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라는 이름, 참노동자라는 이름 김승호씨를 찾아서
이인휘

80년 겨울은 참혹한 삶, 그 자체

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강제 징집돼 군대에 끌려갔다가 1974년 제대를 해서 돌아오니 암울하더군요. 서너 평짜리 단칸방에서 일곱 식구가 살고 있는 겁니다. 제대한 첫날밤 발을 뻗을 곳이 없어서 동생들 다 재우고 앉아서 잠을 자는데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더군요.

군대에 있는 동안에도 사회 변혁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던 나였습니다. 하지만 경동시장에서 밥튀기 장사를 하고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외면할 순 없었죠. 취직을 해서 뒷바라지를 했어요. 3개월 정도 일을 하는데, 미쳐버리겠더라구요. 내가 가진 놈들을 위해 일하려고 이제까지 고생했나 싶었죠. 선택을 해야 했어요. 가족이냐, 내 삶이냐. 모질게 마음을 먹기로 했습니다.

직장에서 받은 월급을 갖고 소리 없이 성남으로 갔어요. 당시 성남은 이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살고 있던 곳이었지요. 어떤 대단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과 함께 싸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거죠. 75년 여름 기술을 배우면서, 주민교회 등을 통해 몸과 마음이 병든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느닷없이 ‘사복’들이 문을 열어 젖혔습니다.
“손들어!”
그들은 내게 총구를 들이밀며 서울대 시위 사건의 배후 조종자를 찾았어요. 당시 김상진이가 ‘진정한 민주주의가 돼야 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할복 자살을 했었거든요. 아마도 서울대 출신 요주의 명단을 작성해 조사하다 내가 있는 곳을 알아낸 거죠. 결국 그 사건과는 관련이 없어 풀어줬지만, 그들은 나를 끊임없이 감시했습니다. 부모 형제와 인연을 끊고 떠나왔는데,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을 용납하지 않더군요. 그때만 해도 학생운동 인자들이 현장에 가는 것 자체가 보안법 대상이 될 수 있었거든요.

'문제는 학교다. 내가 비록 학교 생활 속에서 세상에 대한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이젠 그게 너무도 힘든 짐이 되었구나. 끊자. 학생운동과의 모든 인연도 끊어버리자.'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직장을 다시 잡고, 야간 기술 학원을 다녔습니다. 1년쯤 그렇게 생활을 하다가 기술이 있어야 공장에 들어가서 노동운동을 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깨버렸습니다. 77년 말쯤 직장을 버리고 양평동에 있는 금속 공장에 들어갔어요. 공장은 그야말로 비참한 환경이더군요. 정말 자고 먹고 일하는 것을 되풀이하는 삶 그 자체였어요. 그 곳에서 한 3개월 동안 현장에 대한 감을 익히고, 구로 공단에 있는 공장으로 이전했죠. 그런데 5개월쯤 지나자 또다시 감시가 따라붙더군요.

이게 무슨 업보인가. 정말 지독한 놈들이구나. 이젠 학교와의 인연도 끊었는데 평생 저놈들 감시로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없다니…. 합법적인 신분을 갖자. 몇 년 벙어리처럼 냉가슴 앓으며 지내면 나를 포기하지 않겠나. 좋다. 그런 생각으로 어용인 한국노총으로 들어갔어요. 78년 말 여러 경로를 통해 한국노총 섬유노조 말단 직원으로 들어가 교육 선전부 차장을 거쳐 교선 부장으로까지 올라갔지요. 처음엔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어요. 국장이란 놈이 이북에서 넘어온 안기부 프락치인데, 이놈이 내가 출근을 하면 24시간 감시하는 거예요. 놈들은 내가 어떤 놈인지 잘 알면서 뽑은 거거든요. 어떻게든 나를 이용해 먹으려고 했는데, 이상스럽게 행동하면 골치 아프니까, 늘 감시를 한 거지요.

출근해서 화장실 가는 때를 빼놓고 책만 보는 일을 되풀이하다가 ‘동일방직 사건’과 ‘YH 사건’을 겪게 되었죠. ‘YH 사건’ 일어날 때가 내가 2년째 되던 해입니다. 국장이란 놈이 ‘YH’ 저놈들 빨갱인데, 빨갱이란 성명서 한 장 쓰자고 하데요. 속에서 천불이 나는데, 그들을 빨갱이로 몰다니. 해도 너무 한다 싶어 국장이란 자와 싸움이 붙었어요. 그러자 직원들이 두 패로 갈라졌어요. 안기부에서 파견 나와 있는 놈들이 국장 쪽으로 달라붙고, 양심적인 직원들과 중간파까지 나를 응원했지요. 옥상에서 한판 붙자고 했지만, 싸움해 봐야 자기들만 망신당하는 꼴이 되니, 신경전만 매일 부려댔지요. 그러면서 지내는데 한 달도 안 돼서 궁정동에서 총소리가 나고 10.26 사태가 터진 겁니다.

당시 노동운동 쪽에 관여하던 선배 그룹들을 만났지만 지켜보자는 결론만 들었습니다. 답답하더군요. 어차피 누군가가 또 다시 쿠데타를 일으킬 것은 뻔한 이치였습니다.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막혔던 숨통을 토해내듯 거리로 뛰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난 간염을 앓고 있었지만 가만 있을 수는 없었어요. 그토록 목놓아 기다리던 때가 눈앞에 닥친 겁니다. 쓰러져서 죽어도 좋다, 라는 각오로 6개월 동안 집도 안 들어가고 전국을 뛰어다니며 신규노조 결성을 서둘렀습니다. 마지막으로 5월 17일 서통노조를 결성했는데, 그 시각 군사 쿠테타가 일어난 겁니다.

다음날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데, 계엄선포가 된 거예요. 광주에서 전화가 불나게 오고, 19일엔 사람이 맞아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비상이다! 선배들이 모였지만 또 다시 관망론이었습니다. 쿠테타가 분명하니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 난 참을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여동생이 직장생활로 모아 사준 어머니가 낀 금가락지까지 팔아서 모은 돈 40여 만원을 가지고, 00일보 원판 삭제 안 한 것을 빼돌려 복사를 하고 뿌렸지요.

하지만, 이미 거리는 얼어붙었습니다. 총을 맨 군인들이 거리를 장악하고 모두들 다시 어디론가 숨어들었습니다. 참혹했습니다. 노총에선 나를 일주일 무단 결근으로 처리해서 해임시켰습니다. 간염은 더욱 도져 몸도 무너지고, 마음은 황폐해져 어디에 둘 곳을 몰랐지요. 죽은 사람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내 마음을 집요하게 괴롭혔습니다. 이제까지 세상을 읽고 대항해 왔다는 내 자신이 얼마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가를 한번에 보게 된 겁니다. 그토록 일사천리로 진행된 쿠테타를 모르고 있었다니…. 80년 겨울은 참혹한 삶, 그 자체였습니다. 집에 틀어박혀 3개월 동안 투병 생활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이를 물었습니다.

딛고 일어서야 한다. 관념적인 이론은 공허한 것이다. 매 순간을 치열하게 살자. 10년 동안은 최소한 노동자, 민중으로서 철저하게 바닥 생활로부터 다시 시작하자. 노동운동 한다고 할 때, 학생운동과의 인연을 철저히 끊은 것처럼, 노동운동을 하면서 알던 사람들을 다 끊었어요. 몸이 회복되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죠. 기술을 배우자.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자. 보일러공 자격증을 따서 81년 제지 공장에 들어갔습니다. 그 곳에서 1년 정도 생활하면서 부인될 사람을 만났습니다. 광주항쟁을 통해 카톨릭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던 그 사람을 만나면서, 연인적 감정보다는 동지로서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6개월 정도 그녀와 만나면서 ‘노동계급’이 나서야 혁명이 된다는 의견일치를 봤습니다. 이 참혹한 세상으로부터 좀더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세상이 되려면, 혁명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지요. 우린 결혼하고 단칸방을 마련해서 우리부터 혁명의 세포가 되어, 철저하게 바닥으로부터 새롭게 시작하자고 맹세했던 거지요.

서울대 시절, 세상을 바꾸는데 같이 할 사람 나와라!

저는 1949년 6^25가 일어나기 바로 전 해에 울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기와집 하나 없는 산골 마을이었지요.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시절이었으니까, 어릴 적엔 탄피 같은 것을 주어서 장난을 하며 자랐답니다. 증조부께서 장사를 한 돈으로 농토를 모아 아버지 대에는 농사를 지었지요. 50여 가구되는 마을에서 논 열 다섯 마지기와 밭 스무 마지기 정도를 갖고 있는 중농쯤 되었어요. 하지만, 종가집이라 형편이 넉넉치 못했고요. 제사 많고 예의는 다 차려야 하고, 고모 이모들 시집갈 때 땅 조금씩 나눠주고, 그러다 보니 내가 중학교 들어갈 무렵에는 땅이 모두 없어졌어요.

