의 사노맹은 당면 파쇼정권에 대한 투쟁과 그것의 혁명적 전복이라는 과제에 일차적인 비중을 두는 조직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사노맹은 창립 후에 사회주의적인 선전선동, 가두투쟁 및 선전선동, 가두투쟁 및 선전선동, 경찰서 등 권력의 하부통치기구에 대한 독자적인 타격투쟁, 기타 다양한 대중투쟁에의 참여 및 선전선동작업에 광범하게 참여한다. 1980년대 중반까지도 공개화되지 못하였던 사회주의에 대한 공개적인 선전선동을 사노맹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주의 공개적인 선전선동을 위하여 내는 발행물로는 중앙기관의 선전선동기관에서 발행하는 팜플렛과 3∼4쪽의 간단한 '리플렛', 1∼2쪽의 단순 유인물 등이 있으며, 외곽기관에서 발행하는 매체로는 노동문학사의 『월간 노동해방문학』, 사회주의학생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새벽바람』. 기타 지방위 및 그 하부기관이 발행하는 기관지나 유인물 등이 있다. 반파쇼 투쟁을 위한 가두선전선동도 사노맹이 전개한 투쟁적 활동 중위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인확성기를 동원한 대형 선전선동활동, 대형건물에 선전선동 플래카드를 공개적으로 부착하여 반정부투쟁을 선전선동하는 사례도 들 수 있다. 또한 1989∼1990년 사이 시내에서 파출소를 공개적으로 타격한다거나 화염병을 투척하는 사례, 1990년 5월 메이데이투쟁시 주자파출소에 대한 타격투쟁 등도 그러한 예에 속한다. 이러한 선전선동, 타격투쟁 등은 1970년대 선전선동이 소규모에 그치고 있었고 단속(斷續)적인 활동이었던 점에 비 추어본다면 대단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투쟁은 은폐적인 활동이 아니라 반(半)공개적인 활동이라는 점에서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이것은 1970년대에 비하여 반합법공간이 확장된 데도 기인하지만 1970년대에 비하여 보위능력이 훨씬 발전한 데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1989년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후 사노맹은, 1990년 5월의 대규모 반민자당가두투쟁시, 1991년 5, 6월 가두투쟁시에 자신의 독자적인 깃발과 슬로건, 팜플렛으로 선전선동활동을 공개적으로 수행해왔다.

사노맹의 투쟁적 성격은 무장투쟁을 -비록 단기적인 시행사항으로 상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준비하였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박노해는 민중무장봉기의 단계 별 이행과정을 제3단계(제1단계 : 자생적 무장화 단계, 제2단계 : 계획적 조직적 무장화 단계, 제3단계 : 기존 국가권력의 무장력 제압과 접수단계)로 구분하고, 궁극적으로 지배권력의 무장력에 대한 무장적 대응이 필요할 수 있다고 하는 인식하에서 이에 대한 일정한 준 비작업을 수행하게 된다. 예컨대 폭발물 개발을 추진한다거나 무기고 탈취계획을 수립한다 거나 지방위별로 민중무장력을 확보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한 것 등이 이러한 것이다(물론 사노맹은 궁극적인 힘의 근거가 무장력에서 유래하며 국가권력의 장악이라는 혁명의 일반적 목표의 견지에서 보더라도 '무장이 수반된 민중봉기'가 불가피하다는 일반론적 인식을 넘어 서서, 현실적인 투쟁형태에서 무장투쟁 혹은 도시게릴라투쟁을 사고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둘째, 1980년대에 오면 각계의 대중운동이 활성화된 채로 진행되기 때문에, 사노맹의 대중투쟁에 대한 영향력의 범위와 수준이 훨씬 확장된다는 점에서 사노맹 활동의 성격을 찾을 수 있다.
먼저 대중투쟁에 대한 영향력의 정도라는 점에서 보면, 대중투쟁 전개과정에 집단적으로 참여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1970년대의 영향력 수준을 뛰어넘어 전위조직이 제한된 수준에서나마 대중운동이나 대중조직체에 대해 프랙션적 지도를 포함하여 일정한 조직적 지도력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전위조직이 대중조직에 대하여 일관된 조직적 지도를 행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사노맹에서 나타나는 대중투쟁에 대한 영향력의 증대라는 점은 먼저 현단계 대중운동의 주력 중의 하나인 학생운동 내부에 자신의 외곽조직을 확보함으로써 학생운동의 흐름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1970년대와 달리 사노맹 의 학생운동에 대한 영향력이 상당히 높아졌음을 의아해하는 것이다(물론 이러한 조직적 영향력은 전체 학생운동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학생운동의 일부 정파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갖는다).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면, 1988년경 NL이 주도하는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이하 '서총련')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등에 대립하여 CA그룹은 학생운동조직인 서울지역대학생총연합 건설추진위원회(이하 '서건추')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CA 다수파가 NL로 합류하면서 서건추는 서총련 소수파로 통합된다. 이로 인해 제헌의회그룹의 학생 운동 지도선이 부재하는 상황이 된다. 서건추가 서총련으로 통합된 후에 상부지도가 없는 관계로 통하에 동의하지 않는 학생운동의 제세력들이 '지리멸렬'한 상태로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사준위가 결성되면서 학생운동에 대한 지도를 시작하게 되고, 이러한 지도하에서 통합에 합류하지 않은 조직들이 모여 통민학련(외대, 한양대, 동국대 중 심)을 결성하는데, 이 통민학련은 1989년 상반기 민주화투쟁 학생연합(이하 '민투학련', 서울대, 건국대 중심)이라고 하는 (CPC계)조직과 통합하여 서민학련을 결성하게 된다(후에 양자는 조직적으로 결별한다). 사노맹은 이처럼 통민학련부터 시작하여 서민학련 및 전민 학련(민주주의학생연맹의 전국적 조직)결성에 이르는 과정에 지도적으로 참여하여, 자신의 지도노선을 따르는 학생운동세력을 창출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학생운동 내에 관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90년 검거시에 전민학련 위원장도 사노맹 조직원으로 구속된 바 있다. 이 전민학련은 사노맹의 이념적 지도를 따르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독자적인 투쟁을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다. 여러 차례의 가두투쟁에서 전민학련은 독자적인 이름으로 가두선전선동작업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노맹은 이러한 방계조직에 대한체계적인 조직적 지도를 위하여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사회주의학생연구소'를 만들고 이를 통해 전민학련에 대하여 전략전술적 지침을 내리고 정 치적 지도를 행한 것으로 보인다. 사노맹과 학생운동 방계조직과의 조직적 지도 피지도 관계를 보면, 직접적인 조직적 지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1980년대적 특징의 하나이기도 한데, 비록 전위조직이 변혁운동 전체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정파적 그룹 내에서는 -조직적 연관을 갖건 갖지 않건 간에- 일정하게 지도 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노맹 역시 자신의 변혁이념인 '민족민주혁명론'(NDR) 그룹 내에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정치적 지도를 행할 수 있는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1970년대의 전위조직에 비하여 훨씬 높은 수준의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대중투쟁과 전위조직의 관계라는 점에서 보면, 학생운동에 대한 영향력을 넘어 노동운동에 대한 영향력의 범위가 1970년대에 비하여 부분적으로나마 확대되었다는 점도 사노맹 활동의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이 점은 기층 대중운동이 활성화되고 기층운동 가운데서 선진적인 변혁이념에 공감하는 인자들이 보다 확대된 규모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사노맹은 1980년대의 노동운동의 조직적 대중적 발전과정에서 형성된 조직들 및 노동조합 내부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작업을 체계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시도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 다양한 프랙션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대중운동의 발전과정에 나타난 각계각층의 사회운동조직 특히 노동운동 및 변혁운동조직들 들에 자신의 입장과 조직적 입장을 관철하려고 시도하였다. 그간 사노맹은 노동자대학,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전국농민회총연맹, 국민연합, 전국빈민연합, 민중당 내에 파견망을 보내 어 그 내부에서 활동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사노맹의 문건에 따르면, 전노협이 결성되기 전의 전국회의 산하 노동법 개정 및 '임금인상 투쟁본부'(1988. 12. 22) 결성시부터 파견자를 2∼3명 정도 보내어 내부에서 활동하도록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다양한 운동 조직에 자파조직원을 파견하여 각 공개단체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치적 노선이 관철되도록 시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91∼1992년경에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민중당', '민중진영 단일정당추진위원회', '민중회의', '가톨릭대학생연합회' 등에 파견망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하였던 것으로도 보인다.
사노맹은 혁명의 주력군으로 상정하고 있는 노동계급 내에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하여 다양 한 조직적 시도를 하는데, 위의 파견망 외에도 전국의 많은 공장에 세포조직을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안기부 발표에 따르면 전국 사업장을 혁명의 요새로 만들기 위하여 성남, 안산, 창원, 포항, 울산, 태백 등지의 기업노조와 업종별 노조, 서울, 부산 등 대도시의 병원, 지하 철, 운수노조 등에 조직원을 파견하였으며, 전국의 가능한 사업장에서 특히 서울수도권과 울산 등 동남공업단지 내에서-공장소조작업을 수행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국가안전기획부, 『사노맹의 실체 수사결과』, 1991. 10, 38∼40쪽). 이러한 결과로 울산 등 몇 몇 지역에서는 현장의 선진노동자들 사이에 일정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는 사업장도 존재 한 것으로 보인다.
각 지방위에서도 중앙조직에 상응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는데, 지역에 존재하는 노동운 동단체에 파견망을 둠으로써 조직적 연관관계를 확보하려고 시도하고, 동시에 공장사업부를 두어 개별공장에 자신의 조직원을 확보하고 그것을 공장프랙션 혹은 공장세포조직으로 발전시키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화의 시도와 함께 계기에 따라 파업투쟁을 확산하기 위한 선전선동작업을 전개하였고, 이러한 작업을 체계화하기 위하여 중앙조직국 산하에 공개투쟁조직인 '노동해방선봉대', 비공개 투쟁조직인 '사회주의선봉대', '선동소조'등 을 결성하여, 집회 및 파업투쟁이 있는 곳에 투입하여 선전선동을 전개하였다.
사노맹의 공장사업은 1989년 초 '일대전환' 이전에는 주로 학생운동 출신 및 선진노동자 들을 중심으로 한 내적 훈련에 초점이 주어지고 있었고, 대중사업으로서의 공장활동이 활발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대전환 이후 ① 대중조직에서의 프랙션 활동 ② 지역 사업 ③ 지역단위에서의 공장활동의 활성화를 위한 시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사노맹 자체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장사업 자체도 활성화되기가 어려웠고, 사노맹 출범 이후에야 더욱 확대된 규모로 시도되었다고 한다. 1991년 이후에는 공장활동 을 전면적으로 추진하는 방향에서 사업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사노맹의 경우 전반 적인 이면적 심화와 각계각층 대중운동의 활성화에 조응하여 노동운동의 선진활동가와 선진 대중을 일정하게 확보함으로써 노동운동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인적 기반을 더 확대된 규모에서 확보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조직적인, 인적인 영향력의 확보시도와 함께 사노맹이 1970년대와 달리 다양 한 매체를 통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여러 운동 영역 및 인자들에게 홍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도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사노맹은 "노동해방 이념과 사회주의이념을 선전선동하는 합법적인 매체" 로서 『월간 노동 해방문학』을 정규적으로 발행함으로써 선진활동가 및 선진대중의 정치적 인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우회적인 경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특히 노동해방과사회주의의 이념을 공개적으로 선전선동함으로써 대중운동의 정치적 지향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에 통혁당의 경우『청맥』이 있었으나, 그것은 자신의 독자 적인 이념을 선전 선동하는 잡지라기보다는 당시 진보적인 잡지의 한 형태였을 뿐이었고, 1970년대 남민전은 우회적이건 직접적이건 자신의 이념을 유포할 수 있는 잡지의 창간을 시도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반면에 1980년대 사노맹은 확장된 정치적 공간의 영향 때문이기는 하나, 공개잡지를 통하여 자신의 이념을 공개적으로 선전선동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정기적인 팜플렛인 『긴급전술결의』,『한걸음 더』,『새벽바람』등을 발간함으로써 자신의 이념을 확산할 수 있는 기제를 확보하였다는 점에서도 1970년대에 비하 여 일정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셋쩨로 사노맹이 행한 내부 교육사업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인적 재생산이라는 점에 서 사노맹의 내부 교육체계는 그 이전 시기에 비하여 보다 체계화, 정교화된다는 점을 지적 할 수 있다.
먼저 사노맹은 엄혹한 현실 속에서 조직보위를 위하여 엄밀한 선발기준하에 조직원을 포섭하고 있다. 외부의 한 성원이 조직원으로 가입하려는 경우 추천자가 '가입추천서'를 제출하도록 하고 본인에게 가입원서와 자기소개서 및 정치사상 소견서를 제출하도록 한 다음, 포섭대상자의 '사상성', '비밀활동능력' 등 50여 가지 기준에 따라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하게 된다. 이때 포섭대상자의 출신성분, 투쟁경력 등에 대한 신원사항을 은밀히 조사하고 설문조사, 직접면담을 통하여 조직원으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검토한 후 가입케 하고 있다. 선발된 후에도 6개월 이내의 후보조직원의 검증기간을 거쳐 조직원이 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조직원 자격기준은 초기에는 조직보위 차원에서 대단히 엄격하게 적용하였으나, 1991년 1월 조직개편 후에는 가입자격을 완화하여 과거 사노맹의 지지자 격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충원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일단 조직원으로서 가입한 다음에는 1개월에서 1년 간의 '사상교양', '체력훈련' 등 소위 지옥훈련을 실시하여 직업적 혁명전위투사로서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과정을 밟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지옥훈련은 사준위 시기에는 조 직원으로서 서약한 모든 조직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조직원으로서 선발된 경우 혁명적 사회주의자로서의 인식과 실천능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조직원으로서의 사상적 무장과 혁명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실시'-'혁명의식 강화를 위한 좌우면 설정'-'조직 활동의 목표달성을 위한 슬로건 제정'-'직업혁명가로 육성하기 위한 소위 지옥훈련'을 실시함으로써 '엄혹'한 현실 속에서 직업적 혁명활동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려 고 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지옥훈련만으로 훈련과정이 종결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더하여 '필수실천'이 뒤따라야 완전한 조직원으로서의 교육이 완결된다. 조직원으로서의 사상적 무장을 위하여 세미나를 주 1회 개최하여 투쟁이념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그것이 끝난 후에는 투쟁이념 정립보고서를 제출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세미나과정에서는 '민족민주혁명'이념, 혁명적 사회주의자로서의 정세인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이 포함된다. 마지막에 실시되는 지옥훈련에는 체력훈련, 무술훈련, 실무훈련(통신연락 등), 팀워크훈련 (위장, 상황판단 훈련 등), 담력훈련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사노맹은 1970년대까지의 비합법 전위조직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조직원 후보자의 '성분' 을 분석하고, 조직원으로 선발된 경우에도 강도 높은 조직원 교육을 통하여 내부의 이념적 동질성을 확보하고 동시에 혁명가로서의 이념적, 실천적 자질을 향상시키려는 시도를 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70년대의 내부교육과 1980년대의 내부교육이 다른 점은 혁명적 인식을 획득하기 위한 일반적인 교양이 내부 교육과정에서 큰 비중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1980년대에는 대중의 이념적 급진화가 진전되고대중운동이 활성화되기 때문에 조직내부 에서 수행되어야 할 혁명적 교양내용을 습득한 상태에서 조직원으로 가입하게 되므로 내부 교양에서는 정파적 입장에서의 정치사상 교육 등이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조직원으로서의 교양내용은 '10대 보위수칙' 등 조직 및 조직원의 보위를 위한 훈련지침, 조직원 상호간의 접선방법(무인포스트를 이용한 접선방법 등), 내부의 비밀을 위한 은어사 용법 등이 들어있으며, 10대 보위수칙에는 기밀유지 방법, 미행차단방법, 기타 안전대책 등 이 포함되어 있다.