전 국민학교를 만 다섯 살에 들어갔습니다. 한글도 모른 채 아버지를 따라 들어간 거죠. 그런데 1학년 끝날 때 1등을 했어요. 국민학교 시절 내내 일등을 하다가 중학교도 일등으로 들어갔죠. 아버지가 교편을 잡고 있었으나, 여전히 생계는 어려웠어요. 중학교 졸업할 무렵 형이 도망간 이유도 알게 됐죠.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학비를 못 내자 가출했던 겁니다. 깝깝하데요. 울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해 봤자, 서울에 있는 대학 들어가기는 하늘에서 별따기였습니다. 또 장학금을 받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도 싫었고, 그래서 고등학교 들어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웠던 것은 자라면서 부모님들 간섭을 많이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말 내게 큰 축복이었지요. 고향의 그 아름다운 자연 환경과, 생활은 곤궁했지만, 대가족 속에서 정감 있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전 생각이 찌들지는 않았습니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고요. 그러던 어느날 불현듯 사람이 태어났는데 큰 물에 가서 한 번 놀아봐야 되지 않겠나 싶더라구요. 그래서 느닷없이 부모님에게 서울로 가겠다고 했죠. 어릴 때부터 모범생이었고, 스스로 알아서 하는 걸 믿었던 탓인지, 반대 한 번 없이 천 원을 만들어주시더군요.

오백 원 차비하고, 오백 원 비상금을 찔러 넣고 가방에 옷가지 몇 개 집어 넣어서 서울로 향했습니다. 14살 먹은 시골 촌놈이 서울 청량리역에 도착하니 새벽이더군요. 다행히 열차 안에서 만난 군인이 내 처지를 눈치채고, 형 주소를 보며 집을 찾아줬어요. 그 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지금도 남아 있는 청량리 588 골목이었습니다. 다닥다닥 붙은 판자집들 사이에 있는 이층 판자집에 딱 들어서니, 형이 대뜸 하는 말이 “니 임마, 왜 왔노?”입디다. 당시 형은 고물상에 기거하면서 엿을 팔고 있었어요. 판자집 이층에는 노인부터 시작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숙하고 있었고요.

서울 구경 한 번 시켜주고 무작정 쫓아내려고 했던 형의 고집을 꺾고 신문팔이 일을 하게 됐습니다. 구역 다툼하는 고참들에게 세 번을 속아 비상금을 다 날리면서 신문팔이 길로 접어들었죠. 서울에 왔으니, 악착같이 돈을 벌자고 다짐했습니다. 청량리에서 광화문 쪽에 있는 동아일보사까지 걸어다니며, 신문을 하청 받아 거리를 뛰어다녔습니다. 기숙사에서 먹여주는 아침만 먹고, 점심은 굶고, 돈이 생기면 무조건 저금을 했습니다. 또 신문이 나오면 한 줄도 빼지 않고 다 읽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세상에 돌아가는 것이 눈에 띄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되더군요.

6개월 동안 모은 돈을 갖고 다시 시골로 내려가 공부를 하기로 작심했습니다. 3개월 동안 죽어라고 공부를 해서 서울에 있는 대광 상업고등학교 야간을 전체 일등으로 들어갔지요. 배우자. 배워서 저 청량리 588 같은 어두운 인생을 살지 말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하도록 하자. 주간에는 형과 함께 리어카를 끌며 고물을 줍고 야간에는 학교를 다녔죠. 그러다가 형이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내 위치가 위태롭게 된 거죠.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담임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에게 부탁해 수위 아저씨들과 함께 잘 수 있도록 해줬어요. 그 숙직실에서 기거하며 학교에서 마련해준 가정교사 일을 했어요. 눈물겨운 날도 많았지만 배워서 나와 같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을 했죠.

주야간 통 털어서 1등을 하자 학교에서 서울대를 가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은행원이 될까, 고민하다가 내가 배우자고 했던 이유가 단지 돈만 벌겠다는 것이 아니었기에, 서울대에 가서 좀더 배우기로 했지요. 시험 운이 좋았던지 서울 상대 과 수석을 했습니다. 때마침 독지가가 나타나 가난한 집 자식 중에 공부 잘하는 사람 대여섯 명에게 주는 장학금이 생겼어요. 그 장학금으로 하숙비도 내고, 책도 사서 볼 수 있게 됐어요. 또 남는 돈은 집에 부쳐 가사에 보탬이 되도록 했고요. 그런데, 대학에 들어와 보니 여간 실망이 아니었어요. 똑똑한 놈들이 모였다곤 했지만 공부도 잘 안 하고, 시시콜콜 개인적인 일들에만 관심이 있는 겁니다.

혼자서 책만 봤습니다. 하루에 한 권씩 책을 보면서 많은 생각에 젖었습니다. 특히 불행한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지요. 그러던 5월 어느 날 선배들이 와서 학회 소개를 하더군요. 정운영 씨였죠. 그 분이 나와서 “세상을 바꾸는데 같이 할 사람 나와라!” 하는 식으로 말하더군요.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그들은 설문지를 나눠주고 일주일 후에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그게 내가 살고자 했던 삶의 첫 인연이었습니다. 난 그 학회에 들어가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자체 프로그램을 잡아서 공부했는데, 나는 자유에 대해 공부하기로 했죠. 학기 내내 내가 찾을 수 있는 책들을 모아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쓴 글이 ‘자유에 대해서’ 라는 글이었죠. 지금 돌아보면 낮은 수준이지만 내겐 깊은 관심거리의 대상이었죠. 난 그 글에서 형식적 자유와 실질적 자유에 대해 논했습니다. 실질적 자유는 그야말로 자유를 누릴 물질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라는 주장이었죠. 그렇다면 돈과 학식이 있는 자는 자유스럽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유스러울 수가 없다는 것이었죠. 못 가진 자가 자유스러울 수 있는 ‘평등’ 사상은 거기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겁니다. 자유란 다시 말해 평등이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는 논지였죠.

그 글은 선배들에게 인정을 받아, 정운영 선배의 따뜻한 도움으로 ‘상대 평론’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우린 ‘통혁당 사건’을 접하게 됐습니다. 신영복 선배가 관련된 사건이었는데, 당시 육사 중위였던 그 선배는 우리 학회에 와서 강연도 했던 분이었지요. 아무튼 그 사건에 대한 평가를 하면서 전 우리 사회의 모순에 대해 많은 것을 고민하고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깊은 고민을 하게 됐죠. 그 고민과 맞딱드린 사건이 69년 박정희의 ‘삼선 개헌’ 문제로 나타난 겁니다. 이제 사회에 대한 눈을 뜬 상태니 어찌 가만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처음으로 데모에 주동적으로 참가해, 선동을 했지요. 그후 저는 과격파로 찍혔습니다. 김근태 선배 이후 상대에서 처음 데모를 한 사건이니 더욱 더 눈에 띄었던 거지요. 그리고 방학을 하자, 경찰에서 바로 수배를 때렸더군요. 그게 첫 수배인데, 지금까지 이렇게 수배생활을 하고 있군요.

그 사건 이후 전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여러 번 데모를 하고 수배도 받았죠. 그러다가 70년 11월 전태일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많은 지식인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 역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의 주체’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게된 것이죠. 그 이후 전 범 민중적인 저항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박정희와 김대중이 맞붙는 대통령 선거에도 큰 기대를 갖지 않았습니다. 생각대로 박정희가 이겼으나, 우린 개의치 않고 다시 움직였습니다. 부정부패 싸움을 통해서 정권에 타격을 가해야 된다고 판단했죠. 그 때가 4학년 2학기인데, 전 완전 골수로 찍혀있었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잠잠해질 줄 알았던 박정희는 학생운동이 멈추지 않자 위수령을 발동했습니다. 그 때가 서울대 개교기념일이었어요. 학교로 군인이 쳐들어왔고, 그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고 학교에서 쫓겨나고 그랬지요. 전 수배 상태로 돌아다니다, 강제 징집을 당했습니다. 끝없는 감시에 시달리며 육체적 고통을 당한 군 생활이었습니다. 최전방에서 말단 박격포 탄약수로 지내면서 폐렴까지 걸렸었지요. 전방에서 총 들고 보초를 서다보면 내가 누구를 위해 어디를 향해 총구를 내밀고 있나 무척이나 괴로워하던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제대하고 나와 집으로 돌아와 일곱 식구가 모여 단칸방에서 새우잠을 자는 것을 봤을 때, 내 심정은 얼마나 처참했겠습니까.

왜 우리네 삶은 이렇게 비참해야 되는가. 전태일 열사가 떠올랐고, 내 자신의 무능함이 저주스러웠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둠이 내 가슴을 짓눌러 한없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터뜨렸던 밤이었지요.

노운협에서 전노협으로, 다시 전국연합으로

새롭게 시작해야 된다. 광주의 넋을 가슴에 담고 철저한 삶을 살아야 한다. 보일러공을 그만두고 전기 기사 자격증을 따서 연탄공장에 취직하고 아내와 함께 이문동에 자리를 잡았어요. 온통 까만 세상을 산 거지요. 그러다가 내선 공사와 외선 공사하는 데를 전전하면서 삶 자체를 처절하게 경험했죠. 아내 역시 공장에 취직해 다녔습니다. 밑바닥 삶에 자신감도 생기면서 부모님과 살림을 합쳐 상도동으로 이사했습니다.

만 3년 동안 그런 삶을 살던 중 84년 말부터 구로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85년 구로 동맹파업이 일어나자, 후배들이 찾아와 다시 뛰자고 하더군요. 전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했지요. 최소한 10년은 삶 자체를 처절하게 느끼며 내 몸에 붙은 관념과 지식인의 때를 벗어버리고 싶었거든요. 후배들이 준비론자라고 비판하더군요. 돌이켜보니 그 비판이 일리가 있어 다시 뛰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후배들이 말하는 단체의 상근자로는 일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겠다고 해서 들어간 곳이 반월공단 중소기업이었습니다.