사노맹은 조직원으로 가입하여 조직활동을 시작한 후 이를 적절하게 수행하고 있는지를 평가(暗行點檢)하여 더욱 높은 활동을 위한 평가 및 지도자료로 활용하기도한다. 중견 핵 심간부인 현정덕이 구속되면서 드러난 자료에 의하면, 하부조직원 역량평가서를 작성하는데, 평가기준은 ① 조직적 안정성 ② 임무수행 능력 ③ 비밀활동 능력 ④ 이론 및 조직지도 능력 ⑤ 재정 능력과 임무수행의 조건정도 등이다. 이 각각의 평가기준을 다시 세분하여 그 각각에 대하여 9등급(상상, 상중, 상하, 중중, 중하, 하상, 하중, 하하)으로 평가하고 하부조 직원에 대한 지도 및 비판의 자료로 활용하게 된다.
결국 1980년대 전위조직으로서의 사노맹의 경우 가입 및 승격과정의 체계화, 내부혁명교 육체계의 제도화, 일반 혁명교양을 전제로 한 특수한 혁명교양 제도의 확보 등으로 1960, 70년대에 비하여 더 높은 수준의 제도화를 동반한 인적 재생산메카니즘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넷째로 사노맹의 활동을 '보급투쟁'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즉 사노맹이 자신의 물적 재생산을 위하여 어떤 활동을 하였으며 그것이 얼마나 체계화된 형태로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물적 재생산이라는 점에서 사노맹을 살펴보게 되면, 산업화의 진전으로 이전시기에 비하여 객관적인 물적 자원동원력이 확대되고, 전위적 활동인자들과 대중들의 정치의식상의 괴리가 축소되기 때문에 내부적인 자금조달력이 대단히 확대된다. 그래서 사노맹의 경우 북한이나 일본의 자금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체의 회비, 특별기부금을 통하여 조직활동자금을 마련하게 된다. 물적 재생산 능력이 객관적 조건, 주체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확대강화되어 간다고 할 수 있다. 사노맹은 계급투쟁의 3대영역을 조직, 사상, 재정으로 설정하여 재정확보 활동에 대단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적 재정사상이 아닌 사회주의적 재정사상에 기초하여 재정을 모집, 운영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노맹은 조직활동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보급투쟁'(보투, BT라고 지칭)이라고 명명하고, 4차에 걸쳐 대대적인 모금활동을 하게 된다. 초기의 조직 결성자금을 마련하기 위 한 활동은 '신혼비 작전'이라고 명명하는데, 이 작업은 1988년 9∼11월에 집중되었고, 부분적으로는 1989년 초까지 진행된다. 여기에서 1억 2,000여만원의 자금을 모집하여 아지트, 인쇄시설 등 조직적 사업의 물적토대를 확보하게 된다. 2차로 1990년 8월부터 11 월간에는 당국의 수사가 확대되면서 '도피 및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박노해 치료기금'이라는 명목으로 약 5,000만 원 정도의 자금을 모금하게 되며, 3차로 1990년 12월 중순부터 조직개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자금확보작전을 '호랑이 사냥 작전'으로 명명하고, 자금확보에 나서게 된다. 4차로 사노맹은 1991년부터 1992년 초까지 '지각변동'이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보급투쟁'을 전개한 바 있다(약 5억 원 정도의 목표액). 이러한 자금확보 활동은 박노해라는 상징적인 인물이 상당부분 매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의 물적 재생산역량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사노맹은 이러한 비정규적인 기부금을 통한 조직운영자금 확보라는 차원을 넘어서 서 수익사업을 통하여 조직 자체 내에서 체계적으로 확보하려는 시도를 행한다는 점이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사노맹 후원자 3개팀 12명으로부터 사업자금 3,000만 원을 확보한 후, 소위 '인삼사업계획'을 수립하여 경기도 이천 및 발안의 인삼밭에 1,400만 원을 투자, 입도선매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알루미늄 피막처리기술을 이용한 신소재 개발사업에 착안, 재정후원자로 하여금 5,000만 원의 자본금을 출자케 하여 이윤을 분배하도록 하는 계획을 세우는 등-이 계획은 노출되어 중지된 것으로 판단된다-지속적인 수익 사업을 계획, 시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91년에 들어서면서 안정적인 조직운영자금 확 보를 위하여 학원, 광고기획사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사노맹은 또한 조직적으로 월간지 등에 기고하여 사노맹의 대중적 선전과 동시에 조직자금 을 동원하려는 시도도 한 바 있다. 특히 박노해 시인의 명망성을 이용하여 『신동아』등 월간지에 기고하고 고료를 조직운영자금으로 사용하는 등의 방법도 사용하고 있다.

사노맹은 조직규모가 늘어나고 전업적 활동가가 많아지면서 대규모의 자금이 소요됨으로 써, 그러한 조직운영자금의 조달 자체도 문제이지만, 조직에 참여하는 활동가들의 생활비와 활동비도 문제였다고 한다. 실제 일선기구에서의 재정난이 심각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었다 고 한다. 하부 활동가들의 경우 활동하면서 생활비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학원강사, 자영사업 경영,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생활과 활동을 병행해가는 경우도 나타난다.
1980년대의 전형적인 전위조직으로서의 사노맹은 1970년대까지의 전위조직이 그 객관적 조건의 열악성 때문에 외부자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조건을 극복하면서 자체의 여러 방법을 통하여 방대한 조직운영자금을 조달하고 있으며, 그 조달방법도 일시적인 특별출연방 법을 넘어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조달방법, 즉 수익사업 혹은 기금조성에 기초한 재정운영 방법의 방향으로 발전해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1980년대 전반적인 조건 의 변화가 사노맹이라는 특수조직에도 반영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5. 사노맹의 활동 및 검거 (2) 사노맹의 검거

1988년 4월 사준위가 결성된 시점으로부터 기산하면 조직총책이 검거되는 1992년 3월까지 4년여의 기간, 1989년 11월 사노맹의 출범이 공식화된 시점으로부터 기산하면 2년 반의 기간동안 조직파괴의 위험을 극복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그러나 사노맹은 1990년 9월 연락국의 현정덕이 검거되면서 위기상황에 돌입하고 1991년 3월 조직의 중심인물인 박노해의 검거로 다시 조직적 위기가 가중된 후, 1992년 3월 조직총책 백태웅이 검거됨으로써 조직의 실질적 '붕괴'를 겪게 된다.
1960년대의 통혁당 서울시창당준비위원회, 1970년의 남민전과 비교하여 사노맹의 검거 과정은 몇 가지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첫째는 1960, 70년대 비합법조직들의 경우 일정 한 검거의 단서로 공안당국에 의해 검거가 본격화된 이후 단기간 내에 조직지도부로 파급되고, 조직지도부의 검거와 함께 조직이 일괄 붕괴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사노맹의 경우 조직의 하부에서 조직침탈사고가 발생한 후에도 그것이 곧바로 조직지도부의 검거로 이어지지 않고, 일정기간 동안 조직보위 및'반격투쟁'이 이루어지다가 후에 조직지도부의 검거와 함께 조직의 '붕괴'가 나타나게 되며, 또한 조직지도부의 검거가 이루어지더라도 조직의 전모가 완벽한 의미에서의 조직붕괴-실질적인 '붕괴'이며 설혹 조직이 잔존한다고 하더라도 재건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을 정도로 조직파괴가 심대한 것이지만-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사노맹의 검거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사노맹의 검거과정은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계는 1990년 9월 현정덕을 비롯한 연락국 조직원들의 검거와 10 월 중앙위원인 남진현의 검거를 계기로 한 조직파괴를 들 수 있다. 둘째 단계는 1991년 2∼3월 김진주, 박노해의 검거를 수 있다. 셋째는 1992년 4월 사노맹 총책 백태웅의 검거단계이다.
첫째 단계를 사노맹에서는 '제1차 보위사고' 및 '제2차 보위사고'라고 명명하고 있는데, 유인물의 수송업무를 담당하던 현정덕(수사발표에 따르면 연락국 책임자이다)과 관련조직원들이 구속되었고, 이를 계기로 전국에서 관련자들이 검거된다. 그로부터 한 달쯤 뒤에 그 의 수사과정에서 노출된 단서를 계기로 중앙위원인 남진현이 검거되어 사노맹의 중요 보고서 및 조직 내부자료들이 압수된다. 이를 계기로 역시 전국에서 많은 조직원 및 지지자들이 검거된다. 수사당국에 의한 검거가 본격화될 것에 대비하여, 사노맹은 1990년 6월 15일부터 8월 15일까지 약 60일간을 '비상보위대책기간'으로, 1990년 8월 15일부터 9월 10일까지를 '초비상보위대책기간'으로 설정하고, 조직보위를 위한 내부적 방안들을 강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직원이 검거된 후 사노맹은 이른바 '반격투쟁'을 전개한다.
둘째 단계는 박노해 검거과정에서 중앙위의 문건을 포함하여 조직 내부의 중요 문건이 압수되어, 그 당시까지의 조직의 실상이 상당부분 드러나게 된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박 노해 검거로 압수된 자료를 기초로 하여 그 이후 조직원의 검거가 확대된다.
셋째 단계는 1992년 3월 조직총책 백태웅을 비롯하여 중앙위원들이 대거 검거되는 단계이다. 수사당국은 이전에 수집된 정보를 기초로 하여 사노맹의 주요 아지트를 파악하였고 그곳을 감시하여 1992년 4월 29일 중앙위원회에 참석한 핵심간부를 포함하여 관련자 40명을 일괄 검거함으로써, 조직은 실질적 '붕괴'를 보게 된다.
사노맹은 사실 1980년대 이전의 비합법 혁명전위조직과의 연계없이 1980년대에 성장한 혁명적 인자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결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직적으로 1970년까지의 비합법 조직이 갖는 조직적 취약점을 일정하게 극복하고 있었다. 조직의 장기적 보위를 가능하게 했던 사노맹의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먼저 1960, 70년대 비합법조직의 경우, 조직의 최상층부와 하부조직원이 무매개적으로 연계되어 있음으로써 조직상층부의 검거가 곧바로 최하부조직원까지의 일괄 검거로 나타나게 되는데, 사노맹의 경우 이러한 문제점을 일정하게 극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1960, 70년대 비합법조직의 경우, 조직원간의 연계가 비록 무인포스트나 암호를 이용하기는 하였으나- 인적 연계를 불가불 동반하여 조직원 상호간의 노출이 일정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으나, 사노맹의 경우 조직 하부와 상부, 조직부서간의 연계가 인적 연계방식이 아니라 통신망을 통한 문서전달체계로 이루어짐으로써 한 부서의 조직침탈이 다른 부서의 조직침탈로 비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축소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조직원과 비조직원의 경계를 명확하게 설정하여 조직적 노출의 가능성을 극소화하였고, 조직원의 노출을 철저하게 차단하였다는 것이다. 1960, 70년대 비합법 조직의 경우- 사회적 조건의 열악성 때문이 기도 하나- 조직적 활동이 비조직원에게 노출되어 그것이 검거의 단서가 되는 경우가 있었고, 비조직원과의 모호한 연계가 검거의 단서로 주어지는 경우도 있었으나, 사노맹의 경우 일상적인 활동 속에서 이러한 한계를 나름대로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넷째, 검거된 조직원이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하여 조직전모의 노출을 차단하고자 했고, 조직을 보위하려는 자세를 보였다는 것이다. 제1차 보위사고에서 검거된 현정덕은 "숟가락으로 목을 찌르고, 안경을 쓴 채 머리를 책상에 받고, 혀를 깨무는 등 6회에 걸쳐 자해를 기도하고, 4일간 단식, 묵비권 행사 등 극렬한 심문투쟁을 전개" 하였고, 박노해 역시 자해를 감수하는 자세로 조직보위를 시도하였다는 것은 사노맹 조직원들의 특징적 모습-이러한 자해의 모습자체에 대해서는 대중적 평가가 다양할 수 있겠으나-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수사과정에서 협조자가 발생하여 그로 인하여 조직의 전모가 용이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이전 시기에는 많았으나 사노맹의 경우 조직원의 '변신'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바,이 역시 사노맹의 특징적 모습으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검거과정을 통해 볼 때, 사노맹의 조직적 취약성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으로 지적할 수 있겠다. 첫째, 수사당국의 입체적인 수사 및 미행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 점은 백태웅 스스로도 지적하고 있는 바인데, 조직보위에 대한 '원론적'인 강조와 생활화에도 불구하고 수사당국의 수사방식의 고도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둘째, 검거위험이 만성화하여 각 관련기관의 보위가 불철저하고 이완되어 있었다는 점 을 지적할 수 있겠다. 후에 드러난 바에 따르면 수사당국은 사노맹의 중앙부속기관인 조직 국과 수도권위에 대한 집중적인 감시와 미행을 상당기간 동안 수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수사의 고도화에도 기인하는 것이나-이를 파악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다수의 아지트간의 상호 연계에도 보안이 철저하게 유지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문제점은 1992년 4월의 검거 때 중요 아지트의 일괄급습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셋째, 조직부서간의 연계를 통신망을 통한 문서보고체계로 하는 보위에 대한 적극적인 측면을 위에서 특징으로 지적하였는데, 이것이 갖는 역기능적 측면을 지적할 수 있다. 문서보고체계상 조직 내의 논의 및 상ㆍ하부의 교통이 모든 문서화된 형태로 보존되게 된다. 이것은 일단 자료가 수사당국에 입수되는 경우 조직의 전모를 드러내는 직접적인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물론 사노맹은 문서 자체에 암호를 사용하거나, 컴퓨터 자료의 경우 일정한 '방어(protect)'메카니 즘을 만들어서 그러한 위험을 극소화하려고 시도하기는 하였으나, 그러한 역기능적 측면을 차단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6. 맺음말

이상에서 필자는 사노맹의 조직구조와 조직활동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하였다. 필자 는 이 글에서 먼저 사노맹이 그 일부를 이루는 1980년대 비합법 전위조직들에 대하여 살펴보았고, 다음에 사노맹의 조직적 형성과정, 그것의 인적 구성 및 지역적 기반, 사노맹 조직구조의 실상 및 그 변화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런 후 사노맹의 조직적 활동내용과 조직검거과정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필자는 이 글에서 사노맹이라는 특수한 조직의 인적, 조직적 발전과정을 분석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사노맹이 인적으로 확대를 경험하고 조직적으로 분화발전되어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발견이 곧 사노맹의 대중적 기반이 광범하다든가, 지배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사노맹이 갖는 '혁명적 위협'의 정도가 심대하다는 것을 곧바로 말 해주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사노맹의 인적인 발전에도 불고하고 여전히 '혁명적 인텔리' 조직으로서의 한계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대중적 기반의 정도가 협애성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한다. 비록 사노맹의 조직적 기반이 확대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배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그것이 갖는 혁명적 위협의 정도가 절대적으로 증대되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노맹이 그 일부라고 할 수 있는 변혁적 사회운동은 빠른 속도로 발전되어왔으나, 그 이면에서 지배권력의 안정화도 더욱 빠른 속도로 진전되어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사노맹의 '혁명적 위상'에 대해서는 별도의 분석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1989년부터 1992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사노맹이 세간에 화제가 된 것은, 주로 그 노선 혹은 이념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사노맹은 혁명적 사회주의의 입장 및 혁명적 노동자계급적 관점에서 여타의 많은 노선에 대한 비타협적인 사상투쟁을 전개하였고 그것이 오히려 사회운동진영의-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관심을 끌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은 그러한 사노맹의 이념적 내용에 대한 분석이나 평가를 목표로 하기보다는, 사노맹이라는 '베일에 가려진' 조직의 실상이 어떠한지, 하나의 조직으로서 사노맹이 갖는 특징은 어떠한지에 대한 학문적 분석에 주안점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이념 및 노선에 대 한 분석은 배제하였음을 다시 한 번 밝혀둔다. 이것은 사노맹이라는 조직에 대한 '혁명운동사적 평가'를 필자가 유보하였음을 의미한다.
끝으로 사노맹에 대한 분석논문을 쓰기에는 사노맹이 너무 '동시대적인' 사건이고, 더구나 조직성원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직에 대한 자료가 아직 충분히 확보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글은 극히 불완전한 것임을 지적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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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향386의 사상적 배후는 '강철서신'의 김영환?
(출처: 월간 말 구영식 기자)

'전향 386'들의 다수가 80년대 NL 주사파로 활동했던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사상적 배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386인사들은 대체로 '강철서신'의 저자이자 남한 주사파의 대부로 잘 알려진 김영환 <시대정신> 편집위원을 배후로 지목하고 있다. 김 위원은 1986년 서울대에서 구국학생연맹(구학련)을 결성하고 최초로 주체사상을 학생운동권에 전파한 인물이다. 구학련은 한국 학생운동사에서 '최초의 비합법 주사파 조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당시 '강철'이라는 필명으로 '한 노동운동가가 청년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를 단 편지형태의 글로 운동진영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것이 바로 '강철서신'이다.

80년대 학생운동권 강타한 '강철서신' 주인공

김 위원은 구학련 활동 이후 구속되었다가 출소해 반제청년동맹(1989년)민족민주혁명당(1993년, 민혁당) 등 비합법 주사파 조직에서 핵심활동가로 활동했다. 특히 민혁당은 90년대 중반 내부 사상투쟁을 통해 '김영환파'에 의해 장악됐다. 김 위원은 90년대 초 밀입북해 김일성 주석을 두차례 면담하는 '거물'로 성장했다. 그는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김일성주의자'였다는 것이 당시 동료들의 평가다. 그와 민혁당에서 함께 활동했던 한 386 인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94년 김영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해는 김일성 주석이 서거한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영환은 '육체적 아버지와 정신적 아버지를 모두 잃었다, 94년은 내게 가장 슬픈 해'라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철저한 김일성주의자였다."