그 때 학생운동 출신들이 대거 공단으로 존재 이전을 하던 때였습니다. 관념과 의식으로 뭉친 그들은 현장으로 들어와 공장을 쑤시며 다녔어요. 홍보물을 뿌리고, 책임지지 못하는 행동을 먼저 내세웠지요. 난 노동조합을 만들고 싶어 꾸준히 사람들을 만나며 일하고 있는데, 우리 공장에도 신원 조회가 들어온 겁니다. 어느 날 사무실에서 나를 부르더군요. 공구를 찬 채 사무실에 가기 전에 화장실을 들렸어요. 그런데 한 직원이 날 보고 위장취업 했냐고 하더라구요. 무슨 소리냐고 버럭 화를 냈는데, 형사가 와 있다고 하며 그 친구가 사라지는 거예요. 아찔하더군요. 난 공구를 풀어놓고 담을 넘어 도망을 쳤어요.

또 다시 내 전력이 따라붙은 것에 대해 한탄을 하다 함께 활동하던 안산 지역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 내 위치를 조직을 지도하는 쪽으로 잡았습니다. 당시 학생 출신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노동해방 투쟁위원회’가 있었는데, 우린 ‘노동자 권익 투쟁위원회’를 결성했었죠. 난 ‘노동해방 투쟁위원회’를 찾아가 같이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는 둘로 분리되어 있었지만, 지도부 쪽에서는 같이 마음을 모아 움직였었죠. 파업, 가두투쟁, 홍보전 등등 1년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철저하게 지도부는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았죠. 그러다가 86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공안 탄압이 거세졌지요. 그 탄압에 휩쓸려 조직이 일부 노출되어 나는 안양으로 건너갔습니다. 그 곳에서 성수, 안양, 안산 친구들을 모아 다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폭로 투쟁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마침내 그 사건은 전두환의 ‘4.13 호헌 선언’을 통해 폭발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고양된 민중의 항거가 6월 10일 민중 항쟁으로 이어지자 노동자가 진출할 때라고 판단했죠. 80년 민주화의 봄처럼 민주노조 결성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지역에선 대중적인 단체들이 속속 결성되고, 지역 노조 연합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88년 상반기, 지역의 노동운동 단체들이 모여 ‘전국 노동운동 단체 협의회’를 만들어졌지요. 막상 그 단체가 만들어지자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영순 씨가 위원장을 맡고, 내가 노조 특위장을 맡았습니다. 88년 노동법 개정 투쟁과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을 위한 노동자 대회 땐 정말 감동의 물결이었습니다. 연세대에서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던 모습은 정말 노동자의 물결 그 자체였으니까요.

그후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조직을 결성하자는 말과 함께 전국회의 결성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럼 전국회의를 누가 감당할 것인가. ‘전국 노동운동 단체 협의회’(이하 노운협)에서는 나를 파견했어요. 89년 임금인상투쟁과 노동법 개정 투쟁을 통해 실질적인 전국 조직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죠. 그런데 제가 또 폐결핵이 걸린 겁니다. 몸이 안 좋은 상태에서 무리를 한 거죠. 의사가 쉬라고 하는데, 어찌 쉴 수 있겠습니까. 최소한 전국 조직 건설을 보고 쓰러지자, 다짐하며 실무자 10명을 구성해서 1년 동안 민주노조 전국회의를 조직해 가며 ‘전국노동조합 대표자협의회’(이하 전노협) 건설에 안간힘을 썼습니다.

90년 1월 22일 공권력이 몰아쳤지만 전노협은 결성됐습니다. 감격적인 그 순간을 맞이하고 몸이 안 좋아진 나는 ‘노운협’으로 다시 복귀를 했습니다. 복귀를 해서는 이영순 위원장이 힘에 부친다고 해서 위원장 역할을 맡게 되었지요. 그 때부터 복잡한 일들이 들어 나기 시작했습니다. 민중당에서는 자기들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동맹’(이하 사노맹)은 그들대로 비판 아닌 비난을 해대고, 노동조합 운동도 제대로 못해본 사람들이 상급 단체에 갈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달라고 항의하고…. 90년 넘어오면서부터 뭉치자고 한 것들이 깨져 나갔습니다. 전국 민주 단체 연합’(이하 전민련)도 분열에 분열을 거듭했습니다. 운동을 지도했던 사람들이 생각의 차이를 주장하며, 자리 다툼도 심하게 벌였구요. 강경대 열사의 죽음을 통해 민중의 동력은 살아나는데, 운동권은 내분으로 소용돌이 쳤습니다. 몸이 힘든 건 견딜 수 있었으나, 마음이 힘든 건 너무도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아마도 한계였겠지요. 90년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정치적 상황이 미묘해졌잖아요. 군사독재가 무너지고, 개량화 공세가 치열하게 일고, 지도부들이 동요와 혼란을 거듭하면서 개인적 입지를 향해 찢어진 겁니다. 나 역시 그 한계 속에 있었지만 노동자와 민중의 힘이라는 커다란 토대로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강경대 열사의 죽음으로 인해 끓어오르던 대중의 열기를 모아 쉽게 투항하지 않고, 변절하지 않는 대중조직을 건설해야 된다고 주장했죠. 그게 바로 ‘전국연합’입니다. NL쪽에서 전민련이 있는데, 무슨 전국연합이냐고 강하게 비판했죠. 왜냐면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사람들이 전민련을 장악하고 있었거든요.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PD와 NL은 물과 기름 같았으니까요. 도대체 무슨 진영, 무슨 진영하는데, 왜 우리끼리 진영 싸움을 하는지,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어떻게 이 갈라진 골을 메울 수 있는 것인지 말입니다. 결국 전국연합을 결성했으나, 그 골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됐습니다. 전국 조직의 명칭을 정하는데, ‘민중연합’이냐, ‘민주연합’이냐를 놓고 서로의 입장을 대변한 이름만 되풀이했으니까요. 도저히 그 반목을 없앨 수 없어, 사회를 진행하던 저는 오늘은 결판내자고 하면서 ‘전국연합’을 제안한 겁니다.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좀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이바지하자고 했던 그 조직도 시간이 흐르면서 갈라져버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엄청난 회의가 몰아치는 세월이었습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되돌아 볼 시간을 갖고 싶어 ‘노운협’을 다른 분에게 넘기고 저는 연구소를 만들어 탐구와 사색의 시간을 갖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관계를 맺고 있던 한국통신 내의 민주파가 노조 지도부를 장악한 겁니다. 예상을 하지 못한 엄청난 쾌거였지요. 한국 최대의 사업장이며, 주요 사업장의 일이니 구경만 할 수 없었습니다. 94년부터 그 뒷바라지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어느 정도 내부 동력이 생기자 95년도에 뒤로 물러나 예정된 연구의 시간을 갖으려 했는데, 공권력 투입으로 ‘한국통신 사태’가 벌어진 겁니다. 우왕좌왕하는 동지들을 몰라라 할 수 없어 또다시 1년을 그 일에 매달리다, 노동악법 중 하나였던 3자 개입으로 수배를 당했으나, 그것으로 수배 명목이 충분치 않자 ‘노운협’을 이적 단체로 몰아 국가보안법을 걸은 거지요.

희망은 스스로 만들어 갈 때 그 꽃을 틔운다

수배 생활은 힘들고 괴롭지만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주로 책을 보고 많은 것들을 되돌아봤습니다. 자본론부터 시작해서 고전도 다시 읽고, 변혁 운동에 대한 한계와 극복에 대해, 내 개인의 문제점에 대해 깊이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이었지요. 인간의 뿌리는 무엇인가. 사회주의라든지 진보라는 개념은 종전의 책에서 본 이야기처럼 정말 맞는 것인가. 종전에 우리 운동의 개념에서 소외당한 공동체라는 개념은 무엇인가. 인간에 대한 참 의미를 더듬어가면서, 포괄적이면서도 장기적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너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지요.

다시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소수지만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생각의 차이가 아니라, 깊이와 폭의 차이며, 이탈과 타락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겁니다. 사실 운동을 하면서 얼마나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까. 세상을 좀더 낫게 만들기 위해 알게 모르게 도와준 사람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힘들지만 우리 대에서 다음 대가 딛고 넘어갈 수 있는 디딤돌 하나는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주적이고, 유대할 수 있어야 하는 거지요. 유대란 서로 주고 받는 연대의 차원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을 주듯 받을 걸 계산하지 않고 주는 겁니다. 스스로 그런 마음이 쌓일 때, 우리의 운동에 희망이 있지 않겠습니까. 희망은 스스로 만들어 갈 때, 그 꽃을 틔울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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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학생신문 149호)

어떤 어려움에도 나는 비관하지 않는다
류재영 기자 unipress@e-unipress.com

조정환 - 서울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에서 일제하 프롤레타리아 문학 연구. 1987년에 문학운동의 당파성 강화를 주장하는 민주주의민족문학론을 제창했고, 1989년에 월간 「노동해방문학」창간에 참여, 노동해방문학운동을 전개했다. 이로 인한 1990년 말에서 1999년 말까지의 수배기간 동안에는 이원영이라는 필명으로 국제주의적 및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와 관련된 여러 권의 책을 번역했다. 2000년 9월 다중문화공간 왑의 창립에 참여했고 현재 도서출판 갈무리 편집인을 맡고 있다.