김 위원은 99년 터진 '민혁당사건'에서 공소보류라는 파격적인 조치를 받았는데 그가 국정원에서 '반성문'을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민혁당을 해체한 뒤 구해우(현 광주평화개혁포럼 대표) 등과 함께 '푸른사람들'을 결성했다. 푸른사람들은 80년대 NL 주사파로 활동했던 운동권 출신의 친목·학습모임이었다. 그는 구해우 대표에 이어 2기 회장을 맡았다. 또한 김 위원은 홍진표·한기홍 등과 함께 1998년 11월 현재 젊은 우파의 사상지인 <시대정신>을 창간했다. <시대정신>은 80년대 NL 주사파 그룹이 사상전향을 선언한 후 만든 잡지였다는 점에서 운동권 안팎으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2003년 1월호를 끝으로 격월간지에서 계간지 형태로 발간해오고 있다.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가 단골 필자로 등장한다. 2004년 가을호에는 박세일 의원(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을 권두 인터뷰로 내세워 눈길을 끌고 있다.

'전향 386'의 사상적 거처 역할을 해오고 있는 <시대정신> 그룹은 북한민주화로 포장한 북한붕괴론을 제기해오고 있다. 특히 이들은 황장엽 전 비서가 만든 주체사상이 60년대 이후 김일성 주석에 의해 '김일성주의'로 변질됐다고 비판한다. 즉 황 전 비서의 주체사상이 진정한 주체사상이라는 것. 그래서 운동진영 일각에서는 이들을 '황파'라고 부른다.

한홍구 교수 "김영환은 주체사상을 끝내 소화하지 못한 채 토해 버렸다"

한홍구 교수(성공회대)는 11월 25일자 <한겨레21>의 '남한 주사파의 비극과 희극'에서 김 위원을 이렇게 평가했다.
"김영환은 황장엽 등이 화려한 당의정을 입혀놓은 주체사상을 가장 반주체적인 태도로, 대단히 교조적으로 집어삼켰다. 그러고는 끝내 소화하지 못한 채 토해 버렸다. … 그와 유사한 경험을 했지만, 그와는 달리 차분하게 북을 바라보는 연구자가 된 어느 학자가 지적한 것처럼 '그는 환상이 깨진 자리를 치열한 반성적 대안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북한을 악으로 규정하고 반공, 반북으로 나감으로써 최대한 보상받으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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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NL주사파 운동권 핵심이었다
뉴라이트운동 주도하는 '전향386', 그들은 누구인가
(출처: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

 "운동권들은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고 했는데 자본가만큼 일을 많이 한 사람이 어디 있나."
소위 '수구꼴통'의 우익집회에서 나온 발언이 아니다. 지난 24일 자유주의연대 창립 기념토론회에 참석한 한 386 운동권출신이 내뱉은 '자본가 찬양가'다. 그는 범청학련 부의장과 한총련 중앙집행위원장 등을 지낸 'NL(민족해방) 주사파'출신이었다.

지난 4·15 총선에서 전대협 출신이 12명이나 당선되면서 운동권 386은 언론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요즘 또다른 부류의 운동권 386이 뜨고 있다. 자유주의연대로 집결한 이들은 <조선>과 <동아> 등 보수언론의 지원을 받으면서 현재 뉴라이트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이른바 '전향 386'들로, 대다수가 과거 NL 주사파 출신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홍진표·한기홍, "김정일 정권 타도" 기치 건 <시대정신> 창간멤버

 
▲ 홍진표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정책실장

<오마이뉴스>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자유주의연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향 386'은 신지호·이동호·최홍재·최희섭·한기홍·허현준·홍진표 등으로 확인됐다. 이중 PD(민중민주) 계열인 신지호 대표를 제외한 나머지는 80년대 NL 주사파의 핵심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먼저 홍진표(42)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정책실장. 홍 실장은 한때 국보법(2번)과 집시법(1번) 위반으로 3번이나 투옥된 운동권이었다.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전남 광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홍 실장은 서울대 경제학과 82학번으로 입학했다가 이듬해 정치학과 83학번으로 다시 입학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홍 실장은 '강철서신'의 저자이자 남한 주사파의 대부로 잘 알려진 김영환 <시대정신> 편집위원과 함께 서울대의 구국학생연맹(남한 학생운동사상 최초의 비합법 주사파 조직)에서 활동했다. 그는 당시 김영환 위원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현재까지도 함께 활동하고 있다. 홍 실장은 이후 전민련(전국연합의 전신) 통일분과 간사와 한겨레사회연구소 연구원,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조직국장 등을 지내며 10여년 동안 통일운동에 전념했다. 그는 현재 젊은 우파의 사상지 역할을 해오고 있는 <시대정신>의 창간 멤버이기도 하다.

홍 실장은 지난 23일 기자회견에서 현 정권을 '수구좌파'로 규정한 뒤 "현 정권은 북한인권문제는 외면하고 김정일 정권 유지에 목을 걸고 있다"며 "정상적인 좌파라면 지금 북한체제를 비판하는 게 옳다"고 말했다.

홍 실장과 함께 <시대정신>를 창간한 한기홍(43)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는 노동운동 경력을 가지고 있다.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난 한 대표는 대학 3학년 때 중퇴한 뒤 인천의 작은 공장을 전전했다. 인쇄노조와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각각 3년씩 일하기도 했다. 한 대표는 이후 94년부터 97년까지 철도청 하급 기능직으로 일하면서 노동운동을 지속했다. 하지만 90년대 말 사상전향한 그는 '푸른사람들'에서 활동했다. 푸른사람들이란 80년대 NL 주사파로 활동했던 운동권들의 친목·학습모임이었다. 그는 1기(구해우)와 2기(김영환)에 이어 3기 회장을 맡았다.

한 대표는 99년 12월 "2000만 북한민중을 구출하기 위해 김정일 독재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북한민주화네트워크를 결성했다. 이를 계기로 '전향 386'들은 <시대정신>과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등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과거 전대협은 폭력혁명세력... 민주화운동세력이란 용어 쓰지 말아야"

 
▲ 최홍재 자유주의연대 운영위원

최홍재(37) 자유주의연대 운영위원 역시 <시대정신> 편집위원이다. 최 위원은 고려대 신방과 87학번으로 91년 고려대 총학생회장과 전대협 5기 조국통일위원회(조통위) 대행을 지냈다. 최 위원은 94년 한총련 조통위원장을 지냈으며 그 이후 97년까지 전국연합 자주통일위원회에서 일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98년부터 2000년까지 민화협 연수기획부장을 지냈으며 열린사회시민연합의 은평지부 사무국장으로도 활동했다.

최 위원은 스스로 "골수 주사파였다"며 "98년 북한 기아문제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북한체제의 허구성을 깨달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와 함께 전대협에서 활동했던 한 386 인사는 "그는 매우 성실했고 열정적인 동료였다"고 회고하면서 이런 일화를 들려주었다. "전대협 5기와 6기 중앙위가 이월식을 한양대에서 했다. 교정으로 올라가는 길에 승용차가 길가에 죽 늘어서 있었는데 홍재가 백미러를 다 때려 부시더라. 내가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자본가는 다 때려 죽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조국통일투쟁과 관련해서도 강경발언을 했다." 최 위원은 90년대 후반 사상적 변화를 겪으면서 젊은 우파의 집결지인 <시대정신> 그룹에 합류해 현재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그는 민주통일센터 사무국장도 지냈다.

최 위원은 자유주의연대 창립기념식 토론회(24일)에서 '잃어버린 세대 386(?)-386에 대한 성찰적 회고'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80년대 386'에 대해 "좌경도 용공도 아닌 혁명적 사회주의자"였으며 "소련식 사회주의국가를 만들거나 북한식 김일성주의 국가를 세우려 했던 강력한 이념세대였다"고 규정했다. 최 위원은 '정치권 386'에 대해 "히틀러의 게르만주의보다 더욱 파괴적인 '우리 민족끼리'라는 시대착오적 담론에 매몰되어 있다"며 "한국 386은 김정일과 운명공동체"라고 주장했다.


▲ 이동호 한반도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이동호 한반도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전대협 연대사업국장을 지냈다. 그는 이동복 전 의원이 상임대표로 있는 '북한민주화포럼' 간사를 맡고 있다. 그는 지난 11월 1일 북한민주화포럼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학교 때 조국통일그룹의 지도적 위치에 서서 잘못된 사상에 입각해 살았다"고 '고백'했다. "애국운동세력은 좌파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 나처럼 친북주사파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친북주사파에 대한 실질적인 공격에 나서야 한다. 과거 우리(전대협)들은 폭력혁명세력이었다. 더이상 민주화운동세력이라는 말을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 남한의 학생운동과 좌파운동을 지도하는 세력은 김정일정권이다. 전대협 연대사업국장으로 일할 때 한민전 투쟁지침과 북한의 혁명관을 단파라디오로 듣고 그 내용을 각 대학의 토론자료로 내려보냈다. 애국운동진영은 남한의 좌파를 성장시킨 배후(김정일)를 찾아 집중 공격해야 한다."

유일한 PD계열 신지호... 90년대 초 "더 이상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선언

또 전북대 88학번인 허현준 민주통일센터 연구원(36)은 1994년 전북대 총학생회장과 전북총련 의장을 지냈다. 범청학련 남측본부 부의장로 활동하면서 '남·북·해외 공동연석회의'를 성사시켰던 그는 범청학련사건과 서울대 범민족대회사건으로 두차례 구속됐다. 특히 그는 1996년 한총련 연세대 사건 때 한총련 중앙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2년간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

허 연구원은 98년 (주)다우스마트라는 정보통신회사를 설립하고 2003년 4월에는 인터넷 생선회 쇼핑몰(피시팔팔)을 열면서 사업가로 변신했다. 통일운동과 장애인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2003년 민화협과 통일맞이, 북한민주화네트워크, 탈북자동지회 등에 활어횟감을 무료로 배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허현준 민주통일센터 연구원

허 연구원이 총학생회장으로 있던 전북대는 90년대 중후반 이후 새로운 학생운동의 중심지였다. 즉 NL그룹 주류에서 분화한 '사람사랑(사사)계열'의 근거지였던 것. 이들은 '푸른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으며 대부분의 전북지역 총학생회를 장악했다. 심지어 총학생회 사무실에 '김정일 정권 타도'라는 슬로건을 내걸 정도로 '북한타도론' 혹은 '북한붕괴론'에 집착했다.

허 연구원은 자유주의연대 창립기념 토론회에서 "한총련 중앙간부들은 밤에는 김일성 회고록을 읽고 김일성 항일무장투쟁 비디오를 보면서 탄복하고 박수를 쳤다"며 "386의 이념적 토대는 북한정권의 붕괴와 함께 급격히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최희섭(40) 열린사회시민연합(시민연합) 동대문지부장은 경희대 사학과 84학번. 그는 5기 전대협에서 조통위 정책위원을 지냈으면 이후 전국연합에서 활동했다. 시민연합은 <시대정신>과 연계된 박홍순(87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숭규 등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시민연합은 서울민통련과 민주쟁취국본 서울지부가 각각 시민단체로 전화된 서울민주시민연합과 서울겨레사랑지역운동연합이 합쳐져 1998년 창립한 단체다. 시민연합은 창립 초기부터 '북한실상과 탈북자 실태', '북한현실과 통일운동의 방향' 등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자유주의연대에 소속된 '전향 386'들 중 거의 유일한 PD계열인 신지호(42) 대표는 경기고와 연세대 경제학과(82학번)를 졸업했다. 신 대표는 노회찬·조승수 의원 등과 함께 활동했으며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추진위 울산 책임자였다. 신 대표는 90년대 초반 '고백논쟁'을 일으키며 운동진영에서 화제의 인물로 떠오른 바 있다. 당시 진보정당추진위에서 활동하던 그는 잡지에 '고백' 등의 글을 통해 운동권을 공개 비판하며 사상전향을 선언했다.

신 대표는 92년 8월호 <길을 찾는 사람들>에 기고한 '당신은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에서 "사회주의의 핵심이 사적 소유의 폐지에 있다면 장구한 역사발전이 있는 후라면 몰라도 앞으로 상당기간은 불가능하다"며 "따라서 그것을 신봉하지도 행동에 옮길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당시 기고글의 편집자주에는 "지난 수년간 지하노동운동을 해오면서 사회주의 노동자정당 건설을 추진해왔다는 필자가 맑스레닌주의자에게 묻고 있다"고 적혀 있어 그의 운동경력을 짐작케 한다. 이후 그는 "운동권은 이제 경실련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자신의 충고에 따라 경실련에 들어가 정책파트에서 활동하며 서경석 목사를 보좌했다. 신 대표는 경실련 활동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대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뒤 귀국해 삼성경제연구소 북한연구팀 수석연구원과 한국개발연구원(KDI) 북한경제팀 초빙연구위원을 지냈다. 현재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겸임교수로 있다.

신 대표는 최근 "현 정권의 참여민주주의는 80년대 운동권이 주창했던 민중민주주의의 노무현 버전"이라며 "지배계급 교체, 기존질서 해체 등의 발상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변종인 민중민주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노무현 정부를 공격해왔다.


▲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왼쪽)과 지난 92년 8월호 월간 <길을 찾는 사람들>에 실린 신 대표의 '당신은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 기고글.

전대협 출신들의 반응 "극단적 단절... 정치세력화를 위한 이미지화작업"

이들에 대한 전대협출신 386인사들은 대체로 "이해할 수 없다", 또는 "슬프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성원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사무처장은 이들의 변신을 "극단적 단절"이라고 표현하면서 "극우와 극좌는 통한다는 말을 증명해주는 사건"이라고 평했다. 전문환 전대협 동우회장은 "우익인사가 후원하고 우익매체가 띄워주고 있는 자유주의연대의 출범은 우파의 위기의식에 기반한다"며 "하지만 이들의 고백에는 무게나 비전이 전혀 없다"고 꼬집었다. 전 회장은 "이들은 정치세력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며 "현재의 활동은 결국 정치권 진출을 위한 이미지화작업"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그는 "지역기반 등 하부조직력이 없어 영향력 있는 조직으로 등장하긴 힘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향 386'의 사상적 배후로 의심받고 있는 김영환 위원의 과거 동지였던 A씨는 "왜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했냐고 그들에게 따져야 하는데 도리어 그들이 우리를 욕하고 있다"고 꼬집으면서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김영환이나 홍진표는 당시 학생운동권에 대한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이들은 우리한테 공장에 들어가라고 하면서도 자신들은 들어가지 않았다. 자신들은 혁명 지도자기 때문이란다. 이들은 자기 손으로 돈을 벌어본 적도 없다. 이들은 그동안 운동권에서 나름의 지위를 누려왔다. 이것은 당시 열정적이고 헌신적이었던 많은 동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자신들이 사상적 지도자인 것처럼 행세하면 어떡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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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좌파는 가장 후진적인 외눈박이"
386 골수 사회주의자→자유주의자 전향한 서강대 신지호 교수
(출처: 주간조선 정장열 기자
jrchung@chosun.com)

동아일보에 칼럼을 정기 기고하는 신지호(申志鎬ㆍ42) 서강대 교수가 요즘 지식인 사회에서 화제다. 386 골수 운동권 출신인 그는 과거 운동권 동지였던 열린우리당 386 의원들을 향해 “동지들을 속일 수 없다”며 친북좌익의 성향과 주사파적 시각이 변했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고 이들에게 “과거 청산 자격이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전향한 사회주의자’로서 우리 사회 좌파의 시대착오에 대해 메스를 가하고 있는 신 교수를 지난 10월 2일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 평소 칼럼에서 386 주사파 출신 정치인들에 대해 강한 비판을 하던데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주사파의 목소리가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생각하나.
“노무현 정권을 규정하는 여러 가지 말 중 하나가 386 정권이고 17대 총선 이후 386 운동권 출신들이 대거 여의도에 입성했다. 그런데 열린우리당 386의 다수가 주사파 출신이다. 또 민노당의 다수파도 주사파 출신들이다. 주사파들은 아직 한국 정치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일반 국민에게 반미(反美)ㆍ친북(親北)의 바람을 일으키는 진원지이다. 한국 정치가 제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 주사파 문제를 제대로 검증하고 극복해 나가야 한다. 이 사람들이 과거 어떤 사람들이었고, 지금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으며, 한국을 앞으로 어디로 끌고 가려는지가 명확해져야 국민의 정치적 선택도 분명해질 수 있다.”

- 386 주사파 출신 정치인들이 아직 친북 성향이라고 단정했던데 이들이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 과거와 다름이 없다는 얘기인가.
“물론 주사파도 다양하게 분화됐다. 민노당 주사파 출신들은 거의 변함이 없는 반면 열린우리당 주사파 출신들은 김일성 체제를 찬양하고 신봉했던 데서 이제는 북한을 감싸고 이해하는 식으로 변했다. 이들은 북한의 문제점에 대해 애써 외면하거나 침묵을 한다. 이런 변화도 제대로 된 자기 반성을 통한 게 아니라 북한 체제의 문제점이 만천하에 폭로되면서 어쩔 수 없이 이뤄진 것이다. 이들은 아직도 북한에 대해서는 외눈박이들이다.”

- 386 주사파 출신 정치인들이 과거 자신들의 오류에 대한 반성과 고백이 필요하다는 입장인가.
“그렇다. 주사파는 기본적으로 민족사의 정통성이 대한민국에 있는 게 아니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대한민국 국회의원 배지를 달 수 있나. 그들이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번이라고 밝힌 적이 있나.”

- 386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이 주사파적 시각이 아니라 통일의 염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일반적 정서를 앞장서 대변하고 있다고는 보지 않나.
“그런 측면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민족이나 통일 지상주의로는 그들의 태도가 설명이 안된다. 친(親) 김정일 노선을 걷는 것과 민족ㆍ통일지상주의가 일치할 이유가 없다.”

신 교수는 주사파 출신 정치인들을 비롯해 현 정권에 참여한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은 ‘자아분열증 환자’라는 주장도 폈다. “이 사람들은 세계사적으로 검증된 선(先) 산업화, 후(後) 민주화 노선이 옳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람들이다.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주장을 펴면서 산업화와 경제 발전을 경시한다. 하지만 이 사람들에게 북한 인권 문제를 물어보면 인권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게 생존권이라며 ‘북한도 일단 먹고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민주주의 인권은 나중에 해도 되지 않느냐’는 논리를 편다. 과거 우리의 권위주의 정권에 적용했던 논리와 북한 전체주의 정권에 적용하는 논리가 180도 모순이다.”

“한국 좌파는 수구 맹동적”

- 주사파를 포함한 우리나라 좌파들의 문제점이 뭔가.
“한국의 좌파는 선진국과 비교하면 가장 후진적인 좌파다. 한국의 좌파는 크게 세 덩어리로 분류가 가능하다고 본다. 하나는 주사파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민노당 내의 과거 PD계열이다. 또 하나가 주사파나 PD계열을 극복하고자 하는 포스트 막시즘 등 서유럽풍의 세련된 좌파이다. 이런 세련된 좌파가 대표주자가 되면 그래도 괜찮을 수 있다. 독일의 사민당 같은 정당은 과거 소비에트식 사회주의와 치열하게 투쟁한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우리 좌파 진영에서는 아직도 주사파가 가장 영향력이 크다. 성숙된 좌파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수구적 맹동적 좌파다.”

신 교수는 주사파에 대해 “고쳐서 새로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100% 폐기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최악의 전체주의인 김일성ㆍ김정일 체제를 지탱하는 주사파가 사회주의 내에서도 가장 문제가 많은 사회주의였으며 북한의 실패가 곧 주사파의 실패”라는 것이다.

- 노무현 정권을 평소 좌파 정권이라고 지칭하던데 현 정권 인사들은 좌파 정권이라는 평가에 반발하고 있고 사실 구체적 정책들을 봐도 좌파라는 평가는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많다.
“과거 PD계열은 주사파들에게 개량주의자라고 비판했다. 노동자 계급을 위한 혁명노선을 걷지 않고 자본주의와 적당히 타협하면서 오로지 미 제국주의 반대투쟁만 한다는 것이다. 지금 노무현 정권의 정체성을 보면 그때 구도와 비슷하다. 시장친화적인 주장을 펴는 일부 386 출신 의원들을 보더라도 경제 정책은 우로, 사회ㆍ문화적인 것은 좌로 가져가겠다는 태도다. 이들에게 결정적으로 빠진 것은 통일ㆍ외교ㆍ안보 문제를 어떻게 하겠느냐는 점이다. 이제까지 노무현 정권의 방향을 보면 반미는 아니라고 해도 탈미(脫美)는 분명하다.”

- 현 정권의 정책이 과거 주사파의 전략과 비슷하다는 얘기인가.
“구도가 닮았다. 현 정권은 시장경제 마인드를 갖고 있는데 왜 우리가 좌파냐며 억울하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시장을 조금 중시하는 마인드를 보여준다고 좌파 혐의를 벗을 수 없다. 경제 정책은 기본적으로 시장이 작동하기 때문에 정부가 좌지우지할 단계를 넘어섰다. 정책에서 일정한 편향이 나오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이를 조정해 나간다. 하지만 안보ㆍ외교ㆍ통일 문제에는 시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조정자가 없다. 국민에게 이 부분에서 확고한 믿음을 주지 못하면서 시장이 감시하는 경제 정책에서 약간의 우파적 경향을 보인다고 좌파의 이미지를 벗을 수 없다. 노무현 정권은 주사파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는 좌파 정권이다.”

유시민씨 권위·전체주의 차이 몰라

- 좌파 진영이 지금도 ‘박정희보다 김일성이 낫다’는 식의 사고를 한다고 보나.
“과거에는 박정희·전두환이 싫고 김일성을 좋아한다고 내놓고 얘기했지만 지금은 조금 변했다. 지금 좌파의 멘탈리티는 김일성보다는 박정희가 싫다는 쪽이다. 과거 유시민 의원이 한 신문 칼럼에 ‘유신 5공의 체육관 민주주의나 김일성에게 100% 찬성표를 던지는 북한의 인민민주주의나 오십 보 백 보다’라는 글을 쓴 걸 기억한다. 유시민 의원은 운동권 내에서 우파라는 평가를 받았고 주사파 출신이 아니다. 이런 사람조차 과거 개발독재는 우파 독재였고, 저쪽은 좌파 독재였는데 뭐가 다르냐는 위험한 논리를 편다. 이는 권위주의 체제와 전체주의 체제의 차이점을 전혀 모르는 한심한 얘기다. 과거 문화혁명 시기의 중국이 전체주의였다면 지금은 권위주의 체제다. 이 차이를 중국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하늘과 땅 차이다.”