"노정권의 수배 조치로 저자는 지금까지 15개월동안 사랑하는 동지들과 단절되고 정든 아내와 강제로 헤어져야 하며 이 거친 남한 땅에 태어난 딸의 얼굴조차 모르는 채로 살아야 하는 아픔을 겪고 있다." <노동해방문학의 논리> 서문 中, 조정환, 1990

수배가 풀리기까지 10년이 걸렸다. '얼굴조차 몰랐던 딸' 문영이는 올해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정말이지 12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90년대 초까지 그에게 있어 최대의 화두는 다른 사회주의자와 다르지 않았다. '당 건설' 그리고 '당파성'. 하지만 지금 그는 자신을 더 이상 '사회주의자'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과거와의 단절, 도대체 12년이라는 시간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인터뷰를 약속했던 갈무리 출판사에 아직 조정환 씨는 도착하지 않았다. 대신 반갑게 맞아주는 분이 있었다. 1980년대 말부터 수배된 조정환 씨와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동지'중 한 명이다. "이곳으로 이사온 지는 얼마 안돼요. 예전에 정말 이사 자주했는데 이제는 좀 오래 머물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는 그동안 조정환 씨와 이곳 사람들이 겪었을 만한 어려움이 묻어났다. 얼마 후 조정환 씨가 도착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건네는 데 "이런 게 별로 익숙치 않다"며 웃는다. 오랫동안의 은둔 생활에서 굳어진 습관 탓이었다. 혹시 아직도 조정환이라는 본명보다 이원영이라는 가명이 익숙하지는 않을까?

- 10년 간의 수배 생활이 정말 힘들었을 텐데요.

지속적으로 만난 사람은 다섯 명을 넘지 않았죠. 가족이나 동지들은 물론 만날 생각도 못했구요.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이상한 오해들이 저에게 들려올 때 였어요. 인도로 갔다, 북한으로 갔다, 지방으로 가서 중이 됐다는 등의 이야기를 듣거나 변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도 나설 수가 없었기 때문에 무기력했죠. 한 번은 실종자로 제가 '시사매거진 2580'에 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화를 걸어서 방송 정지를 요구하는데 그 쪽에서 믿을 수 없다고 해서 무척 애먹었죠. 주민등록번호부터 지은 책, 아는 사람까지 다 대고 나서야 간신히 제가 조정환이라는 걸 설득시켰죠. 아마 방송에 제 얼굴이 나갔다면 제 수배 생활은 훨씬 힘들어졌을 겁니다. 그리고 제 주 관심사가 사회과학이니 책을 살 때도 항상 긴장을 하고 서점에 절대 오래 머무를 수 없었죠. 혹여 불심검문이라도 당할까 항상 긴장하면서 길을 다녀야 했구요. 그래도 수배 기간 동안 주위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수배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 최근 펴낸 「지구 제국」이나, 얼마 전 말지에 연재했던 글을 보면 노동해방문학운동을 했던 과거와는 크게 생각이 바뀌었다고 느껴집니다.

한국사회운동도 80년대와 90년대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고 보는데요. 개인적으로는 94-95년이 그런 시기였습니다. 80년대 운동가들 사이에는 노선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노동자 계급을 혁명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정당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었죠. 그런데 89-90년 동구 사회주의와 소련이 몰락하고 사회주의 국가의 실상이 알려지면서 기존의 혁명 이론에 대해서 의심하게 되는 상황이 옵니다.

그때는 마침 제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으로 수배생활을 시작할 무렵이었죠. 수배 생활은 한편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였어요. 월세방에 틀어박혀 한국에 번역된 맑스와 레닌의 책을 모아 모두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국제 사회주의 관련 문헌과 SWP(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 내부에 존재하는 당 경향과 평의회 경향의 논쟁을 연구하며 평의회에 관심을 갖게되죠. 잊고 있던 파리꼬뮨을 눈 여겨 보게된 것도 그때였죠. 이후에는 68 혁명과 당시 학술계의 관심을 끌었던 알뛰세르와 푸코 등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딸리아의 자율주의 운동과 자율주의 이론가 네그리를 알게 되고 강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참여했던 당이 얼마나 중앙집권적이고 위계적이었는가에 대한 네그리의 반성은 지난날 사노맹 활동을 하면서 제가 느꼈던 당 건설의 문제점과 유사했습니다. 당파성에서 자율성으로의 전환. 그 이후부터는 자율주의 운동에 대한 번역과 연구를 진행해왔고 <지구 제국>은 그 동안 변화되어온 저의 생각을 정리하고 집약한 첫 번째 책입니다.

- <지구제국>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신다면

제국이란 세계화 시대 지구사회에 대한 새로운 해석입니다. 이전에는 거대한 국민국가가 식민지를 구축하고 패권을 행사했고 대항전선도 제국주의와 식민지 민중 사이에 형성됐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권력이 특정 국민국가에 모여있지 않죠. WTO, IMF 등의 초국가적 기구, 초국가적 자본이 지구사회에 주권을 행사합니다.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이행'이란 바로 이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대항방식도 지구적 다중의 연대를 구축해 제국의 압제를 봉쇄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여기서 다중이란 68 혁명이후에 분화되어온 여러 유형의 대중 집단을 말하는데요. 기존의 노동자 계급이라는 말로는 다양한 대중을 정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네그리는 이 다양한 대중을 스피노자의 개념을 빌어 multitude라 정의하는데요. 저는 이것을 다중(다양한 대중)이라고 번역했습니다.

- 말 지에 실렸던 <국가권력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글을 보면 '바꿀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시고 있던데요.

존 홀러웨이의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책이 곧 번역될 예정인데요. 진보정당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읽고 답해주길 바라는 책입니다.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오히려 현재의 기본 골격을 강화시키는 데에 도움이 될 뿐입니다. 반대로 국가, 정부, 당, 국민 등을 약화시키는 정치를 해야합니다. 지금 열거한 개념들은 다중을 수동화시키는 핵심적인 요소들이죠. 의회나 국가 등을 활용할 수 있다는 의견은 그 구조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다중의 자치적인 조직들이 활성화되고 상호 교류가 고도화되면서 그 힘이 거대해졌을 때에만 제도를 활용할 수 있죠.

'활동가는 낙관적이어야 한다'. 사회변화에 낙관적이냐는 물음에 대한 그의 대답이다. 인생 속에서 체득한 '모든 문제에는 해결책이 있다'는 그의 믿음, 낙관적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주체적으로 볼 때에 가능하다는 그의 말이 진심으로 와 닿았다.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의 거대함은 우리의 거대함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거대함을 그들의 거대함으로 오인하고 있을 뿐이죠. 다중의 힘을 먹고 사는 제국은 결국 다중에 의해 무너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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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철 (사회주의정치연합)

1. 글쓰기에 대하여

1-1. 장기계획으로 한국의 사회주의 정치운동사를 준비하고 있는 나로서는 본격적인 역사를 쓰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글은 1980년대 말부터 기금까지 공개 사회주의 정치운동에 참여한 관찰자로서의 경험을 통해 느낀 단상을 거칠게 정리하고 문제 제시하는데 그친다. 나로서는 구체적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한 글이기 때문에 논쟁적일 수 있고 주관적일 수 있지만 역사적 글쓰기의 새로운 보기를 보이고 싶은 모험심도 있다.
(참고 글 : 1. 한국노동당의 ‘신전략’비판 2. 1980년대 이후 한국의 노동자 정치운동:정치조직을 중심으로 3. 사회주의 역사에서 배우자)

1-2.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 “민중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 연합 추진 위원회”, “민중당 창준위”, 민중당, 민중회의, 민중정치연합, 노동자정치연대,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 진전을 위한 연대(정치연대)”, “새로운 정치조직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 노동자의힘, 사회주의정치연합(준)에 이르는 15년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1-3. 주체적 경험과 느낌 등의 단상으로 표현하면서도 몇 가지 평가 틀을 지닌다. 첫째, 혁명적 사회주의의 사상과 정치노선을 유지했는가의 문제 둘째, 대중투쟁과의 결합을 실현했는가의 문제 셋째, 의회와 선거에 대한 원칙을 견지했는가의 문제 등으로 구분하고 분석한다.

2. 혁명적 사회주의의 사상투쟁으로서의 합법 정치전술 평가

2-1. 70년대 초반 이후 80년대 초반에 걸친 맑스-레닌주의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정파의 1세대에 해당된다. 이들은 학생운동을 거쳐 이전한 엘리트 사상집단이며 이들의 사상 이론적 기반은 대체로 맑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라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이론적 학습의 깊이와 폭은 레닌과 스탈린 저작, 소련에서 간행된 교재, 일본에서 간행된 저술들이었으며 혁명적 맑스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에 대한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학습을 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사회구성체 논쟁을 통하여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2단계혁명론이 군부파시즘의 암혹한 정세와 맞물리면서 혁명적 정세의 임박함에 긴박되고 고무되고 있기도 했다.

2-2. 이들 세력의 조직노선은 당연히 비합법 전위당 노선이었고 파시즘의 탄압 속에서 더욱 그 노선이 정당화 되었다. 흔히 PD, ND, IL로 표현되는 세 개의 큰 정파가 형성되었고 이들의 노선과 정세인식의 차이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어 생략한다. (참고자료 2참조)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주체사상과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전선론에 대한 비판, 그리고 보수야당 추종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특히 87년 대선 당시 독자 후보론의 입장에서 함께 했으며 (물론 CA가 주도하기는 했지만) 그러한 선거연합은 92년까지도 이어진다.

2-3. 87년 이후 선거전술을 넘어선 조직노선으로의 합법정당 건설론은 복합적 요인이 교직되어 나타났다. 첫째,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고 집약된 사회주의 진영의 합법공간으로의 진출의 필요성이라는 공감대의 형성 둘째,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인한 사상적 동요와 혼란, 수정주의, 기회주의의 확산, 혁명의 포기로 인한 합법.개량주의의 합리화, 셋째. 92년 총선과 대선을 겨냥한 정치주의자들의 욕구와 계산 그리고 이에 편승한 패거리 정치, 넷째, 노동운동을 포함한 대중조직의 성장과 발전 등이다.

2-4. 민중당의 창당은 바로 이러한 요인들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비합법 정파가 개입 또는 적극적 결합을 했고 반군부독재 투쟁세력이 상층(일부 혁신계와 지식인 포함)은 주로 인민노련이, 사무국과 학생위원회는 CA를 포함한 PD정파들로 구성되었다. 중앙위원회는 인민노련의 영향력 하에 있었기 때문에 혁명적 사회주의를 전략으로 포기하고 민중당을 전략당으로(혹은 그롤 준비하기 위한 단계로)인식한 세력이 주도한 당의 생명은 짧았다. (참고자료 1참조) 한국노동당 창당과 탄원서 사건(PT독재와 폭력혁명노선 폐기)이 웅변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또한 전술당으로 개입한 세력은 철수하거나 탈당하고 그 일부가 민중회의라는 정치조직을 건설한다.

2-5. 민중당 내에서의 사상투쟁은 주로 강령 건설 과정에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강령위원회는 정책위원회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강령작성으로 이어지는데 민중당의 경우는 교수위원회(당에 교수위원회를 설치한 것은 비상식적이지만 진보적 지식인의 집단적 결합이 지니는 의미 때문에 두게 되었다)가 강령위원회를 구성하고 강령작성을 했다. 교수위원회에 소속되지 않은 교수들(대부분 사민주의자들)은 정책위원회의 자문을 하고 있었다. 민중당 강령은 최대 강령은 아니었지만 이행기 강령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고 민중민주주의 강령의 틀을 원칙적으로 담아냈다. 강령이 확정되기까지 교수위원회와 정책위원회의 대립이 있었고 학생위원회는 원칙적으로 교수위원회의 입장에 동조하였다. (참고자료, “개혁사회주의에 대한 환상과 회의와 좌절을 넘어서서” 참조) 민중민주주의를 민중주체의 민주주의로 수정하는 웃지 못 할 결과가 민중당 상집에서 있었고 실제로 민중당 강령은 사문화 되었다.

2-6. 민중당과 한국노동당의 합당, 통합민중당, 그리고 소멸은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이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을 경과하면서 양분화 되고 사회민주주의를 전략당으로 표현하려는 세력과 합법정치전술로서 지속적으로 구사하려는 세력으로 구분되었다. 이념적으로는 혁명적 사회주의와 사민주의의 대립으로 나타났고 합법.개량주의 반대 투쟁 전선으로 구획되었다.

2-7. 그 이후 제파와 사노맹 모두 조직사건으로 탄압받다 해체되었다. 민중회의 시절 사노맹과의 연합을 시도했으나 무산되었다. 사노맹은 합법정치부대로 사회당(추)을 만들었고 1992년 대선 이후 민중회의와 통합하여 민중정치연합을 만든다. 제파는 전국노련으로 편입되거나 한노정련으로 진로를 잡는다. 그리고 대중조직의 활동가로 분산된다. 이 시기의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의 투쟁의 중심은 사상투쟁일 수밖에 없었다. 세계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보듯이 수정주의와의 투쟁이 가장 중요한 투쟁이다. 노동계급에 부르죠아 사상이 침투한 것이 수정주의, 특히 사민주의이며 우리 사회의 대중운동의 투쟁과 역행하는 청산주의적 합법개량주의 세력과 투쟁하는 것, 즉 맑스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을 복원시키고 세워내는 것이었다. 반합법정치조직으로 존재하고 있는 조직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사상을 보위하고 선전-선동하려는 과정의 역사였다고도 할 수 있다. “사회주의 혁명”대신 “근본변혁”이라는 용어가 대체되었고 당 건설 투쟁은 장기적 과제로 미루어졌다.

2-8. 92년 대선은 위와 같은 정세에 놓여 있었다. 하나는 ‘사회주의는 망하고 자본주의가 승리했다’는 계급대중의 패배주의나 일반대중의 우경화의 이데올로기 정세 속에서 사회주의를 공공연하게 선전 선동할 수 있는 공간을 얻어내고 그것을 당면한 대중투쟁과 결합시킬 수 있다는 계기로서 대통령선거였다는 점이다. 사회주의 강령을 구체화된 선거강령으로 만들고 투쟁하는 것이었고 92년 백선본 강령은 90년 민중당 강령의 연장선에 있었다. 조직사건의 검찰 기소문을 보면 92년 선거강령을 주로 언급하고 있음이 이를 증명한다. 또 하나는 선거투쟁의 공동투쟁을 기반으로 흩어져있는 사회주의 세력을 연대.통합하는 성과를 남겨야 한다는 점이었다. 결국 진정추(인민노련)는 통합에 응하지 않고 민중회의와 사회당(추)가 통합하여 1993년 민중정치연합을 결성한다. 전국노련(제파)의 경우 대중운동으로의 산개와 이론연구운동의로의 우회로뿐만 아니라 경제주의적 성향이 강한 특성 때문에 사회주의정치운동세력과 함께 할 수 없었다.

2-9. 사노맹이 해체되고 약화되면서 민정련은 당 건설 경로를 둘러싼 노선대립(민중연대안과 정치연합안)으로 분화되고 진정추와 사회당계열이 통합되는 진보정치연합으로, 민중회의 계열이 노동정치연대로, 그리고 계급해방그룹이 노진추(노진추는 단지 인민노련의 탄원서 사건만을 문제 삼았다)로 분화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회당 계열이 기존의 사노맹 노선과 달리 전략수정을 하고 전략으로서의 합법당으로 선회한 것이고 노진추 역시 그와 유사한 입장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후에 언급하겠지만 이 세력은 민주노동당내에서 사민주의를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민중회의의 일부였던 청년그룹은 청년조직을 만들고 그 후 청년진보당 그리고 사회당을 만든다.

2-10. 각 정치세력은 각개 약진하면서 세력보존과 확장을 한다. 96-97 총파업의 공동투쟁전선이 복구되면서 사회주의 세력은 연대 틀을 형성하고 또 한번 정치연합을 모색한다.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 진전을 위한 연대(정치연대)가 그것이다. 정치연대는 테제 형식을 빌려 혁명적 사회주의의 전통을 계승하는 입장을 정리하였지만 임박한 대선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합법개량주의, 사민주의 세력은 민주노총을 기반으로 국민승리21을 결성하였고 일부 민족주의세력 역시 합법정당전술에 입각하여 사민주의 세력과 연대하고 있고 노동자 민중진영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정치연대 운영위원회는 다수가 대선 불참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선대본 출범하기 몇 일전 정치연대 대표였던 나는 선거 참여조건을 직접 작성하여 권영길 대표와 담판을 하게 된다. (중도 후보 사퇴 불가, 대중투쟁과 함께하는 선거투쟁, 계급적 관점의 견지 등) 공개된 합의문을 놓고 정치연대는 선거참여를 결정하게 되고 일부가 정치연대를 탈퇴하고 청년진보당을 창당하게 된다.

2-11. 합의문의 이행여부를 놓고 (선거강령 내부 투쟁, 종이정당 사건, ‘일어나라 코리아’ 사건 등) 선대본 내에 문제제기를 하고 나는 선대본 공동대표를 사임하게 되고 강령위원회에서 철수, 서울 선대본을 중심으로 한 내부투쟁(일어나라 코리아 포스터 철거 등)을 한다. 정치연대의 사후 평가에서 선거참여 결정이 문제가 있었음을 결론짓게 된다. 96-97 노동계급의 정차파업의 성과를 그대로 개량주의 세력에게 넘길 수 없다는 판단, 대선 이후 사회주의세력의 조직 건설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판단 등이 참여 결정의 근거가 되었지만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할 사건이었다.

2-12. 정치연대의 후신인 “새로운 정치조직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새정조)에서의 논쟁은 이념 논쟁이 아니라 조직노선을 둘러싼 쟁점이었다. 민주노동당의 결성과정에 좌파블럭으로 개입하자는 견해(노동조합, 현장 그리고 노진추 등)과 혁명적 사회주의 진영의 독자적 정치조직화를 주장하는 견해가 대립되었고 노진추 그룹이 탈퇴하고 좌파블럭론이 안을 철회함으로서 노동자의힘(준)이 결성되었다. 새로운 정치조직의 이념과 상이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이념 논쟁은 이때부터 본격화 될 수밖에 없다. 쌩디칼리즘이나 무정부주의, 사민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가 혼합된 정치운동이 더 이상 진전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계급정당 건설을 말하기보다 이념논쟁을 선행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회당의 사회주의는 희화화되어 버렸고 혁명적 맑스주의, 혁명적 사회주의(공산주의)의 공동담론으로 소통하고 연대하고 단결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정치신문의 형태로 세력을 표현하고 있는 혁명적 사회주의 진영은 이념적 소통, 혁명적 정치조직과 혁명적 대중조직의 건설을 위한 연대에 적극 나서야 한다. (참고 : [전진]기본노선, 사민주의의 좌익적 언사)

3. 사회주의 정치세력의 대중투쟁과 선거 투쟁 평가

3-1. 10년 주기의 공황으로 볼 때 1987년, 1997년, 2007년 전후의 주기를 들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호황에는 대중투쟁의 소강상태로 불황에는 대중투쟁의 고양으로 표현된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대통령 선거와 맞물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87년 7, 8, 9노동자 투쟁, 96-97정치총파업은 우리 노동운동의 질적 양적 발전을 이룩하는 결절점이기도 하다.