신 교수는 한국의 현 정치 지형을 ‘시대착오적인 20세기 수구 연합’이라고 규정했다. 북한과 운명을 같이 할 열린우리당의 수구 좌파 세력과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 한나라당의 수구 보수 세력, 그리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민노당의 반동 좌파 세력이 우리 정치의 중심 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한국 정치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수구 보수를 대신할 혁신 보수가 등장하는 보수혁명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폈다. “박정희 시대를 역사적으로 평가할 수는 있지만 지금 박정희식 모델로는 절대로 2만달러 시대를 열 수 없다. 지금은 작은 정부와 민간의 활력을 중시하는 자유주의 모델로 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신조도 내용도 없이 기득권에만 집착하는 보수가 아니라 철학과 영혼이 있는 배고픈 보수가 필요하다. 이런 보수 혁명이 일어나 우파로의 정권 교체가 이뤄진 다음에라야 우리 사회 좌파도 진정한 변신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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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06-09-20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념과 사상은 변화해야 한다. 단, '현실과의 호흡을 통해서'라는 전제이자 근거가 있어야 한다. 전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향 근거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전향근거에는 '북한 체제가 대안이 아니다'라는 현실은 있는데, 정작 한국의 현실은 없다. '철학과 영혼이 있는 배고픈 보수'가 대체 어떤 현실적 정책을 의미하는가. 이들은 북한을 이상사회로 생각했던 과거에도, 사회주의를 만병통치약 정도로 생각하는 현재에도, 현실 불가능한 배고픈 보수 운운하는 미래에도, 여전히 현실과는 담을 쌓은 이들이다.
 

386 운동권, 사교육 시장 '완전정복'

(출처: 오마이뉴스)

"386운동권이 사교육 시장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에 대해 뭐라고 할 말은 없다."
386운동권 출신으로 사교육 시장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강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지난 6월 김진경 전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운동권386들이 사교육시장을 장악했다"며 "사회를 변혁시키겠다던 사람들이 이제는 학원 장사를 해서 떼돈 버는 세상이니 도대체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고 말했다. 이 발언을 두고 일부에서는 '운동권에 대한 적절한 비판'이라며 박수를 보냈고, 일부에서는 '망발'이라며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운동권들의 사교육 시장 장악은 업계에도 이미 알려질대로 알려진 얘기다. 386운동권의 사교육 시장 장악은 현재의 입시제도와 한국적 학벌주의가 만들어 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이 말은 단순한 논리로 설명하기 쉽지 않다는 얘기다.

그들은 왜 사교육 시장에 강자로 등장했나

386운동권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94년 수학능력시험으로 입시제도가 바뀌고, 논술 비중이 높아지면서부터. 운동권들은 비판의식과 종합적인 사고를 요하는 언어영역과 논술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입시 경향이 통합교과형으로 바뀌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됐다. 2008년 입시부터 서울대 등 주요 대학이 통합교과형 논술을 대학별 고사로 선택하면서 사교육 시장은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송파구에서 논술학원을 경영하고 있는 L씨는 386이 사교육 시장에서 실력을 발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한다.
"수능의 주요 출제자들이 80년대 중후반에 석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로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교수들이다. 그들의 논문주제는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언어 시험에 월북 작가들의 작품이 나오고 민중정서를 담은 이규보나 정약용의 작품이 자주 출제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386이 겪었던 비판정신과 출제 경향이 유사하다."

사실 386운동권들의 사교육 시장 진출은 생계형에서 출발했다. 80년대말과 90년대초에 사회에 나가 마땅히 뿌리내릴 곳이 없었던 이들은 운동에 한 발을 걸치고 밥벌이를 위해 학원강사로 뛰었다.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돼 사교육 시장으로 진출한 이들도 적지 않다. 386운동권들이 사교육 시장에서 입지를 넓힌 결정적 계기는 90년대 후반 강남 대치동 학원가가 커지면서부터다. 여기에 2000년 대학 수시 시장확대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386운동권 출신들이 주도하고 있는 학원은 조동기논술학원, 유레카논술아카데미, 초암논술아카데미, 플라톤청솔학원, 학림학원, 청산학원 등이다. 이들은 소규모 학원에서 출발해 영역을 전문화하면서 규모를 확장시켰다. 이들 학원 대부분은 현재는 100명이 넘는 강사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출판부, 논술연구소, 어학원을 부설로 두고 기업형으로 움직인다. 인터넷 강의가 일반화된 지 오래다. 이들 사교육 시장의 정점에는 코스닥 상장기업 메가스터디가 있다. 이들 학원들은 네트워킹을 통해 서로 그물처럼 연결돼 있다.

사교육시장에서 돈 벌어 비정규직운동... 정치권 진출도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장을 역임한 황광우(서울대 77학번)씨는 플라톤청솔학원에서 논술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황씨가 지은 <진리는 나의 빛> <황씨 아저씨네 논술 서리>는 논술교재로 유명한 책이다. 도시형 대안학교 '이우'의 교장인 정광필(서울대 78학번)씨도 플라톤청솔학원에서 논술 강의를 했다. <르몽드 코리아>의 대표이사인 박승흡(서울대 80학번)씨는 국어교사 출신으로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됐다가 논술강사를 시작했다. 그는 학원강사로 뛰면서 번 돈으로 비정규직센터를 만들었고, 노동전문지인 <매일노동뉴스> 발행인을 맡기도 했다.

전대협 2기 출신인 조동기(고려대 85학번)씨는 강남 대일학원에서 국어과목으로 스타강사 대열에 들어선 이후 97년말 대치역에 '조동기국어논술학원'을 열어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핵심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현재는 전국에 19개 분원을 마련하고 올해 매출목표를 400억원으로 잡고 있다.

강동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청산학원을 이끄는 쌍두마차인 최원극(외국어대 84학번)씨와 박영재(서울대 84학번)씨는 주체사상쪽 조직이던 자주민주통일(자민통) 소속으로 골수 운동권이었다. 91년 속셈학원 수준으로 출발한 청산학원은 과학고, 민족사관고, 외국어고 전문학원으로 성장해 매출 100억원대의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논술과 구술 면접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고 22개 분원을 두고 있는 유레카논술아카데미의 대표강사 장민성(서울대 81학번), 박홍순(성균관대 82학번)씨는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계로 분류된다. 박홍순씨는 민주노동당 중앙당 기획위원장을 역임했으며 2004년에는 구로갑 후보로 출마한 바 있다.

노원구에 있는 학림학원의 채광석(성균관대 87학번)씨는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으로 운동권의 유명한 시인이었다. 학림학원에는 성대 운동권 출신들이 강사로 다수 포진하고 있다. 초암논술아카데미 대표강사인 이윤호, 송재인씨도 80년대 초반 학번으로 운동권 출신들이다.

과학탐구 영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연봉18억원을 기록한 이범(서울대 88학번)씨도 좌파 운동권의 이론을 제공했던 <학회평론>의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학원 사업을 하다가 정치권으로 진출한 경우도 있다. 열린우리당 정청래(건국대 85학번)의원과 정봉주(외국어대 80학번)의원은 길잡이학원과 외대어학원을 운영하다가 여의도 입성에 성공한 경우다.

총학 집행부 회의같은 마라톤 강사회의

운동권들의 사교육 성공비결은 끈끈한 연대감과 네트워크, 조직관리능력, 친화력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철저한 친분과 인맥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특징이다. 한 학원의 경우 강사 회의가 총학생회 집행부 회의와 비슷하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들린다. 끊임없는 토론을 통해 의견을 조율하고 아이디어를 공유한다. 회의도 학생운동 시절 마라톤회의를 연상케 한다. 초암논술아카데미의 경우 일요일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교사 80여 명이 각 학년별로 세미나를 진행한다. 아이들이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과연 그것이 강사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토론하고 고민한다. 철저한 분석을 통해 '시험에 나올 법한 문제'를 찍어낸다. 철저히 경쟁시스템이 도입된다. 사교육이 공교육을 앞설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세미나가 끝나면 뒷풀이가 진행된다.

이러한 386출신의 사교육 시장 활약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이 존재한다. 사회 변혁을 외칠 때의 모습과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사교육이 확대될 수밖에 없는 공교육 취약성과 입시 중심 체제에 대한 진단없는 비판은 현실과 동떨어진 감상에 불과하다는 의견이다. 386출신 학원 관계자들은 인터뷰 요청에 "이야기를 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을 아끼면서도 "지금 구조대로 가면 공교육은 사교육 시장에 먹힐 수밖에 없다"고 공통적으로 말했다.

이들은 공교육의 상징이 된 전교조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386출신의 한 학원장은 "전교조가 아니라 전개조(전체가 개조대상이라는 의미)"라면서 "변화하지 않고, 교원평가제에 부정적인 모습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한만중 전교조 전 정책위원장은 "사교육 업체들이 교과서를 만들어낼 뿐 아니라 공교육을 포위할 정도로 성장한 상태에서 공교육의 취약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맞지 않는다"면서 "사교육을 이기는 공교육은 현실 조건에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386은 이미 중산층, 비판은 무의미하다"

한편에서는 사교육을 통해 제도가 담아내지 못하는 새로운 내용을 담아내겠다는 목소리도 있다. 초암논술아카데미 이윤호 대표강사는 "학교교육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면서 "그 한계를 21세기 대안적 교육을 통해 극복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초암논술아카데미는 '풀로 엮은 집' 등의 문화사업 활성화를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386운동권 출신이자 대치동 전문학원 1세대인 김찬휘(서울대 83학번), 한석원(서울대 83학번), 이범(서울대 88학번)은 무료인터넷 강의를 통해 교육기회의 평등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올해 3월 인터넷 공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죽음의 삼각형 : 누가 우리를 미치게 만드는가'라는 제목의 동영상은 2008년 대입이 내신-수능-대학별 고사로 이뤄진 최악의 균형이라며 혹평했다. 이 동영상은 학교-학원-대학을 동시에 비판하고 있다. 2008학년도 대입은 논술을 중심으로 한 사교육 시장을 팽창시키고 있다. 지난 4월 <대우증권>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사교육 시장 규모는 현재 16조8000억원에서 계속 확대될 전망"이며 "향후 5년은 고등학교 학생수가 증가하는 황금 시기"라고 규정했다. 이 때문에 언론사와 학원이 손잡고 논술강사 양성 아카데미를 개설하고 강사를 확보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결과적으로 학교-학원-대학의 균형보다는 사교육 쪽에 더 많은 무게가 실릴 가능성이 크다. 시장질서에서 철저히 살아남아야 하는 386세대에게 운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공교육 약화의 책임을 돌리기는 힘들다. 논술강사를 하고 있는 J(서울대 인문대 박사과정)씨는 "이미 중산층에 편입돼 있는 386운동권들을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면서 "예산을 가지고 정책을 움직일 수 있는 국가가 국립과 사립의 경계를 명확하게 하고, 차별화된 지원을 제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지역 특목고의 한 교사는 "교사 1인당 학생수를 현재 35명에서 20명으로 낮추고, 학교조직 슬림화를 통해 운영의 자율성을 높여 나가야 한다"면서 "다양한 방식의 공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 현실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초암C&C 이윤호(44)대표는 잘 나가는 논술강사다. 81학번인 그는 대학시절을 뜨겁게 보냈다. 대학을 3군데나 옮겨 다니면서 학생운동을 했고, 90년대에는 문화운동을 했다. 잡지 <리뷰> 만들 돈을 구하기 위해 13년 전 처음 학원시장에 뛰어들었다. 이 대표는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일정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사교육과 공교육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분법적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다. "현 제도 속에서는 공교육이 아무리 개혁을 외쳐봐야 틀을 깨고 나오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교육주체 만들기가 중요한 것 아닐까요." 이윤호 대표가 공개한 자신의 월급은 비수기인 요즘 200만원 내외. 물론 한참 잘나가는 입시 시즌에는 하루 15시간 강의를 해서 한 달에 3000만원 이상을 번다. 몇 달 일해서 1년을 먹고 사는 셈이다.