3-2.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관철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확장되었지만 노태우 정권에 시작되어 김영삼 정권에서 그 기반을 구축하고 김대중 정권에서 본격화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음을 볼 때 자본과 자본가 권력의 노동운동에 대한 전략 전술이 한국사회에서는 압축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군사 파시즘 아래에서 억압, 착취당했던 노동계급이 어용의 굴레를 벗고 생산의 주체로 올라오는 대중투쟁의 시기, 이른바 민주노조운동의 시기 10년, 정치총파업을 통하여(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정치의 주채로 나서는 8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아마도 2007년쯤에는 역사의 주체, 혁명의 주체로 도약하는 계기를 맞을 것으로 예상된다.

3-3. 그러나 이러한 성장, 발전기도 불구하고 개량주의화 관료주의가 급속도로 확산되는 경향도 함께 보이고 있다. 1991년 전노협이 내세웠던 깃발인 평등세상건설과 노동해방은 민주노총 건설과정에서 퇴색하고 사무.전문직 노동운동의 개량주의에 묻혀버렸고 총연맹과 연맹, 그리고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한 관료주의의 만연은 조직 형식주의에 매몰되어 혁명성, 계급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흐름은 필연적으로 노동자정치운동의 개량주의와 맞물리면서 노사협조주의와 교섭주의로 변질되고 있다.

3-4. 사회주의정치세력이 지금까지 대중투쟁의 정치적 지도부의 역할을 할 만큼 능력을 갖추지 못했으며 부분적 개입과 상층 및 현장에서의 부분적 영향력밖에 행사하지 못하였다. 또한 선거와 맞물리는 상황에서는 대중투쟁과 선거투쟁의 결합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도 결국 선거주의에 빠지는 과오를 범하였다.

3-5. 합법정치전술로 민중당을 규정한 세력과 전략당으로 규정한 인민노련의 경우를 보기로 들어보자. 91년 강경대 열사 투쟁이 고양될 때 보수야당(김대중과 김영삼)은 지자체 선거가 있자 투쟁본부에서 이탈하였고 민중당 역시 선거 참여를 결정하면서 대중투쟁을 방기하였다. 나는 유일하게 선거 보이콧을 주장하였고 결국 민중당을 탈당하였다. 92년 5월 총선에서 보여준 민중당 후보의 모습은 보수야당의 선거활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3-6. 96-97 노동법, 안기부법저지범대위가 광범위하게 구성되기 전까지 민중운동탄압범대위가 존재했을 뿐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연대.단결하여 대중투쟁에 결합하여 투쟁을 성공으로 이끈 예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투쟁의 주체인 노조와 그 상급단체인 총연맹인 민주노총의 주도권 하에서 대우자동차투쟁, 삼호중공업투쟁 등 몇몇 사회주의 세력의 적극적 개입의 성과를 보여준 투쟁이 있었으나 역시 부분적 성과에 지나지 않았다.

3-7. 사회주의 세력의 정치적 지도력의 결여는 혁명사상 이념의 불철저성(사민주의 세력 등)에도 기인하지만 정파이기주의와 가족주의로 인한 사회주의연대의 분절성도 큰 원인중의 하나이다. 대중조직이 정치운동을 압도하는 상황에서는 대중조직을 장악하려는 선거주의(조합권력이 되었건, 현장권력이 되었건, 중앙권력이 되었건 간에)가 판을 치고 (지금까지의 총연맹 위원장 선거에서의 연합전술, 특히 이번 금속 선거에서의 3차 연합전술) 총파업 투쟁에서의 비공식적 개입과 결과에 대한 무책임 등은 그를 주도한 특정 정치조직의 책임이며 사회주의 세력의 연대의 신뢰를 깨뜨리는 작풍이었다.

3-8. 최근 사회적 합의주의 노사정 담합 분쇄를 위한 전국 노동자투쟁위원회(전노투)의 결성은 여전히 참여세력에 대한 불신, 공동투쟁체에 대한 상과 성격에 대한 견해 차이, 주도권 다툼 등의 갈등적 요인이 있기는 하나 모처럼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연대하여 일상적 대중투쟁을 촉진시키고 책임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한 사상.실천적 투쟁을 제대로 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세력 사이의 노선투쟁은 지속되어야 하고 그 오류에 대한 반성을 근거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상설적인 공투체를 지역 중심으로 건설하고 투쟁하는 업종(비정규직)을 중심으로 현장투쟁위원회를 만들어간다면 산별과 연맹에만 목을 매는 관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3-8. 선거와 의회를 통한 집권전략을 가지고 있는 사민주의세력(민주노동당 등)을 제외하고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은 합법정치전술로서의 합법당의 필요성(혁명정당건설 이전에)을 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부르주아선거에도 사회주의자 연대를 통하여 전술을 공동 결정해야 한다. 92년 사회주의 사상투쟁의 교두보 구축의 방어적 투쟁은 사회주의 세력의 불안정한 통합, 합법개량주의 세력의 확대로 유실되면서 97년 양날개론으로 더욱 강화된다. 민주노총을 등에 업는 민주노동당의 출범은 민족주의 세력과도 연합하면서 사회주의 세력은 고립화된다. 97년 대선에서 사회주의 정당의 전망을 가지지 못한 채 몇 가지 선거투쟁을 조건으로 권영길 선본에의 결합은 96-97 정치파업의 성과를 기반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사회주의 진영의 오류였다.

3-10. IMF관리체계를 경과하면서 주기적 공황에 접어들고 신자유주의 압살에 변혁적 노동운동이 압살당하고 개량주의와 관료주의가 만연되면서 맞게 된 2002년 대선에서 사회주의 진영은 결정적 과오를 범하게 된다. 99년 이후 최대의 정파로 성장한 노동자의힘은 계급정당건설을 목표로 내걸었으나 혁명적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확고한 강령과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면서 민주노동당을 전술적 개입으로 판단하는 이중 잣대를 보이고 있으며 운동내부의 선거정치에서 중앙파와 국민파와 끊임없이 연합하려는 기회주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한 기반위에서 2002년 대선 공투본 전술과 경선 전술을 채택하였다. 이 전술은 몇 가지 점에서 근본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첫째, 당 건설이라는 전략이 전제되지 않은 전술이라는 점 둘째, 사회주의 진영의 광범위한 논의와 소통을 기반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셋째, 민주노동당을 포함한 사민주의, 민족주의 세력과의 공동선거 투쟁에 대한 환상과 그에 기반한 지분을 구축하려는 대중추수적 노선이 착종되어 있었다는 점 넷째, 그 지분을 기반으로 2004년 총선에 연합하려는 욕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고 결국 실패하였다. 사회당의 경우 87년부터의 민중후보전술에 집착함으로서 당 건설 보다는 합법적 선거주의와 의회주의에의 편향, 사회주의의 상업적 대중화, 노동계급운동의 부문운동화 등이 작용하여 노동자의힘과 합의가 무산되자 사회주의정치연합(준)과의 합의를 깨뜨리고 독자 대응함으로서 역시 실패하였고 왜소화 되었다.

3-11. 돌이켜보면 가장 강조해야할 사상투쟁과 선전 선동을 소홀히 하고 그 혁명 사상을 담지 할 조직건설(당)에 대한 확고한 전망과 실천을 게을리 한 채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과의 연대를 거부하면서 가족주의와 종파주의에 매몰되어 대중운동과 정치운동의 선거주의에 기회주의적으로 편승하는 근본적 오류를 범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계획과 사업이 부르조아 선거일정에 맞추어 역산되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보기이다. 글과 말은 현란한 혁명적 언사를 구사해도 몸으로의 실천은 중도주의적 활동에 그치는 모습이 지금까지의 사회주의 공개운동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3-12.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복원을 위한 연대와 소통이 노선투쟁과 토론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혁명적 대중투쟁이 끊임없이 고양되도록 하는 혁명적 대중조직과 현장조직의 건설, 그리고 일상적 투쟁을 담지 할 투쟁체 건설이 선행되면서 혁명정당 건설의 상과 성격 및 경로를 결정하고 그에 따른 투쟁전술, 선거전술을 세우는 것이 순서이며 이것이 사회주의정치운동 15년의 결산이다. 과거의 과오를 반성하고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이 힘차게 연대단결하는 운동이 펼쳐지지 않는 한 어느 한 세력과 정파의 행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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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기관지노힘 제31호)

'사회주의 정치운동의 현황과 과제' 토론회에 다녀와서
이정일
 

사회주의정치연합 준비모임 주최로 지난 4월26일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 회관 3층 홀에서 '사회주의 정치운동의 현황과 과제'란 제목으로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60여명이 참석하였고, 연령층은 2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했다. 발제를 담당한 단체소속원이 대부분이었으나 학생들과 노동조합에서도 약간의 수가 참석하였다. 참석자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그다지 밝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회주의정치운동이 처한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이리라.
토론회는 오후 3시30분에 오세철 교수의 인사말과 사회로 시작되어, 7명의 발제가 오후 6시30분경까지 진행된 후, 토론이 이어졌다. 발제내용은 개략적으로 보면, 노동자계급 대중투쟁에 대한 평가, 노무현 정권의 성격, 80-90년대 사회주의정치운동과 현재 상태에 대한 평가, 사회주의정치운동진영의 이후 방향 등이었다.

<주제 발제> (가나다순, 발제문 요약)

거듭남으로 하나되기 (남진현 진보운동전략연구소 소장)

현시기 남한의 정치세력 판도는 기본적으로 '보수'와 '개혁', '진보'의 3대 세력간의 대립투쟁관계이다. 일부 사회주의운동진영은 보수우익세력의 크고 집요한 영향력에 대해 지나치게 경시하면서 좌파진영 내부에서의 논쟁과 권력싸움만을 일삼고 있다. 이러한 협소한 시야를 극복해야 한다.

노무현 정권의 성격은 자유주의좌파의 개혁세력이 중도파와 연합하여 장악한 정권이며, 이에 대한 대응은 양면성, 즉 보수우익세력에 대한 공격에서는 연대하고, 동시에 철저한 개혁과 진보를 향한 헤게모니싸움을 전개해야 한다.
범진보진영은 좌파적 민족주의계열, 사민주의계열, 사회주의계열로 나눌 수 있는데, 좌파민족주의계열에 대해서는 한편으로는 공동의 전선을 형성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이 자유주의좌파의 헤게모니 아래 포섭되지 않도록 견제와 비판이 필요하다.
사민주의도 자본주의를 반대한다는 넓은 의미의 사회주의에 포함시킬 수 있고, 따라서 사민주의는 '의회주의적 사회주의'라고 규정 가능하다. 그러나 사민주의는 의회의 양면성에 대한 안이한 자세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사회의 변혁보다는 국가권력의 장악 그 자체에 더 무게를 두는 잘못된 발상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자들은 사민주의자들과 긴밀한 연대를 거부한다면 관념적 좌익주의에 머물 것이다.
범사회주의진영의 결속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좌파 내 각 정치세력의 대표자들이 개인자격으로 참여하는 정기적인 정치토론 네트워크로 '좌파포럼'을 검토해보자.

한국에서 사회주의 정치운동, 혁신과 연대를 위하여 (박성인 노동자의힘 강령위원장)

현 시기 한국의 사회주의정치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와 '위기의식'은 과거와는 다른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90년대 초반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이념적이고 조직적인 혼란과 동요를 극복하기 위한 힘겨운 투쟁의 성과에 기초하면서, '사회주의정치운동'의 새로운 질적 발전을 요구하는 가운데서 제기되는 '위기의식'
짧게는 96∼97년 노동자총파업 이후, 길게는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자 대중운동의 성장에 기초하여,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라는 전략적인 목표가 현실적인 과제로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의 '위기의식'
현대자본주의의 위기를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공세의 전면화와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적 침략전쟁 등을 통해 극복하려는 시도에 맞서, 반제·반세계화·반신자유주의 대중투쟁이 반자본투쟁으로 고양될 가능성이 커지고, 반제·반세계화·반신자유주의 국제연대투쟁이 현실화되는 정세 속에서의 '위기의식'

따라서 현시기 한국 사회주의정치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 혹은 '위기의식'은 90년대 초반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청산'과 '해체'를 예비했던 '위기·위기의식'이 아니라, 사회주의정치운동의 '부활·소생'을 위한 '위기·위기의식'이다. 임종을 앞 둔 고통이 아니라, 출산을 위한 진통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최근 사회주의정치운동진영의 '위기' 논란, 이에 따른 '사회주의정치운동진영의 연대, 혹은 통합'을 둘러싼 논쟁과 시도를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정치적 방향' 속에서 바라 볼 필요가 있다.: 90년대 초반 이후, 사회주의 정치운동진영이 힘겹게 유지하거나 진전시켜 온 사상과 이론, 전략과 전술 등을 먼저 공동의 '성과', 즉 계승과 혁신이라는 측면에서 총괄하고 집약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먼저 사회주의 정치운동진영의 공유하고 있는 사상이론적 기반을 확인하고, 이어 '차이'가 무엇인지, 이 '차이'를 어떤 수준에서 어떻게 다뤄나갈 것인지에 대해 서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80년대 이후 한국에서의 사회주의 정치운동은 그것이 탄압에 의한 것이었든 아니면 역량에 의한 것이었든, 아직은 '써클운동'(정파)의 단계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어느 나라의 사회주의 정치운동도 써클운동의 '단계'를 단숨에 뛰어넘을 수는 없다. 다음의 3가지 점을 주목할 때 써클운동 단계 극복을 위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모색할 수 있다.

첫째는 사회주의 내용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온 단위가 '써클', 혹은 '정파'였다는 점에서, 그 사회주의의 이념과 전략 전술은 한편으로는 유지·혁신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제한적·정파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써클운동은 그 자신의 해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내용(정치사상적 내용과 조직적 지도력, 전 써클성원의 역량)이 써클이라는 형식을 뛰어넘을 수 있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발전할 때,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다한다는 점이다.
셋째, 바로 이 써클운동의 태내로부터 형성되고 검증된 정치사상적·조직적 지도력이 중심이 되어, 써클을 뛰어넘는 '당적 운동'의 가능성을 모색할 때, '당적 통합'을 모색하는 주장이나 시도가 또 하나의 써클로 제약되는 것을 넘어설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세계화 공세로 인한 노동자계급의 분열과 노동운동의 위기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맞선 투쟁 속에서 새로운 사회 건설의 주체로 성장해 나가는 노동자민중의 역량에 대해서 주목하고, 이러한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반자본'투쟁으로 진전시켜 나가는데 사회주의 정치운동진영이 그 정치적 전망을 현실적으로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남한 사회주의운동은 무엇을 가지고 시작할 것인가? (백철현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 활동가)

91년 소련의 몰락 이후에 남한 노동운동진영에서는 청산주의가 지배하게 되었다. 남한의 사회주의진영에서는 인민노련, 삼민동맹,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를 구성하여 합법주의적, 투항주의적 행보를 계속하였고, 사노맹은 사회주의 합법화를 주장하면서 합법주의, 개량주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러한 사회주의진영의 청산주의적 움직임이 현재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의 직접적인 토대가 되었다. 결국 91년 소련의 몰락 이후에 남한에서 등장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사회발전적 노동조합운동론, 비합법적 노동운동의 청산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이론적, 조직적, 실천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개량주의의 삼두마차가 되었다.

전위정당론은 대중과의 선진적인 결합방식이다. 전위정당은 강령적, 조직적 통일성을 바탕으로 엄격하게 선발된 전위로 출발한다. 하지만 이런 조직의 성격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대중적 전위정당을 지향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당독재로의 변질은 전위당 이론의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전위당 이론이 무너진 자리를 비집고 들어선 것이다.
엄격한 비밀주의는 조직관계에 대한 비밀이다. 이 조직관계에 대한 비밀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국가권력의 타도에 대한 공공연한 선전 선동을 수행하는 것이 비합법 정치조직이다. 사회주의 활동의 공간이 열려진다는 것은 정권의 필요와 판단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적 투쟁역량이 성장하고 계급적 역관계가 변화되는 만큼 보장되는 것이다. 합법과 비합은 단순히 조직의 공개와 비공개의 차이가 아니라 정치적 내용의 차이이다.

노동자의 힘의 활동가 정치조직론은 전형적인 '과정으로서의 조직건설론'이다. 과정으로서의 조직건설론이란 강령적 수준 하에서의 노선적 통일없이 조직을 구성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강령적 수준이란 전위정당, 국가파괴 전략과 프롤레타리아독재, 사적 소유의 철폐와 생산수단의 사회화 등 혁명의 핵심적 테제에 대한 인정 여부를 의미한다. 이는 정치적 결사체가 아니라 느슨한 공동투쟁체를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사회당의 계급좌파와 이를 지지하고 나선 사회주의 대중정당론 역시 '과정으로서의 조직건설론'이다.
사회당의 출동노선은 과연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의회진출에 모든 전략적 전술적 사고를 집중하는 개량주의에서 비롯되었다. 선거를 치르기 위해 '사회당 바깥의 명망가'에게 기댄 통일좌파의 출동노선은 사회당의 의회주의가 낳은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사회당의 계급좌파를 지지하는 사회주의 대중정당론은 "집권을 목표로 하면서 대체권력"을 주장한다.

"노동계급 대중운동의 새로운 폭발적 고양을 총체적으로 준비하고 선도해 냄으로써 새롭게 성장ㆍ발전하는 노동계급 대중운동에 대한 실질적인 지도력을 구축하고, 그러한 힘을 제도정치영역으로 확장하여, 집권 가능성을 가진 현실정치의 실체로서 위상을 확립한다". (양준석/오민규 사회주의 대중정당의 발전전략에 대하여)

결국 이들의 집권전략은 자본주의 국가의 파괴가 아닌 국가의 활용론에 머무르고 있다. 대중투쟁에 대한 강조는 집권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노동계급운동이 폭발적으로 고양된다면 그러한 힘은 제도정치 영역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정치를 철저하게 분쇄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그런데 사회주의 대중정당은 폭발적인 노동운동의 고양을 제도정치영역으로 제한하여 집권으로 향하는 계기로 돌리려 하고 있다. 왜 노동자 투쟁의 폭발적 고양을 자본주의 체제로 가두는가?

민주노동당으로부터 조직적,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혁명정당을 건설해야 한다. 현장을 중심으로 전국적 노동자투쟁전선을 형성하고 노동자의 단결을 조직해야 한다. 현장을 통한 전국적 조직화의 중심은 대공장이다. 전략적 지역과 공공, 금속의 대형사업장을 중심으로 거점을 강화해야 한다. 현장과 사회주의 정치의 굳건한 결합만이 희망이다.