사교육 시장에 진출하면서 고민이 많았지만 그는 대안적 교육을 지향하는 것으로 그 고민을 해결하고 있다. 시장적 질서와 가치적 질서의 균형을 부여하려고 애쓴다. '풀로 엮은 집' 운영은 그러한 고민의 산물이다. 이곳의 다양한 강좌는 민예총 문예아카데미를 연상시킨다. 초암논술아카데미는 94년 출발해서 직영학원 5개를 포함해 서울과 경기에 8개 학원이 있다. 홈페이지에 밝힌 내용을 보면 2005년 1월까지 약 2300여 명이 수강하고 있으며 140여 명의 강사가 있다. 강의배정이나 수익배분에 있어서도 스타시스템에 의존하기보다는 함께 나누는 방식을 중시한다. 매주 일요일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진행하는 80여명의 학원강사 세미나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치열하게 토론하는 자리다.

21세기 새로운 교육 모델 지향이 이들의 목표다. 이 대표는 386운동권의 비판과 자유로움이 조직을 건강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그도 알고 있다. 사교육 시장이 결국 양극화나 신자유주의적인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아니, 양극화를 고착화시키는 역할을 사교육이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교육 시장에 진출한 386이 비판도 많이 받고, 왜 그런지 이유도 알지만 나름대로의 건강성도 있다고 봅니다.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고 일정한 합리적 인식이 있다는 것은 교육을 합리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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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사 금지`가 이들을 키웠다

(출처: 중앙일보)

강남의 사교육 논술시장의 규모가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다. 대형 논술학원의 1년 매출이 100억원이 넘는 점을 감안하면 연간 수백억원은 족히 될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개인적인 논술 과외까지 감안하면 시장 규모는 더욱 커진다. 이 거대한 시장의 승자는 1980년대의 386 학생 운동권 출신들이다. 강남 입시 논술시장의 양대 봉우리인 유레카와 초암을 비롯해 C, N, H 학원 등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학원들을 움직여 가는 주력이 바로 386 운동권이다. 강남의 논술 명문학원 중 비운동권 출신이 대표강사인 곳은 몇 안 된다.

사교육 시장이 번성한 가장 큰 배경은 널뛰기를 거듭한 정부의 교육정책이다. 학교교육에 대한 불신을 학부모들이 사교육으로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동권 386들은 대체 어떻게 강남의 논술 시장을 석권하게 됐을까. 혹시 그들이 과거의 운동권적 사고방식을 학생에게 주입하는 건 아닐까.

◆ 밥벌이 위해 시작했다 = 80년대가 운동권의 시대였다면 90년대는 운동권 좌절의 시대였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사회주의권의 해체, 소련의 몰락은 운동권에 커다란 좌절과 동요를 불러 왔다. 국내에선 군사정부가 물러나면서 운동권은 투쟁의 대상을 잃어버렸다. 80년대의 운동권이 90년대 중반 학원계에 투신한 것은 '밥벌이' 때문이었다. 초암아카데미 노원초암 함경목 원장은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선배의 제안을 받고 논술강사가 됐다. 그는 "학원강사는 이력서를 낼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한때 제적되거나 감방 경력이 있는 386 운동권은 90년대에 정상적으로 갈 곳이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과거 경력을 캐묻지 않는 학원으로 몰렸다는 것이다.

학림논술연구소 대치본원 강상식 원장도 "(2001년) 9.11 사태가 터져 토론을 하다가 선배가 '너 지금 뭐 하냐'하며 논술 교재를 준 게 (내가 강사가 된) 계기였다"고 말했다. 이런 인연과 결속력으로 이들은 빠르게 논술시장을 장악했다. 그러다 보니 특정 학원에 같은 계열의 운동권 선후배가 많다. C학원의 경우 노동운동을 했던 민중민주(PD) 계열이 많다. A학원엔 박노해 시인 등이 관련됐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 관련자들이 있다. 대학과 노동운동 현장 혹은 감방 생활의 선후배 간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학원에 PD 출신이 많고, 어느 학원에 민족해방(NL) 계열이 많다는 건 이들 사이에선 다 알려진 비밀이다. 하지만 학원 측은 학원강사들의 과거가 외부에 알려지는 게 내키지 않는다.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이유였다.

◆ 정부 정책 덕분에 컸다 = 94년 주요대학에서 사실상의 본고사가 부활됐다. 그 무렵엔 논술시험인 국어와 영어.수학 시험을 봤다. 그런 분위기에서 초암(94년), 유레카(96년)가 생겼다. 조모 강사는 "수요가 늘게 되면서 논술 시장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97년 이후엔 논술고사만 남았다. 학교 교육을 강화한다는 이유로 본고사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99년부터는 논술고사가 주요대의 입시를 좌우하게 됐다. 당시 초암과 유레카는 서울대 등 주요대 합격자를 많이 배출했다. "잘 가르친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이 두 학원은 급속히 성장했다.

초암아카데미의 이모 대표는 "당시 17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세 명은 경희대 한의대, 연세대 의대, 이대로 갔고 나머지는 모두 서울대에 진학했다"며 "다음해 목동에 분원을 냈는데 240명 정원에 1200명이 몰려왔다"고 말했다. 2008학년도 서울대가 논술을 통합교과형으로 바꾼다고 발표하면서 사교육 시장은 다시 한 번 폭발했다. 초암아카데미 성민기 원장은 "시장은 냉정하다"며 "가치가 있으면 투자가 되는 곳"이라고 말했다.

◆ 운동권이어서 성공했다 = 80년대 운동권에선 PD와 NL 계열 사이에서 치열한 사상 투쟁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수시로 팸플릿이 회람됐고, 수없는 세미나와 토론, 대자보 작성이 이뤄졌다. 대중 설득도 중요한 실력이었다. 386들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논리를 세우고 상대방의 허점을 공격하는 기술을 익혀 나갔다는 것. 조모 강사는 "운동을 하면서 10여 년간 학습을 했다. 운동권 아니면 체계적인 학습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상식 원장은 "우리는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과 대안, 헌신성이 있었고 자기계발에 적극적이었다"고 말했다. 운동권이었기에 논술시장에서 성공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강사는 "비운동권 출신들은 거대 담론을 접할 기회가 적었고, 한 분야에서만 강해 논술 강의에 적응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초암아카데미 함경목 원장은 "90년대 이후는 운동권이 취약해 논술 시장에서 크지 못했다"고 했다. 사교육을 부추긴다는 비판에 대해 이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조모 강사는 "누구도 밥벌이를 나쁘다고 할 순 없다"며 "우리의 공통 가치는 '우리는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학림논술연구소 대치본원 강상식 원장은 "공교육의 토대를 약화시키는 데 대해 원죄 의식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고정애 기자, 강승우 김윤미 인턴기자 / 사진 = 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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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06-09-20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0년대 치열하게 투쟁했던 이들을 대학 출신에 국한하는 것도, 서로 다른 정치적 목표와 활동방식을 가진 이들을 '386'이라고 뭉뜽그리는 것도, 사교육 자체의 폐해와 사교육에 몸담고 있는 특정 집단의 아이러니를 뒤섞는 방식도, 엉터리 일색이다.

비로그인 2006-09-28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86이라는 말에 벌써 학번이 들어 있으니까요... 이른바 운동권이 사교육 시장에서 엄청난 돈을 벌고, 또 그 돈이 운동단체에 기부되는 거.. 참 아이러니하죠.. 어떻게 생각해야 할 지 ...
 

(출처: 매일노동뉴스)

“‘이론’과 ‘실천’을 잇는 긴장 유지할 것”

"전체 노조조직률 11.6%, 민주노총 조직률 4.3%, 2000년대에 들어 더 뚜렷해진 정규-비정규직간의 갈등과 시민사회에서의 주변화 속에서 한국노동운동이 정치세력화를 이루어낸 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중앙위원 겸 정책실장 은수미씨(41). 그가 지난 2월 <한국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 유형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3월부터 한국노동연구원에서 부연구위원으로서 본격적인 연구자 생활을 시작했다.

80, 90년대 급진적 노동운동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은수미씨의 박사논문은 무엇이 ‘위기의 노동운동’으로 하여금 정치적 진입을 가능하게 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97년 감옥에서 나와 보게 된 노동운동 현실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은 박사는 연구를 시작하기 전 대기업 노동운동이나 정파갈등 등에서 ‘위기’를 실감하면서 문제의식을 발전시켰다.

은 박사는 지난 12일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서 주최한 노동포럼에 발제자로 참가해 석·박사과정 6년만에 출고한 이 논문 내용을 처음으로 노동계에 소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은 박사의 지도교수도 “5번을 읽고나니 내용을 좀 알겠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1시간여 발제로 논문내용을 설명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논문에서 사용된 핵심분석틀인 ‘연결망 분석’이 학계에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관계구조, 사회적 연대, 정치적 연대, 상징, 조직구조 등과 같은 개념은 일반인에게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자나 청중들 모두 노동계 토론에서 나오는 ‘주장’과 ‘정책과제’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으나, 은 박사의 논문엔 이같은 내용이 거의 없다. 박사논문에 ‘정책’을 담는게 ‘마이너스’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은 박사의 문제의식도 반영돼 있는 결과다. 은 박사는 다음날 노동연구원에서 기자를 만나 “연구자가 할 수 있는 최대지점은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연구자가 더 나갈 때 ‘감히 내가’라는 두려움도 들고, 한편으론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연구내용을 안 받아들이거나 추상적이라고 치부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은 박사가 한국노동연구원에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주위 반응은 찬반 양론으로 나뉘었다. 이에 대해 은 박사는 “이론과 실천에서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브릿지’ 역할을 하고 싶었다"고 전제한 뒤, "그런 면에서 연구원이 적절한 곳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노동연구원은 "이론을 필요로 하면서 현실의 요구에 답해야 하는 곳이자 현장을 접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게 은 박사의 설명. 실제 은 박사는 12일 보건의료노조의 올해 첫 산별교섭 현장에 나가보기도 했다. 사노맹 사건으로 6년간의 수감생활과 6년간의 석·박사 학위과정으로 아주 오랜만에 '현장'을 접한 소감은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A를 이야기하면 A브랜드로 인식되는” 현재 노동판도 한국노동연구원을 택한 한 이유였다. 은 박사는 “난 오픈마인드로 이야기하고 있다"면서, "A를 이야기하면서도 B나 C나 D도 함께 생각하고 있는데 A를 이야기하면 A브랜드로 낙인찍히는 것 같다"고 답답해 했다. 특히 "사노맹 출신이라는 것으로 규정된 느낌”이라는 것.