사회주의정치운동의 좌표설정을 위하여 (이성민 사회주의정치연합)

사회주의정치연합(준)은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와의 투쟁이 일국투쟁만으로 가능하지 않고, 일국에서조차 각개 약진하는 운동형태를 극복하지 못하면, 사회주의정치운동의 미래는 물론 현재성조차 지탱하지 못할 것이라는 문제의식과 관료화된 민주노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평의회 건설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기 위해 제기한 것이다.

'사회주의 정치포럼'을 정례화하자. 평의회 운동과 맑스주의 이념사상의 대중화를 위한 사이버(오프라인) 전진기지 '이스크라넷'을 구성하자.

한국사회주의 운동의 통일과 전진을 위한 제안 - 사회주의 대중정당의 발전전략에 대하여 수정증보판 (양준석/오민규)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지난 10년 고난의 시대를 마감하고 역사적인 기회를 부여잡아야 할 시점에 서 있다. 한국의 사회주의운동은 각기 분절된 절망에 갇힌 채 고립분산되어 각개약진하고 있는 사회주의 운동역량들을 '총체적인 전망' 아래 통일시켜 냄으로써 역량있는 전위를 갈망하는 대중운동의 강력한 요구에 부응해야 할 시점, 새로운 전진의 시대를 반드시 열어야 하며 열어낼 수 있는 시점에 있다. 그 대안이 '사회주의 대중정당'이다.

1) 사회주의 대중정당은 자본주의를 극복할 사상적 대안으로서 사회주의를 선명하게 내거는 정당이다.
2) 사회주의 대중정당은 사회주의 활동가를 비롯하여 사회주의에 동의하는 대중들을 폭넓게 포괄하는 정당이다.
3) 사회주의 대중정당은 집권을 목표로 하지만 그것을 '대중권력 형성'이라는 보다 원대한 목표를 향한 중간과정으로서 위치 지우는 정당이다.
4) 사회주의대중정당은 스스로 정치투쟁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자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모든 대중운동의 전위로서 역할하는 정당이다.
5) 사회주의 대중정당은 대중운동의 성장 발전에 철저하게 복무하며 대중운동의 성장 발전으로부터 자신의 성장 발전의 동력을 획득하는 정당이다.
6) 사회주의 대중정당은 선거투쟁과 의회활동을 비롯한 제도정치투쟁을 대중운동의 성장 발전 및 지도력강화를 위한 전체적인 기획 속에서 적절하게 구사해 나가는 정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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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한국 사회운동의 '잃어버린 10년' 
장석준(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 교육부장)

애초에 편집부로부터 원고를 요청받았을 때 그 주제는 "변혁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였다. 사실 필자로서는 편집부의 요청에 쉽게 응할 수가 없었다. "변혁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라는 짧은 말 안에는 이미 90년대에 대한 나름의 평가가 담겨 있었고, 그것은 필자가 요즘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집부의 기획안에 구애받지 않아도 좋다는 말에 일단 필자의 설익은 생각을 풀어본다.

92년 - 하나의 매듭

달력이 말하는 기계적인 '90년대'와 우리 기억 속의 '90년대'의 경계는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전자는 91년 1월 1일에 시작했겠지만, 후자는 92년의 언제쯤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어느새 우리의 말 속에 자리잡은 '80년대'와 '90년대'의 구분은 바로 이 92년을 전후한다.

92년에 한국의 사회운동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우선, 89년-91년 사이의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에 대한 사후 평가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전노협의 침체에 대해, 민중당의 총선 실패에 대해 근심 싸인 논란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랜 군부독재 뒤에 처음 등장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 김영삼 정권이 탄생하게 될 대선이 있었다.
 
92년 당시 민중운동권에는 80년대에 형성된 사회주의 지향의 활동가층이 가장 두텁게 형성되어 있었다. 다수의 사회주의 활동가들을 포괄한 <한국사회주의노동당창당준비위>가 합법대중정당 노선을 천명하면서 <한국노동당(준)>을 출범시켰을 때, 그 발기인 수가 4천여명이었다. 이는 당시 학생운동 출신 사회주의자들과 전투적 선진노동자들의 규모가 대략 어느 정도였는지 힌트를 준다. 이 흐름에 결합하지 않은 전노협 활동가들의 나머지 절반이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라든지 '반제반봉건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 경향의 활동가들을 더 합하면 대략 기만 수준의 '전위'들이 있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비극은 바로 이러한 극성(極盛)의 시점이 곧바로 쇠퇴와 해체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는 당시 남한 사회주의운동에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스탈린주의에 대한 냉철한 재평가를 요구했다. 그러나, 각각의 사상유파가 형성해놓은 담론의 연장선 위에서 진행된 스탈린주의 비판은 어떤 공동의 토론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한국노동당 추진 세력의 '신노선', 구 <현실과 과학> 그룹의 알튀세 학파 수용, 트로츠키주의의 재평가 등은 당시 사회주의 운동에 존재했던 분파 구도를 새로운 지평에서 성숙시키기보다는 더욱 더 폐쇄적이고 자기만족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실 운동에는 다양한 형태의 '청산주의'가 대세가 되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맑스-레닌주의를 '교조적'으로 추구하던 사람들이 사회민주주의의 '교조적' 추종자임을 선언했다. 한국노동당 추진 세력의 상당수는 경실련의 '시민운동'에서 해답을 찾았다. 이념 세계의 움직임에 가장 민감한 학생운동권이 가장 먼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90년대'는 그렇게 시작됐다.

'세계사 속의 90년대'와 '우리의 90년대'

한 동안 우리는 이러한 90년대의 흐름을 우리의 독특한 현상으로 이해했다. 발전자본주의의 성과가 '하늘을 찌르고', 오랜만에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정착하고,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이 발전하기도 전에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가 닥치고, 비로소 '시민사회'라는 것이 형성되기 시작한 남한 사회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제야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이것이 세계사의 '90년대'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에서야 우리는 이를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말로, 다소 추상적으로, 일반화시키고 있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으로 이어지는 제한적인 민주화 과정도, 그리고 그와 함께 꾸준히 추진되어온 한국 경제의 자유화 과정도, 대중문화의 범람도, 사회운동의 침체와 혼돈도 모두 당시의 세계사 흐름과 무관한 게 아니었다.
 
우리에게 돌연 이 사실을 고지한 것은 두 가지 사건이었다. 하나는 96-97년 총파업, 다른 하나는 97년 말의 외환 위기. 96년 겨울 노동법·안기부법 개악 반대 총파업은, 95년 12월의 프랑스 공공부문 총파업 소식과 함께, 노동'계급'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역사의 전면에 드러냈다. 서구에서나 한국에서나 한 동안 '청산'의 대상이 되어온 자본-노동 관계의 중요성, 노동계급운동의 능력과 역할 등등이 다시 주목받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노동계급운동의 침체뿐만 아니라 그것의 부활까지도 전 지구적으로 동일한 시간대 속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97년 겨울의 외환 위기는 90년대의 모든 혼란과 대열이탈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던 한국 자본주의 '영속 성장'의 신화를 박살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자본주의의 시간을 세계 자본주의의 시간대와는 동떨어진 것으로 바라보던 오류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치료 기회였다. 이제 우리는 80년대 말 '3저호황'으로 촉발된 '영속 성장'의 분위기마저도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작은 틈이었을 뿐임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애초에 80년대 혁명운동이 설정한 여러 의제들이 결코 '청산'의 목록에 포함될 수 없는 것임을 뼈저리게 확인한다.

이런 점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상당히 낯선 용어가 21세기 벽두 한국 사회의 설명을 위해 동원되고 있는 상황은, '우리의 90년대'를 '세계사의 90년대'의 시점에서 뒤늦게 되짚어본다는 의미가 강하다. 세계 자본주의의 양극화와 항상적 위기를 심화시킨 지난 10년간의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92년의 언제쯤엔가 우리가 받아들인 '성장'과 '안정'의 환상, '청산'의 변명들을 치유해야 하는 것이다.

운동 주체의 복구 - 90년대가 남겨준 무거운 유산

하지만, 문제는 모순된 현실이 그 뼈를 드러낼 때, 막상 이제까지 줄기차게 모순의 작동을 폭로하고 이를 공격하던 그 운동 주체는 형해화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혁명적 노동운동이 해체되고 나서 노동조합조직만으로 외롭게 진행되어온 한국의 노동운동이 96년 총파업을 성사시켰을 때, 그 총파업은 철저히 노동조합의 좁은 시야에서, 그 해석틀 안에서, 그 조직 골간만으로 이뤄져야 했다. 한편, 한국 자본주의 최초의 본격적 공황인 97년 외환 위기의 와중에서도, 담론 지형을 지배한 것은 부르주아 주류 경제학의 말들이었다.
 
90년대의 마지막 해인 2000년 1월에 창당한 <민주노동당>은, 어쩌면, 90년대 유일하게 착실한 성장을 해온 노동조합운동이라는 대중운동에 기대어 이러한 한계를 급속히 벌충해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잃어버린 10년'을 보상하고 세계사적 시간의 긴박성에 발 맞추어 혁명 역량을 복구하고 확장시켜내려는 것이다.
하지만, 실천을 거듭하면 할수록 역사에 '공짜'는 없다는 진실만이 뼈아프게 드러난다. 이제는 노동조합운동도, 당운동도, 환경운동·여성운동 등의 사회운동도 한때 우리가 벗어버렸던 근본주의=급진주의(radicalism)의 깃발을 다시 부여잡고 '새로운 10년'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각오를 위해서였다면, '잃어버린 10년'도 결코 아깝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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