연결망 분석이 1차 자료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다보니 이번 논문은 자료수집에만 4년여가 걸렸다. 반면 하루도 쉬지 않고 새벽부터 자정까지 집중적으로 써 집필기간은 6개월이 소요됐다. 은 박사는 1차 자료로 1983년부터 현재까지 활동한 조직 중 전국적 연합사건에 참여한 1,609개 조직의 결성선언문, 주요구성원, 강령, 조직체계 및 규약, 내부회의록, 보도자료, 정책보고서, 기관지 등을 활용했다. 자료수집 과정에 쏟아부은 돈만 2천만원 이상. 은 박사는 자료수집이 가장 어려웠다며 노동계가 역사가 될 수 있는 자료를 중요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이는 노동계에서 ‘자료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여력이 없어 간직하지 못하는 탓이 크지만 자료를 스스로 폐기하게 만들었던 국가보안법 영향도 있다. 사노맹 같은 급진노동단체는 더 그러했다.

이와 관련 은 박사는 급진노동운동의 경험에 대한 성찰도 하고 있었다. “의회민주주의가 아닌 정치세력화 움직임은 대중적 동의를 못받고 이념이 대안적이지 못했다. 그래도 그때는 혁명적 건강성이 있었는데, 지금 흐름에 대해선 그 부분도 의문을 갖는다.”

은 박사는 모주간지와 인터뷰에서도 사노맹 활동의 오류를 인정한 바 있다. “점조직화된 지하활동이다보니 조직 내 인간적인 소통이 약했다. (…중략…) 소통이 없는 연대의 나약함을 고민하지 못한 것도 돌이켜 보면 잘못”이라고. 그러나 은 박사는 “급진적 노동운동은 노동운동 내에서 배제됐을 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배제됐다. 급진적 노동운동이 과대평가되는 면도 있고 과소평가되는 면이 있는데 앞으로 이 부분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노동사회연구소 포럼에 토론자로 참여했던 김윤철 진보정치연구소 연구기획실장은 “상징과 구조의 분석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 든다"면서 "상징과 구조의 인과성이 뒷받침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김 실장의 문제제기는 “행위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은 박사는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 이후 빨리 논문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그 부분을 담지 못했으나 이 논문을 책으로 발간하자는 제안이 있어 책으로 낼 때 인과관계도 밝혀낼 예정”이라고 답했다. 은 박사의 이번 논문에는 '향후 과제'로 둔 문제들이 곳곳에 있었다.

김 실장은 “민주노동당이 원내진출 한 뒤 ‘상징정치’를 잘하기 위해서는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며 인과성에 대한 연구를 재주문했다. “연구자가 제기한 명확한 현실을 보고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연구자에게 문제제기를 다시 던지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은 박사에 말을 떠올리면, 바로 이런 ‘소통’이 비로소 은 박사의 역할에 의미를 부여할 듯 싶다. 은 박사는 앞으로 조만간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이 민주노총에 미친 영향’과 ‘사회적 교섭의 전제조건’ 등에 연구할 계획이라고 한다. 급진적 노동운동가에서 연구자로 돌아온 은 박사가 만들어갈 새로운 ‘역할모델’이 기대되고 있다.

송은정 기자  ssong@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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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06-09-20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혁명적 건강성을 오로지 자신들만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만함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의회민주주의는 대중적인 동의를 받는데 있어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관습적인 우선순위를 의미할 뿐이지요.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오로지 이념의 대안성입니다. 점조직적 지하활동이나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태도는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적인 어려움일 뿐이지, 이념 자체에 내제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출처: 중앙일보)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 내정자, 신계륜 당선자 인사특보, 이해찬 민주당 의원, 한나라당 소장 개혁파인 심재철, 김부겸 의원, 유시민 개혁국민정당 전 대표, 이들은 23년 전인 1980년 5월 15일 한 곳에 있었다. 79년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후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에 맞서 운동권이 격렬한 투쟁을 벌이던 당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10만여명이 결집한 서울역 광장 시위의 주역이 바로 이들이었다. 당시 심재철 서울대 총학생회장은 "엄청난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기에 20대 초반의 우리는 너무 어렸고, 상황을 너무 몰랐다"고 말한다.

80년 5월 15일 서울역 부근 경찰 저지선에 시내버스가 돌진해 전경 1명이 숨졌다. 한 학생이 치켜든 플래카드에서 '경희대 복학생회'를 확인한 경찰은 현장에서 시위를 이끌던 문재인(청와대 민정수석 내정자)씨를 연행했다. 당시 경희대생 文씨는 75년 교내시위로 제적됐다 80년 복학했다. 문재인씨는 이날 청량리 경찰서로 연행된다. 그리고 며칠 만에 文씨는 유치장에서 사법고시 2차 합격 소식을 들었다. 경찰서장은 소주 파티를 열어줬고 경희대 재단이사장의 신원보증으로 文씨는 석방됐다. 文씨는 후에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했지만 시위 전력 때문에 판사에 임용되지 못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일했다. 盧당선자는 20년 변호사 동업자인 文씨에 대해 "나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 이라고 소개했다.

지도부는 흔들리고 있었다. 신계륜 고려대 총학생회장은 "철야농성이라도 벌이자.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심재철 서울대 총학생회장, 유시민 서울대 대의원회 의장, 복학생 막내인 김부겸씨 등은 "쿠데타의 빌미를 줄 수 있다. 일단 퇴각하자"고 했다. 함께 있던 서울대 이수성 학생처장(전 국무총리)도 "여기저기 알아보니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충고했다. 공수부대 출동 움직임이 전해지자 지도부는 결국 '회군(回軍)'을 결정한다.

80년에 이어 84년에도 구속됐던 유시민씨는 명문장의 '항소이유서'로 유명하다. TV토론 사회자로 활동하던 그는 지난해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치자 '바리케이드 앞에서 화염병을 들던 심정으로'라며 개혁국민정당을 창당했다. 盧당선자는 이 당에 대해 "같은 여당이자 전략참모가들이 모인 곳"이라고 말한다.



'서울의 봄' 당시 구속학생 중에는 유종일 한국경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도 있다. 졸업 후 친형인 유종근 전 전북도지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했던 그는 지난해 '노연(盧硏.노무현과 함께 하는 연구자 그룹)'을 만든 핵심 주역이었다. 2001년부터 노무현의 경제 가정교사였던 그는 지난 대선 때 盧후보의 핵심 공약들을 구상했다.



'서울의 봄' 주역들인 운동권 2세대들은 오랫동안 서로 만나지 않았다.
당시 숙명여대 형난옥 총학생회장(현 현암사 전무)은 "그때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친구들이 적지 않다"고 말한다. 이들은 20년이 흐른 뒤인 2000년에 다시 모여 '봄날 동우회'를 만들지만 정기모임도 없고 연락조차 뜸하다.

80년 5월 17일에는 광주에서 대규모 민주화항쟁이 벌어졌고 신군부는 이를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정권의 폭력성을 목격한 운동권 학생들은 과격해졌다. 화염병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지하서클에는 사회주의 혁명이론이 스며들었다. 노선투쟁도 치열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광주항쟁은 80년대 운동의 모태이자 학생운동 의식화.조직화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그 첫 신호탄이 이른바 무림(霧林)사건. 파고 들수록 실체를 종잡을 수 없어 붙여진 이름이다. 80년 12월 11일 서울대 도서관 학생식당에 뿌려진 '반파쇼학우투쟁선언'을 정부는 '명백한 좌경화'로 규정했다. 당시 선언문을 써 구속됐던 김명인씨는 현재 문학평론가로 우뚝 섰다. 고세현 창작과비평 사장, 현무환 웅진미디어 사장, 최영선 한겨레신문 교육사업단장, 허헌중 농어촌사회연구소 부소장 등도 함께 구속됐다. 구속자 중 서울대 토목공학과 학생이었던 윤형기씨는 학원가에서 전설적 기록을 세운 인기 수학강사다.

  

81년에는 학림 부림사건 등이 꼬리를 물었다. 노동운동 학생운동의 연대를 강조한 학림사건으로 이선근(민노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장) 민병두(문화일보 정치부장) 박문식(회계사)씨 등이 구속됐다. 같은 해 부산지역 대학생 21명은 불온서적을 읽었다 해서 구속됐다. 이른바 부림(釜林)사건이다. 盧당선자는 이때 부산대생 이호철(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내정자)씨의 변호를 맡으면서 운동권 책을 처음 접하고 '의식화'되기 시작했다. 노무현이 국회의원이 됐을 때 첫 보좌관이 이호철씨였으며 그는 지금도 당선자가 가장 신뢰하는 측근 중 한사람이다.

82년 3월 18일의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은 운동권에도 큰 충격이었다. '반미(反美)운동'이 갑자기 돌출한 데다 지나치게 과격하고 대담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고신대생 문부식(현 당대평론 편집위원)씨는 7년 만에 석방된 뒤 시인으로 변신했다.

지난해 文씨는 무림사건의 주인공 김명인씨와 공개 논쟁을 벌였다. 학생들의 방화로 교내 진입 경찰 7명이 숨진 89년 부산 동의대 사건을 민주화운동보상심의회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면서 벌어진 '80년대 반성 논쟁'에서다.
"성급한 결정이다. 진압경찰의 희생을 무의미한 죽음으로 몰고갈 위험이 있다." (문부식)
"새삼 '내 안의 폭력'을 거론하는 것은 오늘의 잣대로 80년대 인간을 몰아붙이고 학대하는 짓이다." (김명인)
운동권 내부의 과장된 명분론과 과잉 폭력을 경계한 文씨에 대해, 金씨는 당시 국가의 '거대한 폭력'부터 먼저 짚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82년부터 대학가 이념서클 사이에 벌어졌던 '사투(思鬪.노선투쟁)'는 NL(민족해방)대 PD(민중민주) 논쟁으로 이어졌다. 지하 유인물을 통한 이 노선 투쟁은 86년 자민투.민민투라는 별도의 투쟁조직을 탄생시켰다. 당시 지하 유인물 주인공들의 '오늘'은 다양하다. 85년 '깃발'을 쓴 문용식씨는 벤처기업 나우콤 대표이고, 함께 구속된 안병룡.황인상씨는 변호사가 됐다.

운동권 필독서로 70만부나 팔려나간 '철학에세이'의 저자 조성오씨는 41세에 사법고시에 합격,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학생운동 조직화도 빠르게 진행됐다. 84년 학도호국단 대신 직접선거로 총학생회가 구성되고, 85년에는 전국 연합 공개조직인 전학련이 등장했다. 대규모 연합시위로 '학생회장=구속'의 관행이 굳어진 것도 이때다. 서울대 마지막 학도호국단장인 백태웅씨는 '사노맹(남한 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건으로 오랜 투옥생활 끝에 현재 미국에서 사회운동 전반을 연구 중이고, 84년 첫 서울대 총학생회장 이정우씨는 현재 변호사다.

 

같은 해 고려대 김영춘 총학생회장은 민정당 중앙당사 점거 농성 사건으로 구속됐고 지금은 한나라당 의원이다. 전학련 초대 의장 출신 김민석씨는 재선의원을 거쳐 지난해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배한 뒤 국민통합21로 옮겨가는 바람에 인터넷에서 '김민새'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특별취재팀] 김창호 선임전문위원, 이철호 차장, 백성호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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